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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조형예술과에 입학. 기초과정 피마름.

2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4/18
    고은 [월경대 찾아 삼만리]
    무성한털
  2. 2008/04/17
    캐롤리 슈니먼 [내밀한 두루마리]
    무성한털
  3. 2008/04/17
    구보타 시게코 [보지 그림](1)
    무성한털
  4. 2008/04/17
    이영도 [피를 마시는 새]
    무성한털
  5. 2008/04/17
    김승옥 [생명연습] (2)
    무성한털

고은 [월경대 찾아 삼만리]

-중략-

 

대안 월경대 전도사, 소수 민족 여성을 인터뷰하다

 

 나는 '두꺼운 광목천→일회용 생리대→대안 월경대'라는 단선화된 진화의 도식을 머릿속에 갖고 있었다. 일회용 생리대에 점령당한 여성들에게 "이것 보세요, 대안 월경대예요!" 하고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수 민족 여성들로부터 나는 항상 똑같은 답을 들어야 했다. "빨아 써요? 너무 번거롭네요." 이런 반응은 한국에서 숱하게 겪었다.  

 그런데 왜 나는 윈난까지 가서 '미개인'을 교화하는 선교사마냥, 그 계몽적인 시각으로 접근했던 걸까? 서울이나 윈난이나 같은 시대를 살아가기는 마찬가진데 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곳 여성들을 '여성' 이라는 한 범주로 묶기는 무리가 있었다. 경제 수준, 직업, 나이 등 개별 조건에 따라 여성들이 몸으로 겪는 경험이 다르고 달거리대에 반응하는 방식과 내용도 달랐다. 의사 어머니를 둔 바이족 여대생은  내가 소개하는 천 달거리대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는데, 그녀의 어머니 왈, 일회용 생리대가 깨끗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경영학을 전공하는 그녀는 중국제 생리대를 쓰고 있었다.

 반면, 여행사를 경영하는 이족 여성은, 중국산 생리대는 더럽기 때문에 자신은 일본에 사는 언니가 국제 우편으로 부쳐 주는 일본제 생리대만 쓴다고 했다. 그리고 부득이하게 중국산을 쓰게 될 때는 햇볕에 널어 소독을 해서 쓴다고 했다.

 또 어떤 다이족 할머니는  일회용 생리대를 구경도 해 보기 전에 완경을 했다고 했다. 달거리대로 사용한 천을 빤 뒤에는 빨랫줄에 걸어 놓고 그 위에 수건을 덮어 두었다고 했다.  다른 옷들과 함께 널어 두기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며느리는 1990년대 초반부터 천에서 일회용 생리대로 전환했다. 할머니의 일곱 살짜리 손녀는 아마도(내가 선물한 대안 월경대를 쓰지 않는다면) 초경부터 일회용 생리대를 사용하게 될 것이다.

 

윈난성에서 맞은 달거리

 

..

중국 윈난성에서 나는 한국의 1970년대 근대화 과정을 보는 기분이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시골 여성들은 밥벌이를 위해 도시로 몰려들고 저학력에 별 기술이 없는 그녀들이 도시에서 제일 먼저 하게 되는 일은 청소와 빨래를 해 주는 파출부가 대부분인데, 고된 노동에 임금 체불이 일쑤라고 한다. 아침 식사를 길거리 호떡으로 급하게 때우고 출근하는 그들에게 달거리란 생명의 힘을 느끼고 환희를 각성하는 원천이 아니라, 반갑지 않고 거추장스러운 행사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감쪽같이 '처리' 해야 할 문제이고.

 

일회용의 위력

 

이후 나는 열심히 생체 실험(?)을 했다. 중국의 일회용 생리대들을 여러 가지 사서 써 봤다. 중국어로 '위생건'이라는 일회용 생리대 중에는 소독약 냄새가 지독하게 나는 제품들도 많았다. 시험 삼아 써 봤는데, 보지가 화끈거리는 느낌에 차고 있기가 난감했다. 이런 생리대에 들어 있는 화학 물질이 그대로 중국 여성들의 몸속으로 들어가 건강을 망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예전에 많이 썼다는 '위생지'도 재래시장에서 사다 써 봤는데, 넓은 휴지를 둘둘 말은 것이었다. 한 장을 꺼내 착착 접어 팬티로 몸에 밀착시키면, 신문지 위에 엉거주춤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위생지를 팔던 노점의 할머니가 "요즘 누가 이런 걸 써"하셨는데, 그 버석거리는 느낌은 정말 최악이었다. 그런 휴지를 사용하던 사람이라면, 새하얗고 편리한 일회용을 손에 넣었을 때 어떻게 거기에 반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  

 

생명의 여신도 월경이 부끄러웠을까?

 

..  윈난성에서 지낸 한 달 동안 가장 충격적이던 일은, 모계 사회로 유명한 모수오족 여인들조차 월경을 더러운 것,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던 모습이다. ..

달거리대를 바느질하고 빨아 쓰기는 분명 귀찮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기를 원하는 여성에게조차 그 가능성을 빼앗아 버리고, 근대화 과정이 진행되는 곳에서는 몸과 월경에 대한 관심을 가질 기회나 대안적 정보에 대한 접근도 차단된다는 문제의식을 안고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월경대 찾아 삼만리], 고은 - 여행 좋아하세요? 지구별을 여행하는 여자들을 위한 안내서. 유이 엮음. 도서출판 또하나의 문화 펴냄.

p7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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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리 슈니먼 [내밀한 두루마리]

[여성과 미술(주디 시카고,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에서 찾은 자료는 4월 17일, [여성과 페미니즘(헬레나 레킷)]에서 찾은 자료는 4월 30일 올린 것이다.

같은 작가의 이름이 이렇게 다르게 번역되어 나오고 작품명조차 틀리니, 인지도가 낮은 여성 작가에게는 치명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좋지 않군.

사진의 상태나 설명이, [여성과 페미니즘]쪽의 것이 맘에 들어 이 포스팅의 제목을 캐롤리 쉬네만[내면의 두루마리]에서  캐롤리 슈니먼[내밀한 두루마리]로 바꾼다. 내면의 두루마리라는 제목은 약간 피상적일 수 있는데, 이 퍼포먼스에서 낭독된 텍스트의 내용을 봤을 때 -여성의 언어는 사회적으로 어떻게 규정지어지는가, 예술가라는 소집단 속에서도? -내밀한 두루마리라는 번역이 더 들어맞는 것 같음.  

사진의 상태를 봤을 때도,  [여성과 미술]의 사진속 작가는 오르가슴 필인 반면에 [여성과 페미니즘]의 사진속 작가는 진지하다.  앞의 것은 매력적인 육체가 먼저 보이는 반면 뒤의 것은 읽고 있다는 행위 자체가 먼저 보인다.

이래서 편집이 중요. 정말로 이미지로서 여성 나타내기는 쉽지 않은듯.    

 

캐롤리 쉬네만Carolee Schneemann [내면의 두루마리Interior scroll],1975

 여성과 미술: 열 가지 코드로 보는 미술 속 여성. 주디 시카고,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 지음.

아트북스 펴냄. 171쪽.

 

 

캐롤리 슈니먼 (이 책에는 슈니먼으로 나와 있다.) , 내밀한 두루마리Interior Scroll(작품제목도 다르게 해석했군요), 1975년, 롱아일랜드 이스트햄프턴. 

여성과 페미니즘, 헬레나 레킷 엮음. 미메시스 발행. 82쪽

                                                                  

82쪽: 슈니먼은 달랑 시트 한 장만 걸치고서 관객들에게 자신의 책, [세잔, 그녀는 위대한 화가였다 Cezanne,She was a Great Painter]를 읽겠노라고 했다. 이어서 슈니먼은 몸을 덮었던 시트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몸과 얼굴 윤곽을 따라 진흙으로 굵게 선을 그렸다. 그녀는 기다란 탁자 위로 올라가 한 손에 책을 들고 균형을 잡으며 라이프 모델 포즈를 취하면서 책을 읽었다. 그러고 나서 책을 떨어뜨린 슈니먼은 자신의 질 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천천히 꺼내어 거기 쓰인 글을 읽었다. 슈니먼 자신이 이전 작품을 위해 써두었던 페미니즘 텍스트에서 발췌한 것이었다. 그중 한 텍스트는  원래 초현실주의 영화감독을 묘사한 영화 [키치의 마지막 식사Kitch's Last Meal](1973-1977)를 위해 썼던 것이다. 그 남성 감독은 그녀의 영화가 <개인적인 혼란과......감정의 지속.....일기 식의 탐닉.......>으로 가득하다는 등등의 불평을 늘어놓았었다.

 

<그는 말했다. 당신도 나처럼 명쾌한 하나의 과정을 취하면 그 엄격한 함축성을 가지고 지적으로 하나의 치환 체계를 구축해 시각 체계를 세울 수 있다고...... . 그는 이렇게 반박했다. 당신은 그 수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의 기준 체계를 이해하지 못해- 피타고라스 식의 말들...... .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동등하게 친구일 수는 있지만 동등하게 예술가가 될 수는 없어.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우리는 동등하게 친구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동등하게 예술가가 될 수 없다고...... .>

<그가 자기는 [여류 조각가]와 살아 봤다고 나에게 얘기하기에 내가 물었다. 그럼 나는 [여류 영화감독]이 되는 건가?>

<아니야, 그가 대답했다. 우리는 당신이 댄서라고 생각해.>

 

[내밀한 두루마리]는 수많은 여성 관람객을 위한 일련의 퍼포먼스 및 회화 전시회인 [지금 이곳의 여성들Women Here and Now]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슈니먼이 <여성의 음문 공간>과 고대 종교에서 여신의 상징이던 뱀의 형상과의 연관성을 연구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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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타 시게코 [보지 그림]

구보타 시게코Shigeko Kobota [보지 그림Vargina painting],1965

 

여성과 미술: 열 가지 코드로 보는 미술 속 여성. 주디 시카고,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 지음. 아트북스 펴냄.

p171.

 

이 퍼포먼스에서 구보타 시게코는 빨간색 물감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왕에 빨간 색을 썼다면, 생리혈을 쓰지 않고 붓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작업한 이유는 뭘까?

제어하기 힘들어서일까? 아니면 여성성이 너무 드러나는 것이 싫었던 걸까?

 

4월 30일:

구보타 시게코의 퍼포먼스에 대한 맥락설명을 찾음.

 

미술과 페미니즘 (헬레나 레킷 엮음.미메시스 발행) 65쪽.

1965년 뉴욕에서 열린 플럭서스 운동의 공공 축제였던 [영원한 플럭스 축제Perpetual Fluxfest]에서 구보타는 하나의 <액션>페인팅을 했다. 잭슨 폴록이 화실 바닥에 페인트를 뚝뚝 흘리던 제작 방식을 빗대는 동시에 그것을 뒤집어 버린 이 작품에 대해, 당시 많은 남성 예술가들은 거부감을 보였다. 구보타는 커다란 종이를 바닥에 깔고 속옷 가랑이에 붓을 달고 나아가면서 붉은 붓 자국을 남겼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여성적>인 몸짓 그림의 과정을 창조한 것으로, 여성 육체 중 창조의 핵심인 곳에서 흘러나오는 그 그림은 <사정>하듯 던지고 떨어뜨리고 흩뿌리는 그림과는 대조를 이룬다. 또 구보타는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알몸의 여성들을 <인간 붓>으로 사용했던 이브 클랭의 해프닝을 패러디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성기를 새김의 근원으로 사용하면서 서양 문화에서 여성 생식기의 의미에 질문을 던진다. 서양 문화에서 여성의 음부는 프로이트에 의해 (남근이) <결여>된 곳으로 해석되었으며 이 <결여>로 인해 여성은 언어, 시각 기호, 몸짓을 통한 타당한 표현이 불가능하다고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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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도 [피를 마시는 새]

비교적, 생리에 대한 정확한 묘사라고 생각한다.

 

 

-중략-

 

갑자기 그녀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실은 주머니 속의 손으로 허리를 세게 눌렀다. 자신의 몸이 아닌 것 같은 그 부분을 눌러 확인해야 했다. 반응은 신통찮았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지붕이 있는 곳에 쉬게 된 날 미치광이에게 헛소리를 듣고 동료는 배신감을 선사했고 그녀의 아랫배는 제멋대로 통증에 빠져 들었다. 제기랄!  

 

..

갑자기 아실의 아랫배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

 

'제기랄, 내 아랫배에 들어온 씹할 도깨비. 거기서 불장난을 쳐도 좋다고 한 적이 없는데.'

 

 -중략-

`

[피를 마시는 새] 1권, p477-505사이, 2005년 황금가지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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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생명연습]

1962년의 소설. 1950-60년의 풍경이겠지?

그런데 솔직히 죽을만큼 괴로운 생리통을 겪어 보고 나면 귀엽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든다.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어떻다는 건 알겠지만, 남성화자의 지식인놀이가 이런 데 쓰이는 건 나로서는  불쾌.   

 

중략-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게 뭘까?"

지난 5월 어느 일요일, 한교수님 댁엘 놀러갔을 때였다. 햇볕이 여간 좋은 게 아니어서 나와 그 애와 사모님은 등의자를 마당가에 내놓고 앉아 한담을 하고 있다가 발끝으로 흙을 톡톡 차며 등의자를 뒤로 잦혔다 앞으로 숙였다 하고 있는 그 애가 하도 귀여워서 탄식하듯 내가 입 밖에 낸 말이었는데

"여신(女神)의 멘스?"

라고 그애는 가벼웁게 퉁겨버리는 것이었다.

"응?"

나는 얼떨떨해져버려서 코 먹은 소리로 반문했더니

"아닐까?"

그애는 숙인 얼굴에서 눈만을 살짝 치켜떠보며 부정의문법으로 또 한번 쥐어박았다.

"호오, 여신에게도 멘스가 다 있을까?"

사모님께서 마침 이렇게 대답을 하심으로서 그 얘긴 그정도로 그쳐서 나는 화끈 단 얼굴을 감출 수가 있었지만 이건 못 당하겠는데,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중략-

 

한국일보,신춘문예,1962. 김승옥 소설전집 1권, 문학동네, 1995.

 

20세기 한국소설 19. 김승옥 이제하 외.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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