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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기억하고 싶지 않은 지난 일들

1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2/24
    잔칫날 [2004.2.17]
    꿈꾸는나비
  2. 2006/02/24
    시창작교실 모임 다음날 [2004.02.01]
    꿈꾸는나비
  3. 2006/02/16
    부안을 지키는 사람들 [2004.2.17]
    꿈꾸는나비
  4. 2006/02/15
    여의도에서 [2004.2.12]
    꿈꾸는나비
  5. 2006/02/12
    좋은 만남, 좋은 사람들 [2004.2.16]
    꿈꾸는나비
  6. 2006/01/22
    마음이 무거운 날 [2003. 12. 24]
    꿈꾸는나비
  7. 2006/01/21
    울고 싶은 아침 [2001.04.06]
    꿈꾸는나비
  8. 2006/01/21
    노가다 일기 [2001.01.10]
    꿈꾸는나비

잔칫날 [2004.2.17]

잔칫날

이틀 연속으로 새벽까지 술을 마셨지만 괜찮았다. 이 정도로 마시면 변기 잡고 울거나, 약 먹고 종일 누워있으며 앓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다. 푸시시한 모습으로 일어난 오전이 상쾌했다. 술이 덜 깨서 그런지 괜히 기분이 업되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돈지 땅의 기운을 받아서 일거라 믿어진다. 실상사 졸업식 때문에 민희 누나는 아침에 갔다고 했다.

민희 누나 대신 민철 선배가 부안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일주일치 똥을 이제야 돈지의 힘을 받아서 용을 쓰는 보경 누님 때문에 게으른 출발을 했다. 보경 누님의 빨간 선글라스가 언발란스였지만 미인은 뭘 해도 예쁘니까 괜찮았다.^^ 해안선을 따라 물 흘러가듯이 가고 있었다. 갯벌에 솟은 솟대가 보였다. 길가에 차를 세웠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의미심장하고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었다. 비싼 돈 주고 유럽의 미술 기행보다 이 곳에 와서 파괴되어 가는 현장에서 가슴 아파하길 간절하게 기도해 본다. 장승과 솟대 앞에서 사진 한판 때리고 출발했다.

새만금 방조제 위를 달렸다. 차량 통제 지점에서 멈추었다. 해괴망측한 땅에 발을 디뎠다. 정말로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다. 자연에 맞짱 뜨자고 도전장을 낸 놈들은 똑똑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10년도 못 가 쌍코피 터지고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20년 안에는 능지처참을 당하리라. 아무것도 아닌 내가 장담하리라. 우리가 서 있는 방조제 앞에서는 덤프트럭이 똥 누듯이 돌을 쏟아 붓고 있었다. 암담할 뿐이다. 관광버스도 보였다. 뭘 보러 왔는지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웃으면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었다. 땅과 자유의 학생(?)은 그럴 수없다는 듯이 주먹을 치켜들고 구호도 외치고, 어깨동무를 하고 걸어가며 구호도 외쳤다. 조금은 어설펐는지 몰라도 하나 되어 싸우겠다는 단결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박영희 시인의 시 <곰소 잔디다방>에서 보면 채석강 갔다가 언 몸 녹이고 싶거든 곰소의 잔디다방을 가보라고 했다. 육십년대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곰소 잔디다방을 방문하고 싶었거늘 배신의 똥줄을 때리고 어찌 갈 수 있을까. 채석강과 곰소를 뒤로 한 채 달려갔다. 우리의 차를 멈추게 한 풍경이 있었다. 아파트 베란다 마다 걸린 노란 깃발과 아파트 벽면에 걸려 있는 대형 걸개그림이 브이레크를 밟게 했다.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80년대의 대학교 안에나 있을 법한 것이 손바닥만한 촌구석에 걸려 있다는 사실은 뭘 말해주는 것일까.

최근에 나온 산문집 <모항 막걸리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 의 저자인 박형진 시인 집에 도착했다. 누에 아줌마(?)의 첫사랑이라 우기는 집에 도착했을 때 누에 아줌마(?) 심정은 어떠했을지 괜히 궁금해진다.^^; 질펀하게 막걸리 마시며 안주의 맛을 못 본 게 아쉽지만(그것까지 바란다면 무례일수도 있겠지.) 식은 밥에 김치와 동치미를 내주시는 풋풋함에 그저 좋았다. 그리고 고마웠다. 동치미 무시 두 개를 맛있게 돌려 먹는 모습에 감탄을 하고 말았다. 땅과 자유 학생(?)들이 너무 맘에 들었다. 간접 키스니, 남이 입에 댄 건 아무것도 먹지 않는 깔끔함의 극치를 이루는 세상에 거리낌 없이 쥐가 파먹은 듯한 무시를 잘도 베어 먹었다. 간접 키스를 마다할 내가 아니지 그저 고마운 마음으로 먹었다. ^^ 이렇게 살고 싶다. 조금은 허술하게 조금은 더럽게(결코 더러움이 아닌데) 살고 싶다. 뒤뜰의 나무토막 의자와 장독대와 뒷간으로 가는 길과 뒷간 그리고 야트막한 산이 어우러져 아늑했다.

부안 성당에 도착했다. 식당으로 향하는 데 보경이 누나 혼자 가방도 내팽개친 채로 아저씨들과 함께 새끼줄을 꼬기 시작했다. 잘 꼰다며 말하더니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게 꼬올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도 못 하는데 그런 거 보면 대단하다. 식당 안에 있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았다. 종이컵도 노란 색에 핵 없는 세상이라 적혀 있었다. 투쟁의 의지가 어디까지 인지 알 수 있는 증거물이라 생각된다. 성당 앞에 있는 타임캡슐의 구루마 새끼줄에 우리의 마음과 함께 천원을 끼워 넣었다.

이제는 잔칫집 마당으로 변해 버린 반핵 민주광장에 들어섰다. 경록 선배님과 은경 선배님의 (성원 누님 말대로) 혜안이 또 다시 발휘되는 곳이었다. 오월 광주의 시민군 트럭에 주먹밥이며 물을 넣어 주는 아주머니처럼 해방을 선언한 부안에서는 배 터지도록 먹을 수 있었다. 부안에는 거지가 있을 수 없었다. 은경 선배와 보경이 누나와 나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국밥을 받아들고 그 자리에 털석 주저앉아 얼큰한 국물에 속이 다 풀렸다. 은경 선배께서 손수 입에 넣어 주신 젓갈은 정말 입안에 쫙 달라붙었다. 전라도의 깊은 맛은 한마디로 ‘죽인다.’ 어찌 우리끼리만 먹을 수 있을까. 또 다시 받아왔다. 부침개와 막걸리, 김치, 떡으로 대낮에 또 술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보경이 누나는 목마르다며 다른 자리에 가서 맥주로 입가심을 하고 왔다고 했다. 대단한 붙임성인 것 같았다. 이런 세상이면 얼마나 좋을까. 비록 막걸리 몇 잔이 들어갔지만 대낮에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 사는 게 별거 아니라고, 이렇게 사는 거라고 출세가도를 달리는 내 친구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신경림의 시 ‘파장’이 생각난다. ‘못 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타임캡슐 구루마가 풍물패를 앞세워 들어오고 있었다. 흥을 돋우는 풍물패에 한바탕 흔들었다. 은경 선배가 높이 든 피켓 주위에 보경이 누나와 내가 있었다. 준희 형님은 사진 찍는다고 막걸리도 못 먹고,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타임캡슐 항아리에 들어가는 물품들이 보잘 것 없는 것일 수 있지만, 부안 전사들에게는 피눈물 겨운 소중한 것들이었다. 헤어진 운동화, 투쟁기록 영상 시디, 반핵 조끼와 잠바등 온갖 반핵용품들로 항아리에 넣어졌다. 8개월 전만 해도 시골의 순박한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들을 전사로 만들어 버린 종규와 핵폐기장 그리고 위정자들은 좋은 말할 때 지구를 떠나라. 부안 출정가를 따라 불렀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주머니를 보았다. 내가 어찌 저 한을 알 수 있을까. 부안 자치 공동체 만세!

쉽게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느릿느릿 걸었다. 풍물 소리를 뒤로하고 승합차로 돌아 왔다. 민철 선배는 광주로 가야 하기에 여기서 작별을 했다. 광주를 찾아 가겠는 약속을 고이 간직한 채로. 선물로 반핵 깃발 두개를 얻어 왔다. 차를 타기 전에 정리 구호를 했다. 역시 땅과 자유였다. 출발을 선언했는데 보경이 누나가 브레이크를 걸었다. 내팽개치고 새끼줄 꼬면서 챙기지 않은 가방을 찾으러 성당에 들렀다. 진짜로 간다. 부안을 벗어나기도 전에 잠에 빠졌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창렬 선배만 외로이 눈을 뜨고 있을 뿐이다. 몸살을 할 것 같은 기분이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배움을 받아서 머리 속을 교통정리 하려면 며칠은 독수공방해야 될 것 같았다. 그래 이런 몸살이라면 주기적으로 앓았으면 좋겠다. 이만한 공부가 또 어디 있을까 싶다. 이런 인연을 맺어준 땅과 자유의 선배님들께 큰 절을 올립니다.

창렬 선배님 수고하셨습니다. 먼 길을 운전한다는 게 호락호락한 일이 아닐 터인데, 운전 때문에 제대로 편히 술도 못 마시고, 부안을 편히 갈 수 있었던 건 창렬 선배님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은경 선배님 날뫼터에서 밥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경록 선배님의 허탈한 웃음과 가식 없는 행동이 너무 좋습니다.

준희 선배님의 빼어난 목소리로 부른 노래는 아직도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조만간에 술이라도 한잔 하면 어떨까 합니다. ^^

성원 선배님과는 많은 이야기를 못 해 본 것 같네요. 미인 앞에서는 눈도 못 마주치는 숙맥이라서 ^^

보경 선배님은 선머슴아 같아서 좋네요. ^^ 정말 친누나 같이 편해서 좋아요. 조심하세요. 저 왕 빈대라서.

민희 선배님도 많은 이야기를 못 해 봐서 아쉽네요. 평화 유랑단 차 앞에서 사진 찍어줘서 고마워요.

지현이는 서른에 가까운 누나인줄 알았는데 동갑이라니 ^^;; 열린 글터 가면 책이나 빌려주라.

동주+남희 바퀴벌레라고 하는데 왜 바퀴벌레라고 하지. 형광등이라서 ^^;; 손잡고 다니는 모습이 좋기만 하더라. 사실은 배가 좀 아프지만 ^^ 지구 연대 동방 자주 가서 신세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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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교실 모임 다음날 [2004.02.01]

오랜만에 시창작교실 회원들을 만났다. 속쓰림과 주정에 가까운 이야기들 때문에 몸과 마음이 괴롭다. 어김없이 들려오는 할머니의 잔소리가 나를 괴롭힌다.

"문디, 술도 못 이기면서 어디서 쳐 마시고 와가주고 지랄이고!"

할머니 특유의 목소리에는 미움이 섞여 있지 않다. 오늘은 변기를 잡고 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런 날이면 술 깨는 약 봉지가 머리맡에 놓여 있을 때도 있다. 예전만큼 속이 안 좋은 걸 느끼지만, 무작정 마시게 되는 날이 있다.

어제가 그런 날인 것 같았다. 문학이 뭐고, 시가 뭔지 몰라도 소화 해 낼 수 없을 정도의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오버하는 이 버릇을 언제 고칠지 걱정스럽다. 오버가 아니라 분노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커피샵에서 시작해서, 보쌈 집에서 소주, 아구찜 집에서 또 소주, 마지막 입가심으로 생맥주. 솔직히 아구찜 집에서 벌써 술기운이 올라서 살아 보지 못한 80년대를 겁 없이 횡설수설 했는데, 내가 했던 말이 어쩌면 무덤이고 족쇄가 될 텐데. 항상 또 술 깬 아침에 후회하게 된다.

꺼져가는 불씨가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같이 생맥주 집에서 지훈이와 미덕이 샘과 밑도 끝없는 입싸움(?)이 계속 되었다. 장사 마치기 위해 우리 테이블만 가길 기다리고 있는 주인아줌마에 눈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혼자서 두 분의 공격을 엄청 받았다^^

아쉬움을 남긴 채 다음 설전을 기약하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다시 만나고 싶었다. 현재의 내 위치를 또 깨닫기 위해서. 쉽게 말해서 한방 먹었다. 그것도 보기 좋게 기분이 엉망이었다. 아니 지금껏 살아 온 내 사상(생각)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 같았다. 다시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

실컷 깨어지고 싶다. 그래서 더 이상 깨어질 게 없는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 어디서 귀동냥에 겉멋에 빠져 비겁한 놈처럼 술에 힘을 실어 큰소리치는 내 자신이 초라했다. 껍데기에 불과한 내 삶이 이제는 정말 진절머리 난다.

미덕이 샘의 촌철살인 같은 말과 지훈이의 맑은 기운은 나를 또 키우는 원동력이 될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 물어 본다.

“넌 왜 글을 쓰려고 하고, 그 배움에 있어서는 얼마나 진지하고 치열한가?”

좀더 노골적으로 물어 보자

“너 솔직히 습작이라는 걸 몇 편 쓰고 술주정 부리는 거니?”

속쓰림과 오버한 말의 괴로움보다는 오늘의 삶이 또 허튼 다짐으로 끝나지는 않을까하는 괴로움이 더 크다. 지훈이가 중학교 때 이응인 선생님께 들고 갔던 몇 권의 일기장같이 적겠습니다. 한 편의 글을 들고 와 내미는 두려움과 부끄러움도 버리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술자리를 가지겠습니다. 술 먹고 즐기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서로 못 잡아먹어 헐뜯는 자리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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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을 지키는 사람들 [2004.2.17]

부안을 지키는 사람들


잠결에 들리던 보경이 누나와 누나 친구의 대화가 화두로 돌아왔다. 잠에 빠져있는 놈한테까지 배움을 주는 날뫼터였다. 보경이 누나는 잠자기도 아까워하는 귀신(?)인 것 같았다. 경록이 선배님은 언제 일어났는지 콩나물 해장국을 해먹자고 졸라대고 있었다. 날뫼터의 공용 칫솔로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렸다. 누에 아줌마(?)는 여전히 구석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날뫼터의 책에 잠시 빠져 흠모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피켓을 만들자는 소리에 보경이 누나가 크레파스와 종이를 준비해왔다.(날뫼터의 물건을 공짜로 사용한 것임) 피켓을 스스로 만들 본 적이 없어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머뭇거리면서 누나들이 하는 거 지켜보았다. 홍철 선배님이 제안한 문구를 쓰기로 했다.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었다. 괜히 잘 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크레파스를 잡고 쓰기 시작했다. 이런 글을 적어 부안 사람들을 생각한다는 그 자체가 더 소중하다 라는걸 깨달았다. 경록 선배, 은경 선배, 성원누님, 보경이 누나 정말 정성껏 만들었다. 민희 누나도 오자마자 피켓을 만들었다. 은경 선배님의 수고로 김치콩나물국으로 제대로 해장을 했다. 밥을 먹고 난 뒤 바퀴벌레 한 쌍도 피켓을 깜찍하게 만들었고, 누에는 잠에서 덜 깼는지 철자도 틀린 피켓을 만들었다.


준희 형이 오길 만을 기다렸다. 회비를 만원씩 거두었다. 보경이 누나와 난 빈털터리라서 성원누님한테 빌렸다. 최소의 경비로 최대의 효과를 누리며, 행동으로 보여주는 고르게 가난한 사회가 아닐까 싶다. 준희 형이 왔다. 드디어 부안 자치 공동체로 출발이다. 머리털 나고 처음 전라도로 가는 길이라 나에게는 남들보다 더 의미 있는 떠남이었다. 대구를 벗어가기 전에 전농 깃발이 보였다. 한나라당 지구당이었다. 고속도로로 들어왔다. 미끄러지듯이 달렸다.


어제 그렇게 마셨는데도 피곤한 기색이 안 보였다. 벌써부터 부안의 기운을 이어 받는 듯 했다. 경록 선배를 비롯해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 같이 허물이 없었다. 편안했다. 고작해야 만난지 하루 밖에 안됐는데, 발렌타인 선물치고는 너무 큰 선물이었다. 누에, 동주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갔다. 추풍령 휴게소에 들러 군것질거리를 샀다. 나누어 먹는 재미도 솔찮이 괜찮았다. 민희 누나는 안치환 노래를 틀어 달라면 주문을 했다. 덕분에 좋은 노래도 많이 들었다.


신태인 나들목을 빠져 나오면서 우리는 환호성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부안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일단 백산초등학교로 향했다. 우리 차 앞에 짭새차의 경호를 받으면서 시꺼먼 고급 승용차가 따라 가고 있었다. 아마 김종규가 타고 있을지 모른다는 동주의 흥분된 소리에 나란히 서길 기다렸다. 절묘하게도 나란하게 신호에 걸렸다. 왼편 창문을 열어젖히고 얼굴을 내밀었다. 속 시원하게 욕이라도 한판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꺼먼 승용차에는 운전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싱거운 해프닝이었지만 우리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한바탕 웃음으로 마무리 되었다.


백산초등학교에 도착했다. 투표는 종료 되었고, 확인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은성풀님과 길풀님은 새벽 4시에 기상을 해서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바빴다고 했다. 주민투표라 해서 무시하지 마시라. 아주 꼼꼼하게 그것도 투표 절차 그대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 마을 위원장님께서 도장을 안 찍고 가셔서 전화를 해 다시 오라고 하는 것 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모든 과정을 다 참여 할 수 없어서 아쉬웠지만, 그렇게나마 분위기라도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음 장소로 갈려고 하는 데 누에 때문에 기다려야 했다.


누에 변명이 무슨 이야기인지는 잘 몰라도 대충 그랬던 것 같다. 머리보다 이마가 더 넓은 아저씨와 담배를 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나, 꼬신다나 당최 무슨 얘기인지. 그게 뭐 텐 미니쳐라나. 종잡을 수 없는 누에 아줌마가 나에게 배꼽 빠질 만큼의 웃음을 주어서 그저 고마울 뿐이다.


부안 읍내에 도착했다. 거리에는 노란 깃발 세상이었다. 열우당과 민주당의 돈 냄새나는 노란 스카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부안 민중의 정신이 쓰려있는 그 깃발이 태극기 보다 천 배 만 배는 더 자랑스러웠다. 피켓을 나누어 가지고 움직였다. 일단 밥을 해결하기 위해 접선을 했다. 초면인 주요섭 선배님과 정읍에서 두부 공장인가 하신다는 분을 만났다.


김치찌개에 소주를 거시기 하게 먹었다. 옆 테이블에 앉은 분이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다. 지하 조직이라 했더니 흐뭇해하는 표정이었다. 나가시면서 좋은 말씀을 잊지 않고 갔다. 밥이 나오자 아주 조용히 먹었다. 역시 먹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인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배가 부른지 아니면 에너지 충전이 되었는지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민주 반핵광장으로 향했다. 자리를 비집고 들어 가 앉았다. 우리가 만든 피켓이 본격적으로 발휘할 때가 왔다. 문정현 기자님이 직접 생중계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생중계에 아주머니가 주신 따뜻한 오뎅 국물을 마시는 성원 누님이 찍히기도 했다. 카메라 거부증(?)이 있는 나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한총련 행사 때 산 노란 손수건으로, 잠바에 달린 모자로 눈만 내놓고 피켓을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특이했는지 아니면 일렬로 든 피켓이 괜찮았는지 한동안 서포라이트를 받았다. 기자들 때문에 행사 장면이 안 보인다며 나와 라는 소리도 들렸다. 어쩌면 그건 기자들을 신봉하는 우리와는 다른 나름대로의 의식이 있는 행동의 한 가지 일수도 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르익어 가는 열기는 한바탕 어울림으로 최고조에 이르렀다. 신명나는 풍물패 때문인지 병이 도지는 것 같았다. 짜가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땀이 나도록 흔들다가 이제는 손에 손 잡고 강강수월래가 시작되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생판 모르는 사람의 손을 잡고 더 크게 더 크게 큰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이 신명과 재미는 돈 주고 가는 나이트클럽과 정치인들이 보내주는 공짜 온천 관광으로 버스 안에서 흔들어 대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도 없는 걸 새삼스럽지만 몸으로 또 느꼈다.


갈수록 태산이랄까. 짱이다. 인도에 퍼질고 앉아 진정한 술판이 시작된 것이다. 이름을 다 나열 할 수 없을 정도로 빙 둘러 앉아 막걸리에 오뎅 국물에 퍼 마시기 시작했다. 몇 순배의 술잔이 돌고 난 뒤 어제의 분위기 그대로 노래가 시작되었다. 각 지역을 대표해서 제주도 대표 동주가 ‘민들레처럼’을 불렀고, 광주 대표, 정읍 대표, 부안 대표로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렀다. 박형진 시인이 초대되었다. 자작시 낭송은 술자리를 질적으로 업그레드 시켜주었다. 오뎅을 나누어 주시던 넉살좋은 아주머니는 죽이는 트로트로 우리를 주체를 할 수 없게 했다.


부안 민중의 마음이랄까. 맥주 캔 박스를 가져다주시는 아저씨, 뜨거운 국물을 식기 전에 계속 가져다주시는 아주머니, 귤을 한 봉지 사와 주시는 아주머니, 담배 없냐고 물어 봤는데 옆에 있던 아저씨께서 담배 사 피라며 오천원을 선뜻 건네주신다.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하면 될까.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이 세상에 이런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직도 어리둥절하다. 그 고마움에 창렬 선배님의 제안에 동의했다. “기금 마련해 꼭 부안으로 부치자.”


광장에 세워진 평화 유랑단 차에 그려진 그림이 멋있었다. 아니지 전쟁의 비극이 그려져 있어니 슬프다 라는 표현이 정확하겠지. 잊지 않기 위해 평화 유랑단 차 앞에서 민희 누나가 독사진을 찍어주었다. 돈지 공소로 가기로 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평범한 도로 변했다. 아스팔트 위를 비질하시는 아저씨가 보였다. 더러워지거나 파괴 되지 않길 바라는 부안 민중들의 평범한 행동이 김종규보다 더 부안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돈지 공소로 찾아 갔다. 돈지 공소에서는 벌써 술판이 벌어진 상태였다. 녹색연합 회원들과 풀꽃세상의 풀씨들로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땅과 자유라는 이름으로 단체 인사를 했다. 기억에 남는 건 평화와 새들이, 새아의 인사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촌닭이라서 그런지 서울 사람들을 만나니 움츠려져 구석에 박혀 있었다. 민희 누나는 어느 새 잠을 청하러 갔고, 창렬 선배님과 은경 선배는 격포까지 트로트 아줌마를 바라다 주러갔고, 보경이 누나는 은성풀님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경록 선배는 전국 순회를 하면 술잔을 비웠다. 거리에서 느꼈던 뜨거움은 아니었다. 그래서 인지 몇 잔을 비우고는 각자의 잠자리를 찾아 갔다. 준희 형님은 피곤했는지 구석에 얼굴을 파묻었고, 동주의 단짝도 잠자리로 갔고, 성원이 누님도 방으로 가버렸다. 막판까지 살아 있는 우리 멤버는 나와 여전히 걸걸한 목소리로 앉아 있는 보경이 누나, 은경 선배, 경록 선배였다.


돈지 주민이라고 말하는 조태경 선배님과 광주에서 오신 이민철 선배님과 정읍에서 오신 선배님과 경록 선배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놓치기 싫어서 수첩에 적었다. 그 모습이 신기했는지 조태경 선배님께서 같이 먹지 않고 뭐하느냐고 했다. 영광스럽게도 그 자리에 같이 하게 되었다. 소중하고도 나의 정신을 키울 수 있는 자리였다. 남들 다 잘 때 열심히 공부했다 라고나 할까 ^^


민철이 선배는 동학에서 광주로 다시 광주에서 부안으로 오는 그런 정신적 계승과 민주화 성지로 의미 심장한 곳이기도 하고, 주민투표는 힘을 더하는 일이라고 했던 것 같다. 이 말은 나에게 공부할 거리를 던져 준 것 같다. 술기운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게 논리정연하게 언어 구사를 하는 게 부러워 보였다.


조태경 선배님의 제안으로 환경 청년센터 회원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독기 품은 독사 같은 조태경 선배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주민 자체적으로 엄청 난 의식화가 이루어 졌다며 본인도 놀랐다고 했다. 새벽잠이 없는 동네 할아버지가 그때까지 불이 켜져 있는 가로등을 보고는 노발대발 하며 저러니까 핵폐기장이 필요하다고 떠들어 대는 거라며 스위치를 내렸다고 했다. 이 자리도 파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다시 조태경 선배 집으로 향했다. 어느 새 갔는지 경록이 선배는 없었다. 고아 신세로 따라 갔다.


집까지 걸어가면서 조태경 선배와 단 둘이서 걸었다. 멀찍이 떨어져 따라 오는 이민철 선배와 정읍 선배와 환경 센터 간사 두 분이 있었지만, 조태경 선배가 나에게 힘을 실어 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마 이건 특권 같이 느껴졌다. 어깨동무를 하면서 말했다.
“이 형아는 고퇴다. 남들은 서울대 나온 거로 알고 있는데 아니다. 너는 고졸이라면서”
“예”
“고등학교 때 자살하는 친구를 보면서 더 이상 학교를 못 다니겠더라.”
그래서 내가 이런 질문을 한 것 같았다. 그럼 어떻게 녹색연합 간사로 있었냐고 물었던 것 같았다. 그 뒤에 말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에게 용기를 주는 말을 해 준 것 같았다.


마당에 모닥불을 지폈다. 마른 장작이 없어서 잘 타지는 않았지만 불씨가 사그라들지 않고 분위기처럼 조용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조태경 선배가 직접 삶아 온 쭈꾸미로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다. 이민철 선배와 약속을 했다. 광주에 찾아 가면 재워 주고 망월동과 김남주 시인의 생가를 같이 가겠다고. 호주머니의 동전 몇 닢과 담배만 챙겨 온 거지같은 놈에게 부안은 내게 너무 많은 걸 준 것 같았다. 부안을 오게 된 결정적 계기인 땅과 자유에게도 빚을 진 것 같았다. 이러다 대머리 되는 건 아닌지 걱정 아닌 걱정이 되었다. 이민철 선배와는 달과 별을 보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며 소주잔을 비웠다. 두 번 다시 이런 술자리는 없을 것 같았다. 애인과 같이 앉아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뜻이 맞다 는 이유로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조용히 마시다가 화장실 간다는 핑계로 조용히 빠져 나왔다. 우리 가족들이 있는 공소로 돌아 왔다. 불이 꺼진 거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코 골이 소리에 자장가 삼아 잠을 잤다. 부안의 첫날밤이 격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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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서 [2004.2.12]

여의도에서
- 한-칠레FTA 비준안 통과 반대를 위한 농민대회에 참가하면서


여의도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잠바에 민노당 로고와 글씨가 적힌 아저씨를 봤다. 가는 동안도 혼자가 아니고 함께 가는 것이었다. 여의도가 초행길이라 늦지 않게 제대로 찾아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저 아저씨만 따라 가면 될 것 같아 안심이었다.

빌딩 숲을 지나 드디어 도착 했지만, 나락 한 알 회원님들을 쉽게 만날 수 있을까. 손전화로 물어물어 상봉했다. 풀꽃 세상의 풀씨님들과 같이 있었다. 초면이었지만 그렇게 심하게 낯가림을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수많은 깃발 아래 삼삼오오 깡소주를 틀어넣는 아버지 나이 때의 아저씨들, 일하던 그대로 옷차림을 하고 머리띠를 두르고는 담배를 태우고 있는 할아버지들, 아주머니까지도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불콰하게 달아올라서인지 어깨춤을 추며 축제 같은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다.

솔직히 슬펐다. 울컥 눈물이 쏟아질 뻔도 했다. 단련되지 않는 나약한 모습. 들키지 않았지만 이런 감상에 빠지는 것도 싫다.

그것도 잠시, 행진이다.
따라 걷다 보니 단상 앞에 서 있게 되었다. 물대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짱돌을 쥐고 어연하게 서 있는 사수대의 청년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시장바구니에 돌을 나르던 여학생이 짝사랑했던 애보다 훨씬 더 예쁘게 보였다. 강철대오 같이 측면 방호벽을 대열로 이루고 있던 대학생들이 든든했다.

작으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건, 구호로 고함으로 서 있음으로서 버팅겨 내며, 가사도 모르는 농민가며, 아스팔트 농사를 흥얼거리며 따라 했다. (지금은 귀에 따까리 앉을 때까지 듣고 있습니다.) 초년병이라 장갑도 없이 내복도 안 입고 허술하게 온 결과 춥고, 담배도 다 떨어졌고, 다리도 아팠지만, 동지애로 뭉친 나락 한알님들의 배려 때문에 힘이 생겼다.

김밥에 소주 몇 모금을 털어 넣고, 담배도 몇 모금씩 돌려가며 피웠다. 견디면서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건 국회의원이라는 놈들의 비열함을 몸으로 느끼면서 증오하고 있었다. 개 끌 듯이 질질 끌면서 눈치를 보는 잘난 놈들을 얼굴을 떠올렸다.

환호성과 부둥켜안으면서 비준안 저지를 했다는 승리의 맛.
돌아오는 길이 조금은 가벼웠다. 현장에서 하나 됨의 희열을 느꼈다. 돈 주고는 못 사는 그런 맛이다.

나의 첫 전투적(?) 시위 현장에 나락 한 알님들이 같이 있어서 어떤 빽보다 든든했고, 느꼈고, 배웠습니다. 첫발을 내딛는 나에게 용기와 지혜를 주셔서 고마울 뿐이었다. 첫 마음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투쟁의 현장에서 단련되어 가는 강철 새잎 같은 존재가 되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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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만남, 좋은 사람들 [2004.2.16]

좋은 만남, 좋은 사람들 -대구에서 내 삶은 시작되었다


<녹생평론> 사무실로 가는 내 마음이 설렌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공부를 하는 것이기에 기대 반 걱정 반이다. 하지만 발길을 돌릴 수는 없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찾아가는 내 발걸음을 결코 멈출 수가 없었다. 밤눈이 어두워서인지 몇 코스를 지나왔다. 만촌 네거리에서 걸어 올라왔다. 드디어 <녹색평론> 사무실 앞에 섰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문을 두드렸다.


교재 중 <시적인간과 생태적인간>을 구입하지 못했다. 백수 생활의 비참함(?)일까. 경대 서점에서 눈요기로 대충 보고는 씁쓸한 마음으로 나와만 했다. 이런 날이면 서점 주인이 되고 싶어진다. 습벽인지 구입하지 못하면 제대로 책을 읽을 수가 없다. 게으름 때문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수고로움도 없이 어찌 공부를 하겠다고. 한참을 반성을 하게 되었다.


홍철이 선배의 세심한 배려로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공부할 앞부분 읽게 되어 다행이었다. 어느 정도 모인 것 같았다. 자기소개를 하고나서 본격적으로 배움의 봇물이 터지기 시작했다. 발췌문을 다 읽고 나서 조금은 편안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예습을 철저하게 못 한 결과 수박 겉핥기식인 것 같아 나의 게으름을 한번 더 탓하게 되었다. 뜨겁게 확실하게 완전무장하고 2교시를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이야기가 불붙기 시작했는지 11시가 가까워져 가는데도 식을 줄 몰랐다. 취중진담이 아니라 맨 정신으로 진지하고 치열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는 게 조금은 신기했다. 그런 문화를 많이 접해 보지 못 한 촌놈이기에. 뜨거움이 전이되어서인지 공부를 하고 싶다는 배고픔을 느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뒤풀이가 없을 것 같아 아쉬웠는데 그 열정이 금방 식을 그럴 모임이 아니었다.


이런 자리에 무슨 안주가 있더라도 천하일품이 아닐까. 외로움에 쩔쩔매본 놈은 이런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 수 있으리라. 술기운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하니 몹쓸 병이 도지기 시작했다. 뜬구름 잡는 질문에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인 줄 알면서도 나의 궁금증에 스스로도 두 손 두 발 다 들고 혀를 내두르는 병이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도 횡설수설 주절거리게 만든다. 언젠간 제 풀에 지쳐 하지 않을 때가 있겠지. 징그러운 몹쓸 병.


부안까지 가게 되는 성과를 거두고서 맥주집으로 몸을 옮겼다. 끝까지 살아남은 자의 괴로움 또는 즐거움이랄까. 분위기는 절정에 이르는 것 같았다. 맥주 집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노래가 시작되었다. 준희 형님의 ‘저 창살에 햇살이’, ‘전화카드 한 장’과 성원 누님의 ‘청계천 8가’, ‘민들레처럼’ 그리고 나의 ‘농민가’ 또 다른 가수들의 많은 노래들이 더 이상 맥주집에 앉아 있지 못 하게했다. 흔하게 맛 볼 수 없는 그날의 뜨거움이 그리워진다.


결국 노래방까지 가게 되었다. 경록 선배님의 처절한 몸부림과 나의 짜가 춤을 합쳐 이판사판으로 만들고 말았다. 진이 다 빠져 파김치가 된 기분이었다. 동이 트기 직전에 날뫼터로 향했다. 내일을 위해 자는 게 맞지만 의리 때문에 라면에 소주 한 잔 마시고 안면몰수하고 사랑스러운 책을 베개 삼아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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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무거운 날 [2003. 12. 24]

안산 정확히 말하자면 시흥에 올라온지 이틀째다.

아직은 백수라 일자리를 구해야 된다는 생각에 불안하고 걱정이 앞선다.

소주 한 잔이면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 질것 같다. 안개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지역 특성상 안개가 심하게 끼여있다. 이틀 동안 안개가 낀 흐린 날뿐이었다.


 

잘 할 수있을까?

스스로 물어보지만 잘 모르겠다.

내가 정말 해야 할 일과 먹고 살기 위한 일이 있기에 착잡한 심정이다. 룸메이트인

친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기에 담배와 술을 하지 않는 바른 생활맨이다. 그래서인지

흐트러지는 마음이 다 잡아진다.


 

지리 파악을 위해 두발로 엄청나게 걸어 다녔다. 그래도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지하철 타고 중앙역에 내려 하릴없이 걷다가 서점이 보이길래 서점에서 불안한 내 마

음을 진정시켰다. 책만 보면 왜 이리 편안해지는지.

빨리 일자리를 잡아서 정신없이 일에 몰두해야겠다.

너희들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내 마음도 괜히 무거워 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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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싶은 아침 [2001.04.06]

4월 6일 맑음


 

벚꽃의 화려한 자태와 따스한 봄 향기가 코를 유혹하는 봄날은 어김없이 왔다. 계절의 봄을 인력으로 막을 수 없듯이 국방의 의무 또한 우리들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소 도살장 끌려가듯 하나 둘씩 갔다.


 

날선 잠에 실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노래방 일을 마친 병희와 지친 걸음으로 역으로 갔다. 월급을 아직 받지 않아 편도 차비 700원 밖에 없었다. 미안 했지만 병희한테 신세를 졌다. 혼자 가기 싫어 병희에게 같이 가자고 했고, 영민이 혼자 안 나오면 좀 그렇다고 해서 병희가 전화해서 나오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간만에 그것도 이른 아침에 얼굴을 다 보게 되었다. 병희가 건네준 말보르 레드 담배로 착잡한 마음을 누그뜨렸다.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재훈이 오기 전 반가운 얼굴들을 볼 수 있어 기분이 싱그러웠다.


 

술이 덜 깬 상태로 우거지죽상을 하고 나온 영민이, 산뜻하게 발랄하게 변신하고 나온 미애. 그렇게 못 잡아 먹어 안달이든 상극지간인 성배가 훈련소까지 가고. 하여튼 작은 것에 고마움을 느꼈다.


 

정렴이 생각이 났다. 입소 당일 마중을 못 해준게 씁쓸하게 가슴 한 곳이 시려왔다. 드디어 차 시간은 다 되었고 짧은 대화는 끝이 났다. 그리고 재훈이와 처음으로 한 악수. 착잡함과 무거움이 전해지는 악수였다. 개찰구를 지나갈때 재훈이 어머니 눈가는 붉어졌고, 아버지는 마른 그늘이 얼굴에 져 있었다. 플랫폼에 섰을때 내가 해 준건 손을 흔드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기차는 출발했다.


 

쓸쓸하고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미애는 학교가 있는 부산행 기차로, 영민이는 재훈이 아버지 차로, 병희와 난 버스를 탔다. 중고생들 등교 시간이라 꽉 찬 버스에 앉았다. 병희와 난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차창 밖의 풍경만 멍하니 바라 볼 뿐이었다.


 

교복 입은 중고생들이 부러워 보였다. 집 근처 에서 내렸다. 고교때 국어 선생님을 뜻밖에 마주치게 되었다. 가벼운 인사로 지나쳤다. 멀리서 들려오는 경쾌한 새소리. 내 감정과는 상관없는 듯한 눈부신 햇살 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짧은 시간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을 어떻게 가라 앉힐 수 있을까. 조금은 서러운 듯한 울음을 터뜨릴 수만 있다면 시원 해질 듯한데. 밝음이 살아 숨쉬는 아침에 울음이 어울리지 않는지. 억지로 울 수도 없고 환장 하겠다.


 

재훈이는 군대가고, 버스에 탄 중고생들은 학교에 가고, 그 국어 선생님 또한 학교에 갈 것이고, 난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알 수없는 서러움이 일때면 자책을 하는 버릇에 괜히 초라 해진다.


 

끝내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던 아침. 그렇게 울고 싶었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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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다 일기 [2001.01.10]

어제는 한 이주일만에 처음 노가다 갔다 왔다. 근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재수 옴 붙어 아침부터 청승맞은 겨울비를 맞고 일했다.한 이주동안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에 몽롱한 정신으로 말이다.

여름에는 비를 맞고 일하는게 땡볕보다 낮지만, 겨울에는 할짓이 못 되었다. 운동화는 벌써 물이 차 발이 라면 불어터진것 같은 느낌이었고, 안경에는 빗물이 맺혀 앞을 제대로 볼수가 없었다. 그마나 다행인건 완전 코팅된 고무장갑을 끼고 비옷을 입어서 다행(?)이었지. 내가 하는건 디모도(잡일) 자칭`개잡부'다.

개잡부의 첫째 조건 `발이 열나게 뛰어다녀야 한다는 것.
둘째 `붙임성이 좋아, 20년 차이 아저씨와도 농담 따먹기를 잘 해야 한다는 것.
셋째 힘으로 하는 일에는 자신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근데 중요한 건, 그 조건에 내가 다 불합격이라는 것이다^^;;

어제 한 일은 캇팅기에 물 넣어 주고, 시멘트 바닥 쓸고, 옹벽을 수세미로 씻고, 거적대기 덮고, 잡목 다른 현장에 날러 주고 대충 그런 일을 했다. 캇팅기는 뭐냐하면? (목에 힘을 주면서 ^^) 시멘트 바닥 자르는 기계 있잖아. 한번쯤은 다들 보았으리라 생각된다.

짜증 정도로는 표현 안 될 괴음을 내는 기계,귀가 먹먹해지고, 이게 제정신인지, 그리고 인간이라는 자체가 순간 아주 본질적으로 신경질적이기도 하지.

그와중에도 뇌리를 때린 감상. "저리 단단한 시멘트 바닥도 자르데, 왜 내 가난은 저 기계로 자를 수 없는지." 역시 진절머리 나는 지긋지긋한 생각이 떨어지지 않는구나.

그런 생각도 잠시 현장이 산골이라 4시가 되어도 해가 떨진다. 5시쯤에 `시마이 담배'를 피고 일을 마쳤다.
중요한 건 오늘 좆같은 일당보다 약값이 더 많이 든다는 노가다지만, 겨울비 때문에 더 더욱 감기, 몸살에 처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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