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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칫날 [2004.2.17]

잔칫날

이틀 연속으로 새벽까지 술을 마셨지만 괜찮았다. 이 정도로 마시면 변기 잡고 울거나, 약 먹고 종일 누워있으며 앓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다. 푸시시한 모습으로 일어난 오전이 상쾌했다. 술이 덜 깨서 그런지 괜히 기분이 업되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돈지 땅의 기운을 받아서 일거라 믿어진다. 실상사 졸업식 때문에 민희 누나는 아침에 갔다고 했다.

민희 누나 대신 민철 선배가 부안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일주일치 똥을 이제야 돈지의 힘을 받아서 용을 쓰는 보경 누님 때문에 게으른 출발을 했다. 보경 누님의 빨간 선글라스가 언발란스였지만 미인은 뭘 해도 예쁘니까 괜찮았다.^^ 해안선을 따라 물 흘러가듯이 가고 있었다. 갯벌에 솟은 솟대가 보였다. 길가에 차를 세웠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의미심장하고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었다. 비싼 돈 주고 유럽의 미술 기행보다 이 곳에 와서 파괴되어 가는 현장에서 가슴 아파하길 간절하게 기도해 본다. 장승과 솟대 앞에서 사진 한판 때리고 출발했다.

새만금 방조제 위를 달렸다. 차량 통제 지점에서 멈추었다. 해괴망측한 땅에 발을 디뎠다. 정말로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다. 자연에 맞짱 뜨자고 도전장을 낸 놈들은 똑똑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10년도 못 가 쌍코피 터지고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20년 안에는 능지처참을 당하리라. 아무것도 아닌 내가 장담하리라. 우리가 서 있는 방조제 앞에서는 덤프트럭이 똥 누듯이 돌을 쏟아 붓고 있었다. 암담할 뿐이다. 관광버스도 보였다. 뭘 보러 왔는지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웃으면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었다. 땅과 자유의 학생(?)은 그럴 수없다는 듯이 주먹을 치켜들고 구호도 외치고, 어깨동무를 하고 걸어가며 구호도 외쳤다. 조금은 어설펐는지 몰라도 하나 되어 싸우겠다는 단결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박영희 시인의 시 <곰소 잔디다방>에서 보면 채석강 갔다가 언 몸 녹이고 싶거든 곰소의 잔디다방을 가보라고 했다. 육십년대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곰소 잔디다방을 방문하고 싶었거늘 배신의 똥줄을 때리고 어찌 갈 수 있을까. 채석강과 곰소를 뒤로 한 채 달려갔다. 우리의 차를 멈추게 한 풍경이 있었다. 아파트 베란다 마다 걸린 노란 깃발과 아파트 벽면에 걸려 있는 대형 걸개그림이 브이레크를 밟게 했다.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80년대의 대학교 안에나 있을 법한 것이 손바닥만한 촌구석에 걸려 있다는 사실은 뭘 말해주는 것일까.

최근에 나온 산문집 <모항 막걸리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 의 저자인 박형진 시인 집에 도착했다. 누에 아줌마(?)의 첫사랑이라 우기는 집에 도착했을 때 누에 아줌마(?) 심정은 어떠했을지 괜히 궁금해진다.^^; 질펀하게 막걸리 마시며 안주의 맛을 못 본 게 아쉽지만(그것까지 바란다면 무례일수도 있겠지.) 식은 밥에 김치와 동치미를 내주시는 풋풋함에 그저 좋았다. 그리고 고마웠다. 동치미 무시 두 개를 맛있게 돌려 먹는 모습에 감탄을 하고 말았다. 땅과 자유 학생(?)들이 너무 맘에 들었다. 간접 키스니, 남이 입에 댄 건 아무것도 먹지 않는 깔끔함의 극치를 이루는 세상에 거리낌 없이 쥐가 파먹은 듯한 무시를 잘도 베어 먹었다. 간접 키스를 마다할 내가 아니지 그저 고마운 마음으로 먹었다. ^^ 이렇게 살고 싶다. 조금은 허술하게 조금은 더럽게(결코 더러움이 아닌데) 살고 싶다. 뒤뜰의 나무토막 의자와 장독대와 뒷간으로 가는 길과 뒷간 그리고 야트막한 산이 어우러져 아늑했다.

부안 성당에 도착했다. 식당으로 향하는 데 보경이 누나 혼자 가방도 내팽개친 채로 아저씨들과 함께 새끼줄을 꼬기 시작했다. 잘 꼰다며 말하더니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게 꼬올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도 못 하는데 그런 거 보면 대단하다. 식당 안에 있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았다. 종이컵도 노란 색에 핵 없는 세상이라 적혀 있었다. 투쟁의 의지가 어디까지 인지 알 수 있는 증거물이라 생각된다. 성당 앞에 있는 타임캡슐의 구루마 새끼줄에 우리의 마음과 함께 천원을 끼워 넣었다.

이제는 잔칫집 마당으로 변해 버린 반핵 민주광장에 들어섰다. 경록 선배님과 은경 선배님의 (성원 누님 말대로) 혜안이 또 다시 발휘되는 곳이었다. 오월 광주의 시민군 트럭에 주먹밥이며 물을 넣어 주는 아주머니처럼 해방을 선언한 부안에서는 배 터지도록 먹을 수 있었다. 부안에는 거지가 있을 수 없었다. 은경 선배와 보경이 누나와 나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국밥을 받아들고 그 자리에 털석 주저앉아 얼큰한 국물에 속이 다 풀렸다. 은경 선배께서 손수 입에 넣어 주신 젓갈은 정말 입안에 쫙 달라붙었다. 전라도의 깊은 맛은 한마디로 ‘죽인다.’ 어찌 우리끼리만 먹을 수 있을까. 또 다시 받아왔다. 부침개와 막걸리, 김치, 떡으로 대낮에 또 술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보경이 누나는 목마르다며 다른 자리에 가서 맥주로 입가심을 하고 왔다고 했다. 대단한 붙임성인 것 같았다. 이런 세상이면 얼마나 좋을까. 비록 막걸리 몇 잔이 들어갔지만 대낮에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 사는 게 별거 아니라고, 이렇게 사는 거라고 출세가도를 달리는 내 친구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신경림의 시 ‘파장’이 생각난다. ‘못 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타임캡슐 구루마가 풍물패를 앞세워 들어오고 있었다. 흥을 돋우는 풍물패에 한바탕 흔들었다. 은경 선배가 높이 든 피켓 주위에 보경이 누나와 내가 있었다. 준희 형님은 사진 찍는다고 막걸리도 못 먹고,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타임캡슐 항아리에 들어가는 물품들이 보잘 것 없는 것일 수 있지만, 부안 전사들에게는 피눈물 겨운 소중한 것들이었다. 헤어진 운동화, 투쟁기록 영상 시디, 반핵 조끼와 잠바등 온갖 반핵용품들로 항아리에 넣어졌다. 8개월 전만 해도 시골의 순박한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들을 전사로 만들어 버린 종규와 핵폐기장 그리고 위정자들은 좋은 말할 때 지구를 떠나라. 부안 출정가를 따라 불렀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주머니를 보았다. 내가 어찌 저 한을 알 수 있을까. 부안 자치 공동체 만세!

쉽게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느릿느릿 걸었다. 풍물 소리를 뒤로하고 승합차로 돌아 왔다. 민철 선배는 광주로 가야 하기에 여기서 작별을 했다. 광주를 찾아 가겠는 약속을 고이 간직한 채로. 선물로 반핵 깃발 두개를 얻어 왔다. 차를 타기 전에 정리 구호를 했다. 역시 땅과 자유였다. 출발을 선언했는데 보경이 누나가 브레이크를 걸었다. 내팽개치고 새끼줄 꼬면서 챙기지 않은 가방을 찾으러 성당에 들렀다. 진짜로 간다. 부안을 벗어나기도 전에 잠에 빠졌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창렬 선배만 외로이 눈을 뜨고 있을 뿐이다. 몸살을 할 것 같은 기분이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배움을 받아서 머리 속을 교통정리 하려면 며칠은 독수공방해야 될 것 같았다. 그래 이런 몸살이라면 주기적으로 앓았으면 좋겠다. 이만한 공부가 또 어디 있을까 싶다. 이런 인연을 맺어준 땅과 자유의 선배님들께 큰 절을 올립니다.

창렬 선배님 수고하셨습니다. 먼 길을 운전한다는 게 호락호락한 일이 아닐 터인데, 운전 때문에 제대로 편히 술도 못 마시고, 부안을 편히 갈 수 있었던 건 창렬 선배님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은경 선배님 날뫼터에서 밥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경록 선배님의 허탈한 웃음과 가식 없는 행동이 너무 좋습니다.

준희 선배님의 빼어난 목소리로 부른 노래는 아직도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조만간에 술이라도 한잔 하면 어떨까 합니다. ^^

성원 선배님과는 많은 이야기를 못 해 본 것 같네요. 미인 앞에서는 눈도 못 마주치는 숙맥이라서 ^^

보경 선배님은 선머슴아 같아서 좋네요. ^^ 정말 친누나 같이 편해서 좋아요. 조심하세요. 저 왕 빈대라서.

민희 선배님도 많은 이야기를 못 해 봐서 아쉽네요. 평화 유랑단 차 앞에서 사진 찍어줘서 고마워요.

지현이는 서른에 가까운 누나인줄 알았는데 동갑이라니 ^^;; 열린 글터 가면 책이나 빌려주라.

동주+남희 바퀴벌레라고 하는데 왜 바퀴벌레라고 하지. 형광등이라서 ^^;; 손잡고 다니는 모습이 좋기만 하더라. 사실은 배가 좀 아프지만 ^^ 지구 연대 동방 자주 가서 신세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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