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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과거 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협의회 서울대회의 숨은 이야기 [2004. 5]


일본의 과거 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협의회 서울대회의 숨은 이야기

 

 

5월 20일부터 23일까지 열리는 이번 대회를 치루기 위해서 전날 용수 할매와 분이 할매와 같이 먼저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수습 닦지를 떼기도 전에 이런 큰 대회를 맞이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부딪쳐야 하는 일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헤딩하자.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촌닭의 다짐은 다져지고 있었다.

 

608차 정기수요시위에 참가했다. 일장기가 펄럭이기는 일본대사관 앞에서 할머니들과 바위처럼을 부르며 결의를 다졌다.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대회 사무국인 교과서운동본부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은 대회 준비로 아주 분주했다. 등달아 나도 바쁜척하게 되었다. 이름표를 정리하고 서울여성프라자로 옮길 비품을 체크하고 한숨 돌렸다. 처음 보는 사무국 사람들과 제대로 통성명 할 짬도 없이 일은 바빴다.

 

4일 동안 대회가 열릴 장소인 서울여성프라자에 도착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바로 임시 사무국이 설치되었다. 곧바로 사무국의 일꾼들이 다 모여 회의가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일을 해온 게 아니니 조금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진정한 활동가로서 성장하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게 있을거라 믿고 피가 되고 살이 될 소스를 꼼꼼히 필기했다. 몇 시간 동안의 회의가 끝나고 나의 임무를 재확인하면서 자정을 훨씬 넘기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드디어 3박4일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몰래 숨어서 달콤한 잠이라도 잤으면 하는 유혹을 떨치기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나라도 놓기 싫다는 욕심 때문에 힘에 부치지만 끝까지 하려고 했다.

 

첫날 아침부터 로비에서 전시물 설치에 정신을 빼앗겼고, 오후에는 기자회견장 접수대에서, 저녁에는 환영만찬 세팅에 그리고 다음날 개회식장 세팅에 힘을 다 빼고서야 숙소로 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숙소에서는 당일 평가회의가 기다리고 있었다. 교과서운동본부의 최형우 선배, 나눔의 집에 있었던 변상철 선배와 같이 일하고 난 뒤 담배 한 대 피는 맛도 꽤 괜찮았던 것 같았다.

둘째날은 개회식장 무대 대기실에서 우리 국장님의 지시에 따라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조금은 긴장한 채로 움직였다. 개회식과 기조발표가 끝난 뒤 피해자 증언이 있었다. 통역기를 귀에 꽂은 채로 움직였다.

 

중국에서 오신 강근복 할아버지의 남경대학살 증언은 끔찍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일본병사는 어머니를 강간하려다 반항하니 총으로 쏘았고, 11살의 둘째 누나를 강간하려다 도망치니 붙잡혀 군도로 머리부터 반으로 쪼갰습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증언을 겨우 마쳤다. 소름이 끼쳤다. 필린핀에서 오신 암모니타 할머니의 말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내가 부끄러웠다. 증언 말미에 분단된 한반도에서 서로 싸우지 말고 제발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는 당부를 하셨다.

 

북측에서 오신 리상옥 할머니의 증언은 치가 떨렸다. 죽어서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사죄를 받아낼 것이다 라며 울분을 터트려 대회장 내를 숙연하게 했다. 통역기로 들었지만 겨우겨우 분을 삭이면서 원활한 대회 진행을 위해 회의장을 지켰다. 자정까지 다음 날 있을 분과토론 준비 자료를 정리했다.

 

셋째날은 행사장 준비를 다 하고, 사진 찍으러 4개의 분과토론장을 오가며 바쁜 척을 했다. 국포모(국적포기 필요없는 나라만들기 모임)의 짱인 보나선배와 정희선배와 우리의 요구를 담은 문구를 옷에 달고 다녔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니 밥 때를 놓쳐 형우선배가 사주신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공식 행사 끝을 알리는 폐회식에서 강만길 선생님의 정곡을 찌르는 폐회사는 강렬했다. “일본인들은 과거청산을 위한 투쟁을 얼마만큼 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일본의 양심세력은 대단히 귀중하지만 우리의 눈에는 하나의 ‘장식품’으로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환송만찬장으로 옮겨 조금은 맘 편히 저녁을 먹었다. 북측의 계성훈 서기장의 노래 솜씨는 정말로 가수 뺨치는 솜씨였다. 선배들의 제안으로 즉석으로 몸짓과 노래를 맞춰가며 한판 놀 준비를 했다. 떨리는 마음 진정시키기 위해 소주잔을 들이키기도 했다. 기다리던 우리의 차례가 왔다. 반갑습니다와 서울에서 평양까지를 마음껏 부르며 흔들었다. 업된 기분을 숙소로 돌아와 시원한 맥주로 식혔다.

 

마지막 날 난 총련분들과 함께 서울 나들이 함께 하게 되었다. 덕분에 촌닭 서울 구경 확실하게 하는 기분이었다. 버스로 눈요기를 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내려 나보다 더 많이 아시는 총련분의 설명을 들었다. 무식은 죄가 아니라고 했지만 많이 부끄러웠다. 나들이를 마치고 남북교류회장으로 옮겼다.

 

대구행으로 가는 막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쉬웠다. 같이 뒤에서 일을 했던 선배들과 짧았던 시간이었지만 소중한 만남이었다. 자료집 인사말에 보면 “피해자에게 ‘위로와 격려’를, 활동가에게 ‘연대와 교류’를 이라는 문구가 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이 말은 맞는 것 같다. 활동가에 ‘연대와 교류’를, 풀어서 말하자면 이 투쟁이 있어서 함께할 동지를 만났다 라는 것이다.

 

어떤 대회, 행사나 그렇지만 실무를 보는 활동가에게는 회의장 앉아 필기를 하며 발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발로 뛰며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라 믿는다. 투쟁의 깊이를 더 해가는 공부는 골방에서 집중과 반성으로 하면 충분하다고 본다. 하여튼 나에게 있어서 이번 대회는 보이지 않는 성장을 가져다주었다. 쌓이고 쌓이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투사가 되리라 믿는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를 가르쳐 준 이번 대회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 시민모임7월 소식지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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