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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으로'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이종헌

 

 


한순간의 만남이 영원토록 기억되는 것은 그리 흔치 않다. 모 전자회사의 말처럼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지만, 잊을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순간의 기억은 평생 지속된다. 이런 기억은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남아있는 인생의 편린처럼 내 삶에 영속한다. 우리의 윤가브리엘과 만나는 순간순간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 앞으로의 윤가브리엘은 내게 또 다시 어떻게 기억될지 궁금하다.


Scene#1. 2005년 11월 어느 날. 에이즈 토론회에서.


친구사이가 ‘AIDS를 바라보는 동성애의 입장’이라는 제목으로 토론회를 개최하는 장소에서 나는 윤가브리엘을 처음 보았다. 토론자들의 토론 이후, 자유 토론 시간 중 윤가브리엘은 잘못된 에이즈 관련 인식이나 감염인 인권 관련 이야기를 빠짐없이 토해냈다. 내가 ‘토하다’라는 다소 격한 표현을 쓴 이유는 그것이 정확한 표현이 아닐지라도, 그 순간 내게 주는 인상은 그러했고, 내가 가진 HIV/AIDS의 막연한 오해와 감염인에 대한 두려움을 한순간에 깨트리는 상황을 잘 표현하기 때문이다. 내가 먼발치에서 바라 본 윤가브리엘은 그러했다.


Scene#2. 2006년 3월 어느 날. 나누리+모임에서.


나누리+모임 처음으로 참여하는 날. 몇 달 전 내게 강렬한 인상을 주던 그 분이 이 자리에 계셨다. ‘그분이 이분이었구나!’ 나는 몇 분가량 몰래 혼 빠진 정신을 차리느라 시간을 벌어야했다. 자연스러운 분위기로 익어갈 즈음, 윤가브리엘은 따뜻하게 맞아주며 앞으로도 열심히 활동해달라며 인사를 나눴다. 회의는 저녁이 밤으로 이어갈 무렵까지 진행되었고, 그날 윤가브리엘은 표정은 무엇 때문인지 지쳐보였지만 목구멍 깊은 곳에서 깊은 발성 없이 나오는 소리 한마디 한마디가 더 깊게 자리했다.


Scene#3. 2007년 6월 2일.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 현장에서


  3월 후원의 밤 행사 이후 간만에 뵙는 윤가브리엘. 이날은 왠지 더 씩씩해 보였다. 지난 몇 달 동안 HIV/AIDS 관련 운동에 같이 참여하며 일했던 몇몇 분들도 함께 자리해 축제를 즐겼다. 다들 그 동안의 활동으로 조금씩 피곤해보여 맥주 몇 캔을 건넸다. 윤가브리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그는 축제를 잊지 않고 찾아주었다. 역시 그도 동성애자이고, 우리들의 친구이기에.


  윤가브리엘의 젊었을 때 인상이 나와 닮았다고 다른 활동가 분들이 말한다. 영광이다. 회의 자리에서, 토론회 자리에서, 그리고 축제의 자리에서 그를 만날 때도 영광이지만, 그런 분과 닮았다고 하니 더욱 영광이다. 그때 모습을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지금도 윤가브리엘은 아름답다. 감염인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그리고 당당하게 문제점을 문제시하는 그는 여전히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은 모습은 순간 스쳐갈지도 모르지만, 기억으로 남아 언제나 같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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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윤 가브리엘 - 최성애

 내가 본 윤 가브리엘 - 최성애

 

 

 

 

2003년 어느 여름 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대성리에서 열린 여름 음악축제에 갔었다. 가수 한영애씨가 무대에 오르고 첫 곡을 부르기 시작할 때 앞자리에 앉은 한 청년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 이 사람이 가브리엘이야!” 옆의 친구가 귀띔해주었다. 에이즈 환자, 동성애자, 가방끈 짧은 전직 미싱사, 한영애씨의 열혈 팬, 에이즈 환자, 에이즈 환자……. 바로 이 순서대로 가브리엘에 대해 내가 사전에 알고 있던 지식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무대에서 공연이 이어지는 내내 나는 가브리엘을 훔쳐보았다.

 제 나이보다 15년은 젊어 보이는 미남 청년, 한 곡 한 곡 흐르는 음악에 빠짐없이 몸으로 응수하고 환호성을 질러대는 상기된 젊은이, 곡이 끝날 때마다 엄숙하고도 냉정한 코멘트를 잊지 않는 비평가, 마지막 곡이 흐르자 거침없이 무대 밑으로 달려나가 예의 그 흐느적 춤을 더욱 거세게 추어대는 막춤꾼. 내가 처음 만난 가브리엘은 한 예술가의 예술을 온 힘을 다해 사랑하고 만끽하는 에너지 넘치는 젊은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후로도 여러 번 콘서트 장에서, 집회에서, 카페에서, 또 노래방에서 가브리엘을 만났고, 그는 늘 처음 만났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여성학을 공부하고, 사회학을 공부하고, 이런 저런 사회운동을 기웃거리며 사회적 소수자 편에 서고, 그들에 대한 편견을 성토해오던 나였다. 소수자를 소수자로서의 정체성만으로 바라보려는 “비소수자들”의 시선이 갖는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나였다. 그런 나였지만 막상 “에이즈 환자답지 않은” 가브리엘의 모습에 당황했고, 자꾸만 그에게서 “에이즈 환자다운 모습”을 찾아내려는 끈질긴 심리와 싸워야 했다. 가브리엘은 에이즈 환자이지만 에이즈에 의해 무력하게 지배당하지 않는다.

에이즈와 에이즈 환자에 대한 사회의 고정관념에 분노하고 절망하지만 그 분노와 절망을 감염인 인권운동의 연료로 불태운다. 너무 아플 땐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며 울먹이지만 한영애씨에게서 온 전화 한 통화에 금방 즐거워 길길이 뛴다. 남달리 어려운 성장기를 거쳤지만 자신의 불행을 원망도 과장도 하지 않고, 그저 너그럽게 다독거린다. 한시도 가난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지금도 “만약 내게 10억 원이 생긴다면 한영애씨 음반 작업에 몽땅 기부할거야”라고 말하는 철부지다. 그는 에이즈 감염인들을 그들의 삶의 여러 다른 씨줄과 날줄들을 배제한 채 에이즈 환자, 사악한 질병의 무기력한 피해자로만 보려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했다.

어린아이와 같은 그의 투명한 영혼, 음악에 웃고 음악에 우는 그의 절절한 감수성, ‘다중적 소수자’의 삶을 통해 체득한 지혜와 인내심. 설혹 에이즈가 가브리엘의 몸을 몽땅 앗아갈지라도 그가 엮어온 삶과 낭만은 오로지 그와, 그의 따뜻한 친구들의 것으로 남을 것이다. 가브리엘을 알게 되어 난 정말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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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을 뿌리는 사람

 

                                                                                                    미류 _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활동가


 


가브리엘, 나 이렇게 얘기하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그동안 메일도 한번 주고받아본 적 없다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되네요. 늘 너무 익숙한 사람이었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가브리엘을 자주 만나기 어려운 요즘 느끼는 시린 마음이 어색하기 그지없어요.

나, 이런 얘기해도 되나? 나누리+ 활동하면서 가브리엘 만난 지도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으니, 이제 이런 얘기해도 되겠지? 처음엔 나, “아,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렇게 하고 싶은 일이 많은 거야?” 하는 생각에 조금 부담스러웠어요. 회의할 때마다 이런저런 소식들을 전하며 이런 건 이렇게, 저런 건 저렇게 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얘기하는 가브리엘 모습을 보면, “윽, 저걸 어떻게 다해?”, 이런 생각만 들더라구요.

회의 자리에서 가브리엘은 늘 새로운 소식을 말해줬지요. 에이즈에 대한 통계가 나오거나 새로운 치료제가 연구되고 있다거나, 아프리카 어디에서 임상실험이 됐다더라, 중국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피를 팔아서 돈을 벌려다가 HIV에 감염된다더라, 질병관리본부에서 무슨 정책을 발표했더라, 하는 끊이지 않는 소식들. 그리고 어떤 감염인이 직장에서 해고됐다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 어떤 감염인은 정신과 진료를 받아야하는데 입원을 시켜주지 않는다던데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가브리엘은 늘 새로운 고민꺼리를 던져주었고 이제 막 에이즈인권운동을 고민하기 시작한 나는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쫓아가기 어려울 정도였지요.

그 얘기들이 지금의 에이즈인권운동이 이만큼 걸어올 수 있었던 씨앗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조금 버겁고 답이 보이지 않은 채 맴돌기만 했던 얘기들을 우리가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덕분에, 여전히 답이 보이지 않는 얘기들로 가득하지만,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는 거요. 그래서 가브리엘의 자리가 더욱 그리워집니다.

아, 물론 아직 가브리엘은 여기에 있지요. 여기, 우리들과 함께, 여전히 의약품접근권을 고민하고 감염인들의 인권을 옹호하기 위한 실천을 만들어가는 이 자리에 가브리엘이 있지요. 하지만 가브리엘이 많이 아프다는 걸 가브리엘도, 나도, 우리도 조금씩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도 들어요. 제약자본들이 어떻게 이윤을 더 올릴 수 있을까 궁리하는 회의장에서 쩌렁쩌렁 울려퍼질 목소리를 마냥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을, 감염인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더욱 많은 사람들과 그 고민을 나누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나가던 그 발길을 하염없이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더욱 가브리엘이 하고 싶었던 일들이 무엇이었는지 새삼 떠오르곤 합니다. 가브리엘, 나는 친한 사람들이 ‘자기’라고 부르는 거 별로 안 좋아했어요. 좀 웃기잖어. 남더러 왜 자기래? 이런 생각 했었죠. 그런데 가브리엘은 다른 사람들더러 ‘자기’라고 잘 불렀잖아요. 이상하게 그 호칭이, 참 다른 느낌이더라. 뭐랄까, 가브리엘이 좀 나이가 많은 편이었는데 워낙 허울이 없는 느낌이기도 했고 다른 활동가들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기도 했고, 음, 그랬어요. 나도 언젠가부터 가브리엘더러 ‘자기’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 같구요. 그래서 지금, 이런 생각이 들어요. 자기, 우리가 자기의 꿈을, 자기의 삶을 나누고 이어가는 건 어떤 걸까. 지금 여기에서 에이즈인권운동의 또다른 한걸음을 내딛을 수 있도록, 부디 건강해요, 가브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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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없는 별을 꿈꾸는 A's People 윤가브리엘

 [2006년 12월,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에 기고한 글입니다]

 

차별없는 별을 꿈꾸는 A's People 윤가브리엘


권미란(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12월 1일. 세계 에이즈의 날. HIV/AIDS감염인과 감염인의 인권을 지지하는 활동가들은 에이즈확산을 막고 편견과 차별을 넘기 위해 유시민 복지부장관이 해야 할 일은 감시와 통제를 본질로 하는 에이즈예방법 전면개정과 한미FTA협상중단이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유시민 장관이 바로 에이즈확산의 주범이 될 것임을 경고하려고 하였다.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에서 후원한, '편견과 차별을 넘어'라는 제목의 기념행사에서 감염인의 입장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행사장 진입도 제지를 당했다.

감염인의 목소리를 배제한 반면, 버시바우 미국대사의 격려사가 행사장을 채웠다. 버시바우 미국대사는 부시대통령이 2003년 에이즈구제를 위한 대통령긴급계획을 마련하여 아프리카의 감염인을 위해 지원을 하고 있고, 에이즈.결핵.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국제기금에도 제일 많은 돈을 냈다며 에이즈확산을 막는데 미국이 최선에 서 있음을 자랑했다. 부시의 긴급계획은 복제의약품 사용금지, 금욕 등을 옹호하는 국가에 직접 지원하는 형태를 고수하면서 초국적제약자본에게 이윤을 몰아주고, 자신이 원하는 보수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에이즈를 이용하고 있다. 자신을 위해 에이즈를 악용하고 금욕과 순결을 에이즈예방이라고 떠들고 있는 부시를 칭찬하면서 기념행사는 끝이 났다. 억울함과 분노사이로 가브리엘에 대한 그리움이 차올랐다. ‘새로운 에이즈치료제를 구할 때까지 이를 악물고 버틸게. 우리 같이 싸우자’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는 눈물이 쏟아졌다.


한국다국적제약협회의 약제비적정화방안 반대 기자회견장. ‘에이즈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약을 먹을 수 없어서 죽는 것이다’라는 영문글귀가 새겨진 티셔츠를 들고 초국적제약자본이 말하는 신약에 대한 환자의 접근권이 거짓말임을 폭로하는 가브리엘 (사진: 정우혁. 네트워커)

 

6월 15일 한국다국적제약협회(KRPIA)가 약제비적정화방안에 대해 반대입장을 표명한 기자회견장, ‘환자의 신약에 대한 접근을 저해하고,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의욕을 감소시킬 것’이라며 약제비적정화방안을 철회하지 않으면 투자를 철수하겠다고 협박을 하자 기자회견장은 소란스러워졌다. 이때 한 HIV/AIDS감염인의 목소리에 기자회견장이 순간 조용해졌을 뿐 아니라 단상에 앉아있던 제약회사 대표들은 당황해 했다.

"나는 에이즈환자입니다. 로슈는 푸제온을 왜 그렇게 비싸게 팔려는지 대답하십시오"


8월 15일 국제에이즈회의가 열리고 있던 캐나다, 활동가들은 애보트가 주최한 심포지움이 시작되자마자 단상을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다. 애보트는 에이즈치료제 노비르(성분: lopinavir)와 칼레트라(성분: lopinavir/ritonavir)를 판매하고 있다. 노비르와 A에이즈치료제를 함께 복용하면 A의 효과가 증대된다. 애보트는 다른 제약회사의 에이즈치료제와 노비르를 함께 복용하는 것을 막고 칼레트라의 시장을 확대하기위해 미국에서 노비르의 가격을 500%인상한 바 있다. 게다가 칼레트라의 가격은 환자들이 사먹을 수 없는 수준이고,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에서는 판매하지 않고 있으며, 냉장보관을 해야 한다. 전 세계 HIV/AIDS감염인의 2/3가 살고 있는 아프리카에서 냉장보관을 해야하는 약은 먹을 수 없는 약이다. 애보트는 8월 13일에 ‘개발도상국에서 lopinavir/ritonavir에 대한 접근을 확대하기위해 새로운 시도’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아프리카와 최빈국에서 연간 환자당 500달러로 인하하겠다는 것이다.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아프리카의 민중에게 연간 500달러는 죽음을 부르는 가격이다. 한 HIV/AIDS감염인이 행사장 단상에 있던 애보트 광고판에 기습적으로 락카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는 애보트측에 의해 행사장 구석으로 내동댕이쳐졌다.


4000:3800=100:30 말이 안되는 이 등식은 전 세계 HIV/AIDS감염인의 현실이다. 보고서(UNAIDS, 2006)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HIV 감염인이 40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특히 아프리카에서는 2600만 명으로 전 세계의 HIV 감염인의 2/3를 차지한다. 아시아에는 830만 명,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150만 명, 라틴아메리카에는 160만 명의 HIV감염인이 살고 있다. 그런데 미국이 전체 에이즈치료제 시장의 70%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아프리카, 아시아,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라틴아메리카에 살고 있는 HIV/AIDS감염인 약 3800만 명에게 공급되는 에이즈치료제는 전체 에이즈치료제 시장의 30%도 안된다는 얘기다. 2005년 한 해 동안 410만 명이 새로 에이즈에 감염되었고, 280만 명이 에이즈로 숨졌다. 하루에 8천명이 에이즈로 사망하고 있다. 약이 있어도 약을 못 먹기 때문에 죽어가고, 에이즈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11월 30일, 태국에서는 최초로 의약품에 대한 강제실시계획이 발표되었다. 태국 국영제약회사가 에이즈치료제 에파비렌즈를 미국의 제약회사인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보다 30배이상 싸게 공급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번 강제실시 결정은 태미FTA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태국 HIV/AIDS감염인들의 강제실시 투쟁은 1998년부터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1998년 태국 의약품특허재조사위원회가 과도한 의약품 가격이 공중보건의 이해에 반할 경우 강제실시를 촉구하도록 권고를 했다. 당시 태국국영제약회사는 에이즈치료에 사용하는 화이자의 플루코나졸과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의 디다노신에 대한 강제실시를 통해 싸게 공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자 미무역대표부와 미제약협회는 무역보복을 가하겠다며 강제실시 폐지, 의약품특허재조사위원회 폐지, 지적재산권 침해에 대한 감시강화, 독점보호기간 연장을 요구하였다. 결국 태국정부는 에이즈치료제를 포함하여 필수의약품의 강제실시는 제한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태국 감염인들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2004년 2월에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이 디다노신에 대한 특허권을 태국에 양도, 2006년 8월에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이 콤비드에 대한 특허권을 포기하게 만들었고 , 2006년 11월 에파비렌즈에 대한 강제실시에 이르게 되었다.


다국적제약협회앞에서 '로슈는 왜 푸제온을 비싸게 팔려는 겁니까?'라고 외쳤던, 애보트 행사장 단상에 락카를 뿌려대던 가브리엘은 병원에 있다. 한국에서 판매되는 13가지 에이즈치료제에 모두 내성이 생겨서 새로운 치료제가 필요하다. 2000년 이후에 미FDA승인을 받은 에이즈치료제는 약제성분기준으로 12가지이지만 한국에서 시판허가를 받은 것은 3가지. 이 중에서 실제 판매가 되고 있는 것은 2가지뿐이다. 로슈는 푸제온에 대해 시판허가를 받았지만 유럽과 미국에서 팔리는 가격을 요구하면서 판매를 하지 않고 있다. 연간 2만달러(약 2천만원). 다행히 인도 제약회사에서 한국에 판매되지 않고 있는 신약 중 2가지에 대해 복제약을 생산하고 있다. 가브리엘은 인도 제약회사의 복제약과 미국의 에이즈구호단체로부터 푸제온을 구하고 있다. 하루하루를 어렵게 버티면서 새로운 에이즈치료제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가 더욱 기다리는 것은 몸이 조금이라도 나아져서 함께 싸우는 것이다.

태국의 강제실시 발표에 누구보다 기뻐하는 가브리엘, 차별 없는 별을 꿈꾸며 싸울 준비를

한다. 걷기가 힘들어졌지만, ‘다리가 한결 부드러워졌어’라며 가브리엘은 오늘도 재활운동을 한다.

에이즈운동가 윤가브리엘 치료비 마련을 위한 후원인이 되어주세요

 

▲후원계좌(001502-04-153002 국민은행 정욜)로 후원금을 보내주세요.

▲정기후원(CMS)을 해주실 분은 신청서를 보내주세요.

* 신청서 다운받는 곳: http://rainbowsnail.pe.kr/data/support.hwp

* 신청서 보내실 곳: aspeople@jinbo.net

* http://blog.jinbo.net/As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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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과 장미

 


당신은 우리에게 언제나 든든한 힘이 되고 있습니다.

몇일 전 12월 1일 에이즈 감염인 인권주간 소속 활동가들은 세계 에이즈의 날을 HIV/AIDS 감염인 인권의 날로 선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그 장소는 감염인을 시한폭탄으로 여기며 차별과 편견으로 가득찬 에이즈 정책을 펼치는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가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차별과 편견의 벽을 넘어’라는 제목으로 기념행사를 치루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감염인 인권증진이 에이즈 예방이며, 감염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한미FTA를 중단할 것을 외쳤고, 감염인의 발언권을 보장하라며 행사장으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와 협회 관계자는 우리들의 진입을 막았습니다.  기껏 들어갔지만 행사는 이미 끝났고 우리의 요구를 알리기 위해 보건복지부 차관에게 항의서한을 전달하려했으나 대한에이즈예방협회 관계자는 항의서한을 뺏으며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전달할 기회마저 박탈했습니다.


그 날 저녁, 기자회견 참가 활동가들이 가브리엘형이 있는 병실로 모였습니다.  저는 우리가 바라는 에이즈 감염인 인권의 날을 축하하기 위해 수줍은 감수성을 들이밀며 빨간 색 장미 꽃 한 송이를 들고 병실로 찾아갔습니다. 형이 기자회견에 함께 참가하지 못해 안타까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완강하며 절박한 행동을 만들지 못해 안타까워 하고 있을 활동가들이 떠올랐으며, 형이 질병과의 혹독한 싸움에서 이기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고 제 자신의 마음을 강렬한 붉은 색으로 채우기 위해 형이 좋아하는 장미 한 송이를 가져갔습니다.  꽃을 받아들며 좋아하는 형이였으며, CMV로 시력을 많이 잃긴 했어도 붉디 붉은 꽃은 보이는 모양입니다. 


병실엔 꽃을 들고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전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았건만 원래 모르는 사람처럼 당당히 ‘뒷 문’ 엘리베이터를 통해 올라갔습니다.  형은 꽃을 보고는, “혹시 앞에서 ‘저지’ 안하디?”했습니다.  순간 사람들은 왁자지껄 웃었습니다.  “어째 말을 골라도 ‘저지’래..  누가 활동가 아닐까봐.”...



붉게 물든 장미 보다 더 선명하게

전 형이 감염인인 사실을 안지 몇 년 되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 심하게 아파 병원에 입원한 동인련 회원이 있다고 했을때도 그냥 입원했나 했습니다.  형에게 직접 감염인이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놀라기 앞서 ‘절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야할 굳은 약속’을 얻기라도 한 것처럼 얼어버렸습니다. 


형은 누구보다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2005년 동성애자인권캠프에서 형은 자신 삶의 이야기를 쏟아냈습니다.  병원진료를 거부당했던 일, 집안과의 관계... 캠프 참가자들은 형의 이야기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동성애자임과 동시에 감염인으로 ‘두 번의 커밍아웃’.  이 힘든 ‘커밍아웃’은 그 간 형이 겪었을 고난을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가브리엘 형은 불게 물든 장미보다 더 선명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열정적인 사람

장미는 가브리엘 형이 자신의 예명을 로즈로 할 만큼 좋아하는 꽃입니다.  열정적인 자신의 끼를 ‘로즈’란 이름으로 표현하며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 발족식에서 맘껏 펼쳐보였습니다.  태국에이즈컨퍼런스에서 세계 에이즈 활동가들의 밝고 역동적인 활동에 크게 고무받은 형은 깊고 구수한 끼를 선보인다며 한껏 곱디 고운 한복을 입고, 형이 좋아하는 ‘한영애’님의 노래를 립싱크하며 무대를 휘어잡았습니다. 


작년 APEC 회의가 열리는 부산에도 함께 갔었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동인련 참가단과 함께 호모포비아 부시 반대! 전쟁에 쓰일 돈으로 에이즈치료제를!이란 피켓을 들고 무지개 깃발을 휘날리며 부산 시내를 휘젓고 다녔습니다.  멀리 회담장소를 보며 ‘헤엄이라도 쳐서 갈까?’하던 형의 떨리는 목소리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봄이 좀 더 빨리 오길 바라는 심정으로

온갖 미사여구를 끌어다 쓰는 글발 아닌 글발이 오히려 형의 활동을 미화하지 않나 쓴 글을 보고 또 보고 합니다.  하지만, 형과 함께 했던 순간을 기억해보면 언제나 그것은 저에게 활동의 좋은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병실에서 다리가 더 굳어지면 안된다며 앙상하게 뼈만 남은 두 다리를 떨며 운동하던 형, 밥힘으로 벌떡 일어나 함께 활동해야 한다며 새끼 꼬박꼬박 챙겨먹어야 한다는 형, 답답한 병실에서 굳건하게 에이즈 활동가들에게 힘을 불러 일으켜 주는 형...  봄이 빨리 찾아와 형과 함께 장미가 가득한 곳에서 걷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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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 운동가 윤 가브리엘에게 희망을! 이 땅 모든 에이즈 환자들에게 치료제를!


욜 _ 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가

 

 

 

윤 가브리엘은 HIV에 감염된 지 10년이 채 안된 에이즈 환자입니다. 지금은 병원에서도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일반 사람들이 출입하기 힘든 에이즈 쉼터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습니다. 면역수치가 많이 낮아져, 이제는 바이러스가 서서히 윤가브리엘 활동가의 몸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걷기조차 힘들어 휠체어에 몸을 실어야 하고, 좋아하는 고로케조차 마음대로 사 먹지 못합니다. 음식의 맛을 음미하기보다, 식사 후 약 먹는 것에 대해 걱정을 합니다.



윤가브리엘은 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가이자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대표입니다. 그가 처음 동성애자인권연대 가입했을 때 그 누구도 그가 감염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동성애자인 자신이 편견을 더 부추길까봐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한국에서 에이즈 환자로 사는 것이 얼마나 불공평한지, 편견이 얼마나 끔찍한 지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몸조차 가누기 힘들고 생활이 매우 어려웠지만, 감염인 인권을 지지하는 동성애자, 보건의료인들과 함께 나누리+라는 에이즈 인권 단체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표가 되었습니다. 나누리+에서 활동하며, 백혈병 등 다른 환자단체들과 연대하려 노력하였고 인권단체들과 함께 ‘에이즈’가 인권의 문제임을 상기시켰습니다. 대학, 병원, 단체 등 가릴 것 없이 에이즈와 인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라면 이를 악물고서라도 찾아다녔습니다.

  

 

▲ 2006년 6월 15일 다국적 제약회사들의 '한국의 약제비 절감정책'의 반대 기자회견장에서

"에이즈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약을 먹지 못해 죽는다!"란 옷을 들고 항의하는 윤 가브리엘

 

 

그는 실천하는 활동가입니다. 약을 팔아 자신들의 배만 불리는 다국적 제약협회 관계자들 앞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히 외쳤습니다. “나는 지금 당장 로슈사가 생산하는 푸제온이라는 약을 써야 하는 환자다. 왜 푸제온이 한국에 들어오지 않는지 대답하시오”라고. 에이즈 환자들이 지금 당장 먹어야 하는 약이 기업의 이윤 때문에 시판되지 않는 현실을 폭로하였습니다. 조지 부시가 방한한 지난해에는 APEC이 개최되는 부산까지 찾아가 “에이즈 환자를 위해 써야 할 돈이 전쟁에 의해 쓰여지고 있다”며 전쟁반대 입장에도 단호했습니다.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2년마다 개최되는 국제 에이즈 회의에서도 국제에이즈운동 단체들과 함께 연대활동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에이즈 운동의 최선두에서 싸웠던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건강을 회복시킬 수 있는 약과 그를 지지하는 많은 분들의 도움입니다. 윤 가브리엘 활동가 치료에 쓰여야하는 약은 지금도 국내에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2004년 시판허가가 나왔지만 국내 환자가 많지 않고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푸제온’이라는 약은 들어오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길리어드라는 제약회사에서 판매하는 비레드(테노포비어)라는 약은 1년에 약 660만원이 들 정도로 고가입니다. 다행히 인도 시플라 제약회사에서 복제의약품을 만들어 싸게 판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녹녹치 않습니다. 윤가브리엘 활동가는 그동안 넉넉하지 않은 생활에 이미 물질적, 정신적인 삶이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에이즈 운동의 최선두에서 투쟁했던 윤 가브리엘에게 필요한 약이 공급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도움과 지원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입니다. 한국정부가 마땅히 이 모든 역할을 해야 맞지만, 다국적 제약회사들 앞에서 질질 끌려다니는 지금의 행동을 볼 때 윤가브리엘은 그냥 걸어다니는 바이러스일 뿐입니다. 윤가브리엘 활동가가 다시 건강을 되찾고 한국의 에이즈 환자들의 인권과  건강을 되찾는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윤가브리엘 활동가 후원에 참여해주십시오. 그리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HIV감염인, 에이즈 환자들이 자유롭게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는 에이즈 운동에 동참해주십시오. 후원금은 윤 가브리엘 약값 및 치료비에 쓰여질 것입니다.

 

 

현재 가브리엘 운동가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치료를 위해서는 일주일에 적게는 500,000원 많게는 900,000원 정도의 돈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후원은 가브리엘 활동가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후원계좌

001502 - 04 -153002 국민은행 정욜

가브리엘 활동가를 위한 정기 후원(CMS)는 현재 논의 중에 있습니다.
결정과 동시에 알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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