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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사회적 교섭안, 정족수 미달로 무산

이수호 위원장, "임시대대 소집할 것" 불씨 남아
집단적 보이콧 아니냐, 고성 오가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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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은 기자 
노동계 안팎의 관심의 초점이 되었던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에 관한 건'이 제33차 대의원대회의 정족수 미달로 무산되었다.

민주노총은 20일, 21일 양일간 충북 보은 속리산 유스호스텔에서33차 대의원대회를 개최하고, 2004년 사업보고ㆍ평가 및 결산 승인, 2005년 사업계획 및 예산을 확정했다. 민주노총은 이 자리에서 정부의 개악안 강행시 진행될 2월 총파업의 계획도 확정했다.

제33차 대의원대회 1부 행사인 투쟁보고 대회가 진행되고 잇다.

그러나, 논란이 예상되었던 '사회적 교섭(안) 승인 건'은 안건 상정 직후 정족수 미달로 대의원대회가 유예되면서 안건의 처리는 무산되었다. 그러나, 이수호 위원장은 대의원대회 유예 선언 직후 "다시 치열한 토론을 통해 빠른 시일 내 임시대의원대회를 개최해 안건을 처리하겠다"고 밝혀 사회적 교섭(안)을 둘러싼 논란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13시간 격론, 정족수 미달까지

"32차 임시대대에서 "총파업 결의 이후 내년 대대에서 예정되어있는 사회적 교섭 논의 진행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위원장은 "총파업을 결의해 놓고, 그것도 정부의 개악안 강행 의지가 명백한 상황에서 사회적 교섭에 참여하지는 않겠다"고 발언했었다. 지난 대대 상황과 주객관적인 상황이 달라진 것이 없는데, 이 시점에서 사회적 교섭 논의를 진행하는 인식의 근거는 무엇인가?"

사회적 교섭 승인 건은 민주노총 사업계획 승인 건, 2월 총파업투쟁 계획 승인 건에서부터 이미 '안건 상정에 대한 반대' 의사가 발언 중간중간 나오고 있었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네 번째 안건인 '사회적 교섭 승인 건' 안건 상정 논의가 시작된 시각은 새벽 3시 30분, 이미 직전 현장 발의 안건인 '비정규연대회의 하루 총파업 동참 건' 처리에서 확인된 재석 대의원수는 399명으로 과반 정족수 393명을 아슬아슬하게 넘긴 상태였고, 계속해서 자리를 뜨는 대의원들이 늘고 있었다.

"사회적 교섭 논의는 찬반 양론이 아닌 난상 토론이 되더라도 맑은 정신으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논의되어야 한다"는 대의원들의 정회 요청이 이어졌다. 그러나,이수호 위원장은 "의장으로서 나름의 판단이 있다, 자세를 흔들리지 말고 회의를 속행하자"며 직권으로 안건설명을 진행했다.

계속되는 정회요청에 이어 정족수 확인 요청까지 이어지자 결국 새벽 4시경 이수호 위원장은 정회를 선언했다. 이어 긴급 소집된 중앙집행회의에서 대책이 논의되었고, "휴회 후 28일 대의원대회를 속개하자는 것"으로 안이 모아졌다.

각 연명별로 조합원들을 상대로 취지를 설명하는 시간을 20여 분간 진행한 후 5시 회의가 속개되었다. 이수호 위원장은 "휴회 후 1월 28일 오후 2시 다시 회의를 속개해 책임 있게 힘찬 결의를 모아내자"는 의사진행 중집 제안을 설명했다.

그러나, 최용우 대의원 등이 "휴회냐 유예냐에 따라 안건의 처리 결과가 달라진다"며 정족수 확인을 요청하였고, 정족수 확인에 들어갔다. 재석 대의원은 380명으로 확인되었고, 새벽 5시 30분 경 유예가 선언되었다. 이수호 위원장은 "의장으로서 책임을 느끼는 한편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규정에 따라 남은 안건을 처리하기 위해 임시대의원대회를 소집하겠다"고 밝혔다.

"표찰 수거하고 명단 공개하라", "주홍글씨라도 쓰자는 거냐!"

"성원 확인 중인데 나가는 대의원은 뭐냐, 입구라도 막고 안정적으로 진행하자"
"그런 식으로 면박을 주어서 어쩌자는 거냐"며 간간이 이어지던 고성이 정족수 미달이 확인되자 통제불능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강대균 대의원은 "민주노총 33차 정기대대 공지 한 달 전에 했다. 오늘은 중앙위 논의 통해 상정된 안건들을 다루는 자리였다. 대다수 대의원들이 13시간을 침묵하며 이 자리에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정회 중간에 조직적으로 회의를 유예시킬 거라는 발언을 들은 대의원이. 조합원들이 위임한 책임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무거운 우려까지 표출했었는데, 그것이 현실로 드러났다. 이런 결과를 가지고 무슨 내용으로 총파업을 하나? 우리의 최소한 역할도 못하고 있는데, 무엇으로 조합원을 설득하나?"며 정족수 미달이 집단적 결정에 의한 것이라는 강한 의구심을 드러내며 반발했다.

"당장 이 자리에 있는 대의원들을 확인하고 이석한 대의원 명단을 붙여라"는 고성에 이수호 위원장은 "이미 이석 대의원 확인하겠다고 말했었다. 표찰을 앞으로 거둬달라"고 말했다.

"주홍글씨라도 쓰자는 거냐? 언제는 유예되면 표찰 걷었었나, 너무 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들이 터져 나왔고, 급기야 한 대의원은 표찰에 불을 붙여 던지기도 했다.

13시간에 걸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는 그렇게 깊은 불신의 골을 남기고 끝을 맺었다. 논쟁 속에 다시 확인하고 결의한 민주노총의 2월 총파업은 한 달여 남겨져 있다.
2005년01월21일 12: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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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회진보연대와 함께 돌아본 1년

백승욱 | 운영위원, 중앙대 사회학과

 

2004년은 2003년부터 지속된 대내외적 지각변동이 이어지면서 그 파장이 더욱 커진 한 해였다. 밖으로는 미국의 신보수파가 주도하는 세계질서의 재편이 이라크 전쟁으로 시작된지 두해 째 되면서 그 파장이 줄어들줄 모르는 채 확장되고 있다.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지 한해가 아니라 두해가 지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랄만큼 무장한 세계화의 영향력은 일상 속에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 전쟁에 대한 반대와 저항이 적지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다른 영역에서 벌어지는 삶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저항으로 확산되지 못하면서 어느덧 반전은 삶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비판의 문제로 바뀌어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2004년 초 한국의 정치판에 벌어진 대통령 탄핵이라는 해프닝은 사실 이 문제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탄핵을 둘러싼 논란 속에서 사회진보연대는 이 문제를 바라보는 세가지 기준점을 제기한 바 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 무장한세계화와 전쟁에 대한 반대,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전면적 위협에 대한 저항이라는 기준점이 그것인데, 이 세가지가 서로서로를 받쳐주는 운동으로 연결되어야만 지속적 생명력을 가질 것임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탄핵과 그 이후 과정에서 나타난 수많은 동요는 이 것들중 어느 하나의 부분적 측면만을 붙잡거나 또는 낡은 방식으로 그 속성을 이해하기 때문에 생긴 문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2년 대선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국내 정치지형의 변화는 냉전의 틀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낡은 틀이 빠르게 무너지는 대신 변신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새롭게 형성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이데올로기적 기반은 여전히 취약하며, 그 취약성이 쉽게 극복되지는 않을 것이고, 지속적인 동요와 상호폭로가 일시적으로 그 취약성을 지탱하는 정치가 지속될 것이지만, 외형이 쇄신된 자유주의와 외형을 쇄신하려는 보수주의는 진보세력의 쟁점제기를 선점하려 노력할 것이다. 그에 비해 쇄신되지 못한 진보세력은 여전히 익숙한 과거의 틀 속에 갇힐 수도 있을 것이다. 대중의 힘의 분출을 봉쇄한 1987년의 망령은 탄핵국면만 덮어싼 것이 아니라 민주노총도 민주노동당도 덮어 쌀 수 있고, 윤기나는 고립을 찬란한 성공으로 오해하도록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김진균 전 대표께서 돌아가신지도 한 해가 되었다. 민중형성과 연대는 김진균 대표께서 붙잡고 있던 두가지 화두였는데, 연대를 통해 어떻게 민중이 민중으로서 형성되는 길을 찾아갈지는 남은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성과에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 돌진하면서 새로운 운동방식과 새로운 조직형식을 고민하는 것은 불나비 김진균 선생 만이 아니라 사회진보연대의 자세이기도 하다. 지난해의 만민공동회와 전범민중재판은 민중의 자기 발언권을 되찾는 작은 출발점이 될 수 있었다. 그 계기를 더욱 확대해가는 한 해가 될 것을 기원해 본다.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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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의 부활...

 

전세계 인구의 반과 국가의 3분의 2는 자국 경제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선진 산업국 국민에 의해 조종되며 워싱턴 DC에 근거를 둔, 고국을 저버린 ‘전문가’들이 거시 경제, 투자 정책, 그리고 사회적 지출을 관리한다. 멀리서 온 이 명령들의 기본 방침은 ‘워싱턴 합의’로 알려져 있다.

개발 도상 국가와 포스트 사회주의(post-socialist) 국가를 위해 정책 패키지를 들고 날라 온 외국인들은 두 개의 세계 기구, 곧 세계은행과 IMF의 스태프들이다. IMF와 세계은행이 각국 정부에 ‘추천한’ 많은 조치들이 실무적으로는 이성적인 근거가 취약하고 비생산적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의 제안은 몇 가지 이유로 주목을 받고 있다. 양대 기구는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이나(덜 열광적이기는 하지만) 일본과 같은 경제대국의 지지를 얻고 있다.

그들 밀사들은 실질적인 경화 대출 한도를 손에 들고 해당국 수도에 도착한다.―그들의 제안을 충심으로 받아들이도록 권위를 부여하는 강한 인센티브이다. 이 제안들은, 지난 십여 년 동안 지배적인 위치에 이르게 된 ‘신자유주의’ 또는 ‘시장 친화’ 상표를 부착한 정책 분석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멕시코의 1982년 이후가 두드러진 예이다― 해당국 정책 입안자들이 워싱턴에서 온 친구들보다 신자유주의에 더 열광적이었다.

경제 정책의 이러한 ‘글로벌화’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아르헨티나에서는 중앙 은행을 ‘통화위원회’로 대체함으로써 영국 식민지의 고대 통화 관습을 복제하고 있다. 그리고 프린스턴의 ‘화폐의사’(money doctor) 켐머러(E.K. Kemmerer)의 1920년대 사명은 오늘날 IMF에서 구축해 놓은 것들과 아주 닮아 있다. 1980년대 경제 사회 정책의 극적인 전환은, 켐머러를 넘어 대공황 이전의 환경을 재형성하는 방향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신’자유주의 옹호론자들은 현재의 논쟁이 수십년 전의 논쟁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진보적 비평 또한 존재한다. 위대한 사회주의 과학자 폴라니(Karl Polanyi)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세계은행과 IMF가 창설된 1944년에 발간된 『거대한 변환』(The Great Transformation)이라는 책 속에 다음과 같은 비평을 하나 실었다.


“변화의 문제를 이해할 때만큼 자유주의 철학이 확실하게 실패한 적은 없었다. 자생성(spontaneity)에 대한 감성적 신뢰감에 불타올라, 변화에 대한 상식적인 태도를 버리고 경제적 개선에 의한 사회적 결과를 그 여부에 상관하지 않고 신비할 정도로 쉽게 받아들였다.”


폴라니에 따르면, 1920년대에 “경제적 자유주의는, 시장의 자유를 위협하는 모든 개입주의 정책을 제거함으로써, 시스템의 자기 조절력을 복원하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 ‘노력’에 대한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나타난 비극적인 반응은, 완전히 자유화된 시장 시스템은 사회적으로․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폴라니의 위대한 테마를 예증해 주었다. ‘자기 조절’ 시장은, 특히 노동, 금융 그리고 국제 무역과 같은 주요 부문에서는 오래 갈 수 없다. 규제를 완벽히 철폐하기 위한 시도는 불안정하고 투기적인 행동을 야기시키거나, 또는 소득과 부의 집중을 초래함으로써, 잠재해 있는 통제권을 국가에 다시 부과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폴라니의 명언에 따르면, 하나의 규제 완화를 향하고, 또 하나는(금융 불안정과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면) 그 역방향으로 움직인 ‘이중 운동’이 존재한다.

폴라니의 이론은, 시장과 사회적 모순을 중재하는 국가의 능력이 글로벌화된 경제 하에서의 외부 경제와 금융 속박 때문에 점점 더 손상되는 오늘날에 있어 글로별화에 대한 논쟁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재앙 이후 “각국 정부간의 경제적 협동과 자유 의지로 국민의 삶을 조직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한 국제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글로벌 조정 기능을 구축하려는 의지는 세계은행과 IMF의 설립으로 유도되었다. 역설적인데, 개방도상국에게는 오늘날의 이 기구들이 1940년대 유토피아적 사고의 파괴 뒤에 숨어 있는 지적 근간과 정치 세력을 나타낸다. ‘한국 사회에 주는 충고’, 「자유주의의 부활: 글로벌 경제하의 IMF와 세계은행」, 랜스 테일러(Lance Taylor), 이병천․백영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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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상승과 노동시간 단축...

 

“과거의 농업사회에서는 가족 중 가장(家長) 한 사람만 노동에 전념하면 가족의 생계가 가능했지만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오면서 가족 모두 노동에 종사하지 않으면 생계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10여 세 소년들이 하루 14시간 동안 탄광에서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어려웠다는 점은 엥겔스의 말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가족 모두 하루에 14시간 동안 일하지 않으면 가족의 생계가 어려울 만큼 자본은 최저의 임금과 최장의 노동시간으로 인간 노동을 수탈했던 것이다. 이 점은 임금 조건과 노동시간이 최저생계비와 연계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뒤집어 말하면,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 투쟁과 노동시간 단축 투쟁은 동전의 양면이었던 것이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홍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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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향한 경주...

 

경제적 실적의 부진과 사민주의적 신념에 대한 회의, 그리고 세계화로 인해 더욱 치열해져 가는 국제경쟁 등이 유럽 나라들로 하여금 신자유주의로 눈길을 돌리게 함……그리하여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편은 노동자들이 자본에 대한 고난에 찬 투쟁을 통해 역사적으로 쟁취해 온 것들을 자본이 회수해가는 과정이라고 일컬어지게 됨. 이름하여 ‘자본의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임. 여기에서 생산입지를 옮기겠다고 하는 자본의 위협은 민족국가와 노조에 대한 초국적자본측의 효과적인 무기가 되어 ‘바닥을 향한 경주’를 낳음. 거기에는 복지와 환경에 대한 자본측의 고려가 약화되는 것도 포함됨. ‘오늘날 세계의 여러 가지 노조운동론 :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를 중심으로’, 사회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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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똘레랑...

 

“의약분업 과정에서 불거진 의사 폐업 사태와 롯데호텔과 사회보험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공권력의 대응을 보면서 나는 카뮈와 엠마누엘 토드의 말을 돌이키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에서라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회적 불의1)였고 차별이었다. 생존권이 아닌 기득권을 지키려는 의사들의 폐업에는 전전긍긍했던 공권력이, 생존권을 요구하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는 강경 진압을 통하여 ‘질서’를 강제했다.”

“‘받기 위해 주는 것은 모든 교환의 원칙인가?’라는 물음은 ‘남북한 사이의 상호주의’와 구체적으로 관련시킬 수 있겠으며, ‘모든 권력은 폭력을 동반하는가?’라는 질문은 ‘국가폭력’에 관한 질문과 함께 ‘한국에서 파업을 거의 모두 불법으로 규정하고 탄압하는 국가폭력’의 문제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유는 거부하는 권리로 정의되는가?’라는 물음에는 ‘자유와 파업권’을 연관시킬 수 있다. 파업권을 노동자들의 ‘거부하는 권리’로 정의할 수 있을테니까.”

“나는 ‘불법파업’이라는 프랑스 말을 들어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다. 파업은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의 최후 선택이고 ―그 어떤 노동자가 무조건 파업을 좋아하나?― 노동3권의 하나인 단체행동권의 핵심으로서 당연히 보장되어 마땅한 것이다. 오히려 파업 사업장에 대해 인력을 투입하는 게 불법이다. 그만큼 노동자의 파업권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의지가 관철되고 있다. 지하철이나 기차 등 공공부문에서 최소한의 서비스를 확보하기 위해 파업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일부의 목소리조차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끝난다.

한국의 상황은 잘 알다시피 이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거의 모든 파업이 ‘불법’이고, 대체인력 투입이 불법이기는커녕 ‘구사대’까지 활개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임에도 이른바 국민의 정부는 역대 정권의 똑같이 관계부처 대책회의라는 것을 거쳐 ‘불법파업 단호대처’를 운운하고 있고, ‘조중동’ 등 수구 신문들은 누가 대화에 나서지 않는지 묻지도 않은 채 ‘노동자들은 대화에 나서라’면서 국가경쟁력과 국가 신인도를 앵무새처럼 떠들고 있다.”


“일찍이 볼테르는 ‘앵똘레랑(불관용하는 자)’2)을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 자를 선험적으로 유죄라고 평가하도록 유도하는 자」라고 말했다. 또 루소는 앵똘레랑을 가리켜 「자기가 믿는 것을 믿지 않으면 선의의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와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 자들 모두에게 냉혹하게 저주를 내리는 자」라고 말했다. 21세기초 한국 사회는 17세기에 바나주 드 보발이 말한 「견해의 대립을 통해 이성을 눈뜨게 하지 않으면 인간을 무지와 오류로 몰아가」는, 그런 사회와 멀지 않다. 이를테면 물질은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이성과 정신은 17세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홍세화.

 

 

1) “사회정의는 질서에 우선한다” 볼테르.

 

 

2) 억압적 관용(repressive tolerance) : ‘억압적 관용’은 마르쿠제가 1965년에 쓴 논문 제목이기도 한데, 간단히 말해 “합법적 권위에 의해 결정된 틀 안에서만 반대파를 용납”하는 지배 계급의 태도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가령, 지배 계급이 사상․결사․언론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해도, 실제에 있어서 이는 기존의 행정 체계의 틀 내에서만 인정받기 때문에 피지배자들의 저항을 흡수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쿠제는 외견상 순수해 보이는 기존의 관용을 ‘추상적 관용’이라고 비판하면서, 역설적이게도 자유의 범위와 내용을 확장시킬 뿐만 아니라 편파적으로 피지배자의 입장을 옹호하는 ‘차별적’ 관용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차별적 관용을 실천할 때에만, “파괴와 억압을 관용하는 행위 규범을 관용하지 않는, 아니 절대로 관용하지 않으며 이에 복종하지 않는 소수”와 더불어 현존 체제를 분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좌파의 상상력(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 조지 카치아피카스 지음, 이재원․이종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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쏠리다리떼...

 

“프랑스에서 종이1) 없는 이주노동자들이 종이를 얻기 위해 단식 투쟁을 할 때 그들과 항상 함께 하는 인류학자 에마뉘엘 테레는 인류에겐 흑인종, 황인종, 백인종의 인‘종’이 없고 다만 인‘류’뿐이라고 외친다. 지금까지 인류는 뒤섞이면서 문화적 다양성을 획득해 왔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홍세화.

 

 

1) “‘노동허가증’이라는 이름의 종이”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홍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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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레랑스란...(1)

 

“‘서로 다른 체제와 이념을 인정한다는 것.’ 이것이 똘레랑스 정신이다. 나와 다른 남을 다른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 즉 나와 다른 남에게 나와 똑같이 될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하여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대화와 토론을 통해 최선의 길을 모색해 나간다는 것, 이것이 바로 똘레랑스의 정신이다.”

“다시금 강조하거니와 똘레랑스의 부드러움은 앵똘레랑스1)에 대한 단호한 앵똘레랑스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홍세화.

 

 

1) “저항을 포기한 주체는 이제 자기 정당화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 이때 주체는 이문열이 <선택>에서 권장한 그 독특한 인생철학, 즉 ‘어차피 그러안아야 할 강제라면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주체적으로 그러안자’는 해괴한 논리를 내면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조선일보 내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가령 동아일보의 경우에는 사내에서 편집방향에 대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오고 다만 이 ‘말’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못하고 “온건론”으로 귀결되는 데에 반해, 조선일보의 경우에는 아예 비판은 나올 수가 없고 평기자들마저도 사측을 옹호하는 논리를 개발하기에 바쁘다. “디제이 신문은 어쩔 수 없다.” “보도 내용이 다소 의심스럽다.” “디제이의 언론개혁은 계급투쟁적 성격이 있다.” “또 마이너 신문들의 메이저 신문들을 위한 공세의 측면도 있다.” 이들의 태도는 이렇게 자발적, 주체적, 공격적인 구사대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그것이다.” ‘아웃사이더’, 「존재미학, 비루한 자들의 미적 에토스」, 진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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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포코(foco)’ 이론

 

대중운동을 움직이게 하는 한 방식으로서 요청된, 소수의 헌신적인 게릴라 집단인 ‘포코’1)가 시골 지역에서 수행하는 무장 투쟁은, 도시에 기반을 둔 노동자 계급의 전위 세력들을 구축한다는 공산당의 전략에 대해 일련의 대안적인 전략을 구성해줬다.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발전된 생산 부문의 사람들 내에서 자신들의 기반을 구축하고자 했다면, 게릴라들은 군사적․정치적․경제적으로 집중되어 있는 기성의 권력 조직과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는 농민들에게 들어가려고 했다. 또한, 공산당이 가능한 한 현존의 정치 일정 내에서 움직이려 했고, 평화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믿었다면, 게릴라들은 현존 국가를 분쇄하기만을 원했다. 넒은 의미에서 보아, 공산당은 혁명에 유리한 조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꾸준히 강조하면서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이행을 주장했던 반면, 게릴라들은 “포코라는 작은 원동력을 통해 대중운동이라는 큰 원동력을” 움직이게 함으로써, 이런 조건들을 창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비록 볼리비아,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에서 체의 포코 이론이 현실화되지 못했지만,2) 포코 이론은 니카라과 혁명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쿠바 혁명의 성공을 따르려고 했던 시도들은, 라틴 아메리카 혹은 제3세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미국에 있었던 <웨더 언더그라운드 Weather Underground>와 <흑인 해방군 Black Liberation Army>, <아일랜드 공화군 Irish Republican Army>, 서독의 <적군파 Rote Armee Fraktion>,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 Red Brigades>, 캐나다의 <퀘백 해방전선 Front de Liberatíon Quebequois>(FLQ), 스페인의 <바스크 토지와 해방 Basque Land and Liberty>(혹은 Euzkadi Ta Askatasuna, ETA), 또한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 좌파 Gauche Proletarian> 등은 모두, (마리겔라,3) 마오,4) 지압5) 등은 물론) 체와 드브레6)를 신중하게 연구했으며, 쿠바의 전략을―성공했든지 못했든지 간에― 자신들의 나라에서 실행에 옮겼다.

쿠바 게릴라들의 성공으로 인해, 핵심부와 주변부의 급진적 운동들 내에서 게바라주의자들Gevarist Wing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급진 좌파와 소련 공산당은 심각하게 갈라서게 됐다. 1961년 경에는 브라질 공산당이 무장 투쟁 찬성파와 소련파로 분할됐으며, 이와 유사한 시기에 볼리비아, 베네수엘라, 페루, 칠레, 그리고 콜롬비아의 운동들 내에서 이런 분할이 발생했다. 몇 년이 지난 이후, 이와 똑같은 일이 미국의 <블랙 펜더 당>, 독일의 <독일 사회주의 학생연맹 Sozialistischer Deutscher Studentenbund>(SDS)에서 발생했다. 비록 이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은 소련이 아니라 마오주의였으며, 무장 투쟁 찬성파 내에도 맑스주의자들이 있었지만 말이다.

전략과 전술상의 차이 외에도, 소련 공산주의와 새로운 급진주의 간의 간극에는 새로운 차원도 있었다. 이는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의 창출’을 위해 인간을 변혁시키라는 체의 요청으로 정리됐다. 오랫동안 소비에트 맑스주의는 사회의 기본 구조를 변혁시키면 필연적이고 자동적으로 문화적․사회적 변혁이 찾아온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새로운 급진주의는 정치, 경제, 문화를 변혁시킴과 동시에, 사회 구조 및 개인 주체를 변혁시킬 것을 요구했다. 추상적으로 볼 때, 비혁명적인 객관적 조건들은 변화될 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 거부했다는 점은, 새로운 급진주의가 일상 생활의 변혁은 ‘혁명 이후’에까지 미뤄져야만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거부했다는 점과 유사하다. 제3세계의 게릴라들과 핵심부의 급진적 운동들은, 직접 행동과 문화적―정치적 혁명(여성해방을 포함하여)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이론적으로 긴밀히 묶여 있었다. 또한 실천적으로는, 공동의 적(미 ‘제국주의’)과 공동의 경쟁자(소련식 ‘급진주의’)에 대항해 단결을 이뤄냈다. 쿠바가 꾸준히 소련과 유대 관계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혁명적 운동들은 미국의 침공과 경제 봉쇄 이후에까지, 공산주의자들의 지도도 받지 않았고 소련과 유대 관계를 맺지도 않았다. 또한, 쿠바는 신좌파에게 강력한 자극을 주기도 했다. 가령 피델 카스트로7)의 연설문이 미국에서 출간됐을 때, 북아메리카의 한 편집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쿠바의 사례는 신좌파에게 영감을 주었다. 단호한 민중들과 강력한 지도력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패배시킬 수 있었던 것이 그 살아 있는 증거이다. 투쟁을 강조하고,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이라는 전망을 던져주는 피델의 연설은, 쿠바인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의 헌사는, 그 역사적 가능성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당당하리마치 낙관적이었다. “북아메리카인들에게 혁명의 완수 가능성을 전해준 쿠바인들과 베트남인들에게, 그리고 이 가능성을 이용하고 있는 북아메리카의 젊은이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신좌파의 상상력(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 조지 카치아피카스 지음, 이재원․이종태 옮김.

 

 

1) ‘포코(foco)’는 스페인어로, ‘중심’ 혹은 ‘중핵’을 의미한다. 게바라는 특정한(즉, ‘소수의 헌신적인,’ 혹은 ‘전문적이며 혁명적인’) 게릴라 세포들을 이렇게 불렀다. 이들의 전략은 시골과 산간 지역에 해방구를 형성한 후, 이를 도시에까지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다음을 참조하라. 체 게바라, 편집부 옮김, 「게릴라 전쟁」, 『체 게바라』, 오월, 1988, 103~162쪽.

 

 

2) 이런 운동들이 겪었던 유혈 진압을 ‘현실화되지는 못한’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건, 너무 너그러운 일이다. 하바나에서 열린 <3대륙 회의 Tri―Continental Conference>에서 반복적으로 대두된 무장 봉기 요구(1996년 1월)와 1967년의 OLAS 회의에 대해, 라틴 아메리카 정부와 미국은 신속한 대응을 취했다. 1967년, <미주 기구 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는 쿠바를 비난했으며, 쿠바에 대한 경제 제재를 주창했다. 유일한 조정자이자 군사 원조의 출처(그 당시에)였던 미국은, 파나마에 남부 사령부를 건설했다. 1968년경에는, 파나마에서 반게릴라 훈련을 받은 특수 군대가 52차례나 작전을 수행했는데, 1966~1967년에 이 군대는 과테말라, 베네수엘라, 니카라과는 물론, 볼리비아에도 개입했다. Houtart․Rousseau, op. cit., pp.206~207.

 

 

3) Carlos Marighella(1911~1969). 브라질의 도시 게릴라. 마리겔라는 1965년 2월 <10월 8일의 혁명 운동 Revolutionary Movement of October 8>(MR―8)을 결성, 그 다음 해에 결성된 <인민의 혁명적 전위 People’s Revolutionary Vanguard>, <민족 해방을 위한 행동 Action for National Liberation>과 함께 도시 게릴라전을 감행했다. 1969년 12월 30일, 경찰의 매복에 걸려 사살당했다. <붉은 여단>과 <적군파> 등이 그의 저서인 『도시 게릴라 소책자 The Minimanual of the Urban Guerrilla』(1969)를 공식 훈련 입문서로 사용했다.

 

 

4) 毛擇東(모택동; Mao Zedong, 1893~1976). 중국의 혁명가. 이른바 ‘대장정 Long March’(1934~1935)을 통해서 일본군을 패퇴시켰으며, 결국 1949년에 중국인민공화국을 세웠다. 마오는 자신의 게릴라 이론과 문화 대혁명(1966~1969)을 통해, 제3세계는 물론이고 유럽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5) Vo Nguyen Giap(1912~ ). 베트남의 군사 전략가이자 정치가. 1939년 9월, 중국에서 호치민을 만나, 그와 함께 ‘베트민’을 결성했다. 그 유명한 ‘디엔비엔푸’ 전투나, ‘구정 공세’가 모두 그의 주도 아래 이뤄진 것이었다. 그는 『큰 승리, 큰 임무 Big Victory, Big Task』(1967) 등과 같은 저서를 통해 군사 전략과 게릴라 전술을 체계화했다.

 

 

6) Régis Debray(1940~ ). 프랑스의 철학자. 1967년 3월, 체 게바라와 게릴라 활동을 하기 위해 볼리비아로 갔다. 이때에 드브레는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무장 투쟁과 정치적 투쟁을 기록한 『혁명 속의 혁명? Révolution dans la révolution?』(1967)을 발간했다. 이 책은 게바라의 ‘포코 이론’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의 저서 중, 『이미지의 삶과 죽음 Vie et mort de l’image』(1994)이 국역되어 있다.

 

 

7) Fidel Castro(1926~ ). 쿠바의 대통령. 1956년 12월 2일, 약관 32세의 나이로 체 게바라와 같은 동지들과 쿠바 해안에 상륙, 12명의 게릴라들을 이끌고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에서 게릴라 투쟁을 전개했다. 1959년 쿠바 혁명을 완수, 그 해 2월에 수상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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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레랑스란...

 

“당신의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당신이 그 견해를 발표할 자유만은 옹호한다” 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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