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이정찬 시의원 '희망을 쏘다' 출판기념회

                      -13호 밖에 살지 않는 외딴 섬마을 출신 소년이 던지는 희망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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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찬 시의원(57년생, 양천구 제 2선거구)이 그의 저서 ‘희망을 쏘다’를 가지고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양천문화회관에서 열린 출판기념회는 1층만 550여석인 대형 회관으로서 전 좌석을 가득 메우는 대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오늘(25일) 의정보고회를 겸해서 열린 이정찬 의원의 ‘희망을 쏘다’ 출판기념회는 그동안 양천정보신문과 서울남부신문의 CEO으로서 뿐만 아니라 특유의 친화력과 성실함과 따뜻한 봉사정신이 결합돼 이뤄낸 성과다. 자발적으로 모여든 축하객들의 발걸음을 보아서 그렇고, 스스럼없이 다가와 막역지우처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민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그랬다. 마치 마을 회관으로 모여든 오빠, 누나, 삼촌, 이모, 작은 아버지, 조카들처럼 다함께 어울려서 치르는 마을 잔치마당 같았다.  

이정찬 시의원은, 전남 완도의 아주 작은 섬마을에서 태어났다. 가구수가 13호 밖에 안 되는 곳에서 그것도 10형제 중 막내로. 그의 형과 누나들이 하나 둘 대처로 떠났던 것에 비해서 막둥이였기에 이정찬은 홀로 끝까지 남아 부모님과 같이 살게 되었다. 그런데 동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과정이 닥치자 이웃에 있는 큰 섬으로 통학하는 처지가 됐다. 통학 길이 장난이 아니었다. 배를 타고 차를 바꿔타면서 가야하는 험로였기 때문이다. 이정찬은 하는 수 없이 잠시 학업을 중단하거 만다. 그러나 이정찬은 이후 검정고시를 거쳐서 방송통신대학을 졸업한다. 그러고나서 연세대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를 따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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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그의 삶은, 굴곡이 심한 편이었다. 결코 순탄한 인생은 아니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런 점이 오늘 날의 그를 있게한 밑거름이 되고 자산이 된 셈이다. 남들과 다른 차별화 되는 점이 오히려 그만의 강점으로 작용하여 그를 경쟁력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여기에 성실하고도 따뜻한 마음까지 보태저 그만의 특이한 인생스토리를 지닌 사나이로 다듬어졌다/

이정찬에 대해서 좀 더 말해본다. 그의 인생에서의 첫 번째 시련은 장어 잡이를 나갔다가 모진 풍랑을 만나서 12살 때 죽을 번한 일이다. 두 번째 시련은 교통사고, 세 번째는 청산면의 여서도 앞바다에서 맞았다. 또 네 번째는 22.000V의 어마어마한 감전 사고를 겪은 일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4번의 죽을 고비에서 운 좋게 살아났다. 그는 이런 자신의 삻을 은혜로 환원시키기 위해 이웃에 대한 봉사활동에 눈을 뜨게 된다. 목적 있는 삶인 셈이었다. 역경과 시련을 딛고 일어선 인간승리의 전범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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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용모는 시원하고 단정한 느낌을 준다. 숱 많은 머리를 올백으로 빗어 넘긴 헤어스타일과 깔끔한 옷매무세가 한데 어울려서 조화를 이룬 때문이다. 여기에 빠르고 정확한 발음이 더해저 샤프한 도시남의 인상을 형성한다. 더해서 촌철살인의 말솜씨까지 겸비함으로서 이정찬 의원 특유의 실루엣을 완성한다. 한마디로 올백머리 50대 아이돌, 이것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무엇이 이정찬 의원을 이토록 깔끔하고도 단정한 사나이로 다듬었는지 모른다. 네 번 죽다가 살아난 그의 특별한 이력에서 조금은 찾을 수 있으려나? 섬마을 출신의 가난한 소년이었기에 동화 속에 나오는 ‘성냥팔이 소녀’에게조차 동병상린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여린 감성의 소유자로 성장할 수 있었으리라. 타향살이를 하면서 눈물 젖은 빵을 먹었기에 때로는 자신이 혹시 미운오리새끼가 아닐까 하는 낭패감도 맛봤지만, 자신의 역경과 시련마저도 독특한 장점으로 승화시켜 스스로 아름다운 백조가 될 수 있었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 앞에 좋은 모습으로 우뚝 선 것이다.

그는 잘 안다. 시의원은 혼자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와 오랜 동안 소통하며 알고 지낸 지역주민들의 후원과 응원 없이 된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그렇다.

부산의 철근공장에서 허기진 배를 달래면서 철근 일을 했는가 하면, 부천의 고무공장에서는 신발 만드는 일을 했다. 한때는 영업사원을 전전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늘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았기에 세상에 사는 동안에 “난 선한 일을 하고 가야지!”하는 결심을 늦추지 않았다. 결국 정직과 선한 마음과 한결 같은 용기가 오늘 날의 그를 만들었다.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당선을 위해서 혹은 재선을 위해서 뛸 것이다. 이정찬 의원도 그렇다. 아니 그는 재선을 바라고 있는 사람이다.

 

6월 지방선거를 목표로 하고 있는 모든 이에게 말한다. 나서라! 외쳐라! 뛰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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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6 14:50 2014/02/26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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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무장투쟁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 흉상 제막식

                                     -출생 터인 서울 중구 명동 YWCA 건물 자리인 표지석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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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 선생 일가를 아는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6형제 전원과 그 일가족 50명을 이끌고 만주 땅으로 망명을 결행한 분이다. 목적은 오로지 전 재산을 처분한 군자금으로 항일무장투쟁운동을 하여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우당 선생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어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이 아닌가?”하고 일갈했던 분이다. 신분과 재산과 인생 모두를 조국의 독립 하나만을 위해서 여한 없이 바친 거룩한 삶이었다.

서릿발 같이 매섭고 일송정 푸른 솔처럼 변치 않는 자주독립운동의 기개를 세운 때가 서른 살 청년 때였다. 이회영 선생은 물었다. “한 번의 젊음을 어찌할 것인가”고. 예순 여섯의 나이로 옥사하기까지의 삶으로 선생은 자신의 물음에 답했다. 몇 대가 누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다 바쳐 칼바람 에이는 압록강의 물살을 가르며 국경의 밤을 그렇게 넘었다.

우당선생은 1905년에 울사늑약 체결의 음모를 저지시키고 무효화 하는 운동을 주도하였고, 고종황제를 설득하여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파견을 주장하여 관철시킨 바 있다. 그러나 헤이그밀사 사건은 실패로 돌아가고 기어코 한일합방이라는 이름하에 나라가 망하자 6형제 전원과 일가족 50여 명이 전 재산을 정리하여 망명을 떠난다.

우당 이회영선생은 만주 땅에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개소하였고, 1912년에는 ‘합니하’로 이전하여 본격적인 무관학교 교육을 시작한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할 때까지 독립군 간부 3,500여명을 양성하는 성과를 이루고 독립전쟁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광복군을 창설하는 밑거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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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더불어 선생이 야심차게 추진한 일은 고종황제를 설득하여 망명계획을 추진하는 일이었으나 고종황제는 독살되고, 그 여파로 3.1운동이 일어난다. 그러고 상해 임시정부가 구성되어 우당 선생은 의정위원으로 참여한다. 이후 아나키즘 운동과 ‘의열단’ 조직을 지원함과 동시에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여 흑색공포단을 산하에 두고 의혈투쟁에 매진한다.

그러나 선생의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서 일경의 추적은 날로 심해진다. 우당선생이 중국의 항일부대와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하도록 현지 지도 차 잠입하던 중이었다. 일제는 대련에서 우당선생을 체포되어 여순 감옥으로 이송한다. 선생은 이곳에서 모진 고문과 굶주림으로 순국하는데 이때가 선생의 나이 66세인 1932년 11월 17일의 일이었다.

올해는 선생이 돌아가신지 82년 되는 해다. 오늘(24일 오후 4시) 비로소 고인의 흉상제막식을 하게 됐다. 이는 우당기념사업회에서 끈질기게 추진한 결과였다.

아나키즘운동과 무장 항일투쟁을 선도했다 하여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날엔 자주국방이 없는 독립이라는 것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만큼이나 허황된 구호요, 거짓되고 망령된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시대적 평가가 이루어지고, 선생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한 상황이 됐다. 이에 홍일식 우당기념사업회장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선생의 흉상제막 건에 대한 예산을 중구청에 요청한다. 오늘 이렇게 우당선생의 흉상 제막이 그 결과다.

참고로 흉상이 세워진 자리는 우당 이회영 선생의 6형제가 태어난 생가 터라고 한다. 명동에 있는 YWCA 건물자리다. 흉상은 건물의 정문 표지석공원에 자리를 잡았다. 박유천 광복회장, 이종찬 전 국정원장, 안중현 서울지방보훈청장, 최창식 중구청장, 우당선생의 손자이자 민주당 4선 국회의원인 이종걸 의원과 유족들과 축하객 300여명이 모여와 자리를 빛내줬다.

우당 이회영 선생님, 당신을 기립니다. 머리 숙여 기립니다. 당신은 진정한 항일 독립투사이시며 위대한 선각자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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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5 01:03 2014/02/25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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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치동계올림픽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피겨스케이팅에서 김연아가 은메달을 딴 것을 두고 부당하다며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저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보다 냉정한 입장입니다. 김연아가 메달을 따면 좋지만 못 따도 서운할 것도 없는 사람이지요. 갈라 쇼에서 러시아 선수가 넘어졌건 제 견해는 1.2차 경기인 쇼트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 부분에서 본 인상을 피력해보겠습니다.

그런데 편파판정이라면서 분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어떤 점에서 그럴까요? 이번 소치올림픽의 피겨스케이팅 경기를 큰마음 먹고 지켜보았습니다. 하여 이튿날 한 지인으로부터 ‘금메달을 못 땄다.’면서 전화가 결려왔을 때 김연아가 금메달을 따지 못한 이유를 제 나름대로는 피력해줬습니다. 이에 지인은 피겨스케이팅 재방송을 다시 봤던 모양입니다. 그러고 나서 전화를 또 했더군요. 이번에 김연아가 금메달을 따지 못한 점에 대한 저의 관전평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입니다.

첫째 김연아는 솔직히 좀 떨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소심하고도 안전 위주의 경기를 한 것이지요. 본인도 고백했습니다. 경기 직전 연습에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리가 올라가지 않아서 점프를 하지 못했다.”고요. 모든 선수들이 그렇겠지만 김연아 선수도 점프 장면에서 엉덩방아를 찧을까봐 두려웠을 것입니다. 엉덩방아를 찧으면 메달 권에서 멀어질 뿐만 아니라 국제망신인 거지요.

사실 이 부분에서 대회의 승패가 결정되기 때문에 메달 권에서 멀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국내 펜들을 대할 면목도 없고, 자신의 피겨 인생의 마지막 국제대회를 엉덩방아로 마감했다는 트라우마가 남는 판입니다. 선수에게는 이 두려움이 무엇 보다 컸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될까봐 초조한 티가 역력해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박력과 기세에서는 러시아 선수에 뒤지고, 노련함과 유연함에서는 이탈리아 선수가 더 나아 보였습니다. 1차 경기에서도 양 선수에 비해서 그리 특출 난 점이 없었고, 대회 이틀 째 날 프리스케이팅에서의 경기내용을 보면 김연아는 점프가 6개이고 상대선수는 점프가 7개였습니다. 여기다 착지도 그리 매끄럽지는 못했습니다. 양쪽 선수에 사이에서 그 어떤 차별성이나 특출 나게 우월한 점은 없었다고 봤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김연아 선수는 이런저런 걱정과 강박관념이 상당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에게서 발산되는 기(氣)는 그리 활달하지 못했고, 착하고 얌전해보이긴 하지만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워 보였습니다. 어떤 이는 열정이 없어보였다고 말했습니다. 김연아의 이런 심리를 귀신같은 국제심판들이 알아채지 못할 리는 없었겠지요. 한 수 지고 들어갔던 겁니다. 이 부분에 많은 시사점이 있습니다. 척 하면 삼천리요. 노회할 뿐만 아니라 눈치가 100단 쯤 되는 국제심판들이 곧 은퇴할 선수인 김연아가 무엇이 그리도 예뻐서 너도나도 점수를 후하게 줬겠습니까? 앞장 서서 그녀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주는 일을 하겠습니까? 피겨스케이팅의 흥행과 장래를 위해서도 타 종목과의 경쟁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김연아의 의상도 인상적이지 않았습니다. 우중충하고 별 볼일 없었습니다. A급은커녕 B급이라 말하기도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심판과 관중들의 눈은 물론 대회장을 빛낼 만큼의 매력적인 요소가 그 어디에 있었던가요. 그녀에게서 풍겨 나오는 포스도 그저 그랬다고 봅니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우리들의 눈에만 김연아가 유독 크게 보였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보다 큰 그림에서도 보겠습니다. 러시아는 이번 소치올림픽에 56조나 들였습니다. 56조라는 돈은 천억이 쉬운 여섯 번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이런 대가(代價)를 치른 러시아가 바보는 아일 것입니다. 상대보다 못할 것 없는 경기를 펼친 자국 선수를 놔두고 남의 나라 선수들에게 메달이나 바치려고 천문학적인 돈을 들이지는 않았을 거라는 얘기죠. 더구나 채점에 의해 결정되는 종목에서 금메달 하나 못 건진다면 말이 안 되겠지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김연아는 행운아입니다. 그녀가 얼마나 행운아인지 말해보겠습니다. 지난 밴쿠버에서 금메달을 딴 것도 상당한 행운이 뒤따랐다고 봅니다. 메달을 다투는 선수들 중에서 초강대국의 선수가 끼어있지는 않았으니까요. 다만 이번에 문제인 것은 5점이라는 큰 점수 차이가 날 정도로 아델리나 소트니코바의 실력이 김연아 보다는 압도적이지는 않았다는 사실일 겁니다.

이번 소치올림픽에서 김연아는 은메달을 땄습니다. 은메달을 수확한 것도 다음 개최지가 우리나라의 평창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아닌 말로 이탈리아 선수가 은메달을 땄더라면 어쩔 번했습니까? 카롤리나 코스트너는 김연아 보다 못한 점이 뭐였는지 따져보면 답이 나올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탈리아 선수를 제치고 은메달을 딴 것입니다. 왜? 다음 개최지가 한국이기 때문에. 김연아는 이런 저런 덕을 톡톡히 본 것입니다. 행운아인 거지요.

편파판정이라면서 청원사이트로 달려가는 것을 나무랄 수 는 없습니다. 다만 냉철한 관전평을 내놓지 못하고 하나같이 국민들에게 억울한 감정만 부추기는 수구꼴통들, 정권안보에만 충성스럽게 부역하는 방송들이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김연아는 이번에 패기, 정신력, 기술, 예술성, 열정 등에서 너무 소극적이었고, 선수의 한계점과 말기증상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계륵을 머금고 대회를 치렀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꼽아봅니다. 밴쿠버대회 이후 은퇴를 선언했다가 번복한 이유는 복합적이라 할 수 있지요. 첫째 CF 퀸으로서 금전적인 수입을 계속 창출하는데 있어서도 다음 대회를 위해서 땀과 노고를 아끼지 않는 선수라는 이미지가 필요했고, 둘째 소치올림픽대회에 출전해야만 우리나라 선수 두 명이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부문에서의 출전권을 얻을 수 있었기에, 마지막으로 다음 동계올림픽대회를 치르는 우리나라의 사정상 피겨스케이팅 선수층이 두껍지 않아서 은퇴가 여의치 않았다고 봅니다.

여기다 하나 더 보태면 문대성이 갖고 있는 선수 출신 IOC 위원의 임기가 2016년에 끝납니다. 장미란 선수가 희망을 피력하긴 했지만 우리 정부나 체육회에서는 둘 중 누구를 IOC 위원으로 내세우고 싶어 할까요? 이런 점에서도 김연아 선수의 선수생활 연장은 필요했을 겁니다. 아무튼 김연아 선수가 은퇴를 번복하고 어려움을 이기며 잘 버텨준 점에 대해서 박수를 보냅니다. 피겨스케이팅 계에 어서 다음 평창대회 때까지 제 2의 김연아가 나타나 주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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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3 23:51 2014/02/23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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