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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 25년속의 에이즈운동

 [2006년 7월 동성애자인권연대 진보포럼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에이즈 25년 속의 에이즈운동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윤가브리엘


1) 미, 에이즈발견 ‘에이즈 이데올로기로 게이들 죽이기’


올해로 에이즈 발견 25년이 되었다. 미국에선 에이즈 25년을 맞아 25년 정리와 에이즈 문제가 어떻게 왜곡되고 이용되어 왔는지 언론들이 특집기사들을 통해 다루었다. <이글 에서는 시사 주간지<뉴스위크>가 에이즈25년 ‘에이즈가 미국을 어떻게 바꿨나’의 특집기사에서 일부분 인용하였다.>


1981년 미국 질병관리센터(CDC) 의사들이 “남성 동성애자"들이 감염되는 특이한 급성폐렴과 피부암 사례”로 보고하면서 에이즈는 세상에 존재를 알렸다,

당시 대통령 레이건의 보좌관을 지낸 팻 뷰캐넌은 1983년 언론에 기고한 글에서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를 이렇게 묘사했다 “동성애자들이 자연과의 전쟁을 시작했고, 자연은 가공할 천벌을 내리기 시작했다.” 이 한마디로 레이건 정부와 극우파, 언론 등이 왜곡과 무시, 비난의 질병으로서 에이즈를 다루었다는 것을 단 적으로 알 수 있다.

에이즈발견 25년 역사를 돌아보면 당시 미국 사회는 마치 중세 인들이 흑사병을 대하듯 무관심과 적의, 오해로 에이즈를 다루다 질병을 키웠고, 특히 남성동성애자들은 극우파와 기독교에 의해 질병을 확산시키는 악마 취급을 당하며 “신이 동성애자에게 내린 천벌”이란 낙인을 받고 죽어 나갔다. 82년 美 의료인ㆍ언론, 등은 에이즈를 "동성애자 관련 면역 결핍증"으로 소개. 질병관리센터 는 에이즈(AIDS) 로 명칭을 지정하였다, 아이티 출신, 동성애자, A형 혈우병환자, 정맥 약물주사자, 를 4대 위험요인으로 지목하였다. 종교적, 도덕적 이유로 게이와 약물 주사자 들에게 관심이 없던 레이건 정부는 무관심으로 일관하였고 언급자체를 꺼렸다. 미국에서만 에이즈로 1만 2천여 명 이 사망할 때까지 공식석상에서 한 번도 이를 언급하지 않은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레이건의 입에서 ‘에이즈’라는 말은 1987년에야 나왔다. 그것도 ‘비정상인들’인 남성 동성애자들끼리의 성관계가 유일한 발병원인인 ‘게이 암’으로 에이즈를 언급하여 이른바 ‘정상인들’ 이성애자들은 동성애자들을 조소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1980년대 미국 언론들도 에이즈 보도에 무관심 했다. 뉴욕 타임스는 81~82년 사이 새로운 치명적인 전염병에 대해 10건 미만의 기사만 실었으며, 그나마도 작은 박스 기사로 다루었다. 뉴스위크도 83년 4월에야 커버스토리로 다루었고.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성애자도 감염된 1982년 2월 '게이들에게 종종 치명적인 질병이 여성과 이성애자에게도 발병하다'라는 제목으로 처음 보도했다. HIV감염인 들은 가정에서 쫓겨나고, 직장에서의 해고, 학교, 병원, 등 에서 기피, 격리대상이었으며 의료 보험 혜택도 받지 못했다.


당시 게이 사회도 에이즈에 대해 무관심 했다. 게이 언론도 에이즈를 취급하지 않았다. 언론에서 “게이들에게 치명적인 질병”에 다룬 기사들을 게이 언론들은 “질병관련 소문은 대체로 근거 없다”는 제목을 달았다. 에이즈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는 게이사회 일각에서 여러 해 동안 지속되어 왔다. 주변인들이 피부암으로 또는 심한 폐렴으로 입원 하는 동안에도 70년대의 파티를 이어가길 원했던 다수의 게이들은 자신들의 성적자유에 에이즈가 찬물을 끼얹는 걸 원치 않았다. 84년에 가서야 샌프란시스코 게이 전용사우나 폐쇄 여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동성애자 권리 운동가이자 작가인 ‘래리 크레이머’(87년 ACT-UP 을 조직한 활동가)는 당시 게이들이 많이 모이는 행락지에서 에이즈 연구기금 모금 운동을 벌였으나 불과 769 달러 밖에 안모였다.


대다수 미국인들이 ‘처음으로’ 에이즈를 알게 된 것은 영화배우 록 허드슨이 85년 게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에이즈로 끝내 사망하면서 그때서야 미국인 들은 에이즈를 처음으로 인식했다. 대다수 미국인들이 감염인 근처에만 가도 병을 옮는 줄 알았던 당시 상황에서, 친구 록 허드슨의 손을 잡으며 그의 뺨에 키스를 하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사진은 혁명적 인 것 이었다. 이 후 테일러는 에이즈 자선 재단을 운영하며 미 정부 보다도 더 먼저 발 벗고 나서서 에이즈 연구기금과 환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자선 활동을 시작하였고 에이즈 자선재단의 대표적인 얼굴이 되었다.

그 이후 91년 농구 스타 매직 존슨의 감염은 '버젓하고 건강해 보이는 스포츠 스타'도 에이즈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에 더욱 충격적 이었고, 영국의 유명 록 그룹 퀸의 리드보컬리스트 프레디 머큐리 의 감염사실 과 죽음은 전 세계를 놀라 게 만들었다


2) 미 에이즈환자들 거리를 나서다! ‘침묵은 죽음이다’


81년 에이즈 가 처음 발견 된 이후 이 질병과 질병의 확산을 수수방관한 미 정부에 분노를 터뜨려온 에이즈 운동가 “래리 크레이머”는 87년 실의에 빠져있는 에이즈 환자 1만 여명을 모아 뉴욕 맨하탄 동성애자 지역봉사센터에서 '직접행동' 조직 액트업(ACT UP “권력의 해방을 위한 에이즈연대”)을 결성한다.  액트업 은 ‘침묵=죽음 Silence=Death’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하고. 백악관 앞에서 에이즈로 사망한 환자의 관을 들고 정부의 무대책에 항의하며 투쟁에 나선다. 액트업 이 결성된 같은 해 87년 미 FDA에 첫 승인 된 에이즈 치료제 AZT (지도부딘)를 환자들이 먹을 수 있게 하고 조속한 치료제 개발과 지원을 촉구 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치료제 AZT를 개발한 제약사가 있는 월스트리트를 봉쇄했다. 이후 에도 액트업 과 연대하는 많은 단체들(옥스팜, 국경없는의사회 등)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를 점거하고 성패트릭 성당에서 대규모 시위 등을 지속적으로 벌인다. 이 들의 지속적인 투쟁에 힘입어 에이즈에 대응하기 위한 미 정부의 본격적인 대책 마련인 에이즈지원 법 과 예산 배정은 1990년대에야 이뤄졌다.


95년 클린턴이 백악관에서 최초의 HIV/AIDS 회의를 개최하고 에이즈 치료제 단백분해효소 억재제인 신약들이 개발 되어 에이즈 치료가 좀 더 쉬워진다. 97년 세 가지 향바이러스제 를 섞는 칵테일 용법 덕분에 미국에서 에이즈 사망자가 전년대비 40%이상 감소 하지만 비싼 치료제 때문에 돈 없는 환자들은 약을 먹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미국은 사 보험 제도에다 주마다 보험관련법이 달라 현재도 에이즈는 보험적용이 안 되는 곳이 많다) 액트업 은 특허라는 명목으로 폭리를 취하는 다국적 제약사들을 비난하며 지속적인 약값인하 투쟁을 벌리 고 2년마다 열리는 국제 에이즈 회의에서 “비싼 치료제가 우리를 죽인다!”는 구호를 외치며 다국적 제약사의 전시장들을 때려 부시 며 항의 한다.

그 외에도 반세계화 투쟁의 집회가 있었던 1999년 시애틀, 2000년 제노바, 그리고 2002년 유럽사회포럼이 열리고 있는 피렌체에서 에이즈 문제를 해결하라는 요구를 내걸고 반세계화 행진에도 결합하였다. 처음 에이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된 액트 업이 적극적으로 ‘반세계화, ’반자본주의 운동’에 참여 하는 건 에이즈의 문제가 단지 질병의 문제가 아니고 빈곤과 계층의 문제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현재 에이즈 환자의 95%는 저개발국에 집중돼 있고 특히 아프리카 사하라이남 국가들에 무려 2천 8백만 명이 몰려 있다. 또한 계층적으로도 의료 접근권이 취약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감염 율 이 많다.(미국의 현재 감염 율 통계를 보면 가난한 흑인들이 50%이상을 차지한다)


에이즈 25년 미국 사회를 평가해보면 초기 게이의 질병으로 왜곡하여 초기대응 하지 못한 실패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부터 현재 이라크 전쟁에 이르는 모든 전쟁에서 죽은 미국인 보다 더 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그 과정에서 미국의 역사와 문화에 지우지 못할 흔적을 남겼고 동성애를 묘사하는 언론의 태도를 바꾸었다. 미국인들은 무시하고 욕해왔던 한 사회의 인간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에이즈 란 질병도 바뀌었다 게이와 약물사용자를 죽이는 질병에서 ‘빈곤과 인권 취약 계층의 질병’으로 바뀌었다. 에이즈 환자의 권익을 위해 투쟁한 액트업 은 수수방관하던 미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냈고 에이즈 환자들이 적극적인 행동을 벌이지 않았다면 암 환자 , 림프종 등의 난치병 환자들이 오늘날과 같은 열성적인 환자 권익운동을 벌이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3) 한국 에이즈25년 감염인 인권침해25년 ‘감염인 들이 인권을 말하다‘


한국에서는 1985년 에이즈 환자가 처음 발견 되었다. 당시 에이즈란 질병을 강 건너 불구경 하던 정부는 87년 부랴부랴 대책이라며 에이즈 예방법을 제정, 감염인 색출, 격리, 통제에 들어간다. 에이즈 예방법을 통해 공포의 이데올로기를 조장하면서 미국이 초기 대응에 실패한 직접적 원인인 동성애자 ‘고 위험 집단’ 정책으로 일관한다. 미국의 실패한 에이즈 정책을 답습하는 정부를 비판해야할 한국의 언론들은 오히려 에이즈 공포를 더 부추긴다. 감염인문제가 발생하면 보복 심리로 문제를 일으킨다며 에이즈문제의 원인이나 연구는 없고 사건에만 초점을 맞춘다. 언론에서 감염인 들은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으로 심각한 문제이고 정부에 감염인 감시와 관리를 더 철저히 하라는 기사들을 쏟아낸다. 국가인권위가 지난해 발간한 ‘HIV 감염인과 에이즈환자 인권실태 조사보고서’를 보면 3대일간지 에이즈 관련보도 1600건 중 5.3%인 85건만이 감염인 인권을 기사로 다뤘다.


또한 에이즈를 정부가 제대로 알리지도 않아 국민들은 에이즈 발견 25년이 지난 지금도 에이즈에 무관심 하며 나와는 상관없는 일들로 인식한다. 그나마 에이즈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언론에 의해 왜곡된 공포의 대상 일뿐이거나 입에 올리기 싫은 금기의대상이다. 나와는 무관한 일로 받아들이지만 감염인들 에겐 심한 편견을 보이고, 감염인 들이 퍼트리고 다녀 문제라는 피해의식도 상당하다. 감염인 들은 여전히 부도덕한 ‘걸릴 만한 짓을 한사람들’이란 낙인 이 찍 혀 한국에서 에이즈 25년은 ‘감염인 인권침해 25년‘ 으로 단정 지어 말할 수 있다. 이런 한국사회의 잘못된 에이즈 인식을 조장하는 배경엔 에이즈 예방법(후천성 면역결핍증 예방법)이 존재한다. 87년 제정 후 몇 차례 개정을 통해 감염인 격리 조항 같은 독소조항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감염인은 감시와 통제, 관리의 대상일 뿐이고 에이즈 공포에 기반 한 조항 도 변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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