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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과 헨리 데이빗 소로

 헨리 데이빗 소로의 책 월든을 본 적이 있다. 월든 호숫가에서 일어난 일들을 적어놓은 책이다. 텔레비젼에서는 포도광고에 "콩코드"가 나온다. 그 콩코드가 월든 호숫가가 있는 곳이다. 그곳에 오두막을 짓고 혼자 일하면서 살게 된다.

 권정생의 우리들의 하느님, 현대 산문 문학 중에서 최고로 꼽히는 듯한 작품이다. 권정생은 안동시, 그것도 촌에 가까운 조탑동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마을 교회당 종지기로 일하며 글을 쓴다. 그리고 작은 오두막을 짓고 평생을 그곳에서 살아간다.

 헨리 데이빗 소로와 권정생은 신앙에 있어서도 같은 모습을 보인다. 교파는 다르겠지만 개신교 신앙이다. 소로는 월든 호숫가에서 혼자서 살았던 반면, 권정생은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다.

 헨리 데이빗 소로는 호숫가에 사는 생명들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긴 하나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관찰자의 입장은 한국과 미국의 당시 자연관의 차이여서 그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숲 속에 생물들을 자세히 알려고 노력하는 것은 먼저 사랑하려면 알아야 하는 서구식 사고방식이다.

 권정생은 오두막 주위에 있는 생물, 사물들을 친구처럼 대했다. 그래서 동화에서 사회적 약자들과 동물들이 나온다. 우리들의 하느님에 쥐 이야기가 나온다. 쥐와 친구가 되기 위해 애쓰는 모습들을 보이고 있다. 그것이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집필의 소재와 경험이 된다.

 헨리 데이빗 소로는 호숫가에서 있으면서 전쟁에 대한 직접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것이 시민의 불복종이라고 한다. 세금을 내지 않아 감옥에 갇히기도 했는데 친척이 보석금을 대신 물어주고 풀려났다고 한다.

 권정생은 동화로 현실을 바라보았다. 대부분 민족, 통일, 주위의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주제로 많이 썼다. 그러다 보니, 국가기관에서 권정생을 조사하기도 했다고 한다. 권정생 죽은 이후 다시 한 번 탄압을 받았다. 국가권력은 그의 산문 우리들의 하느님을 불온서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는 후기에 폐결핵이 생기는 바람에 죽게 된다. 반면 권정생은 젊은 날에 폐결핵에 걸리지만 70까지 오래 산다. 그리고 2007년 우리 곁을 떠났다.

 권정생에 대해선 사람들은 이름을 모른다. 그러나 강아지똥의 작가라고 하면 사람들은 이제야 깨닫는 현실을 보니 아쉬운 마음이 든다. 헨리 데이빗 소로 역시 현실도피로만 알고 있는데 현실참여인 시민 불복종 운동을 만들었다는 것은 유명하지 않다.

 어쨌거나 이 두사람을 너무 조명한 나머지 신격화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지금 사람들의 의식이 오히려 그들에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생전에 두 사람은 자신을 밖에 너무 알리는 것을 무척이나 꺼려했으니 말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사는 것은 "미쳤어"라는 대중가요를 떠올릴 지 모른다. 그만큼 한국 대중사회는 물질적인 상태가 됐다는 것이다. 적응한 대중들은 그들에게 반기를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그들의 삶을 따라 살고자 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성직자, 수도자, 목회자마저 물질, 감각으로 가버린 시대다. 그들에게 이 두 사람처럼 살라고 하면 손사래를 칠 것이다. 나도 그렇게 살기는 솔직히 두렵다! 마음만 하고 싶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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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들에게 등급을 묻지 마라

 진보적 장애인들마저 장애등급에 대해서 물어본다. 어느 진보적 장애인 단체에서 강연을 들었는데, 수강신청서를 적는 란에 장애등급이라는 글자를 보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물론 서비스 제공이나 장애인 개인을 알기 위해서 그러는 거라는 걸 이해한다. 그러나 진보적인 장애인단체라면 장애등급을 묻는 란은 이제 없앴으면 한다.

 그들 대부분이 특수교육학과나 사회복지학과 출신이어서 그런지 이미 관습이 되어버려서 장애등급을 묻는 게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아무리 진보운동을 해도 그렇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묻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것이 싸우면서 보수를 참칭하는 박정희주의자들을 닮아간 한국 시민사회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것은 흔히 "니 몇 살이고?", "너 어디 출신이냐" 따위를 물어보는 한국인들의 무의식적인 적이 작용을 하고 있다.

 장애등급은 관료의 산물이고 전문가주의의 산물이다. 관료의 편의성으로 장애등급을 나눈다. 1에서 7까지 장애등급을 나눠놓았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악용하고, 명백히 차별을 두자는 것이다. 악용되는 것은 가짜 장애인 양산이라는 것이다. 손가락이나 다리 하나 다쳤다고 공공 사무소에다 신청만 하면 장애인으로 인정을 받는다고 한다. 그것은 세금 면제와 자신의 이기적 편의를 위한 악용이다.

 모든 장애인들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모든 것을 보장 받아야 하는데, 번호로 매겨서 하는 건 문제가 있다. 장애인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못 한다면 그 배려는 아무 쓸모가 없다. 장애인 할인만 해놓고 장애인 시설이 없는 경우가 큰 문제이다.

 장애등급은 관료의 편의주의로 인한 것이기도 하고 전문가주의의 산물이기도 하다. 대부분 의사에게 판정을 받는다. 이것이 문제가 된다. 구조적 이론으로 보면 의료인들이 장애인들에게 주는 호명은 개인의 인생을 결정하게 된다. 가령 "너는 지적장애 3급이니 몇 살의 지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말은 장애인들에게 낙인화가 된다. 나이로 지능을 판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정확하지 않을 뿐더러 스물 살이 넘은 장애인들에게 여전히 아동으로 살아야 하는 문제가 벌어진다.  

 세월마다 매해마다 바뀌는 장애등급은 확실성과 객관성에 있어서도 문제가 되고 있다. 명칭이 바뀌고 다른 장애도 포함되기도 한다. 예전에 정신지체인인 것이 지금은 지적장애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지적장애라는 말도 문제가 잇다. 사람을 IQ라는 도구로 결정하는 것은 무리다. 어른들에게 IQ 검사를 해보라. 틀리는 것이 많이 나타날 것이다.

 법정 장애인등급에 속하지 않거나 잘못 기재된 장애인들에게는 이것이 상처가 된다. 장애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차별로 고통 받고 있다. 잘못 기재된 장애인들은 수정하려면 전문가들에게 6개월이라는 세월과 비용을 써야 한다.

 그러니 장애등급이 몇이냐는 것은 쓸데없는 말이다. 그리고 묻지 말아야 하고 대답하지 말아야 하는 언어다. 장애인의 프라이버시이면서 또한 상처이며 낙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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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이여, 화이트데이를 거부하라.


 한국에서는 무슨 데이가 많이 있다. 이게 서로 양면성을 띠면서 발전되어 왔다. 2월 14일 성 발렌티노 축일, 즉 발렌타인 데이를 시작으로 화이트데이, 블랙데이, 삼겹살 데이, 삼각김밥데이, 빼빼로 데이 등 상업성이 강한 날이 있는가 하면, 시민사회단체가 만든 애플데이가 있다. 이런 데이들을 보면 이들은 연애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벤트라고 하겠다.

 

 발렌타인 데이가 대표적으로 비판을 받는다. 일본에서 나온 쵸콜릿 상술로 진정한 의미를 잃었다는 것이다. 발렌타인 데이의 유래를 알게 되면 단순히 쵸콜릿을 주고 받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군인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발렌티노 신부가 탈영한 군인을 도와줬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병역거부의 그리스도교적 전통을 갖고 있다.

 

 한국에서 만든 데이가 이벤트성이 매우 강하다. 또한 평등적 의미도 포함이 된다. 특히 블랙데이의 경우, 솔로들끼리 함께 자장면을 먹으러 간다는 것은 균형감을 잡아주는 듯하다.

 

 문제가 되는 데이도 있다. 빼빼로 데이이다. 유명 제과업체의 상술로 시작된 날이다. 어느 고등학생 소녀들이 서로 빼빼로를 나눠먹었다고 해서 시작이 됐다고 한다. 이것을 노린 제과업체는 이날을 빼빼로 데이라고 대중매체에 선포했다. 덩달아 떡업체들은 경쟁을 위해서 가래떡데이로 만들어 버렸다. 사실 이날은 농민의 날이었다. 89년 노태우정권이 만든 날이기도 하다. 늦게 만들어진 게 영향력이 강했던 것일까 농민의 날은 결국 빼빼로데이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3월 14일은 화이트데이이다. 세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발렌타인 데이에 쵸콜릿을 준 여자에게 남자가 사탕으로 보답하는 날이다. 이제는 화이트데이에 종말을 고하노라. 이는 감사를 독으로 답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여자 보고 "줬으니 고맙다. 죽어라."는 뜻과 같다. 이는 이별의 날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보면 화이트 데이는 남성 중심의 상업권력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탕을 주면서 여자친구에게 사랑을 고백하라는 것은 폭력화 된 상술이다. 사탕이라는 딱딱하고 화학첨가제 투성이가 여성의 몸을 위협하는 폭력이다. 이런 의미는 무의식적으로 여성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있는 것 같다.

 

 사탕은 쵸콜릿에 비하면 아무 쓸모없다. 달기만 할 뿐 우울증에 효과적인 물질이 없다. 설탕에 버무려진 맛은 달콤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독성물질은 위험한 것이다. 설탕이 독이 될 수 있지만 맹독인 화학성분을 담은 식품첨가물이 바로 그것이다.

 

 식품운동가 안병수 씨에 의하면 사탕에 들어간 것이 화학 물질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청색 몇 호, 황색 몇 호, 등등의 알 수 없는 독성물질이 사람의 몸을 위협하고 있다고 한다. 화이트데이에 쓰이는 사탕들이 위험할 수 있다. 알 수 없고 불법적인 업체가 많아 관리 감독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암암리에 마트와 문구점으로 많이 유통되고 있다고 한다.

 

 설탕 가운데 백설탕은 달콤하지만 노화를 강화시키고, 많이 먹으면 당뇨에 걸릴 수 있다. 재료가 사탕수수나 사탕무로 만든다고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이들은 제조원가가 비싸서 사탕제조업체가 못 구한다. 그래서  제조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화학성분이 들어가게 된다.

 

 (물론 쵸콜릿도 역시 마찬가지다. 남미나 아프리카에서 불공정 무역으로 들여온 카카오를 먹는다는 것은 즐겁지 않다. 얼마 전에 쵸콜릿 안의 벌레 사건은 제조과정의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엿을 줄 순 없다. 미국어화된 말 "엿 먹어라."는 이미 욕이 된 지 오래이다. 우리 엿을 주면 좋겠는데 말이다. 그러나 엿도 줄 순 없다. 엿에 강한 밀도가 치아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물엿 같은 재료는 치아에 달라붙어 문제 생긴다.

 

 여성들이여. 화이트데이 사탕을 거부하라. 사탕을 준다면 헤어지라는 의미로 받아들여라. 그것이 당신들이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길이다. 

 

 에리히 프롬이 말했듯 인간은 보상을 추구하는 유기체다. 하나의 대안은 연인들이 함께 비누를 만드는 것이 낫다. 그러면 서로의 건강도 챙기게 된다. 그래도 간식으로 하고 싶다면 제과점에서 케이크 한 조각을 사다주는 것이 낫다. 받는 것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는 그 마음이다. 물질적인 것에만 집착하지 말고 서로를 생각하면서 문자 한 통,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한국의 모든 연인들이 깨달았으면 좋겠다. 

  

 

참고문헌-안병수,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국일미디어,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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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장애학을 위하여

 장애학, 이 학문은 작년 겨울에 대구 DPI에서 처음 접한 학문이다. 자료집을 보고 장애학이 무엇일까하고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강사가 말하길 장애학은 장애인들이 자신의 문제를 밖으로 끄집어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전에 장애는 개인이 문제라는 식의 접근을 했다. 장애학이 생기고 나서 장애는 사회환경의 문제로 접근을 한다.

 

 작년부터 장애학 독서를 하고 있는데 볼 때마다 충격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를 시작으로 나는 나쁜 장애인이고 싶다, 장애화의 정치를 읽어보면 내가 몰랐던 장애사회를 접하게 된다.

 

 장애화의 정치는 어렵고 인쇄가 잘못된 게 있었지만 장애가 정치적인 의미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 책의 저자 마이클 올리버는 리즈대 교수로 장애인이다. 그리고 맑스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는 맑스주의 시각으로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의 차별과  폭력을 이야기한다. 문화까지 언급하면서 사회의 정치가 장애인들에게 얼마나 불합리하게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장애화의 주도권은 의사들과 정부라고 한다. 그만큼 권력이 장애를 규정화시킨다는 얘기다. 나의 장애인 복지카드에는 정신지체인이라고 돼 있다. 그러나 사실 나는 뇌병변 장애인이다. 왜 그래 됐냐면 부모님의 무지와 나 자신의 의식 없음으로 인한 읍사무소 직원의 편견 섞인 사무화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정신박약이라고 써놓으면 혜택이 간다는 말에 응했다는 부모와 나의 무지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장애학은 슬픈 학문이 것 같다. 아니 원래 사회학이란 학문이 슬프다. 올리버는 사회학과 교수로 사회학의 한 분과인 사회학을 만든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최근에 알려졌다. 장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학교측의 무지와 편견으로 인해 사회학과가 아닌 사회복지학과로 배치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학문까지 장애인 차별을 하는 한국사회의 편견이 아닌가 싶다.

 

 장애학이 슬픈 이유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가족을 고발해야 한다는 아픔이다. 장애학을 하면서 고통스럽고 슬펐던 부분이다. 나의 가족을 고발해야 한다는 아픔과 고독이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원래 사회학이란 학문이 객관적이어서 그런지 가족마저 이렇게 객관화 시켜버리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들이 장애학을 하면서 가족들을 올바르게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한다.

 

 장애학을 하면서 느끼는 게 있는데, 권력에 대항하고 비판하는 것을 보면 아나키즘이 생각난다. 맑스주의자인 마이클 올리버의 책을 보면서 그렇게 느끼게 된다. 권력의 실체를 밝히고 그것을 비판하고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나키즘 사회학의 기본이다. 장애인 아나키스트들이 바실리 에로센코 한 명만 조명된 현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맑스주의 쪽에는 안토니오 그람시, 로자 룩셈부르크와 마이클 올리버도 있는데 말이다.

 

 앞으로 장애학을 공부하면서 아나키즘을 도입하고 싶다. 아나키즘 장애학은 이 땅의 장애인들이 권력의 도움을 더 이상 받지 않고 얻어먹지 않고 자기 스스로 하도록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그리고 장애인 해방에도 적극적으로 함께 하고 사회에 참여와 다른 장애인들과 연대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장애학은 아직 걸음마 단계이지만, 걸음마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느냐에 따라서 미래가 달라진다. 영어권에서 나온 장애학은 맑스주의에 가까워서 잘못하다가는 장애인들이 권력에 의존적으로 변할 위험성이 많이 있다. 권력의존을 반대하는 게 바로 장애학의 기본이기는 하나 맑스주의라는 게 권력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는 한계가 있다. 아나키즘은 의존보다 자기 스스로 권력이 되어서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 장애학에는 얼마든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특히 아나키즘이 힘을 발휘하는 것이 있다. 바로 자립생활이다. 시설에서 이제는 지역사회로 들어갈 때 아나키즘이 발휘된다고 할 수 있다. 집이나 업체 기숙사나 시설 안에서만 생활을 하게 된다면 장애인 차별을 심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장애인들은 인간적인 자유를 못 누리게 될 위험성이 있다. 자립생활을 통해서 지역사회와 시민사회, 종교.문화사회로 많이 결합함으로써 함께 해야 한다. 장애인 개인도 중요하지만 시민사회가 장애인들을 밖으로 나오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자유와 자치, 상호부조를 통한 아나키즘을 장애학에서 많이 실천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를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는 노력으로 갈 수 있다. 

 

 아나키즘 장애학은 맑스주의 장애학의 대안이 될 지는 많은 논쟁과 비판과 수정이 있어야 하겠다. 두 장애학의 연대도 중요해서 앞으로의 논의도 그 방향으로 가야 한다. 두 이념은 같은 공통점이 있어서 언제든지 연대가 가는 하다. 이 두 이념이 연대를 하면 한국사회의 장애해방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의 장애학은 맑스주의적으로 보아왔지만 이제는 아나키즘도 도입할 때이다. 권력의존이 아닌 자생적인 연대와 개인의 자율성의 존중이 앞으로의 연구 목적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아나키즘을 자립주의라고 불러보면 어떨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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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에서의 해방

 사회는 편견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 안에선 첫 인상의 이미지가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첫 인상 그 자체가 어쩌면 편견을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동체라는 사회에서 한 개인은 평생 동안 첫 인상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낙인론적이긴 하지만 그게 사회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는 다른 환경의 만남이기 때문에 한 개인을 제대로 알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래서 인간은 남의 첫 인상이 그대로 있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첫 인상을 계속 간직하려는 보수성은 폭력을 부른다. 그것이 편견의 폭력이다. 한국 사회는 보수성이 강해 권력의 폭력을 많이 본다. 첫 인상의 권력이라는 것이다. 첫 인상의 권력은 물론 세상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그 첫 인상의 권력이 한 개인들에 의해 해체되기도 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편견을 버리도록 노력해야 진정하게 거듭날 수 있다고 하겠다. 그것이 바로 사회를 인간적이고 따뜻하게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따뜻함을 만들어 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첫 인상들이 박혀 있기 때문에 그렇다.

 첫 인상, 권력화된 편견은 야만성을 드러내게 된다. 사회는 적자생존의 원칙이라는 것은 편견에서 나온 말인데,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게다가 사회복지제도는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에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도 있다. 그렇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다 이기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P.A.크로포트킨(러시아 아나키스트)의 상호부조론을 보게 되면 동물 뿐만 아니라 인간들도 서로 도우면서 살아간다고 한다. 나는 그전까지 진화론이 맞다고 생각해서 인간만이 서로 돕는다고 알고 있었다. 그 편견이 깨져 버리자 혼란스러움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뭔가가 잘못 알았구나라고 생각했다.

 동성애, 병역거부, 아나키즘을 편견의 눈을 봤는데, 병역거부자의 글을 보고 그와 친구가 되고, 동성애에 대한 글을 보니 그것도 내 편견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편견을 깨는 것은 사실 두려운 일이다. 첫 인상에서 머무르는 게 인간의 보수적 욕망으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그래서 그 보수성을 간직하기 위해, 사회의 안정이란 명목으로 권력은 첫 인상을 소유하고 강요하기 위해 폭력을 동원한다. 진실은 원래 괴로운 것이기에 인간의 본성을 외면하게 된다.

 지금 이 시간에도 편견의 폭력에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하고 있다. 심지어 사회의 안식처라고 하는 종교까지도 편견을 유지하고 보존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일어나는 폭력을 정당화하고 편견의 권력으로 세력을 확대해가며 싸우고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것을 깨려는 사람들을 신의 이름으로 사회의 안정이라는 명목으로 죽이고 다치게 만들고 자기들은 썩어가고 있다.

 공동체란 것은 서로 돕는 따뜻함을 전제로 한다. 편견의 폭력은 사회를 차갑게 하고 있다. 편견의 사회화를 막고 인간 스스로 해방하려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인상이란 절대로 영원한 게 아니다. 환경에 따라 바뀐다. 유지되는 게 있다고 해도 완전히 유지하는 게 아니며 바뀌었다 해도 급격하게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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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들에게 다양한 고용의 기회를...

 저번에 장애인 취업박람회가 있어서 가보았다. 부모님께 죄송하고 일자리도 찾을까 해서 가보았다. 많은 장애인들이 일자리를 찾으려고 모여들었다. 나도 거기에 끼여서 같이 들어가서 면접을 보았다. 장애인을 고용하는 업체가 경북지역에서 많이 왔는데, 구미와 칠곡에서 많이 왔다. 그 중에서는 고령도 보이고 경주, 경산, 대구도 보였다.

 안내서를 펴보니, 업체들은 거의 공업체들이 많이 와 있었다. 주류 산업역사론으로 보면 2차산업이다. 핸드폰 공장, 종이컵 공장, 부품 공장 등등으로 거의 2차산업이다. 장애인들이 일자리를 찾는데 무슨 불만이냐고 물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잘 보면 거의 이러한 고용현상은 오히려 장애인을 더 멀어져 보이게 할 수 있다.

 외국의 경우를 보면 장애인들이 3차산업, 서비스업에 고용되 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정신지체인들 중 낮은 등급의 사람들도 함께 3차 산업에서 일한다. 이것을 보면 한국은 장애인들의 고용을 외치면서도 한편으로는 왜 2차산업에만 집중하게 만들었을까?

 장애인들을 고용하는 업체들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에 많이 있지 않다. 대다수가 외진 농촌지역이나 산골짜기에 위치돼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게다가 기숙사 생활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직도 의식이 바뀌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장애인 시설들이 산골이나 농촌의 외진 곳에 위치해 있듯 고용업테도 그곳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는 의식이다. 이러한 고용현실은 장애인들의 사회참여를 유도하기는커녕, 오히려 소외하게 한다.

 존재가 의식을 좌우하듯이 공간이라는 게 사람들의 의식을 좌우하는 것이다. 마치 독재자들이 예술공간들을 서민들이 다가갈 수 없는 곳에 놓았듯이 말이다. 장애인이라는 존재를 산속에다 옮겨놓음으로써 그들이 나오지 말아야 할 사람, 가까이 하기에는 먼 사람으로 편견을 강화해 버린다.  이러한 편견의식은 장애인들이 사회로 못 나오게 하는 벽을 만들어 버린다. 이러한 벽을 쌓고 장애인 고용해야한다고 막 떠든다면 위선일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은 수용시설 의식이라 부르고 싶다. 장애인들은 사회복지와 재활치료라는 이름으로 수용시설에 많이 수용된다. (요즘은 그룹홈이 있어서 사회복지학계에서 수용을 점점 해체되도록 하고 있다.)  이 수용시설이 주로 농촌의 외곽지역에 위치해 있어 다가가기가 매우 힘들다. 그래서 장애인들의 사회참여는 차단이 되고 편견은 높아져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편견 때문에 한 마을에 장애인 복지시설이 생기면 주민즐의 반발이 거셌다. 감시와 처벌의 장화는 장애인들 자신들의 삶의 의식마저 비인간화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수용시설 의식은 그 후에 편견을 만들어 버리고 차별과 폭력을 동반해 왔다.  그래서 장애인들을 불쌍한 사람, 거지, 나와서는 안 되는 사람 등의 편견의식을 가져왔다. 이런 의식은 아직도 장애인들을 바라보는 시각의 잔재로 남아있다.

 게다가 장애인들의 직업재활이고 떠드는데, 진정한 직업재활은 장애인들이 2차 산업에다가 가둬두고 산 속에만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하고 함께 노는 것이 진정한 직업재활이다.

 예전에는 장애인들이 불편해도 자신이 할 수 있으면 일을 했다고 한다. 이런 아름다운 고용전통이 우리에게 있다고 알려진는 것은 지금의 상황이 그렇게 열악한 증거가 아닐까? 옛날 장애인들은 2차 산업 뿐만 아니라 3차 산업, 1차 산업에도 종사했다.(정창권의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의 고용현실은 2차산업에만 집중할 뿐 1.3차 산업은 소수이다. 이렇게 되면 장애인 고용증가는 커녕, 실업률만 높이는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할인점이나 커피숍, 대학 내 식당들에서 장애인 학생이나 일반 장애인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있다해도 직업교육을 받고 주방 안에서만 일하는 장애인들 뿐이다. 이런 현상 때문에 장애인 대학생들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어도 못 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중앙에서는 청년 실업률이 높다, 노인 일자리 창출하자고 하지만, 장애인 고용은 여전히 약한 편이다. 장애인들의 2차 산업 고용집중은 오히려 실업률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 것이다. 장애인들에게 평등한 고용혜택으로 실업률을 줄이는 것이 좋다. 많은 장애인들이 사회 진출로 인해 편견의 벽을 깨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고용확대로 인해서 실업률은 떨어질 것이다.

 경영자의 편견도 버려야 한다. 일부 경영자들은 아직도 장애인들을 고용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왜냐하면 장애인들은 느리고 부담스럼고 일을 못한다는 편견을 늘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비장애인의 눈으로만 편견이다. 신체의 하나가 불편하면 다른 신체 하나가 발달한다는 의학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보면 장애인들의 고용이 많이 있고 얼마나 좋은지를 모르고 있다. 단지 몸이 불편하다는 편견과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또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보장하라고 늘 외친다. 그렇다. 나도 그들의 말에 동조한다. 그렇지만, 일부 노동자들 역시 경영자와 다를 바 없다. 그들도 역시 자신들만 모여서 일을 하고 어울린다. 장애인 노동자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은 재수없다고 따돌리기도 한다. 이로 인해 자신들의 공고한 벽을 만들어 놓고 장애인과 외국인은 따돌리고 나서 자기 밥그릇을 챙긴다면 정말 큰 위선이다. 노동자들은 장애인과 외국인들을 하나의 인간의 띠로 묶어 생각해야 한다. 

 장애인 개인은 자신이 약한 사람, 보호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런 생각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약자로만 많이 생각하지 말고 장애를 자신의 개성으로 보는 생각의 훈련이 중요하다. 자기 발로 사회로 나와 힘차게 외치는 것이다. 누구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야할 것이다.

 실업률이 높다는 오늘, 장애인들에게 다양한 노동기회를 많이 만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장애인들을 하나의 사회구성원으로 느낄 때까지 많은 편견을 깨뜨려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2차 산업 집중을 해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사의 잘못된 편견을 버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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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보다 농민의 아픔을...

오늘 황우석 교수가 기증한 난자를 실험에 사용했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그 발표를 한 순간, 네티즘들이 황 교수를 구하려고 난리가 났더군요! 노벨상 수상후보에 올랐다는 이유와 난치병 환자를 치료한다는 이유로 너무 띄워주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은 난자없이는 배아복제가 불가능하다라는 것이 드러난 겁니다. 하지만 그 윤리적인 문제를 제쳐두는 현실은 다른 곳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언론이란 게 심판을 받아야 할 1순위가 아닐까 할 정도랍니다.


생각없는 네티즌이 황우석 씨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막가파로 쳐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보수 신문들도 그 영향이 아주 크다는 겁니다. 아, 도대체 농민들의 아픔은 금방 잊고 황우석에게만 쏠리는 현실은 힘이 빠지게 하네요! 이런 영웅 만들기는 사회적 약자를 소외시켜 버리는 효과가 있어 권력에 이용될 수 있습니다.


난자를 기증하겠다는 여자들,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자신들을 먹여 살리는 농민들의 아픔은 생각하지 않고 심한 후유증을 무릅쓰고 기증하는 반생명적인 생각을 합니다. 이는 한국은 이미 생명의 문화가 약해졌다는 증거죠! 암울한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은 우리가 그만큼 생명적 약자를 무시해 왔다는 것입니다. 장애인들, 불치병 환자들에게 인간다움의 정신이 아닌 극복과 경쟁의 시각으로 바라본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체줄기세포는 생각하지는 않고 암세포가 증가할 위험이 있는 배아줄기세포를 너무 띄워준 것입니다. 이런 극복의 시각은 결국 난치병 극복과 국익이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는 농촌에도 미치게 되죠! 생명공학의 기업유착으로 인해서 GMO를 만들어내고 그걸 이용해서 약탈하려는 기업들이 많습니다. 쌀개방을 하게 되면 중국에서 만든 불량쌀을 먹게 되는 겁니다. 이런 것은 김치파동과 같은 농어산물 사건에서 드러났습니다. 중국은 이미 돈에 미쳐 있습니다.


그 뒤에는 미국과 다국적 기업이 도사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생명공학으로 생명을 희롱하고 떼돈 번다는 황우석보다, 우리를 살리고 죽는 농민을 더 생각해야 합니다. 생명공학은 연구를 한 번 하면 떼돈을 벌 수 있지만, 농사는 자신을 죽이고 남을 살리는 숭고한 것입니다. 이런 숭고함을 돈으로 치부해 버리고 환경을 파괴하는 농업을 하라는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에 희생당하는 농민들을 생각합시다.


언론은 이런 농민들과 자연의 사정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아니 무시하는 것이 많습니다. 보는 우리도 반성해야 합니다. 밥에 든 쌀을 고마워 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고 막 먹어버리는 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오늘 황우석 살리기를 보고 느낀 것은 생명의 문화가 한국 사회에 이렇게 부족한가, 국익과 극복 이데올로기가 이렇게 심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너무 슬픕니다.

 

황우석은 욕 먹어도 잘 먹고 잘 삽니다. 그러나 농민은 부동산 투기로 고통받고 부채로 고통받고 일해도 한만큼의 대가가 적어 대기업 공장 노동자보다 착취를 당하고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황우석을 지나치게 띄워준다면 우리의 밥상은 구데기 밥상이 될 겁니다. 얼마나 끔찍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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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에 반대한다.

나는 솔직히 비정규직법을 모른다. 그러나 비정규직법에 대한 언론의 행방을 볼 때 그 법이 악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선 비정규직법 이름 자체가 문제다. 내가 알기로는 기한을 두고 갈아치우는 법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노동시장의 유연화는커녕 마치 노예화가 되는 것이다. 고용자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고용불안의 상태에선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국가에 의해 비정규직을 만들어 놓고 고용과 해고를 제멋대로 하는 것은 오히려 고용불안만 가속시키게 돼버린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한국을 망치게 돼버린다.

 이 법과 비정규직이라는 명칭은 애초에 쓰지 말았어야 했다. 이런 말 때문에 기업들이 제멋대로 고용과 해고를 반복하는 비윤리적인 횡포를 본다. 이는 취업자들에게는 불리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고용상태가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통계의 편견일 수 있다. 비정규직이 많은 산업지역에는 고용과 해고를 반복하는 상태다. 조기퇴직도 늘어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비정규직은 애초에 없어야 한다. 비정규직은 일반 사람뿐만 아니라 장애인들에게도 불리한 법이가. 장애인들은 노동시정에서 얼마든지 비정규직이 될 수가 있다. 장애인 노동상황이 2차산업으로 집중돼 있고 다양하지 못한 것을 본다면 비정규직이 될 가능성이 많다.

 사람 하나 살리지 못하는 정부라면 등을 돌려야 옳다. 나는 비정규직에 반대하며 취직을 미루겠다.

 열린우리당 정부는 좌파정부가 아니다. 뉴라이트 쪽에서 말하는데, 이것은 착각이다. 노동자를 죽이는 이런 악법과 장애인 고용을 불안하게 하는 악법을 만든 정부는 절대 좌파가 아니다. 사람 하나 살리지 못하는 정부가 어찌 좌파겠는가.

 이번 비정규직법안 통과는 결국 한국의 고용불안을 가져오게 되며, 장애인 고용도 잘 안 될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전망한다. 왜 비관적이냐고? 현실이니까.

 나는 올해도 취업이 잘 되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돈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것은 늘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고용불안만 가져오는 법에 반대하면서 나는 오늘을 횡설수설한 글 한 편 쓰면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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