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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0/11
    친구와 함께(1)
    꿈꾸는나비
  2. 2006/10/04
    서문시장에서 웃다
    꿈꾸는나비
  3. 2006/09/20
    탕수육
    꿈꾸는나비
  4. 2006/05/20
    그 공포를 지우고 싶다(4)
    꿈꾸는나비
  5. 2006/03/16
    떨어진 자의 짜증남
    꿈꾸는나비
  6. 2006/02/28
    땅과자유 제4대 의장에 당첨되면서(2)
    꿈꾸는나비

친구와 함께

추석 연휴 기간에 친구와 함께 팔공산을 올랐다. 대구와서 동갑내기 친구를 사귄 건 처음인데, 산을 좋아한다는 것에 마음이 맞아 첫 산행으로 팔공산을 잡고 몇 주 전부터 준비를 했다. 1박 2일 코스로 비박을 하기로 했다. 민간인 신분이 아닌 군바리 때 혹한기 말고는 비박이 처음이라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파계사에서 시작하여 파계재를 지나 헬기장에서 잠을 잘까 한참을 둘이서 고민하다 조금만 더 가보자는 결론을 내리고 갔는데, 얼마 못 가서 어둑해주지는 바람에 적당한 곳에 자리를 폈다. 라면에 소주에 한잔 걸치고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이렇게 비박하며 한 잔하는 맛 정말 괜찮은 것 같았다. 헬기장에서 잤다면 야경과 별을 보며 더 좋았을텐데, 아쉬웠다.

 

몇 잔이 오고가며 말도 트고, 다음 산행 약속도 잡았다. 모난 성격에 죽마고우 빼고는 다시는 친구를 못 사귀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으니, 그럭저럭 살만 한 것 같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짐을 꾸렸다. 갈증으로 원래 가고자 했던 곳까지 마실 물을 확보해서 갈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마당재를 지나 서봉에서 라면에 맥주를 곁들여, 국물은 밥을 살짝 삶아서 아침을 해결했다. 알콜 파워 덕분에 동봉까지 가뿐히 올랐다. 원래는 신령재를 지나 갓바위까지 산행하려고 했으나, 그냥 신령재에서 내려왔다.

 

다 내려와 버스 타고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음식점에서 또 맥주를 까고 말았다.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나는 산행이었는데 낮인데도 취하기 보다는 말똥말똥 했다. 이런 기분 간만에 느꼈다.

 

  팔공산, 동봉을 얼마 안 남겨두고 내려다보니 대구가 손바닥하게 보였다.




  내 친구다.

 산행에 맞춰 티셔츠를 선물해준 재홍이형 고맙소~ 옷이 때깔난다^^

 내려오면 찍었는데 '구절초' 인 것 같은디^^;;

 쑥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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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시장에서 웃다

서문시장에서 웃다

 

2년 가까이 일하던 사무실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있던 서문시장을 개인적인 일로 찾은 적은 없었다. 배낭 매듭이 터진 채 2년 동안 제대로 사용도 못하고 놔둔 것을 1박 2일이 산행 약속이 잡히고서야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가방 수선 집이 있다는 정도의 귀동냥으로, 대목장으로 인산인해일 텐데도 이런 사정은 개의치 않고 그저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서문시장으로 갔다.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할 줄 알았지만 쉽게 가방 수선집을 찾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일단 맡겨 놓고는 사람 구경할 요량으로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만치 붐비지는 않았다. 건어물전에는 활기가 넘쳐났다. 선물 세트가 진열되어 있는 곳도 마찬가지였다. 칼국수, 수제비로 요기를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시장에 오면 알 수 없는 힘이 생긴다. 가끔은 시장에 가고 싶을 때가 있다. 돈을 들고 뭘 사러가기 보다는 살아있다는 것을 보고 싶어서. 뚜렷한 목적 없이 마냥 걸으며 보고 있으니 이 시간에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되나 일중독 비슷한 걱정이 밀려왔다. 그것도 잠시 지금의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오후 햇살 받으며 분잡한 시장을 걷는 이 기분, 정말 오랜만이었다. 잠시지만 내가 지금 행복하구나라고 느껴졌다.

 

엄마가 시장가는 날이면 기다렸다가 같이 가겠다고 생떼를 부리면서 함께 가면 엄마랑 같이 걷는 시장은 아주 풍족했다. 엄마랑 쪼그려 앉아 떡을 사먹거나, 보리밥집에 가서 집에서 먹는 반찬과 별반 다르지 않는 반찬에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럼 엄마는 누가 보면 집에서 굶긴 줄 알겠다며 혀를 끌끌 찼다. 보리밥 주인 할머니께서는 어린애가 보리밥이 입맛에 맞지 않을 텐데 잘 먹네 라며 웃으셨다. 이런 기억들이 남아 있어서인지 백화점보다는 시장이 좋다. 화려한 불빛 아래 가격표 보기가 무서울 품목이 진열된 백화점에 가면 나의 허름한 옷의 터진 소매와 옷깃에 낀 때가 들통 날까봐 불안한 게 사실이다. 홈플러스나 이마트도 매한가지다. 시장은 전혀 그런 걱정 없이 낮술에 불콰한 얼굴로도 걷을 수도 있다.

 

포목점을 지나면서는 겨울용 이불이 없다는 사실이 막 떠올라 주춤거리며 이것저것을 보았다. 일 마치면 술 마시기 바쁘고, 주말은 그저 늘어지게 잠잘 뿐, 그 생활의 반복. 맹탕한 나를 스스로가 좀 더 챙긴다면 이번 겨울에는 따뜻하게 이불을 덮고 잘 수 있을 것이다. 서문시장에서 내가 좀 사람답게 살아야할 건더기를 만들었다. 조금 전에 지나친 양말 세트가 진열된 곳을 다시 찾았다. 항상 빚만 진 것 같았던 2년 가까이 일했던 사무실을 지척에 두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더구나 추석 아닌가. 사람 구실하기 위해 양말 세트를 10개 샀다. 예쁜 것으로 고르기 위해 망설이기도 했다. 내내 인사 제대로 못 드리고 나와 할머니께, 사무국 일꾼한테 마음이 쓰였는데 차차 갚을 요량으로 더디지만 제대로 하자.

 

단단히 꿰맨 빈 배낭을 메고는 양말을 담은 봉지를 들고 사무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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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수육

탕수육

 

에어컨도 없는 칠곡 끄트머리 사무실을 들락날락 한지도 두 달이 되었다. 너무 더워 도망치고 싶을 때가 한 두 번도 아니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시끄럽지 않고 공기가 좋다는 것 빼고는 사무실 조건으로 별로다. 끼니를 때워야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1인분은 배달이 잘 안되니, 자장면 아니면 짬봉이다. 외근을 보고 온 선배랑 스페샬 메뉴로 자장면과 탕수육을 시켰다. 항상 그렇지만 느긋하게 먹기보다는 허겁지겁 허기진 배를 채우기 바쁘다. 빨리 먹지 말아야지 하며 먹는데도 그게 잘 안 된다. 어찌 오늘은 조금 느릿하게 먹었다. 그래도 중국집 탕수육은 나름대로의 맛이 있는데 이 집 음식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스무 살 시작을 탕수육으로 했던 그 맛과 똑같았다. 대학 시험을 보기 좋게 떨어지고 난 그 해 겨울은 정말 추웠다. 겨울은 매양 춥기는 마찬가지지만. 갈비집 망하고 몇 년을 쉬다가 엄마는 뭔가를 하기 위해 부산 이모 집에 있었다. 이종사촌 형과 경남여고 근처 시장에 점포를 얻어 천 원짜리 탕수육을 팔았다. 엄마는 그걸 배워 고향에서 장사를 하려고 했다. 엄마는 형한테서 일 배워 돈 벌어서 대학가라고 했다. 시집 몇 권을 챙겨 들고 부산을 찾았다. 옷에는 항상 느끼한 기름 냄새가 묻어 있었다. 손바닥만 한 점포에 이종사촌형, 엄마, 나. 3명이서 겨울을 견디기 위해 밥을 먹었고 난 눈치껏 책보는 것이 유일한 낙처럼 지나간 시간이 있었다.

 

천 원짜리 탕수육 맛이 학교 앞 주전부리용이지만, 반짝 장사로 그 해 돈 맛을 볼 수 있는 장사였던 것 같다. 천 원짜리도 배달하기 위해 50cc 오토바이를 타고 동네를 다녔다. 엄마랑 같이 배달 갔다가 도저히 들어갈 수 없어 엄마가 들어갔던 경남여고. 스티커 붙이려고 다니다 헬멧 안 썼다가 의경한테 걸려 벌금 물리 뻔 하다가 눈물 쪽 뺄 만큼 빌었던 적. 참 추웠다. 배짱이라도 있었으면 덜 추웠을 텐데.

 

짧은 봄이지만 봄이 왔다. 동가리 신작로에 천 원짜리 탕수육 점포를 마련했다. 내 고등학교 시절을 남의 식당 일을 하던 엄마가 드디어 장사를 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식당 구정물 묻힌 사람이 식당 여는 게 숨통 트이는 삶일 것이다. 덩달아 설레었다. 하지만 그 설렘은 짧았다. 탕수육 팔던 분식집이 동네 어른들 술판으로 변해가면서 문을 닫았지만 요기로 탕수육을 솔찮이 먹었다. 문을 닫고 나서 난 한동안 맥주 안주로도 탕수육을 먹지 않았다. 하찮은 것들이 문득 너무도 또렷이 되살아나는 구질구질함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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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포를 지우고 싶다

그 공포를 지우고 싶다

-5월 4일 대추분교에서 이 정권의 끝을 보다

 

48시간을 꽉 채우고, ‘즉결심판 출석통지서’를 들고 유치장을 나왔다. 함께 연행되었던 동지에게 담배를 빌려 경찰서 현관에서 피웠다. 젠장할 비 때문에 갈 길을 더 머뭇거리게 했다. 연행이 되지 않았더라면 일부러 올리는 없을 분당에서 대구행 버스를 기다렸다. 저녁에 도착해 대백 앞 민주광장에서 열린 ‘평택 강제집행규탄 촛불집회’에 참가했다. 걱정해주신 선배들에게 인사도 드렸고, 아비규환의 대추분교의 모습이 담긴 선전물을 시민에게 건네주었다.

 

막걸리 몇 잔으로 나의 생활로 돌아 왔다. 며칠이 지났고, 4시간 거리의 평택이 딴나라처럼 잊혀 지는 듯 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무덤덤해진 건지 연행과 유치장의 경험으로 의연해진 건지 나답지 않게 분노가 표출되지 않았다. 나의 술버릇으로 봐도 한 번쯤은 억병에 취해 실수가 나올 법 한데 그렇지 않았다. 면회를 온 선배가 보낸 메일을 보고서는 차츰 그 진의를 알 수 있었다.

 

조서 꾸미면서 국가와 개인의 관계나 사법체계의 힘을 피부로 느꼈을 꺼라 생각한다. 조지오웰은 이 경험을 위해 일부러 경범죄를 짓기도 했다는데 너는 어쩌면 가장 저렴한 댓가로 값진 경험을 한지도 모른다. 훌륭한 작가나 활동을 위한 자양분을 얻은 걸로 생각해라, 축하한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리지만 지금의 떨리던 감정을 잘 기억해두었으면 좋겠다.

 



잊혀진 게 아니라 묻혀 있었던 것이다. 나의 분노가 거대한 국가의 힘으로 눌려 있었던 것이다. 찍 소리 못하게 만드는 공포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여느 평범한 아저씨였을 형사들은 조서를 꾸미며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정당한 법집행인 걸 아느냐, 국회에서 통과되고 합법적인 절차로 인한 국책사업인걸 아느냐, 불법집회 사실을 아느냐? 앵무새처럼 형사들은 각자에게 물었다. 스스로 정당한 저항이라 생각하면서 근데 무엇 때문에 묵비권을 행사하느냐 당당하다면 정당하게 말하라! 라면 오히려 기세등등했다.

 

국가의 위임을 받아 조사관으로서 충실히 임무 수행을 하고 있지만 왠지 말싸움만 하다가 끝날 평행선 같은 조사가 공명정대한 조사였는지 궁금했다. 타이핑한 조서를 확인하라며 문서를 내밀었다. 나의 말은 이미 나의 말이 아니었다. 조사관이 얻고자 했던 답을 얻기 위해 조목조목 묻고 또 물었고, 그 정답만 기재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난 이런 식의 조사라면 다시 질문을 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묵비권으로 응하겠다고 했다.

순순히 질문에 응했던 나에게 조금 전에 커피와 담배를 웃으면서 전해주던 얼굴이 금방 굳어 버렸다. 신경질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내가 윽박지르면서 조사했냐고 반문했다. 묵비권으로 벌써 처리를 다 했던 경찰은 아쉬워하며 한 건 할 수 있었네 하는 둥 직업 경찰 본연의 임무로 탈바꿈한 모습을 보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터라 귀찮았는지 더 이상 묻지도 않고 조서 꾸미기를 끝냈다.

 

반신반의했던 국방부의 대화가 결국 속임수로 끝나고 말았다. 지역의 청년․학생들로 긴급하게 조직을 하여 5월 3일 밤 11시를 넘겨 대추초교에 도착했다. 새벽 4시의 결의대회를 앞두고는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운동장에 모인 많은 수많은 대오를 보고는 나름대로 안심을 하였다. 하지만 이 생각도 단박에 깨지고 말았다. 여명이 트기 전에 미군기지 안 도로에는 끝도 없이 전경버스와 장비를 실은 화물차량, 군용차가 물 밀릴 듯이 들어오고 있었다. 여명이 트고는 배치가 다 되었는지 움직일 명령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신문사 기자들은 헬멧을 쓰고는 어딘가를 뛰어 다니고, 방송국 아나운서는 첫 방송을 위해 멘트 연습에 열중이었다. 마치 이라크 전쟁 발발을 알리는 미사일이 목표물을 명중하며 아나운서의 상세한 설명으로 생중계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방송국의 첫 방송과 함께 악어 입을 벌리듯 미군기지의 문은 열리고 새카만 전경들이 밀고 들어 왔다. 내리 쪽에서는 순식간에 밀려 학교 근처까지 들어 왔고, 학교 정문 쪽에서도 밀려 연좌 농성으로 전경을 막아내고 있었다.

 

나는 학교 뒤편에서 대치 중인 대오 후미에서 함께 했다. 이 순간부터 정말 보지 말아야할 것과 이 자리가 아니었으면 못 봤을 그래서 더 더욱 두 눈 부릅뜨고 봐야 할 것들을 확인했다. 학교 뒤편에 아직도 엄연히 생활을 하고 있는 주택이 있는데도 골목에, 옥상에, 틈이라는 틈은 전경들로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침 한술도 겨우 떴을 시간, 정말 코미디 같은 상황을 난 보았다. 방패와 죽봉으로 일촉즉발의 순간 대문이 열리더니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교복 입은 남학생이 대치상황을 보고는 어리둥절함과 빽빽한 사람들로 학교 갈 길이 사라져버린 대문 앞에서 멈칫거리다 집으로 들어가며 대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참담한 모습을 보고 말았다.

 

학교를 못 가게 만드는 전경과 군인이 중학생의 등교쯤은 아무 상관없을 것이고 국방부와 이 나라 정부는 중학생의 등교쯤은 ‘전략적 유연성’ 앞에서는 눈곱만큼의 가치도 않을 것이다. 학교를 가지 못했을 그 학생은 이 세상이 과연 어떻게 보였을까. 그리고 그 모습을 평생 어떤 무게로 짊어지고 살아갈까. 새내기인 듯한 대학생의 발언은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났다. 어떤 장광설, 어떤 논리적인 발언보다도 더 현실인 것이다. 직파한 논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온 전경과 군인들을 눈에 앞에 두고서 욕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되겠는가

 

주민들이 만들어주신 주먹밥을 먹고는 몇 시간도 못 되어 운동장을 내어주고는 학교 2층으로 몰리게 되었다. 죽을 수 도 있겠구나. 그래서 살기 위해 학교로 올라가게 되었다. 체험해보지는 못했지만 순간적으로 건국대와 연세대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2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앞에서 들리는 비명과 군홧발 소리, 전경들의 방패소리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공포 그 자체였다. 더 이상 갈 곳 없는 학교 2층. 계속 들려오는 소리들.

 

그 공포를 어찌 할지 몰라서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던 평상시라면 몇 번을 망설였을 사람들에게 무작정 전화를 돌렸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며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부탁드렸다. 300명가량의 인원이 2층을 가득 메웠다. 몇 시간의 진정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운동장을 가득 메운 전경들과 용역들을 보았고, 하늘로는 태극기가 선명히 보이는 헬기로 철조망을 묶고는 쉴 새 없이 나르고 있었다. 2층에서 보이는 내리 쪽의 들판에는 위에는 주황색 체육복을 입은 군인들이 철조망을 치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3월 말 나는 함께 활동하고 있는 ‘땅과자유’ 회원들과 평택으로 농활을 가게 되었다. 그날 나는 도두리 쪽에서 일손을 돕게 되었다. 오줌 눌 곳도 없는 끝도 보이지 않는 너른 그 땅을 전쟁을 치룰 미군의 기지로 내준다는 말인가. 팽성대책위 사무실에 붙어 있던 “쌀은 생명을 살리지만, 무기는 생명을 죽입니다.” 가 자꾸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 그날 함께했던 회원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았다. ‘평택을 생각하며, 평택을 지키는 것이라면 함께 싸우자’ 그래서인지 ‘땅과자유’ 회원들은 일명 대추리병이라 불리는 병에 전염병 돌 듯 돌아 아파하고 있다. 그날 고생했다면 챙겨주신 흑미 다섯 포를 나누어 먹었다. 내가 먹었던 그 흑미가 이제는 철조망을 치고 있는 군인들의 군홧발에 의해 다시는 맛보지 못하게 되었다.

 

열린우리당의 임종인의원의 방문으로 기자들만 날뛰는 상황을 창문으로 보면서 정말 살의를 느끼게 만들었던 잔인한 장면을 눈물을 참으면서 보고 말았다. 공룡 같은 포크레인의 삽날은 아름드리 나무를 순식간에 부셔버렸다. 어찌 저럴 수가 있나! 주민이자 이 학교의 소사이시던 할아버지께서 옮겨 심으면서 몇 십 년을 정성껏 키운 나무를 단 몇 분 만에 부셔버리는 저들도 집에서 한 가정의 아비일 것이며 자식들과 꽃을 키운다고 화분을 놔두지 않았을까. 그 광경을 같이 보고 있던 학생이 말했다. “옮겨라도 심지.”

 

옮겨 심지 않는 저들은 또 다시 방패와 곤봉을 앞세워 2층을 올라오고 말았다. 1분도 못 견디고 우리는 교실에 몰려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쳤다. 굵직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던 노동자의 구호는 아직도 잊지 못하겠다. 오월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 바로 이곳이 오월 광주였다. ‘오월의 노래’가 현재 진행형인 걸을 함께 부르며 느끼고 말았다. 그렇게 난 전경들의 의해 들려져 나갔다. 어떤 소식도 접할 수 없었던 난 5월 6일자 신문의 일면에 나와 있던 사진을 보고 또 다시 눈물을 참아야만 했다. 대추초교는 없어지고 잔해더미에 꽂혀 있는 깃발의 ‘평화’

 

학교를 가지 못했을 중학생과 수 십 년 된 아름드리 나무의 최후를 잊지 못한다. 마지막까지 스크럼을 짜고 노무현 정권의 끝을 절대 잊지 말고 기억하자며 구호를 외쳤던 처음 보는 동지를 잊지 못 한다. 나에게 즉결심판으로 벌금을 물리고 국가의 안보 또는 어떤 법적 근거를 내밀어도 2006년 5월 평택을 잊지 못한다.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노무현 정권의 끝을 보게 된 것은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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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진 자의 짜증남

백수의 일기를 좀 근사하게 뭔가 있어 보이게 쓰고 싶어 기다리고 기다렸건 만, 눈알 빠지게 기다리다간 속에 천불이 나서 못 베기길 것 같아 쌓여 있는 것을 휘갈겨 쓴다. 그것도 새벽 3시를 넘겨서 말이다. 내일 아침에 선거 사무실 청소를 가기로 약속을 해서 일찍 자리에 누워 건만 오늘 일때문인지, 원래 불평불만이 많아서 인지 잠이 오질 않았다. 그렇다고 할 일을 다 해놓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백수 생활도 3개월째를 달리고 있다. 백수 생활하면 꼭 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그래서 달콤한 잠도 안 자고 날밤까면서 까지 귀찮은 행정서류와 면접, 시험(상식적인 수준)을 보면서 참고 참았다. 근데 떨어지고 말았다. 그냥 짜증이 왕창 밀려 왔다. 짜증나서 미치겠다. 술이라도 한 잔 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일거리 걱정에 집회 마치고 밥만 먹고 돌아왔다. 예전 같았으면 왜 떨어졌을까 하고 아주 심한 자책과 절망의 구렁텅이에 떨어져 겠지만, 그것도 한 두번이 아니니 그저 짜증이 날 뿐이다.

 

그 전에도 아주 많아겠지만 미술대회 나가서 떨어졌던 기억으로 시작해서 대학 떨어진 것, 또 떨어진 것, 이번 앞에 기회가 되어 특별전형으로 서류접수를 했는데 그것도 보기 좋게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뭐가 있나. 이 정도 되니 시험친다라는 류의 모든 것에 그냥 말 안하고 조용히 지나가려고 노력하지만 이게 술만 먹으면 입이 근질근질해서 말해버리고 만다. 발표가 나면 쪽팔리만.

 

실업자 재취업 교육 일환으로 백수라면 한 번쯤 교차로로 통해 눈요기 정도는 했을 법한 IT교육 과목 중에 컴퓨터 초급 단계인 분야를 체계적이면서 구속받으며 배우고 싶었다. 그것도 공짜로 (실제로는 공짜도 아니면서 사기 때리는 거지만) 배울 수 있으니. 근데 이 일정을 맞춘다고 백수의 생활에 많은 지장을 받았지만 참았다. 평택 투쟁도 이런 핑계거리로 스스로에게 위안을 받곤 했다. 6개월 과정을 교육 받을 준비로 6개월 동안 모든 일정을 이에 다 맞춰 놓았다. 근데 이제는 하는 일 없이 나이만 먹게 될 판이다.

 

그리고 보니 고등학교 졸업 이후 어떤 틀에 구속을 받으며 교육 또는 그에 준하는 뭐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아직도 내 친구 중에는 대학교 2학년인 학생이 있는데. 뭐 이런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건 아닌 것 같고, 이 짜증남을 어떻게 해소하면 기분이 나아질까 싶다. 경쟁율, 시험, 운, 실력 이런 것 다 떠나서 이번에 떨진 것에는 면접에서 아주 거침없이 말 한 것에 대한 보복성이 있지 않았을까. 근거없는 추측을 해 본다. 자전거를 타고 집회를 나가면서 그 학원을 지나 갔는데 밉고, 분하거나 이런류의 기분보다는 그냥 짜증이 일어 왔다. 며칠은 그렇게 지나가곤 할 것이다.

 

오늘 짜증에 일조한 건 평택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동안 함께 하지 못한 이유 중이 이 일정 때문이었는데 그것을 어떻게 보상 받을까 싶다. 보상해 줄 일도 없겠지만. 어이구 왜 내 삶인데 내 계획대로 안 되는 것이여~ 짜증, 짜증

결국 오늘 포크레인이 밀고 들어와 생명과 평화를 파괴하며 논을 파고 말았다. 근데 이건 짜증이 아닌데, 왜 짜증으로 느껴질까. 분노가 쌓이고 쌓여, 관성이 되어서 그런가.

 

16일이 최대의 고비가 될 것이라 하는데 대추리에서는 지금도 규찰을 서고 있겠지. 평택에서 투쟁하는 동지들이 다치지만은 않았으면 좋겠다. 어쩌면 무례를 범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랴, 이렇게 기도하는 게 나의 한계인 것을.

 

나의 짜증이여, 어서 증발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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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과자유 제4대 의장에 당첨되면서

땅과자유 제4대 의장에 당첨되면서

 

 

얼마 전에 있었던 열우당 당 의장 선거가 갑자기 생각납니다.ㅋㅋ

체육관 선거로 정동영이 당선되면서 수락 연설도 했다고 하던데, 저는 당첨 이바구나 좀 할까 합니다.

우리들의 교과서인 녹평 책을 뒤적였습니다. 새삼스럽지만 내가 숨 쉬고 있는 이 곳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열우당 당의장 선거가 민주적이라 볼 수 있을까(물론 다른 집의 사는 방식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래서 12년 동안 배워왔던 교육, 과목으로 따지자면 사회, 정치 교과서와 샘을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열받는다. 어디 보상받을 방법 없을까 하고 머리 굴리고 있습니다.

 

지금 하는대로 하되 끈질기게 좀 해볼까 합니다. 게으름 피우고 농땡이 부리면 당근과 채찍을 골고루 섞어가며 선배님들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더글러스 러미스, 녹색평론사>

에서 몇 구절을 옮겨 놨습니다. 그리고 땅과자유의 제비뽑기에 대해 홍철선배께서 이야기 해주셨고 확인했지만 원칙에 대해 정리해서 적어 놨습니다. 2월 24(금) 제 4대 의장 제비뽑기에 참석하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 증거(?) 사진을 올려 놨습니다. 끝으로 의장의 권한으로 요구합니다. 역대 전 의장님들은 신임 의장에게 수고해라는 뜻으로 축하주 또는 그에 상응하는 예우(?)를 요구한다!!

 

 

{국가에는 3개의 신체가 있습니다. ... 민주주의라고 일컬어지는 나라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정치적인 신체분이며, 군사적인 신체와 경제적인 신체는 명백히 비민주적, 반민주적입니다. ... 선거는 귀족제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거를 하면 가장 유명한 사람, 가장 돈이 많은 사람, 가장 사회에서 눈에 뜨이는 사람이 뽑히게 되므로, 그것은 귀족이라는 것입니다. ... 민주주의에서 만약 대표를 뽑는다고 한다면, 즉 민주적으로 대표를 뽑는다면, 그것은 제비뽑기라야 합니다.

... 어째서 그것이 민주적인가. ... 시민이라면 전원이 대표가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고, 그래서 누구라도 시민이라면 대표를 맡아야 하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이 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경제성자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더글라스 러미스, 녹색평론사)> 121~122쪽 인용

 

 땅과자유 제4대 의장 뽑은 방식

1.선거+추첨(제비뽑기)

 ㄱ. 먼저 선거에서 각자 두명의 후보를 기입

 ㄴ. 두표 이상 받은 후보를 추첨한다.

 ㄷ. 후보는 그 날 참가한 이외의 사람도 포함된다.

 ㄹ. 사외 후보도 가능하며 고로 사외 의장도 가능하다. 예를 들자면 마르코스, 차베스, 강신우 등등

 ㅁ. 추첨에서 추첨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장소에서의 연장자가 추첨하도록 한다. 

  *빠뜨린 부분이 있다면 답글 부탁드립니다.

 

증거 사진

 ▲제가 될지 누가 알아겠습니까?


 ▲대풍식당 어머니, 뽑기의 긴장감을 막걸리 한잔으로~


 두근두근 결정의 순간


 어쩌겠습니까^^;;


 ▲지소장님 생일이기도 한 날, 의장 당첨 축하 공연



 ▲지소장의 뛰어난 연주 솜씨로 4대 의장 뽑기 피날레를 장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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