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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장애학을 위하여

 장애학, 이 학문은 작년 겨울에 대구 DPI에서 처음 접한 학문이다. 자료집을 보고 장애학이 무엇일까하고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강사가 말하길 장애학은 장애인들이 자신의 문제를 밖으로 끄집어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전에 장애는 개인이 문제라는 식의 접근을 했다. 장애학이 생기고 나서 장애는 사회환경의 문제로 접근을 한다.

 

 작년부터 장애학 독서를 하고 있는데 볼 때마다 충격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를 시작으로 나는 나쁜 장애인이고 싶다, 장애화의 정치를 읽어보면 내가 몰랐던 장애사회를 접하게 된다.

 

 장애화의 정치는 어렵고 인쇄가 잘못된 게 있었지만 장애가 정치적인 의미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 책의 저자 마이클 올리버는 리즈대 교수로 장애인이다. 그리고 맑스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는 맑스주의 시각으로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의 차별과  폭력을 이야기한다. 문화까지 언급하면서 사회의 정치가 장애인들에게 얼마나 불합리하게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장애화의 주도권은 의사들과 정부라고 한다. 그만큼 권력이 장애를 규정화시킨다는 얘기다. 나의 장애인 복지카드에는 정신지체인이라고 돼 있다. 그러나 사실 나는 뇌병변 장애인이다. 왜 그래 됐냐면 부모님의 무지와 나 자신의 의식 없음으로 인한 읍사무소 직원의 편견 섞인 사무화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정신박약이라고 써놓으면 혜택이 간다는 말에 응했다는 부모와 나의 무지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장애학은 슬픈 학문이 것 같다. 아니 원래 사회학이란 학문이 슬프다. 올리버는 사회학과 교수로 사회학의 한 분과인 사회학을 만든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최근에 알려졌다. 장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학교측의 무지와 편견으로 인해 사회학과가 아닌 사회복지학과로 배치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학문까지 장애인 차별을 하는 한국사회의 편견이 아닌가 싶다.

 

 장애학이 슬픈 이유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가족을 고발해야 한다는 아픔이다. 장애학을 하면서 고통스럽고 슬펐던 부분이다. 나의 가족을 고발해야 한다는 아픔과 고독이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원래 사회학이란 학문이 객관적이어서 그런지 가족마저 이렇게 객관화 시켜버리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들이 장애학을 하면서 가족들을 올바르게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한다.

 

 장애학을 하면서 느끼는 게 있는데, 권력에 대항하고 비판하는 것을 보면 아나키즘이 생각난다. 맑스주의자인 마이클 올리버의 책을 보면서 그렇게 느끼게 된다. 권력의 실체를 밝히고 그것을 비판하고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나키즘 사회학의 기본이다. 장애인 아나키스트들이 바실리 에로센코 한 명만 조명된 현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맑스주의 쪽에는 안토니오 그람시, 로자 룩셈부르크와 마이클 올리버도 있는데 말이다.

 

 앞으로 장애학을 공부하면서 아나키즘을 도입하고 싶다. 아나키즘 장애학은 이 땅의 장애인들이 권력의 도움을 더 이상 받지 않고 얻어먹지 않고 자기 스스로 하도록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그리고 장애인 해방에도 적극적으로 함께 하고 사회에 참여와 다른 장애인들과 연대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장애학은 아직 걸음마 단계이지만, 걸음마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느냐에 따라서 미래가 달라진다. 영어권에서 나온 장애학은 맑스주의에 가까워서 잘못하다가는 장애인들이 권력에 의존적으로 변할 위험성이 많이 있다. 권력의존을 반대하는 게 바로 장애학의 기본이기는 하나 맑스주의라는 게 권력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는 한계가 있다. 아나키즘은 의존보다 자기 스스로 권력이 되어서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 장애학에는 얼마든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특히 아나키즘이 힘을 발휘하는 것이 있다. 바로 자립생활이다. 시설에서 이제는 지역사회로 들어갈 때 아나키즘이 발휘된다고 할 수 있다. 집이나 업체 기숙사나 시설 안에서만 생활을 하게 된다면 장애인 차별을 심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장애인들은 인간적인 자유를 못 누리게 될 위험성이 있다. 자립생활을 통해서 지역사회와 시민사회, 종교.문화사회로 많이 결합함으로써 함께 해야 한다. 장애인 개인도 중요하지만 시민사회가 장애인들을 밖으로 나오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자유와 자치, 상호부조를 통한 아나키즘을 장애학에서 많이 실천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를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는 노력으로 갈 수 있다. 

 

 아나키즘 장애학은 맑스주의 장애학의 대안이 될 지는 많은 논쟁과 비판과 수정이 있어야 하겠다. 두 장애학의 연대도 중요해서 앞으로의 논의도 그 방향으로 가야 한다. 두 이념은 같은 공통점이 있어서 언제든지 연대가 가는 하다. 이 두 이념이 연대를 하면 한국사회의 장애해방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의 장애학은 맑스주의적으로 보아왔지만 이제는 아나키즘도 도입할 때이다. 권력의존이 아닌 자생적인 연대와 개인의 자율성의 존중이 앞으로의 연구 목적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아나키즘을 자립주의라고 불러보면 어떨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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