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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언제나 사람들의 몫으로 남아

 
희망은 언제나 사람들의 몫으로 남아
에이즈 인권모임 나누리+ 윤가브리엘을 만나다
강곤 | 기자 19호 | 2007년 1월
윤 가브리엘(39세)은 동성애자이고 에이즈 환자다. 이 한 줄의 글이 가진 폭력성과 선정성을 우리 사회는 아주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는 6년 전부터 그리 대수롭지 않은 바이러스로 알려져 있지만 에이즈 환자에게는 폐렴이나 중추신경계의 장애를 가져올 수 있어 치명적인 CMV 바이러스와 질긴 싸움을 해오면서 한편으로는 에이즈 인권모임의 대표로 활동의 최전선에 서 있던 활동가이다. 지난 해 들어서 급속도로 몸이 악화되면서 벌써 다섯 차례나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투병 중인 그를 찾아갔다.

 


누군가는 가야 할 길을 가다

 


오른쪽 눈은 거의 보이지 않아요. 의사가 치료 불가능한 단계라고… 하지만 한 쪽이라도 보이는 게 천만다행이죠. 아직은 걷는 것도 힘에 부치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요. 어제는 병원 안에서 조금 걷는 연습도 하고. 문제는 CMV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주사인데 그동안 맞던 주사가 부작용이 생겨 다른 것으로 바꿨어요. 그런데 바꾼 약이 보험 적용도 안 되고 병원에도 없는 약이라서 희귀약품센터에 직접 주문해서 맞고 있어요. 한 달에 약값만 190만 원 정도 들고…. 돈도 돈이지만 이 약도 부작용이 생길 경우 대책이 없죠. 지난 달(2006년 11월)에 잠시 퇴원을 하면서 의사한테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이야기까지 들었어요. 그 얘기 듣고 엉엉 울었죠. 갑자기 무섭더라구요. 하지만 아직까지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지 않아요. 지금 같아서는 조금만 더 회복하면 곧 활동할 수 있을 거 같은데….

99년도에 폐렴과 결핵을 심하게 앓았죠. 그때 입원을 하면서 감염 사실을 알게 됐어요. 너무 늦게 알고 치료도 늦게 시작한 탓인지 국내에 들어와 있는 에이즈 치료제는 전부 내성이 생겼고 다른 기회감염도 많은 편이죠. 처음 에이즈에 걸렸단 것을 알았을 때는 나도 보통사람들처럼 편견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면서 한 6개월 동안 연락도 끊고 잠적을 했죠. 당시만 해도 감염인 모임이나 에이즈 인권단체들이 전무했어요. 혼자서 끙끙 앓다가 10년 넘게 사귄 친구에게 털어놨는데 고맙게도 너무 따뜻하게 나를 위로해줬어요.

 


그 후 그는 동성애자인권연대의 문을 두드리면서 조심스럽게 인권활동을 시작하게 되고 그의 말대로라면 “우연한 기회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2003년 ‘에이즈 인권모임 나누리+’를 만드는 데 참여하고 대표까지 맡게 된다. 그 뒤로 그는 HIV/AIDS 감염인 당사자이자 에이즈 인권활동가로서 감염인의 인권과 관련된 국내외의 현장을 쉼 없이 누벼왔다.

 


2003년 당시에 언론에 에이즈 환자에 대한 진료 거부라든지 감염인 부부가 낳은 아이가 감염이 되어 감염인은 임신을 금지시켜야 한다든지 하는 내용이 나왔어요. 왜 우리는 사람대접도 못 받고 숨어 지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동성애자에다가 에이즈 감염인이란 사실 때문에 꺼려지는 게 없었던 건 아니지만 결국 누군가는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활동을 하면서 사실 보통사람들은 워낙 모르니까 오히려 설명하고 설득하기 쉽죠. 감염인들에게 호소하는 게 훨씬 어려워요. 그들이 나서는 게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단 한명이라도 나를, 우리를 지지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했어요. 그런 어느 날 캠페인을 하는데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자기도 에이즈 환자라며 고맙고 수고한다는 거예요. 캠페인을 하면서 감염인이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 못했는데….

 


윤 가브리엘의 긍정의 힘

 


 

그는 2006년 활발했던 HIV/AIDS 감염인 인권에 대한 활동도 많은 침묵하는 감염인들이 어딘가에서 지켜보며 지지를 보내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런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그의 태도는 에이즈 인권활동가 이전의 삶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어릴 적에 집을 나왔어요. 중2 땐가. 위로 누나 하나와 세 명의 형들이 있었는데 누나는 아주 어릴 때 시집을 갔고 부모님하고 형들과 같이 살았죠. 그런데 나만 배다른 동생이었어요. 그래서인지 큰 형이 참 많이 나를 괴롭혔어요. 때리기도 많이 때리고. 어떤 날은 ‘너 오늘은 반찬은 먹지 말고 밥만 먹어’ 하면 그래야 했어요. 오줌 쌌다고 벽을 보고 서있다 쓰러져 잠든 적도 많았죠. 아버지는 택시를 했고 어머니도 장사를 해서 늘 밖에 있었으니까, 형의 주먹보다 무서운 건 없었죠. 둘째나 셋째 형은 그렇지 않았는데 큰 형만 유독 나를 괴롭혔고 아무도 거기에 대들지 못했어요. 그러다 도저히 이대로는 못살겠다 싶어서 중학교 2학년 때 가출을 했어요. 그리고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간 곳이 전자제품 뒤편에 들어가는 기판에다가 구멍을 뚫는 일을 하는 공장이었어요. 거기서 일하면서 졸다가 손가락을 구멍 뚫는 기계에 넣어 이렇게 다친 거예요. (그의 왼손 가운데 손가락은 약간 짧다. 아예 마디가 다 잘렸다면 이어붙일 수도 있었지만 반 마디가 뭉개져서 그마져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거기는 일도 어렵지 않고 늦게까지 시키지도 않아 좋았는데 어느 날 공장 앞에서 우연히 아는 친구를 만난 거예요. 가족들이 찾아올까봐 사장에게 맡겨놨던 월급 통장도 못 챙기고 그길로 도망쳤죠. 나중에 주민등록증을 만들 나이가 되어서 집을 물어물어 찾아가봤는데 아버지는 내가 집 나오고 얼마 안 있어서 당뇨로 돌아가셨고 키워준 어머니는 다른 분하고 지금 지방에서 살고 있어요. 친어머니야 찾을 길이 없죠. 아버지가 살아 있었더라면 혹시 몰라도….
그리고 간 곳이 동대문 평화시장에 있는 봉제공장이에요. 거기서 미싱보조로 시작해서 아프기 전까지 10년 넘게 일을 했죠. 하루에 18시간씩 일을 했어요. 그러면 바지 한 벌에 몇 천 원씩 나한테 떨어지는 거예요. 거기서 기억나는 게 일한 것 밖에 없어요. 당시에는 청계피복노조가 활발히 활동할 때였지만 대부분 이렇게 도급제로 일을 하다 보니 우리가 오히려 불빛을 가리고 몰래 일을 했지요. 그래야 수입이 느니까. 사실 그때는 노조가 뭐 하는 곳인지 그런 것도 잘 몰랐고 관심도 없었죠.

 


그러면서 그는 스물한 살 때 네 살 연상인 여자와 동거도 했다고 한다. 성 정체성에 대한 확신도 없었고 지식도 없었기 때문에 딴에는 나름대로 자신의 문제에 대해 치료를 해보려는 노력이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동거를 했으니 여자한테는 정말 미안하죠. 지금이라도 다시 만나면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못 만나게 되네요. 손가락과 예전부터 앓던 중이염으로 군대를 면제를 받고나서도 나는 슬프고 우울했어요. 군대를 갔다 오면 남자다워질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마저도 가지 못하게 됐으니…. 왜 나는 남들 다 가는 군대도 못 갈까 절망을 했죠. (웃음) 남들은 돈 벌었다고 하며 남의 속도 모르고 좋겠다고 떠드는데.

 


사람에게 희망을 걸다

 


그런 그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고 더 나아가 에이즈라는 치명적인 사회적 차별과 편견을 넘어 활동을 하게끔 했던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

 


열아홉 살이었던 86년 어느 날인가 라디오에서 한영애 씨의 노래를 들었죠. 어, 우리나라에도 이런 여자 가수가 있다니… . 충격적이었죠. 그 목소리와 독특한 창법에도 반했지만 음악이 얼마나 철학적인지 몰라요. 삶을 진지하게 돌아볼 기회랄까, 세상살이에 대한 가르침이랄까 하는 것을 한영애 씨의 노래를 통해 얻고 위로를 받았던 것 같아요.
사춘기부터 시작되었던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함께 어릴 때부터 받았던 폭력이 겹쳐서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없는데 왜 나는 이렇게 살기 힘든 것일까 이런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어릴 때는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너무 슬퍼서 노을을 보면서 울기도 많이 했어요. 지금도 어릴 적 생각을 하면 그때가 아련하게 떠올라요. 그냥 어디론가 떠나면 나를 구해줄 사람이 나타나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죠. 지금 돌이켜보면 참 어리석은 생각이죠. 성인이 될 때까지 누구도 나에게 세상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 뭐 이런 것을 이야기해주지 않았는데 한영애 씨 노래가 그런 세상에 대한 목마름을 달래줬죠. 그래서 한영애 씨의 노래는 내 삶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에요. 만약 내가 이 세상을 마감할 때 제일 아쉬운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나를 지원해주고 도와줬던 이들에게 미안한 거 하나 하고 또 하나는 이제 더 이상 한영애 씨 음악을 못 듣는다는 거예요.(웃음) 노래 중에 ‘말도 안 돼’란 노래가 있는데 거기 가사 중에 ‘희망은 너와 내가 맞잡은 손에 있다’는 부분, 그게 지금까지 내 삶의 신조가 된 거 같아요.

 


그래서인지 그는 지난 해 5월 백혈병 환자로 에이즈 인권모임 활동을 하다 세상을 떠난 김상덕 씨(본지 2006년 7월, 13호 人터뷰 참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지금도 한 쪽 팔이 떨어져 나간 느낌”이라며 상실감을 표현했다.

 


상덕이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별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통하는 그런 사이가 됐어요. 아픈 사람끼리 모이면 아팠던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는데 얼굴만 봐도 서로 그런 얘기도 할 필요가 없는 처지란 것을 알았던 거죠. 상덕이는 다국적 제약회사와 싸웠던 경험도 있고 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사실 활동을 시작하면서 내가 못 배웠다는 것,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것에 많이 주눅 들어 있었어요. 처음 만나서 학번이 뭐냐고 물어오면 ‘대학 안 나왔다’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은 하지만…. 어디 회의를 가서도 제발 내 의견을 물어보지 않았으면 하고 앉아있게 되죠.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감염인 당사자로서 내가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하는 고민이었어요. 그런 부분에서도 상덕이는 참 도움이 많이 되던 친구였죠. 지금도 기억에 남는 말이 “인권활동이 감염인 단체를 쫓아가서도 앞서가서도 안 된다. 감염인과 함께 가야 한다. 그리고 절대 이익집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거예요. 깊은 얘기도 못했고 오래된 친구도 아니었지만 늘 전화할 때면 서로 “제발 아프지 마라”며 끊었죠. 그 친구 추모 글에서도 “거기서는 제발 아프지 마라”고 썼지요.

 


든든한 동지이자 벗이었으며 선배이기도 했던 이를 떠나보낸 그는 지금 많이 지쳐 보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있다. 몸이 회복되면 제일 하고 싶은 것이 뭐냐는 질문에 “그동안 밀린 활동을 어서 해야죠.”라고 조금의 주저도 없이 대답한다. 그런 것 말고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말해달라고 하니 역시 조금의 주저함도 없다. “한영애 씨 공연 보러 가야죠.” 돌아와 그가 말한 한영애의 노래가사를 찾아본다. 그 노래의 마지막 구절이다.

 

그래도 희망은 너와 내가 손잡은
사람에게 걸 수밖에 희망은 언제나
사람들의 몫으로 남아있게 마련이지

 


사진 박김형준 | 다산인권센터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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