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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리 슈니먼 [내밀한 두루마리]

[여성과 미술(주디 시카고,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에서 찾은 자료는 4월 17일, [여성과 페미니즘(헬레나 레킷)]에서 찾은 자료는 4월 30일 올린 것이다.

같은 작가의 이름이 이렇게 다르게 번역되어 나오고 작품명조차 틀리니, 인지도가 낮은 여성 작가에게는 치명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좋지 않군.

사진의 상태나 설명이, [여성과 페미니즘]쪽의 것이 맘에 들어 이 포스팅의 제목을 캐롤리 쉬네만[내면의 두루마리]에서  캐롤리 슈니먼[내밀한 두루마리]로 바꾼다. 내면의 두루마리라는 제목은 약간 피상적일 수 있는데, 이 퍼포먼스에서 낭독된 텍스트의 내용을 봤을 때 -여성의 언어는 사회적으로 어떻게 규정지어지는가, 예술가라는 소집단 속에서도? -내밀한 두루마리라는 번역이 더 들어맞는 것 같음.  

사진의 상태를 봤을 때도,  [여성과 미술]의 사진속 작가는 오르가슴 필인 반면에 [여성과 페미니즘]의 사진속 작가는 진지하다.  앞의 것은 매력적인 육체가 먼저 보이는 반면 뒤의 것은 읽고 있다는 행위 자체가 먼저 보인다.

이래서 편집이 중요. 정말로 이미지로서 여성 나타내기는 쉽지 않은듯.    

 

캐롤리 쉬네만Carolee Schneemann [내면의 두루마리Interior scroll],1975

 여성과 미술: 열 가지 코드로 보는 미술 속 여성. 주디 시카고,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 지음.

아트북스 펴냄. 171쪽.

 

 

캐롤리 슈니먼 (이 책에는 슈니먼으로 나와 있다.) , 내밀한 두루마리Interior Scroll(작품제목도 다르게 해석했군요), 1975년, 롱아일랜드 이스트햄프턴. 

여성과 페미니즘, 헬레나 레킷 엮음. 미메시스 발행. 82쪽

                                                                  

82쪽: 슈니먼은 달랑 시트 한 장만 걸치고서 관객들에게 자신의 책, [세잔, 그녀는 위대한 화가였다 Cezanne,She was a Great Painter]를 읽겠노라고 했다. 이어서 슈니먼은 몸을 덮었던 시트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몸과 얼굴 윤곽을 따라 진흙으로 굵게 선을 그렸다. 그녀는 기다란 탁자 위로 올라가 한 손에 책을 들고 균형을 잡으며 라이프 모델 포즈를 취하면서 책을 읽었다. 그러고 나서 책을 떨어뜨린 슈니먼은 자신의 질 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천천히 꺼내어 거기 쓰인 글을 읽었다. 슈니먼 자신이 이전 작품을 위해 써두었던 페미니즘 텍스트에서 발췌한 것이었다. 그중 한 텍스트는  원래 초현실주의 영화감독을 묘사한 영화 [키치의 마지막 식사Kitch's Last Meal](1973-1977)를 위해 썼던 것이다. 그 남성 감독은 그녀의 영화가 <개인적인 혼란과......감정의 지속.....일기 식의 탐닉.......>으로 가득하다는 등등의 불평을 늘어놓았었다.

 

<그는 말했다. 당신도 나처럼 명쾌한 하나의 과정을 취하면 그 엄격한 함축성을 가지고 지적으로 하나의 치환 체계를 구축해 시각 체계를 세울 수 있다고...... . 그는 이렇게 반박했다. 당신은 그 수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의 기준 체계를 이해하지 못해- 피타고라스 식의 말들...... .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동등하게 친구일 수는 있지만 동등하게 예술가가 될 수는 없어.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우리는 동등하게 친구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동등하게 예술가가 될 수 없다고...... .>

<그가 자기는 [여류 조각가]와 살아 봤다고 나에게 얘기하기에 내가 물었다. 그럼 나는 [여류 영화감독]이 되는 건가?>

<아니야, 그가 대답했다. 우리는 당신이 댄서라고 생각해.>

 

[내밀한 두루마리]는 수많은 여성 관람객을 위한 일련의 퍼포먼스 및 회화 전시회인 [지금 이곳의 여성들Women Here and Now]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슈니먼이 <여성의 음문 공간>과 고대 종교에서 여신의 상징이던 뱀의 형상과의 연관성을 연구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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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타 시게코 [보지 그림]

구보타 시게코Shigeko Kobota [보지 그림Vargina painting],1965

 

여성과 미술: 열 가지 코드로 보는 미술 속 여성. 주디 시카고,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 지음. 아트북스 펴냄.

p171.

 

이 퍼포먼스에서 구보타 시게코는 빨간색 물감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왕에 빨간 색을 썼다면, 생리혈을 쓰지 않고 붓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작업한 이유는 뭘까?

제어하기 힘들어서일까? 아니면 여성성이 너무 드러나는 것이 싫었던 걸까?

 

4월 30일:

구보타 시게코의 퍼포먼스에 대한 맥락설명을 찾음.

 

미술과 페미니즘 (헬레나 레킷 엮음.미메시스 발행) 65쪽.

1965년 뉴욕에서 열린 플럭서스 운동의 공공 축제였던 [영원한 플럭스 축제Perpetual Fluxfest]에서 구보타는 하나의 <액션>페인팅을 했다. 잭슨 폴록이 화실 바닥에 페인트를 뚝뚝 흘리던 제작 방식을 빗대는 동시에 그것을 뒤집어 버린 이 작품에 대해, 당시 많은 남성 예술가들은 거부감을 보였다. 구보타는 커다란 종이를 바닥에 깔고 속옷 가랑이에 붓을 달고 나아가면서 붉은 붓 자국을 남겼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여성적>인 몸짓 그림의 과정을 창조한 것으로, 여성 육체 중 창조의 핵심인 곳에서 흘러나오는 그 그림은 <사정>하듯 던지고 떨어뜨리고 흩뿌리는 그림과는 대조를 이룬다. 또 구보타는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알몸의 여성들을 <인간 붓>으로 사용했던 이브 클랭의 해프닝을 패러디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성기를 새김의 근원으로 사용하면서 서양 문화에서 여성 생식기의 의미에 질문을 던진다. 서양 문화에서 여성의 음부는 프로이트에 의해 (남근이) <결여>된 곳으로 해석되었으며 이 <결여>로 인해 여성은 언어, 시각 기호, 몸짓을 통한 타당한 표현이 불가능하다고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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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도 [피를 마시는 새]

비교적, 생리에 대한 정확한 묘사라고 생각한다.

 

 

-중략-

 

갑자기 그녀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실은 주머니 속의 손으로 허리를 세게 눌렀다. 자신의 몸이 아닌 것 같은 그 부분을 눌러 확인해야 했다. 반응은 신통찮았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지붕이 있는 곳에 쉬게 된 날 미치광이에게 헛소리를 듣고 동료는 배신감을 선사했고 그녀의 아랫배는 제멋대로 통증에 빠져 들었다. 제기랄!  

 

..

갑자기 아실의 아랫배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

 

'제기랄, 내 아랫배에 들어온 씹할 도깨비. 거기서 불장난을 쳐도 좋다고 한 적이 없는데.'

 

 -중략-

`

[피를 마시는 새] 1권, p477-505사이, 2005년 황금가지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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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생명연습]

1962년의 소설. 1950-60년의 풍경이겠지?

그런데 솔직히 죽을만큼 괴로운 생리통을 겪어 보고 나면 귀엽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든다.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어떻다는 건 알겠지만, 남성화자의 지식인놀이가 이런 데 쓰이는 건 나로서는  불쾌.   

 

중략-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게 뭘까?"

지난 5월 어느 일요일, 한교수님 댁엘 놀러갔을 때였다. 햇볕이 여간 좋은 게 아니어서 나와 그 애와 사모님은 등의자를 마당가에 내놓고 앉아 한담을 하고 있다가 발끝으로 흙을 톡톡 차며 등의자를 뒤로 잦혔다 앞으로 숙였다 하고 있는 그 애가 하도 귀여워서 탄식하듯 내가 입 밖에 낸 말이었는데

"여신(女神)의 멘스?"

라고 그애는 가벼웁게 퉁겨버리는 것이었다.

"응?"

나는 얼떨떨해져버려서 코 먹은 소리로 반문했더니

"아닐까?"

그애는 숙인 얼굴에서 눈만을 살짝 치켜떠보며 부정의문법으로 또 한번 쥐어박았다.

"호오, 여신에게도 멘스가 다 있을까?"

사모님께서 마침 이렇게 대답을 하심으로서 그 얘긴 그정도로 그쳐서 나는 화끈 단 얼굴을 감출 수가 있었지만 이건 못 당하겠는데,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중략-

 

한국일보,신춘문예,1962. 김승옥 소설전집 1권, 문학동네, 1995.

 

20세기 한국소설 19. 김승옥 이제하 외.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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