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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을 지키는 사람들 [2004.2.17]

부안을 지키는 사람들


잠결에 들리던 보경이 누나와 누나 친구의 대화가 화두로 돌아왔다. 잠에 빠져있는 놈한테까지 배움을 주는 날뫼터였다. 보경이 누나는 잠자기도 아까워하는 귀신(?)인 것 같았다. 경록이 선배님은 언제 일어났는지 콩나물 해장국을 해먹자고 졸라대고 있었다. 날뫼터의 공용 칫솔로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렸다. 누에 아줌마(?)는 여전히 구석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날뫼터의 책에 잠시 빠져 흠모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피켓을 만들자는 소리에 보경이 누나가 크레파스와 종이를 준비해왔다.(날뫼터의 물건을 공짜로 사용한 것임) 피켓을 스스로 만들 본 적이 없어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머뭇거리면서 누나들이 하는 거 지켜보았다. 홍철 선배님이 제안한 문구를 쓰기로 했다.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었다. 괜히 잘 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크레파스를 잡고 쓰기 시작했다. 이런 글을 적어 부안 사람들을 생각한다는 그 자체가 더 소중하다 라는걸 깨달았다. 경록 선배, 은경 선배, 성원누님, 보경이 누나 정말 정성껏 만들었다. 민희 누나도 오자마자 피켓을 만들었다. 은경 선배님의 수고로 김치콩나물국으로 제대로 해장을 했다. 밥을 먹고 난 뒤 바퀴벌레 한 쌍도 피켓을 깜찍하게 만들었고, 누에는 잠에서 덜 깼는지 철자도 틀린 피켓을 만들었다.


준희 형이 오길 만을 기다렸다. 회비를 만원씩 거두었다. 보경이 누나와 난 빈털터리라서 성원누님한테 빌렸다. 최소의 경비로 최대의 효과를 누리며, 행동으로 보여주는 고르게 가난한 사회가 아닐까 싶다. 준희 형이 왔다. 드디어 부안 자치 공동체로 출발이다. 머리털 나고 처음 전라도로 가는 길이라 나에게는 남들보다 더 의미 있는 떠남이었다. 대구를 벗어가기 전에 전농 깃발이 보였다. 한나라당 지구당이었다. 고속도로로 들어왔다. 미끄러지듯이 달렸다.


어제 그렇게 마셨는데도 피곤한 기색이 안 보였다. 벌써부터 부안의 기운을 이어 받는 듯 했다. 경록 선배를 비롯해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 같이 허물이 없었다. 편안했다. 고작해야 만난지 하루 밖에 안됐는데, 발렌타인 선물치고는 너무 큰 선물이었다. 누에, 동주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갔다. 추풍령 휴게소에 들러 군것질거리를 샀다. 나누어 먹는 재미도 솔찮이 괜찮았다. 민희 누나는 안치환 노래를 틀어 달라면 주문을 했다. 덕분에 좋은 노래도 많이 들었다.


신태인 나들목을 빠져 나오면서 우리는 환호성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부안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일단 백산초등학교로 향했다. 우리 차 앞에 짭새차의 경호를 받으면서 시꺼먼 고급 승용차가 따라 가고 있었다. 아마 김종규가 타고 있을지 모른다는 동주의 흥분된 소리에 나란히 서길 기다렸다. 절묘하게도 나란하게 신호에 걸렸다. 왼편 창문을 열어젖히고 얼굴을 내밀었다. 속 시원하게 욕이라도 한판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꺼먼 승용차에는 운전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싱거운 해프닝이었지만 우리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한바탕 웃음으로 마무리 되었다.


백산초등학교에 도착했다. 투표는 종료 되었고, 확인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은성풀님과 길풀님은 새벽 4시에 기상을 해서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바빴다고 했다. 주민투표라 해서 무시하지 마시라. 아주 꼼꼼하게 그것도 투표 절차 그대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 마을 위원장님께서 도장을 안 찍고 가셔서 전화를 해 다시 오라고 하는 것 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모든 과정을 다 참여 할 수 없어서 아쉬웠지만, 그렇게나마 분위기라도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음 장소로 갈려고 하는 데 누에 때문에 기다려야 했다.


누에 변명이 무슨 이야기인지는 잘 몰라도 대충 그랬던 것 같다. 머리보다 이마가 더 넓은 아저씨와 담배를 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나, 꼬신다나 당최 무슨 얘기인지. 그게 뭐 텐 미니쳐라나. 종잡을 수 없는 누에 아줌마가 나에게 배꼽 빠질 만큼의 웃음을 주어서 그저 고마울 뿐이다.


부안 읍내에 도착했다. 거리에는 노란 깃발 세상이었다. 열우당과 민주당의 돈 냄새나는 노란 스카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부안 민중의 정신이 쓰려있는 그 깃발이 태극기 보다 천 배 만 배는 더 자랑스러웠다. 피켓을 나누어 가지고 움직였다. 일단 밥을 해결하기 위해 접선을 했다. 초면인 주요섭 선배님과 정읍에서 두부 공장인가 하신다는 분을 만났다.


김치찌개에 소주를 거시기 하게 먹었다. 옆 테이블에 앉은 분이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다. 지하 조직이라 했더니 흐뭇해하는 표정이었다. 나가시면서 좋은 말씀을 잊지 않고 갔다. 밥이 나오자 아주 조용히 먹었다. 역시 먹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인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배가 부른지 아니면 에너지 충전이 되었는지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민주 반핵광장으로 향했다. 자리를 비집고 들어 가 앉았다. 우리가 만든 피켓이 본격적으로 발휘할 때가 왔다. 문정현 기자님이 직접 생중계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생중계에 아주머니가 주신 따뜻한 오뎅 국물을 마시는 성원 누님이 찍히기도 했다. 카메라 거부증(?)이 있는 나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한총련 행사 때 산 노란 손수건으로, 잠바에 달린 모자로 눈만 내놓고 피켓을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특이했는지 아니면 일렬로 든 피켓이 괜찮았는지 한동안 서포라이트를 받았다. 기자들 때문에 행사 장면이 안 보인다며 나와 라는 소리도 들렸다. 어쩌면 그건 기자들을 신봉하는 우리와는 다른 나름대로의 의식이 있는 행동의 한 가지 일수도 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르익어 가는 열기는 한바탕 어울림으로 최고조에 이르렀다. 신명나는 풍물패 때문인지 병이 도지는 것 같았다. 짜가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땀이 나도록 흔들다가 이제는 손에 손 잡고 강강수월래가 시작되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생판 모르는 사람의 손을 잡고 더 크게 더 크게 큰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이 신명과 재미는 돈 주고 가는 나이트클럽과 정치인들이 보내주는 공짜 온천 관광으로 버스 안에서 흔들어 대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도 없는 걸 새삼스럽지만 몸으로 또 느꼈다.


갈수록 태산이랄까. 짱이다. 인도에 퍼질고 앉아 진정한 술판이 시작된 것이다. 이름을 다 나열 할 수 없을 정도로 빙 둘러 앉아 막걸리에 오뎅 국물에 퍼 마시기 시작했다. 몇 순배의 술잔이 돌고 난 뒤 어제의 분위기 그대로 노래가 시작되었다. 각 지역을 대표해서 제주도 대표 동주가 ‘민들레처럼’을 불렀고, 광주 대표, 정읍 대표, 부안 대표로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렀다. 박형진 시인이 초대되었다. 자작시 낭송은 술자리를 질적으로 업그레드 시켜주었다. 오뎅을 나누어 주시던 넉살좋은 아주머니는 죽이는 트로트로 우리를 주체를 할 수 없게 했다.


부안 민중의 마음이랄까. 맥주 캔 박스를 가져다주시는 아저씨, 뜨거운 국물을 식기 전에 계속 가져다주시는 아주머니, 귤을 한 봉지 사와 주시는 아주머니, 담배 없냐고 물어 봤는데 옆에 있던 아저씨께서 담배 사 피라며 오천원을 선뜻 건네주신다.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하면 될까.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이 세상에 이런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직도 어리둥절하다. 그 고마움에 창렬 선배님의 제안에 동의했다. “기금 마련해 꼭 부안으로 부치자.”


광장에 세워진 평화 유랑단 차에 그려진 그림이 멋있었다. 아니지 전쟁의 비극이 그려져 있어니 슬프다 라는 표현이 정확하겠지. 잊지 않기 위해 평화 유랑단 차 앞에서 민희 누나가 독사진을 찍어주었다. 돈지 공소로 가기로 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평범한 도로 변했다. 아스팔트 위를 비질하시는 아저씨가 보였다. 더러워지거나 파괴 되지 않길 바라는 부안 민중들의 평범한 행동이 김종규보다 더 부안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돈지 공소로 찾아 갔다. 돈지 공소에서는 벌써 술판이 벌어진 상태였다. 녹색연합 회원들과 풀꽃세상의 풀씨들로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땅과 자유라는 이름으로 단체 인사를 했다. 기억에 남는 건 평화와 새들이, 새아의 인사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촌닭이라서 그런지 서울 사람들을 만나니 움츠려져 구석에 박혀 있었다. 민희 누나는 어느 새 잠을 청하러 갔고, 창렬 선배님과 은경 선배는 격포까지 트로트 아줌마를 바라다 주러갔고, 보경이 누나는 은성풀님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경록 선배는 전국 순회를 하면 술잔을 비웠다. 거리에서 느꼈던 뜨거움은 아니었다. 그래서 인지 몇 잔을 비우고는 각자의 잠자리를 찾아 갔다. 준희 형님은 피곤했는지 구석에 얼굴을 파묻었고, 동주의 단짝도 잠자리로 갔고, 성원이 누님도 방으로 가버렸다. 막판까지 살아 있는 우리 멤버는 나와 여전히 걸걸한 목소리로 앉아 있는 보경이 누나, 은경 선배, 경록 선배였다.


돈지 주민이라고 말하는 조태경 선배님과 광주에서 오신 이민철 선배님과 정읍에서 오신 선배님과 경록 선배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놓치기 싫어서 수첩에 적었다. 그 모습이 신기했는지 조태경 선배님께서 같이 먹지 않고 뭐하느냐고 했다. 영광스럽게도 그 자리에 같이 하게 되었다. 소중하고도 나의 정신을 키울 수 있는 자리였다. 남들 다 잘 때 열심히 공부했다 라고나 할까 ^^


민철이 선배는 동학에서 광주로 다시 광주에서 부안으로 오는 그런 정신적 계승과 민주화 성지로 의미 심장한 곳이기도 하고, 주민투표는 힘을 더하는 일이라고 했던 것 같다. 이 말은 나에게 공부할 거리를 던져 준 것 같다. 술기운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게 논리정연하게 언어 구사를 하는 게 부러워 보였다.


조태경 선배님의 제안으로 환경 청년센터 회원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독기 품은 독사 같은 조태경 선배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주민 자체적으로 엄청 난 의식화가 이루어 졌다며 본인도 놀랐다고 했다. 새벽잠이 없는 동네 할아버지가 그때까지 불이 켜져 있는 가로등을 보고는 노발대발 하며 저러니까 핵폐기장이 필요하다고 떠들어 대는 거라며 스위치를 내렸다고 했다. 이 자리도 파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다시 조태경 선배 집으로 향했다. 어느 새 갔는지 경록이 선배는 없었다. 고아 신세로 따라 갔다.


집까지 걸어가면서 조태경 선배와 단 둘이서 걸었다. 멀찍이 떨어져 따라 오는 이민철 선배와 정읍 선배와 환경 센터 간사 두 분이 있었지만, 조태경 선배가 나에게 힘을 실어 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마 이건 특권 같이 느껴졌다. 어깨동무를 하면서 말했다.
“이 형아는 고퇴다. 남들은 서울대 나온 거로 알고 있는데 아니다. 너는 고졸이라면서”
“예”
“고등학교 때 자살하는 친구를 보면서 더 이상 학교를 못 다니겠더라.”
그래서 내가 이런 질문을 한 것 같았다. 그럼 어떻게 녹색연합 간사로 있었냐고 물었던 것 같았다. 그 뒤에 말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에게 용기를 주는 말을 해 준 것 같았다.


마당에 모닥불을 지폈다. 마른 장작이 없어서 잘 타지는 않았지만 불씨가 사그라들지 않고 분위기처럼 조용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조태경 선배가 직접 삶아 온 쭈꾸미로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다. 이민철 선배와 약속을 했다. 광주에 찾아 가면 재워 주고 망월동과 김남주 시인의 생가를 같이 가겠다고. 호주머니의 동전 몇 닢과 담배만 챙겨 온 거지같은 놈에게 부안은 내게 너무 많은 걸 준 것 같았다. 부안을 오게 된 결정적 계기인 땅과 자유에게도 빚을 진 것 같았다. 이러다 대머리 되는 건 아닌지 걱정 아닌 걱정이 되었다. 이민철 선배와는 달과 별을 보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며 소주잔을 비웠다. 두 번 다시 이런 술자리는 없을 것 같았다. 애인과 같이 앉아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뜻이 맞다 는 이유로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조용히 마시다가 화장실 간다는 핑계로 조용히 빠져 나왔다. 우리 가족들이 있는 공소로 돌아 왔다. 불이 꺼진 거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코 골이 소리에 자장가 삼아 잠을 잤다. 부안의 첫날밤이 격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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