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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윤 가브리엘 - 최성애

 내가 본 윤 가브리엘 - 최성애

 

 

 

 

2003년 어느 여름 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대성리에서 열린 여름 음악축제에 갔었다. 가수 한영애씨가 무대에 오르고 첫 곡을 부르기 시작할 때 앞자리에 앉은 한 청년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 이 사람이 가브리엘이야!” 옆의 친구가 귀띔해주었다. 에이즈 환자, 동성애자, 가방끈 짧은 전직 미싱사, 한영애씨의 열혈 팬, 에이즈 환자, 에이즈 환자……. 바로 이 순서대로 가브리엘에 대해 내가 사전에 알고 있던 지식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무대에서 공연이 이어지는 내내 나는 가브리엘을 훔쳐보았다.

 제 나이보다 15년은 젊어 보이는 미남 청년, 한 곡 한 곡 흐르는 음악에 빠짐없이 몸으로 응수하고 환호성을 질러대는 상기된 젊은이, 곡이 끝날 때마다 엄숙하고도 냉정한 코멘트를 잊지 않는 비평가, 마지막 곡이 흐르자 거침없이 무대 밑으로 달려나가 예의 그 흐느적 춤을 더욱 거세게 추어대는 막춤꾼. 내가 처음 만난 가브리엘은 한 예술가의 예술을 온 힘을 다해 사랑하고 만끽하는 에너지 넘치는 젊은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후로도 여러 번 콘서트 장에서, 집회에서, 카페에서, 또 노래방에서 가브리엘을 만났고, 그는 늘 처음 만났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여성학을 공부하고, 사회학을 공부하고, 이런 저런 사회운동을 기웃거리며 사회적 소수자 편에 서고, 그들에 대한 편견을 성토해오던 나였다. 소수자를 소수자로서의 정체성만으로 바라보려는 “비소수자들”의 시선이 갖는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나였다. 그런 나였지만 막상 “에이즈 환자답지 않은” 가브리엘의 모습에 당황했고, 자꾸만 그에게서 “에이즈 환자다운 모습”을 찾아내려는 끈질긴 심리와 싸워야 했다. 가브리엘은 에이즈 환자이지만 에이즈에 의해 무력하게 지배당하지 않는다.

에이즈와 에이즈 환자에 대한 사회의 고정관념에 분노하고 절망하지만 그 분노와 절망을 감염인 인권운동의 연료로 불태운다. 너무 아플 땐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며 울먹이지만 한영애씨에게서 온 전화 한 통화에 금방 즐거워 길길이 뛴다. 남달리 어려운 성장기를 거쳤지만 자신의 불행을 원망도 과장도 하지 않고, 그저 너그럽게 다독거린다. 한시도 가난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지금도 “만약 내게 10억 원이 생긴다면 한영애씨 음반 작업에 몽땅 기부할거야”라고 말하는 철부지다. 그는 에이즈 감염인들을 그들의 삶의 여러 다른 씨줄과 날줄들을 배제한 채 에이즈 환자, 사악한 질병의 무기력한 피해자로만 보려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했다.

어린아이와 같은 그의 투명한 영혼, 음악에 웃고 음악에 우는 그의 절절한 감수성, ‘다중적 소수자’의 삶을 통해 체득한 지혜와 인내심. 설혹 에이즈가 가브리엘의 몸을 몽땅 앗아갈지라도 그가 엮어온 삶과 낭만은 오로지 그와, 그의 따뜻한 친구들의 것으로 남을 것이다. 가브리엘을 알게 되어 난 정말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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