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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6/04

장애인들에게 다양한 고용의 기회를...

 저번에 장애인 취업박람회가 있어서 가보았다. 부모님께 죄송하고 일자리도 찾을까 해서 가보았다. 많은 장애인들이 일자리를 찾으려고 모여들었다. 나도 거기에 끼여서 같이 들어가서 면접을 보았다. 장애인을 고용하는 업체가 경북지역에서 많이 왔는데, 구미와 칠곡에서 많이 왔다. 그 중에서는 고령도 보이고 경주, 경산, 대구도 보였다.

 안내서를 펴보니, 업체들은 거의 공업체들이 많이 와 있었다. 주류 산업역사론으로 보면 2차산업이다. 핸드폰 공장, 종이컵 공장, 부품 공장 등등으로 거의 2차산업이다. 장애인들이 일자리를 찾는데 무슨 불만이냐고 물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잘 보면 거의 이러한 고용현상은 오히려 장애인을 더 멀어져 보이게 할 수 있다.

 외국의 경우를 보면 장애인들이 3차산업, 서비스업에 고용되 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정신지체인들 중 낮은 등급의 사람들도 함께 3차 산업에서 일한다. 이것을 보면 한국은 장애인들의 고용을 외치면서도 한편으로는 왜 2차산업에만 집중하게 만들었을까?

 장애인들을 고용하는 업체들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에 많이 있지 않다. 대다수가 외진 농촌지역이나 산골짜기에 위치돼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게다가 기숙사 생활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직도 의식이 바뀌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장애인 시설들이 산골이나 농촌의 외진 곳에 위치해 있듯 고용업테도 그곳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는 의식이다. 이러한 고용현실은 장애인들의 사회참여를 유도하기는커녕, 오히려 소외하게 한다.

 존재가 의식을 좌우하듯이 공간이라는 게 사람들의 의식을 좌우하는 것이다. 마치 독재자들이 예술공간들을 서민들이 다가갈 수 없는 곳에 놓았듯이 말이다. 장애인이라는 존재를 산속에다 옮겨놓음으로써 그들이 나오지 말아야 할 사람, 가까이 하기에는 먼 사람으로 편견을 강화해 버린다.  이러한 편견의식은 장애인들이 사회로 못 나오게 하는 벽을 만들어 버린다. 이러한 벽을 쌓고 장애인 고용해야한다고 막 떠든다면 위선일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은 수용시설 의식이라 부르고 싶다. 장애인들은 사회복지와 재활치료라는 이름으로 수용시설에 많이 수용된다. (요즘은 그룹홈이 있어서 사회복지학계에서 수용을 점점 해체되도록 하고 있다.)  이 수용시설이 주로 농촌의 외곽지역에 위치해 있어 다가가기가 매우 힘들다. 그래서 장애인들의 사회참여는 차단이 되고 편견은 높아져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편견 때문에 한 마을에 장애인 복지시설이 생기면 주민즐의 반발이 거셌다. 감시와 처벌의 장화는 장애인들 자신들의 삶의 의식마저 비인간화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수용시설 의식은 그 후에 편견을 만들어 버리고 차별과 폭력을 동반해 왔다.  그래서 장애인들을 불쌍한 사람, 거지, 나와서는 안 되는 사람 등의 편견의식을 가져왔다. 이런 의식은 아직도 장애인들을 바라보는 시각의 잔재로 남아있다.

 게다가 장애인들의 직업재활이고 떠드는데, 진정한 직업재활은 장애인들이 2차 산업에다가 가둬두고 산 속에만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하고 함께 노는 것이 진정한 직업재활이다.

 예전에는 장애인들이 불편해도 자신이 할 수 있으면 일을 했다고 한다. 이런 아름다운 고용전통이 우리에게 있다고 알려진는 것은 지금의 상황이 그렇게 열악한 증거가 아닐까? 옛날 장애인들은 2차 산업 뿐만 아니라 3차 산업, 1차 산업에도 종사했다.(정창권의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의 고용현실은 2차산업에만 집중할 뿐 1.3차 산업은 소수이다. 이렇게 되면 장애인 고용증가는 커녕, 실업률만 높이는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할인점이나 커피숍, 대학 내 식당들에서 장애인 학생이나 일반 장애인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있다해도 직업교육을 받고 주방 안에서만 일하는 장애인들 뿐이다. 이런 현상 때문에 장애인 대학생들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어도 못 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중앙에서는 청년 실업률이 높다, 노인 일자리 창출하자고 하지만, 장애인 고용은 여전히 약한 편이다. 장애인들의 2차 산업 고용집중은 오히려 실업률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 것이다. 장애인들에게 평등한 고용혜택으로 실업률을 줄이는 것이 좋다. 많은 장애인들이 사회 진출로 인해 편견의 벽을 깨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고용확대로 인해서 실업률은 떨어질 것이다.

 경영자의 편견도 버려야 한다. 일부 경영자들은 아직도 장애인들을 고용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왜냐하면 장애인들은 느리고 부담스럼고 일을 못한다는 편견을 늘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비장애인의 눈으로만 편견이다. 신체의 하나가 불편하면 다른 신체 하나가 발달한다는 의학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보면 장애인들의 고용이 많이 있고 얼마나 좋은지를 모르고 있다. 단지 몸이 불편하다는 편견과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또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보장하라고 늘 외친다. 그렇다. 나도 그들의 말에 동조한다. 그렇지만, 일부 노동자들 역시 경영자와 다를 바 없다. 그들도 역시 자신들만 모여서 일을 하고 어울린다. 장애인 노동자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은 재수없다고 따돌리기도 한다. 이로 인해 자신들의 공고한 벽을 만들어 놓고 장애인과 외국인은 따돌리고 나서 자기 밥그릇을 챙긴다면 정말 큰 위선이다. 노동자들은 장애인과 외국인들을 하나의 인간의 띠로 묶어 생각해야 한다. 

 장애인 개인은 자신이 약한 사람, 보호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런 생각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약자로만 많이 생각하지 말고 장애를 자신의 개성으로 보는 생각의 훈련이 중요하다. 자기 발로 사회로 나와 힘차게 외치는 것이다. 누구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야할 것이다.

 실업률이 높다는 오늘, 장애인들에게 다양한 노동기회를 많이 만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장애인들을 하나의 사회구성원으로 느낄 때까지 많은 편견을 깨뜨려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2차 산업 집중을 해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사의 잘못된 편견을 버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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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보다 농민의 아픔을...

오늘 황우석 교수가 기증한 난자를 실험에 사용했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그 발표를 한 순간, 네티즘들이 황 교수를 구하려고 난리가 났더군요! 노벨상 수상후보에 올랐다는 이유와 난치병 환자를 치료한다는 이유로 너무 띄워주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은 난자없이는 배아복제가 불가능하다라는 것이 드러난 겁니다. 하지만 그 윤리적인 문제를 제쳐두는 현실은 다른 곳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언론이란 게 심판을 받아야 할 1순위가 아닐까 할 정도랍니다.


생각없는 네티즌이 황우석 씨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막가파로 쳐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보수 신문들도 그 영향이 아주 크다는 겁니다. 아, 도대체 농민들의 아픔은 금방 잊고 황우석에게만 쏠리는 현실은 힘이 빠지게 하네요! 이런 영웅 만들기는 사회적 약자를 소외시켜 버리는 효과가 있어 권력에 이용될 수 있습니다.


난자를 기증하겠다는 여자들,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자신들을 먹여 살리는 농민들의 아픔은 생각하지 않고 심한 후유증을 무릅쓰고 기증하는 반생명적인 생각을 합니다. 이는 한국은 이미 생명의 문화가 약해졌다는 증거죠! 암울한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은 우리가 그만큼 생명적 약자를 무시해 왔다는 것입니다. 장애인들, 불치병 환자들에게 인간다움의 정신이 아닌 극복과 경쟁의 시각으로 바라본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체줄기세포는 생각하지는 않고 암세포가 증가할 위험이 있는 배아줄기세포를 너무 띄워준 것입니다. 이런 극복의 시각은 결국 난치병 극복과 국익이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는 농촌에도 미치게 되죠! 생명공학의 기업유착으로 인해서 GMO를 만들어내고 그걸 이용해서 약탈하려는 기업들이 많습니다. 쌀개방을 하게 되면 중국에서 만든 불량쌀을 먹게 되는 겁니다. 이런 것은 김치파동과 같은 농어산물 사건에서 드러났습니다. 중국은 이미 돈에 미쳐 있습니다.


그 뒤에는 미국과 다국적 기업이 도사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생명공학으로 생명을 희롱하고 떼돈 번다는 황우석보다, 우리를 살리고 죽는 농민을 더 생각해야 합니다. 생명공학은 연구를 한 번 하면 떼돈을 벌 수 있지만, 농사는 자신을 죽이고 남을 살리는 숭고한 것입니다. 이런 숭고함을 돈으로 치부해 버리고 환경을 파괴하는 농업을 하라는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에 희생당하는 농민들을 생각합시다.


언론은 이런 농민들과 자연의 사정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아니 무시하는 것이 많습니다. 보는 우리도 반성해야 합니다. 밥에 든 쌀을 고마워 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고 막 먹어버리는 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오늘 황우석 살리기를 보고 느낀 것은 생명의 문화가 한국 사회에 이렇게 부족한가, 국익과 극복 이데올로기가 이렇게 심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너무 슬픕니다.

 

황우석은 욕 먹어도 잘 먹고 잘 삽니다. 그러나 농민은 부동산 투기로 고통받고 부채로 고통받고 일해도 한만큼의 대가가 적어 대기업 공장 노동자보다 착취를 당하고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황우석을 지나치게 띄워준다면 우리의 밥상은 구데기 밥상이 될 겁니다. 얼마나 끔찍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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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에 반대한다.

나는 솔직히 비정규직법을 모른다. 그러나 비정규직법에 대한 언론의 행방을 볼 때 그 법이 악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선 비정규직법 이름 자체가 문제다. 내가 알기로는 기한을 두고 갈아치우는 법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노동시장의 유연화는커녕 마치 노예화가 되는 것이다. 고용자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고용불안의 상태에선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국가에 의해 비정규직을 만들어 놓고 고용과 해고를 제멋대로 하는 것은 오히려 고용불안만 가속시키게 돼버린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한국을 망치게 돼버린다.

 이 법과 비정규직이라는 명칭은 애초에 쓰지 말았어야 했다. 이런 말 때문에 기업들이 제멋대로 고용과 해고를 반복하는 비윤리적인 횡포를 본다. 이는 취업자들에게는 불리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고용상태가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통계의 편견일 수 있다. 비정규직이 많은 산업지역에는 고용과 해고를 반복하는 상태다. 조기퇴직도 늘어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비정규직은 애초에 없어야 한다. 비정규직은 일반 사람뿐만 아니라 장애인들에게도 불리한 법이가. 장애인들은 노동시정에서 얼마든지 비정규직이 될 수가 있다. 장애인 노동상황이 2차산업으로 집중돼 있고 다양하지 못한 것을 본다면 비정규직이 될 가능성이 많다.

 사람 하나 살리지 못하는 정부라면 등을 돌려야 옳다. 나는 비정규직에 반대하며 취직을 미루겠다.

 열린우리당 정부는 좌파정부가 아니다. 뉴라이트 쪽에서 말하는데, 이것은 착각이다. 노동자를 죽이는 이런 악법과 장애인 고용을 불안하게 하는 악법을 만든 정부는 절대 좌파가 아니다. 사람 하나 살리지 못하는 정부가 어찌 좌파겠는가.

 이번 비정규직법안 통과는 결국 한국의 고용불안을 가져오게 되며, 장애인 고용도 잘 안 될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전망한다. 왜 비관적이냐고? 현실이니까.

 나는 올해도 취업이 잘 되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돈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것은 늘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고용불안만 가져오는 법에 반대하면서 나는 오늘을 횡설수설한 글 한 편 쓰면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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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교육보다 종교의 자유를...

 종교계가 사립학교법에 반대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종교교육을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개방형 이사제로 인해서 종교교육을 못하게 한다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종교계 학교의 종교수업은 인성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교재 내용을 펼쳐보면 중립성은 온데간데 없고 자기 종교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어느 학교 종교교재를 펼쳐보면 다른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자기 종교의 교리서에만 나오는 얘기가 거의 다 차지한다. 어느 경전에 나올 법한 이야기, 교리가 나온다. 이게 교리서인지 종교 교과서인지 모르겠다. 이걸 가지고 청소년들에게 교리교육을 시키는 거나 같다고 볼 수 있겠다. 마치 그물망을 쳐서 아무 물고기를 잡는 것 같은 밀렵꾼들의 꼼수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무시한 종교계 사립계 학교들이 개방형 이사제가 도입되면 종교교육을 못하게 된다고 아우성이다. 그럼 종교교육이 도대체 누구를 위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자기 종교를 위한 것인가? 인간을 위한 것인가? 성경에 나와 있듯이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난 게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난 것이다라는 말씀을 잊은 게 아닌지 묻고 싶다.

 종교교육은 물론 종교계 사립학교의 권리이기도 하다. 자기 종교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건 그들만의 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립성이 있어야 할 교과서에 자기 종교만 넣는다면 이건 종교 교과서가 아니라 일종의 교리서에 불과하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대한민국 헌법과 인권을 위반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권리와 사랑을 말하고 종교의 자유에 관한 교령까지 선포했다. 그러고도 자기 종교만 소개하는 것은 위선이다.

 그리고 사립학교법 반대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종교계는 청소년들의 말에 귀를 닫고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을 안 가져오면 기합을 준다든지, 미사나 예배를 강제적으로 참례를 한다든지 하는 현실은 청소년들의 말은 없고 어른들의 말만 있다. 그들에게 학생은 공부만 하는 존재, 교장과 교사, 이사장 같은 어른들의 말을 들어야 하는 존재로만 보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인권이란 과연 사치일 뿐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싶다. 도덕과 윤리, 종교 과목에 서로에 대한 배려를 하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여전히 종교를 강요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는 종교는 인간의 마음의 휴식과 인간의 존재이유를 설명해 주지 못하는 일종의 공허요 장식품일 뿐이다.

 종교교육을 못한다고 아우성을 치지 말고 청소년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주라. 종교의 자유는 어른들만의 권리가 아니다. 청소년들에게 먼저 종교의 자유를 줌으로써 원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자기 종교만 소개하는 종교교과서는 그만 하고 여러 종교를 소개하는 책을 교과서르 삼았으면 좋겠다. 종교 교사는 자기 종교의 성직자나 수도자가 아닌 다른 종교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와서 가르치고 소개하는 강연회식의 수업을 진행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을 해본다. 또한 예배 같은 종교의식은 청소년의 자유에 맡기고, 신자 청소년만 하면 된다. 그리고 공적인 자리인 교실이나 강당에는 십자가 같은 종교의 상징이 아닌 다른 걸로 대체를 했으면 한다. 학교 성당이나 교회당에만 있어도 얼마든지 종교학교라 할 수 있다. 

 학생들의 자치권을 인정해서 종교서클을 만들어 지도교사를 붙여준다면 더 좋을 것이다. 자기 종교만의 종교서클만 만들고 남의 종교서클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종교교육과 종교의 자유는 말 뿐이고 강요요 위선이다. 그것은 종교 창시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다.

 종교의 자유는 인권이다. 그것은 어른들만 독점해서는 안 된다. 어느 집단이 독점해 버리면 그것은 인권이 아니다. 청소년들의 종교의 자유가 종교교육의 시작이다. 다른 종교를 관용하는 태도가 한국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듯이 종교계 사립학교도 관용의 태도를 보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억지로 강요를 하거나 조용하게 강요한다면 종교는 결국은 공허한 외침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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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정이 아니라 협박이다!

 최근 처음으로 미국 쌀이 수입된다고 한다. 이를 막기 위해 농민들이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미 들여온 미국산 농산물이 많은데, 왜 하필 쌀까지 들여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농민들은 죽어가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이런 정부의 정신 나간 정책은 기득권이 미국과 가까웠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반미 좀 하면 어떠냐", "내가 대통령이 되면 꼭 사과를 받아오겠다"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부터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다. 권력야당의 지도부는 반미하면 안 된다는 말로 자기 당의 농촌 출신 의원들 마저 소외시키는 등의 태도를 보이고 있었고, 이라크 파병 동의안도 거대 여야 같이 통과시켰다.

 예전에도 농산물 개방에 대해 말이 많았다. 우르과이 라운드, 칠레 FTA 같은 협정들이 농민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통과시켰다. 이번에는 기본적인 식단인 쌀마저 수입해서 먹어야 하는 현실이 다가오고 있다.

 예전에 개그 콘서트에서 부자와 빈자들의 차이를 강조하는 코너가 있다. 재밌게 봤는데, 지금은 하지 않는다. 거기 보면 "나는 유기농 식품을 먹고"라고 할 때, 상대편에선 "나는 수입 농산물 어쩌고"라고 말하는 게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이는 무슨 말인가? 야극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경고다. 그러나 당시 시청자, 방청자들은 개그라고 흘러넘겼을 지 모른다. 개그맨과 제작자 자신조차도 그것이 개그라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 말을 지금 깨달아 보면 우리의 뒷통수를 후려치는 듯하다.

 수입 농산물은 사실 그대로 들여오는 건 없다. 농약을 쳐서 들어온다고 한다. 인체에 해롭다는 농약을 뿌린다고 예전부터 있어왔으나 우리는 먹고 안 죽으면 되지라는 말로 넘기고 있다. 그러나 나중에 어떻게 될 지는 아직 모른다. 요즘 아이들이 아토피 피부염을 앓고 있다고 한다. 과자 안에 있는 성분도 문제지만 수입산 밀가루나 재료가 눈에 띄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입 농산물에 대한 감시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이미 많이 들어온 수입 농산물이 있는데도 더 개방하라는 미국의 요구도 문제지만, 미국이라면 받아들이는 한국 정부는 더 문제다. 더 들여와서 뭐 하겠다는 건가?

한미 FTA와 소파 같은 미국과의 협정은 우리가 주권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다. 보통 무역이라는 것은 자기의 것을 바꾸는 교환에서 나온다고 본다. 그 교환은 강제로 개방하는 것이 아니라 비밀원칙을 지키면서 교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 개방해 버리면 남는 게 없고 상대방만 살찌게 되고 자기는 거지가 되는 자살이 된다.

 미국 같은 기업이 센 곳은 특히 위험하다. 지적재산권과 미국 특허권이라는 걸 내세워 농산물을 빼앗게 될 것이다. 이미 우리 토종 생물들이 미국 지적재산권에 등록이 돼 있다고 한다. 만약에 쌀마저 미국 기업에 의해서 좌우된다면, 농업은 위험해질 것이고, 굶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사회 양극화 현상이 심해질 것이다. 사실 제3세계 국가가 못 사는 것은 선진국의 비인간적인 태도이다. 기업이 국가를 대신하게 되버린 곳을 보면 양극화가 심하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경제재제를 해버리면 결국은 그 사회는 도탄에 빠지게 되고 만다. 그 경제재제란 기업에 의한 농산물 시장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통일 정책에도 상당한 지장을 초래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한미 FTA 자체가 미국기업의 북한 침략전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협정에 따라 미국 허가 없이는 절대로 북에 식량난이 극심해도 못 보내는 건 아닐가 하는 우려를 표해 본다.

 국내의 농업생산도 망하게 돼 있다, 한국의 농업 70%가 거의 쌀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부 다 농협이라는 금융기관에 빚을 내어서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만약에 쌀농사로 평생을 살아가는 농민들에게 경쟁력 있는 쌀만 생산하라고 한다면 농민 보고 죽으란 이야기가 된다. 미국의 쌀과 중국산 쌀이 들어오면 싸게 팔게 돼 있다. 농민들이 지은 쌀은 물론 비싸게 돼 있다. 나는 쌀이나 농산물이 비싸게 파는 건 반대한다. 수입 농산물이 아무리 많이 들어온다고 해도 비싸게 값을 올리고 판다면 결국은 수입쌀을 찾게 될 것이다. 수입쌀을 먹게 된다면 인체에 재앙이 우려가 된다. 아이들에게 아토피 피부병과 농약에 들어있는 살인 물질로 사람이 병들게 되면 누구의 책임이겠는가?

 농민들은 수입 농산물로 더욱 더 빚을 내야 하는 상황이 반복이 될 것이다. 싸게 파는 농산물만 찾는데, 지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농촌 자살률이 높고 노인 인구도 많은 현실에서 기초 농산물을 개방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 없다. 미국 기업에 의해서 지어야 하는 농산물은 결국은 나라와 사회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

 미국은  야비한 나라다. 자기 기득권에 도전하면 가차없이 제재해 버리는 잔인함도 가지고 있다. 게다가 한미 협정으로 미국이 하는 것을 따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은 결국은 독재를 가져올 수 있고 민주주의는 또다시 망각할 수 밖에 없다.

 이런 현실 속에서 정부와 기득권은 인민을 생각하지 않고 미국의 눈치와 자기만 보고 있다. 농민이나 서민은 더욱더 가난해 지고 결국은 OECD에 들지 못하게 만들 것으로 생각이 된다.

 기득권만 강화하려고 미국에 붙는 사람은 어리석다. 그리고 나중에 미국 아닌 강대국들에게 아부하는 사대주의적 잔재는 이제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이번 FTA는 사대주의 중의 하나로 보인다. 이는 결국 농업의 사대주의, 기업의 사대주의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 기득권만 위해서 산다면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사회는 비인간화가 될 수 밖에 없다.

 나는 FTA에 반대한다. 그것은 절대로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사대주의자들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건 미국 기업에 붙어서 어떻게든 기득권을 보장하려는 욕심에 불과한다. 신자유주의가 현실이 아니다. 불가피가 아니다. 그것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이상일 뿐이다. 현실은 우리 주위를 돌아보는 것에 있다. 강자가 약자에게 안 하면 죽는다는 식의 생각은 강자의 이상일 뿐 우리의 현실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FTA와 같은 미국과의 협정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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