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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티노 신부


 날씨가 봄이 다 됐는지 따뜻함이 몸에 다가온다. 발렌티노 신부는 사제관 창문을 열었다. 식복사 자매는 아직 오지 않았다. 새벽 5시 40분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늦는구나! 아직 식사시간이 안 됐는데도 투정을 부린다. 신부는 수단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새벽미사를 드리기 위해서다. 이 본당에는 수도자가 없기 때문에 사무장과 함께 아니면 혼자서 준비해야 했다.

 

 제의방에서 제의를 정리했다. 마을에 사는 신자 어르신들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젊은 사람 몇 명이 들어온다. 농촌 본당이라 어르신들이 더 많았다. 많아봐야 한... 30명 정도. 젊은 사람은 본당 근처 분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여교사 2명, 농사 지으러 일찍 귀농한 젊은 30대 부부도 있다. 필리핀이나 베트남에서 온 외국인 아낙네들과 남편들도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무장은 오지 않았다. 그는 핸드폰으로 사무장에게 전화를 걸려고 사제관으로 다시 들어갔다. 핸드폰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그 때 사무장 부인이 전화를 받았다. 이런 시간에 누구냐며 짜증나는 듯한 말투였다.

 "여보세요?"

 "저... 김 발렌티노 신붑니데이."

 "아, 네, 신부님요. 이 시간에 어쩐 일로?"

 부인의 말투가 환하게 변했다.

 "사무장님 계시능교?'

 "그 양반 지금 자고 있는데요."

 "죄송하지만 지금 미사 시간이 다 돼갖고 준비를 해야 되는데 사무장님 아직 오지 않아가 우예 됐노 싶어가 전활 드렸습니다. 이른 시간에 전화해서 죄송합니데이."

 "아, 뭐요. 신부님 부탁이면 당연히 들어줘야지요! 잠시만요. 여보, 일어나 보래이. 본당신부님."  

 하고 부인은 사무장에게 전화를 넘겨주었다.

 

 그런데 잠결인지 아팠는지 사무장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어데 아픕니꺼?"

 "신부님요, 미안합니데이. 제가 오늘 감기 몸살 걸리갖고 성당엔 몬 가겠심더."

 "우짜노...? 감기 빨리 나으시소."

 "참말로 미안합니데이."

 그는 핸드폰 뚜껑을 닫았다. 어허! 이거 참.... 신부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핸드폰을 가볍게 책상 위로 낮게 던졌다. 사제관을 나와 성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시간이 없었다. 평소보다 좀 늦게 일어난 것이다. 원래는 4시 50분에 일어나 씻고 성무일도를 바치고 해야 하는데 말이다. 어제 면내에서 본당 청년들 7명과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늦게 잤던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웬만하면 고해성사를 주려고 일부러 아침 일찍 일어난다.

 "이런... 미사 후에 고해성사 집전해야겠다."

 하며 허탈한 마음으로 제의를 입고 입장하기 전 기도를 바쳤다. 청년 교사 데레사의 풍금 반주소리에 맞춰 성가가 울러퍼지고 있었다. 데레사도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풍금소리가 평소보다 못한 것 같았다. 신부는 입당을 시작했다.

 

 성가가 끝나자 신부와 신자들은 성호경을 그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

 "오늘 미사는 저번 주에 돌아가신 김 안토니오, 황 체칠리아를 위한 연미사이고, 김 베네딕토를 위한 미사입니다."

 그리고는 양손을 모으고 참회의 기도를 시작했다.

 

 참회의 기도가 끝나자 무심코 고개를 들어 신자석 쪽을 보았다. 뒷자리에 웬 군인이 서 있었다. 이 근처에 군대도 없고 군대 간 사람이 없는데?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  휴가 맞아서 할머니 만나러 온 군인이겠지. 하고 그는 가볍게 넘겼다.

 

 미사가 끝났다. 그는 제의방을 나와 고해소로 향했다. 성당 끝에 있는 고해소는 연한 갈색으로 된 큰 나무상자 같다. 기다리는 사람이 몇 명 안 된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오늘 빨리 마치고 바실리오 신부랑 낚시하러 가야겠다. 그런데 고해소 옆에 군인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뭔가가 뉘우치려는 듯 그의 눈에 눈물이 떨어졌다. 좀 있다 군인의 고해 좀 들어봐야겠다. 발렌티노 신부는 문을 열고 들어가 고해성사용 영대를 걸쳤다. 작은 고해창은 작은 구멍들로 돼 있어 모자이크처럼 사람의 얼굴을 가렸다. 누군지 알듯 말듯하다.

 

 역시 시골의 할머니들의 고해답다. 내용인즉, "이눔의 영감탱이가 술을 마이 마시가...", "우리 며느리하고 말이 안 통해서 고새임더", "지난 번에 돈 몰래 까먹었심더." 이건... 음... "뭐라고예?", "나는 죄가 없는데 무슨 고백을 하라카는지 모르겠어예."

 

 더 골치 아픈 건 영어로 말하는 필리핀 아낙네였다. 발렌티노 신부는 아는 영어를 동원해서 영어로 말해 주었으나 아낙네는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부가 농촌에 왜 하필 외국인들을 불러들였노? 하며 신부는 답답했다.

 

 이제 사람들의 고해가 끝나고 군인만 남았다. 영대를 손에 접어쥐고 밖으로 나와 보았다. 군인 옆에 한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성당에선 그들이 말하는 소리가 울러 퍼져 신부의 귀에도 들렸다. 연인인 듯한 분위기였다. 어? 체칠리아 아이가? 신부는 그 아가씨의 세례명을 떠올렸다. 어쩐 일로 둘이 저래 앉아 있노? 둘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오빠, 이카믄 내가 불편하다. 탈영을 와 하는데?"

 "나... 군대 가기 싪어! 양심에 거슬려."

 군인의 목소리를 듣고 보니, 최전방에 있는 군인인 것 같다. 그의 손은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머리를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

 "오빠, 신부님한테 고해성사 받아라."

 "내... 하...느님한테 버림받았는데 무슨 고해성사고? 흑흑..."

 하며 군인은 흐느꼈다.

 "오빠, 하느님은 무엇이든 받아주는 거 배왔제? 그러이 오빠도 할 수 있을 거야. 괜찮아..."

 하며 아가씨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을 했다.

 

 신부는 그들을 부르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그냥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손을 내렸다. 그리고는 슬금슬금 문을 열고 가려는 순간, 군인이 몸을 일으켜 고해소로 향해 몸을 돌렸다. 신부는 황급히 문을 닫고 영대를 목덜미에 걸었다. 그리고는 성호를 그었다. 고해소 신자석의 군인도 함께 성호를 그었다. 가톨릭 신자여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군인이 말하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자 신부는 그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주었다.

 "괜찮아요. 고해성사는 하느님께 하는 겁니데이. 사제는 무덤에 가서라도, 총 맞아 죽어도 신자들의 죄를 말하지 않아예. 아무 염려 말고 고해하시이소."

 어느 정도 안심이 들었다 싶었는지 군인을 말을 시작했다. 군대라는 곳이 대한민국의 모든 젊은 남성들의 집단이어서 그런지 서울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말씀드려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고해한 지 1년 되었습니다. 그동안 성당에 잘 나가지 못했습니다. 개신교 교회당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고참들이 미웠습니다."

 

 그 말을 듣자 신부는 언짢았다. 아니 멀쩡한 성당 놔두고 왜 개신교 교회당에 가냐? 신자인 도리도 모르냐? 하긴... 성당 미사가 서 있다 보니 군인 입장에선 피곤할 만도 하겠지. 그냥 평소에 듣던 거라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고백이 평소와는 달랐다.

 "이런 말씀을 드려야 할 지 모르겠네요..."

 "네, 말씀하세요.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습니다."

 말만 이렇게 잘한다. 사제들의 거짓말이다. 아무리 들어주어도 마음에 따라서는 화가 나는 고백도 있고 기분 좋은 고백이 있기 마련이다. 대충 끝내고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김 신부는 지금 빨리 밥먹고 낚시 가야겠다는 마음 뿐이다. 

 

 군인은 한 동안 뜸만 들였다. 신부는 기다리는 데도 한계가 있는 듯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좁은 고해소의 특성상 답답하다. 군인은, 어떻게 해야할까? 이 신부가 나를 헌병에게 넘겨주면 어떡하냐? 여러 의심들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다.

 "신부님, 저 탈영병입니다."

 신부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고해사제는 어느 고해든지 침착해야 한다. 

 "제가 탈영을 한 것은 고참들의 알게 모르게 하는 괴롭힘과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고참들이 저더러 일을 못한다고 말리곤 따돌렸습니다. 그 때 전 화가 났습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은 어디서나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형제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야, 이런 좋은 코멘트를 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 신부는 속으로 무척 기뻐했다. 군인은 고백을 계속 이어갔다.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이라는 국가가 미친 것 같습니다. 왜 젊은이들만 살인연습을 시킵니까? 전 어릴 때부터 폭력을 무척이나 싫었습니다. 애들과 선생이라는 사람에게서 많이 맞았기 때문입니다. 전 폭력영화는 보지 않습니다."

 신부는 마음이 아팠다.

 "조금만 버티면 되잖아요.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줘요. 나도 군대 있을 때 힘들었지만 그게 다 인생 경험입니데이."

 사실 신부는 이런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했다. 지금 상황이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언제 군인들이 총을 들고 이 성당에 모여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시간? 그 시간이 얼마나 낭비인지 아십니까?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요? 인생 경험이라고요? 그게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군대 나와도 맨 같은 사람, 더 나빠진 사람 많이 있습니다. 작은 것만 보고 함부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모두 살인기계가 됩니다.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절대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복학하면 시간이 빠듯한 선배들을 보면 막막합니다."

 답답한 신부는 고해성사용 영대를 걸친 채 고해소 사제석의 문을 열고 신자석으로 향해 가서 말했다.

 "이봐요. 여긴 성당이지. 국회가 아니야."

 군인은 놀랐으나 다시 안정을 찾고 무릅받이에서 일어나 말했다.

 "신부님, 성경에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돼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서에 사람을 죄짓게 하는 자는 누구나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죽어야 한다, 보복하지 말라고 적혀 있습니다. 왜 이 구절을 무시하십니까?"

 고해소 앞 성당 뒷자리 의자에 앉아 두 사람의 대화가 계속 되었다. 여자친구는 멀찍이서 두 사람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면...  강도가 자네 집에 쳐들어 와서 물건을 뺏고 어머니와 여동생, 여친을 강간하면 어떡할 건데?"

 그 때, 군인의 여자친구가 소리쳤다.

 "신부님,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너무 기가 막히네요! 전 신부님 좋은 분인 줄로 알았는데 실망이네요!"

 "그런 말이 아니라..."

 신부는 쩔쩔매었다. 빨리 이 상황을 빠져나가고픈 생각이 들었다.

 

 그 때 군인이 침착하게 말햇다..

 "신부님, 그런 질문 너무 어리석어서 대답할 수 없습니다. 강도가 오히려 약할 수도 있고 누구 하나가 강도와 싸울 수도 있어요. 그런 질문은 함정 질문입니다. 대답할 가치가 없습니다."

 이내 침묵이 흘렀다. 신부는 털썩 의자에 주저 앉았다. 사제가 된 지 10년만에 이런 복잡한 문제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탈영병을 대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지만 나보다 더한 신부도 있겠지. 탈옥수나 전방의 탈영병을 대하는 신부는 마음이 골치 아플 거야.

 

 고개를 숙인 신부는 잠시 기도를 했다.

 '주님, 전 지금 힘듭니다.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도록 제발 저에게 힘을 주소서.'

 고개를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니 예수의 팔이 벌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냥 받아들이라고... 내가 지금 미치겠는데... 신부는 어이없고 기가 막혀서 웃었다.

 "신부님, 괜찮으세요?"

 하며 군인이 말했다. 옆에 여자친구도 와 있었다. 신부는 여자친구를 보며 말했다.

 "잠깐 밖에 가 있을래요? 지금 고해성사 아직 안 끝났어요."

 "네, 그럴게요. 오빠, 힘내,"

 말하고 여자친구가 성당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해가 이미 하늘로 올라 떠 있었다.

 

 신부는 고해성사를 계속 집전했다.

 "알겠습니다. 그런 질문 이제 안 하겠습니다. 군인은 명령에 따릅니다. 그건 사제인 저도 같아요. 주교님 명령 없이 움직일 수 없는 게 사제와 군인과 같은 겁니데이."

 "네, 저도 압니다. 하지만 전 양심의 소리가 중요합니다. 전 사람을 죽이는 그 살인연습을 할 수 없습니다. 폭력을 싫어하는 것, 그것이 제 신념이고 양심입니다."

 "양심이라... 그러면 형제님의 동료들은 모두 비양심이라는 말인교?"

 "그건 양심과 상관 없습니다. 그네들은 자기 의무를 다하고 있으니까요. 그것이 양심 아닙니까."

 어이가 없고 시원하지 않은 대답이었다. 보통은 이런 질문에는 군인이나 일반 사람들은 쩔쩔매기 마련인 것이 군종사제 시절의 경험이었다. 그런데 이 군인은 뭔가 달랐다.

 "국방의 의무가 국민의 의무입니다. 그걸 아나요? 누가 쳐들어 오면 그것을 막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네, 압니다. 그러면 신부님은 국민의 기본권이 뭔지 아십니까?"

 그 때 신부는 말을 머뭇거렸다. 군인은 말을 이어갔다.

 "한국은 그동안 기본권리를 무시하고 의무만을 강조했습니다. 의무라는 게 뭡니까? 서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합의하는 것이 아닙니까. 서로 좋아서 합의한 것이 의무입니다. 억지로 시켜서 하는 것은 절대로 의무가 아닙니다.

 최전방 부대, 어떤지 아세요? 언제 전쟁이 날 지 모르는 상황에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희 부대는 헛 죽음이 되는 거고, 저는 양심에 어긋나는 살인을 하게 됩니다. 사람 하나 죽이는 게 사람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는지 아십니까?

 "아, 그래도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지켜야지 탈영을 하면 어떡합니까?"

 "제가 탈영을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십니까? 저도 함께 싸우고 싶습니다. 이 나라는 도저히 평화에 대해서는 나약하다는 생각 밖에 없어요. 젊은 사람들 시간이 헛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전 평화에 대한 신념으로 탈영을 결정했습니다."

 이제 신부는 지쳐버렸다. 더이상 논쟁해 봐야 화가 나게 되고, 감정에 앞서 욕을 해대는 사제답지 않게 되는 문제가 있다. 어쩔 수 없다. 그냥 탈영을 관용하는 수밖에... 그 군인도 지쳐버렸는지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신부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무심코 지나쳤던 그것을... 평화에 대한 복음의 말씀, 병역거부하다 순교한 무수한 성인들, 그리고 자신이 발렌티노 성인의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을 말이다.

 

 발렌타인 데이는 상업성에 묻히고 순수함이 많이 퇴색되었다. 그 원래의 의미가 연인의 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발렌티노 신부가 로마의 어느 병사의 사랑을 보호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어느 병사가 연인과 함께 성당으로 찾아와 발렌티노 신부를 찾아왔다. 당시 로마의 법에 따르면 결혼을 하면 병역이 면제된다고 한다. 그래서 로마는 군인의 혼인을 막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었다. 그 어려움을 알고 발렌티노 신부는 그 병사를 혼인시키고 자신이 붙잡혀 순교를 했다고 한다.(발렌티노 신부는 감옥에서 자신이 죽기 전에 몸을 제대로 삼아 생애 마지막 미사를 드리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것이 발렌타인 데이, 즉 2월 14일 성 발렌티노 축일의 유래이다.  

 

 수단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상본 하나가 쥐어졌다. 이번에 종신서원을 하는 수사들이 본당에 준 상본이었다. 그는 본당 출신 수도자 중에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상본을 꺼내 보니, 평화의 기도가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신을 버리고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니...

 

 그 구절을 보고 신부는 깨달았다. 이사야 예언서와 복음서에도 나와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다시는 군사훈련을 하지 않으리라. 그래, 그 날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말씀도 있어.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비록 국가의 법이 폭력적일지라도 하느님의 법은 사랑으로 하는 것이다. 그는 그 군인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탈영을 도와주기로 했다. 사제는 교구장 주교로부터 자신의 고해성사권을 박탈당하거나, 총이나 칼로 위협하고 고문을 당할지라도, 돈으로 매수를 당할지라도 절대로 신자의 죄를 발설해서는 안 된다.

 신부가 입을 열었다.

 "형제님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죠. 그렇지만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그것이 자유니까요.

 "정말요? 신부님, 고맙습니다.

 "보속으로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바치세요."

 하고 신부는 그에게 평화의 기도가 적힌 성 프란치스코 상본을 주었다.   

 

 군인은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저 여자친구와 혼인신고를 했습니다... 휴가 중에 완료를 했습니다... 이젠 부부가 돼서 외국에 망명해서 애도 낳고 살려고요."

 "돈이 많이 들 텐데 준비 다했어요?"

 "네, 군대가기 전에 여자친구와 유럽여행 가기로 했었는데, 그게 망명의 비용이 됐네요!"

 "일자리는? 망명하면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데?"

 "아는 사람이 유럽에 일하고 있어서 그곳에 가면 될 거예요."

 "이제 하느님 앞에서 혼인을 해야 하겠는데, 밖에 여자친구 데리고 올래요."

 "네, 알겠습니다."

 "아 참, 사죄경 하겠습니다."

 "네."

 하고 군인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신부는 손을 들고 길게 사죄경 앞부분을을 외우고 십자가를 그으면서 마무리를 했다.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

 하고 신부는 군인의 머리를 손으로 갖다 대고 떼어 내렸다. 군인의 마음이 자유로워졌다. 

 

 군인은 밖에 나가 여자친구를 불렀다. 여자친구는 성당 안으로 들어왔다. 둘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있었다. 십자가의 예수는 두 팔을 벌려 두 사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신부는 제의방으로 들어가 혼인성사예식을 할 것들을 들고 나왔다. 군인은 제의방 앞에서 작은 탁자를 들고 제대 앞에 놓아두었다. 그리고는 반지를 앞에 놓아두었다. 반지는 5천원 짜리 묵주반지 두 개였다. 신부는 그들 앞에 놓여진 반지를 보고 마음이 흐뭇해지는 것을 느꼈다. 5천만 원이나 천 억 정도 하는 다이아몬드 반지보다 싸고 볼품 없어 보이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반지가 더 아름다워 보였다.

 

 오늘의 혼인예식은 어느 혼인미사보다 더 아름다웟다. 두 신랑신부의 모습은 그냥 옷과 군복이었으나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보다 더 아름답다. 두 가난한 부부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는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 밖에 없을 것이다.

 

 혼인 예식을 마치자 신부는 제의방으로 인도했다. 본당 뒷쪽 문으로 해서 차를 태우고 보낼 생각이다. 일단 남자은 군복부터 벗었다. 신부는 자신의 속옷과 바지와 셔츠를 내주었다. 남자가 옷을 다 갈아입은 뒤, 김 신부의 차에 탔다. 그들은 공항으로 향했다.

 

 다행히 공항에는 군인들과 경찰들이 오지 않았다. 아직 탈영기간이 걸리지 않았는가 보았다. 마침 바로 공항에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가 있었다. 남자가 신부에게 말했다.

 "신부님, 정말로 고맙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지금 아주 급하니 얼른 가세요. 헌병들에게 붙잡히지 말고요."

 두 부부는 공항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래도 아쉬운지 뒤를 돌아서 손을 흔들었다. 신부도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신부는 좀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지금 뭘한 지도 모른 체했다. 그냥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신학생 시절 수도원에서 피정을 할 때 어느 노 수사가 한 말이 생각났다.

 '언젠가 학사님은 발렌티노 성인이 한 일을 하게 될 것이야.... 허허허."

 그리고 어느 책에서 읽은 구절도 생각이 났다. 어느 유명한 미학자가 한 말이다.

 '진정한 인간은 탈영병이다.(진중권)'

 그 구절이 생각나자 신부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 때였다. 많은 경찰과 군인들이 공항에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미 비행기는 이륙한 지 오래되었다. 햇빛이 큰 유리창 사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신부는 배가 고팠다. 그리고 아직 숙취해소를 못했는지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마침 공항 안에 문을 연 음식점 하나가 보였다. 저기 가서 국밥 한 그릇 시원하게 묵자. 그는 그곳으로 향해 빨리 걸어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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