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명의 지인과 함께 남이섬에 갔다. 남이섬의 행정구역은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으로 돼있었다. 남이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의 북한강변로에 있는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섬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남이섬을 오고가는 왕복 배 삯과 입장료까지 합해서 성인 기준으로 1만원의 입장표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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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머리 쪽으로 다가가니 엄청나게 많은 인원이 승선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처음엔 강변길을 걸어보다가 이내 각종 테마파크가 몰려있는 섬 한가운데로 갔다. 보다 많은 시설이 있겠지만 다 구경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이중 제일 볼만한 곳은 소리박물관과 미술전시관과 도서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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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든 먹을 것을 빼놓을 수는 없어서 식당 쪽을 들여다보면 왁자지껄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우리 일행은 남이섬 구경을 마치고 나가서 먹기로 했다. 우선 눈에 띄는 곳은 이렇게 야외공연장과 음식점 그리고 드라마 겨울연가를 추억할 수 있는 배용준과 최지우 동상이 서있는 정원과 레일바크 타는 곳, 1인용 자전거 혹은 연인과 함께 탈수 있는 2인용 자전거를 타고 강변길을 달리는 모습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개인적으로 감명 깊은 어린이 도서관을 사진으로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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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에 접해본 어린이 도서관 중에서 탁월한 곳이라 생각돼서다. 환경과 동선 구성이 그중 재밌게 보여 눈에 띄었다. 아이들 심리를 반영하여 꾸민 공간의 높낮이와 공간의 명암도 보다 밝은 곳과 은밀하게 숨어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게 차별화 돼 있다. 모양과 크기도 각각 다르게 자연스럽게 배치돼 있었다. 밝고 환하고 색채 또한 연하게 혹은 짙게 시원하게 포근한 느낌으로 다양했다. 각 나라의 다양한 그림동화가 골고루 갖춰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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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어린이 도서관에서 시도했던 시행착오를 간파한 듯하다. 어린이 도서관은 어떠해야 한다고 전해들은 것들이 충실히 반영된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도서관 밖은 각자 목적대로 웃고 떠들고 즐기며 남이섬에 들어온 목적에 충실하려는 사람들로 넘친다. 누구는 이점이 좋다 누구는 저런 점이 좋다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갤러리와 방송국과 전시실 그리고 소리박물관이 있어서 단순한 섬 관광을 넘어서도록 하려는 시도로 보았다. 이런 의도의 구현에 유독 정성을 기울인 곳이 어린이 도서관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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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한옥으로 지은 갤러리는 평당 건축비가 상당했을 것이다. 이에 비해서 어린이 도선관은 건축비나 공간 조성에 그리 큰 부담이 없으면서도 섬의 품격을 높이는데 일조한 계획이었으리라고 본다. 자 그럼 남이섬의 어린이 도서관을 즐감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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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7 12:17 2013/11/17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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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구 중계동 104 마을 일대는 서울에서 마지막 남은 철거지역이라고 합니다. 주민 1500가구 3000여명이 사는 지역으로서 1967년에 조성 됐다고 합니다.

많은 곳이 재개발 붐을 타고서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이 우리나라의 수십년 지속된 유행이었습니다. 아파트 한채 받는 것이 너나 없이 지상 목표였습니다. 아니면 임대주택이나마 받아 떠나면 다소의 성공으로 여기는 정서가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104 마을에 남아서 그럭저럭 옛날 방식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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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사람들은 전에 비해서 일부분이지만 아직도 마을은 온전합니다. 서울시는 고민 끝에 발표를 내놓았는데 판자촌을 1/3 정도는 존속시킨다고 합니다. 판자촌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부수고 아파트만 짓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점에 동의하는 관민 합의가 이뤄진 것입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 어림 없었지요. 무조건 부수고 아파트만 지어달라는 주장만 유일무이한 주장 혹은 대한민국 사람들의 소원이다시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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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 우리들이 10년 20년 혹은 30년 40년 세월과 만고풍상을 겪으면서 한켜씩 쌓으며 가꾼세월, 연륜, 흔적의 가치는 무조건 아파트, 오로지 아파트!! 를 능가하는 가치로 인식되기 싲가했다는 점입니다. 어렴풋이나마 아파트만이 모든 가치의 1순위가 아닐 수 있다는 인식을 조금씩이나마 하게 된 점입니다.

예전에 살던 모습이 서울 그 어느에도 남아있지 않는 현실이 정말 생긴다면 그덧은 우리 모두에게도 결코 득이 안 된다는 점에 동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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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구 문화체육과에서 문화체험(?) 할 시민들을 모집했답니다. 친구 B가 부랴사랴 같이 가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B는 어느 눈오는 날에도 104마을에 가서 마을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올 정도로 마을이 사라지기 전에 자료를 남겨놔야한다고 어지간히 되뇌이더니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가는 군요. 시간은 오후 3시에서 약 2시간, 사진전을 겸해서 진행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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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들이 갔을 때는 때마침 스텐다드 차트은행(구 제일은행) 직원 30여 명이 연탄 3200장을 나대지에 부려놓고 연탄배달 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1가구당 150장이면 한달 연료가 된다고 하더군요. 연탄 배달하는 모습이며 약 20여명의 체험단 그리고 문화체험 예비사회적 기업 <우인>에서 나온 해설사와 대표 그리고 구청 직원 두분까지 합해서 모두 25명 정도가 함게 무리를 이뤄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104 마을 사진을 포토로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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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은 누구인가
                   - 까탈스런 나에게 단 한 번도 호감을 주지 않았던 그

지난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의 일이다. 박원순이 백두대간 종주를 중단하고 산에서 내려왔다. 수염이 유달리 덥수룩해 보였던 그는 안철수의 지원으로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나는 박원순을 찍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나경원을 찍은 것은 물론 아니다.

모든 정치평론가들이 투표율 60%가 넘으면 박원순이 승리할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나는 55%만 넘어도 박원순이 낙승할 것이라고 보았다. <시선집중>이라는 라디오 프로에서 나는 그렇게 공표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나는 끝내 투표에 기권해 버렸다. 어차피 당선될 것인데 내 표까지 그에게 헌정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들리는 말로 박원순의 백두대간 종주 행사는 전액 <...
코오롱>의 지원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내가 박원순에게 표를 주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인상이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인상에서 좀처럼 진실성은 물론 평균인 정도의 솔직성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어느 언론사 창립행사에서 나는 그와 함께 축사를 한 적이 있는데 나는 일부러 자리를 멀리 해 그와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는 것을 예방하는 조치를 취했던 적이 있다. 지금도 나에게는 유명인을 기피하는 이상증세가 있다.

나는 그의 저서를 여러 권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약력에 단국대학 졸업이 누락되어 있다. 그는 몇 개월 다닌 서울대(사회계열) 학력은 반드시 기입해 놓았다. 어떤 책에서는 아예 ‘서울법대’라고 사실과 다르게 기입해 놓은 것도 있다. 4년씩이나 다니고 졸업한 ‘단국대학 사학과’를 자기 삶에서 배제하는 그를 나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아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박원순에게 표를 주지 않은 이유는 그의 인상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는 텔레비전 토론에서 ‘천안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나경원의 질문에 ‘북한의 소행으로 본다’고 태연하게 답변했다. 나는 둘 중의 하나, 즉 그의 인상이 맘에 들었거나 아니면 천안함 답변만 제대로 했더라면 기꺼이 투표장에 나갔을 것이었다.

최근 박원순은 종편 A와의 인터뷰에서 이석기 의원의 국가보안법 적용에 찬성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는<자주민보> 존폐 문제에 지자체장으로서 권한 행사를 기피하더니, 슬며시 일처리를 사법부에 전가해 버렸다. 그는 다른 종편과의 인터뷰에서는 ‘통합진보당의 정당해산청구는 정부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내가 알기로 2011년 박원순 시장 선거운동에 가장 헌신적이었던 사람들이 바로 통합진보당 청년당원들이었다.

“권양...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것은 한국 법조계에서 ‘시대의 변론’으로 회자되는 조영래 변호사의 것이다. 그 유명한 부천서 성고문사건(1986년) 1차 변론서의 서두 문장이다. 아래 두 글을 읽어 보자.

“1차 변론서의 초안은 박원순이 담당했다... 그러나 박원순이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초고를 일별한 조영래는 아무 말 없이 덮어 둔다... 변론 기일이 불과 며칠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조)영래는 자신이 직접 펜을 들었다.”(안경환 저, 『조영래 평전』, 323쪽)

“1차 변론요지서의 초안을 필자가 잡아주었더니 그는 거의 다시 쓰다시피 재작성했는데...이 1심 변론요지서는 이 시대 최고의 명문 중의 하나가 되었다.”(박원순 저, 『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 441쪽)

당시 조영래는 39세였지만 세상이 인정하는 대변호사였다. 반면 박원순은 30세의 무명 변호사였다. 그런데 그는 스스로, 1차변론서의 초안을 자기가 ‘잡아 주었다’고 표현했다.

나는 사람을 평가할 때 이런 사소한 것들을 더 중시한다. 박원순은 대부분의 학·경력이 석연치가 않다. 서울시장 당선 전 그는 방배동 60평 아파트에 월세로 살았다고 했다. 그는 얼마나 책이 많은지 아파트 거실까지 마치 도서관 서고처럼 층층이 책꽂이를 나열해 놓은 것을 보았다. 때문에 거실이 매우 어두침침해 보였다. 아파트에 자기 혼자 사는 것도 아닐 터인데 어떻게 거실까지 다 자기 책으로 메워놓은 것인지? (참고로 나는 내 방 말고는 집에 책을 쌓아 놓지 않는데, 그것은 가족에 대한 작은 배려 때문이다.)

위에 적었듯이 박원순은 ‘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라는 책 제목을 달았다. 여기서 ‘이들’이란 대부분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이다. 그런 그가 서울시장이 되고는 이석기에게 ‘국가보안법 유죄’를 단죄하는 발언을 했다. 박원순은 이와 별도로 『국가보안법 연구』(전 3권)라는 저서로 이름을 날렸다.

그렇다. 혹시 그의 반생에 걸친 저술과 운동은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끝으로 나는 재벌 돈으로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시민운동가 출신 정치인이 자기 야심과 함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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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0 21:24 2013/11/10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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