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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우리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용서 반대론은 매우 강력한 주장이다. 어떤 종류의 용서는 천박하고 경박하다. 그리고 피해자는 자신을 무참히 해친 가해자를 원망할 권리, 때로는 증오할 권리가 있다 (...) 하지만 최선의 용서는 우리 인간이 더없이 위대할 때가 아니라 악이 물들고 저속하게 타락해 최악의 수준에 있을 때 그들에 대한 연대감을 보여준다. 이것은 최고뿐 아니라 최악의 우리, 즉 누구나 될 수 있는, 혹은 된 적이 있었을 법한 최악의 인간을 위해 사랑을 옹호하는 투쟁이다. 물론 피해자의 요구와 피해자와의 연대감이 가해자와의 연대감보다 늘 훨씬 중요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는 가해자에게 어떤 태도를 보일지 결정해야 한다. 그들을 용서하기로 한다면, 그것은 곧 때로는 끔찍하기도 한 그 악행의 본질을 [용인하거나 침묵하지 않고] 인정하되 계속 마음을 열고 장차 뭔가 나아지기를 소망하겠다는 뜻이다. 그 소망은 종종 무참히 깨지지만, 그럼에도 몇 번이고 되살아난다." - 이브 개러드 & 데이비드 맥노튼, [[용서란 무엇인가]], 파이카, 2013, 233-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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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삶

"자아는 한편으로 자기 바깥의 우상을 섬기고, 다른 한편으로 스스로를 자신의 우상으로 구성한다. 이 둘 가운데 나중의 것이 더 중요하다. 즉 자아는 이상적인 자아상과 자신을 일치시키고 스스로를 우상으로 삼는다. 자아가 자기 바깥의 우상을 섬기는 것은 자기 자신도 그러한 우상이 되려 하거나 그 우상의 권력을 자기도 나누어 가지려 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아의 삶은 스스로를 우상으로 삼는 삶이다. 즉 자아의 삶은 일종의 꿈이다. 우상인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꿈이 그것이다." -이종영, [[내면으로]], 울력, 2012, 4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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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보기 좋은 신간 몇권 추천

인터넷 뉴스의 여배우들 노출 기사나 맥심의 클럽 파티 리뷰를 또래 남성들처럼 약간의 흥분에 젖어 보는 취미가 있긴 하지만, 나는 주말에 시간이 나면 고작 밥집과 서점에만 들리는 심심한 사람이다. 이미 알라딘에서 다 체크한 것들이지만 인문/철학과 사회과학/정치학 신간 코너를 한 번씩 둘러 보고, 요즘에는 거기에 더해 만화 코너에 들려 웹툰이나 그래픽 노블을 좀 들여다 보기도 한다.

 

그리고서는 한 두 권 씩을 꼭 사들고 나오는데 정작 재밌게 읽는 책은 거의 없다. 언젠가 이 공간에서 말한 적이 있는 것 같지만 도서구매는 나 자신에게 "내가 아직도 이 주제에 관심이 있고, 이런 새로운 시각들(혹은 나의 이상적 자아를 배신하는, 오히려 그리하여 더 큰 만족감을 주는 세속적 주제들)을 챙겨볼 지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일종의 의례 같다. 그런 와중에서도 재밌게 보기 시작해 드물게도 완독하게 되는 책들이 몇 권 나오긴 하는데 최근에는 다음 책들이 그러했다.

 

 

1`. 마이클 굿윈, 댄 E 버, [만화로 보는 경제학의 거의 모든 것], 김남수 옮김, 다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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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711468

 

사회학과 졸업생으로서 경제학에 대해서는 그것이 주류이든 비주류이든 맑스주의이든 항상 "언젠가 개괄적으로라도 정리해야 하는데"라는 부채감이 있었다. 가끔 사회과학 학술서든 대중서든 경제사라든가 경제학 용어는 빠지지 않고 나오지만 대강 보면 아 그렇구나 싶지만 남에게 설명하려고 보면 내가 정말 이걸 이해를 한 번은 해봤을까. 개인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이라는 말이 특히 그런데 이 단어만 나오면 이게 사회적 문제인지 괜한 걱정이나 협박인지 뭔지 알 수가 없다.

 

사회과학이 조금이라도 섞인 대중서를 읽는 독자들이라면 느꼈을 법한 혼란인데 이 책은 이를 나름의 일관성을 가지고 묶어주고 있다. 이 책의 주장이 어떤 입장에서 보았을 때 타당하건 부당하건 간에 이 책이 출발선을 짚어주는, 다른 경제학 책을 읽을 기초를 주는 책이라는 것은 적어도 나한테는 맞는 이야기 같다. 가라타니 고진을 읽고 철학책들을 읽을 때 그러했던 기억이 난다....

 

좀더 자세하고 적절한 서평은 프레시안북스의 기사를 참조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0315175741

 

 

2. 이브 개러드, 데이비드 맥노튼, [용서란 무엇인가], 박유진 옮김, 파이카,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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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7540205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담이지만 용서할 일도, 그리고 용서받았으면 하는 일도 많은 차에 읽게 된 책이다. 해외 어떤 출판사에서 [ART OF LIVING]이라는 시리즈로 나오고 있고, 이를 또 시리즈로 번역하고 있는 파이카 출판사에서 나온 다섯 권의 책들 중 하나다.  

 

저자들은 자신의 문제의식을 현대의 용서 옹호론을 비판하며 시작하고 있다. 오늘날 각종 담론과 대중문화에서는 용서를 무조건적인 긍정적 가치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문제적이다. 용서 옹호론은 용서의 이유를 용서하는 사람의 치유 효과에 방점을 두고 있지만, 이는 용서가 무엇보다도 가해자에게 큰 이익이라는 것을 망각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어떤 경우에는 가해자로 하여금 적절한 대가를 치루지 않고 죄로부터 해방되게 하는 부정의를 초래하기로 한다. 용서는 정의와 등치될 수 없으며 심지어 정의를 침해하기도 하는 것이다.

 

저자는 용서를 긍정적이고 문명적인 것으로, 복수를 부정적이고 원시적으로 보는 시각에 맞서 용서에 대한 강한 반론들을 소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가 긍정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용서가 되어야 할지에 대해서 논한다고 한다(아직 완독은 못 했다).

 

 

3. 조지프 엡스타인, [성난 초콜릿 : 그럴듯하면서 확인할 수 없고 매우 가혹한 가십의 문화, 사회사], 박인용, 김양미 옮김, 함께읽는책,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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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369649

 

어제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전반적으로 시오랑의 치오랑이라고 하고 참고문헌에 서지정보도 대강 적혀 있는 등 대중인문서로 의도하지도 않았고 여러 면에서 헐렁하다는 느낌을 주는 편집의 책이지만 그냥 내용이 재밌고 그닥 비싼 편도 아니어서(15,000)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싶다. 부제를 보고 문화사 사회사라고 하면 너무 과한 평 같고 저자는 재치있는 글솜씨로 가십, 뒷담화, 소문들의 특성에 대해서 정확히 묘사하고,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차지하는지, 무엇보다도 왜 참을 수 없는지에 대해서 여러가지 개인적인 경험과 널리 알려진 사례들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가십의 부정성이 아닌, 그렇다고 긍정성도 아닌 불가피성 내지는 실재성에 대해서 논한다.

 

고루고루 재밌는 책이다. 가십의 특성이 "그럴듯"한 동시에 "확인할 수 없어야" 하며 "가혹"하다는 명료한 정의에서부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해, 가십이 그리 지저분하고 지울 수 없는 고통을 주고 또 우리가 받기도 하지만 왜 그만큼의 재미를 주는지, 고급 정보가 제한된 집단내 개인들이 어떻게 가십을 이용해 삶의 전략들을 세우는지, 정치인의 도덕성과 사생활이 어째서 공적 가십(?)의 대표적 사례가 되었는지, 인터넷이 가십의 유통 속도를 어떻게 가속화하고 있고 그것이 "가십을 위해 싸우는 민병대"를 거느리게 됐는지에 관한 썰들도 학술적 엄밀함은 약하지만 그 자체로 재밌는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블래즈 파스칼의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서로를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같은 역시 '유명인'의 인용들도 소소한 재미를 주며, 저널리즘의 현재적 위치에 대한 상투적 고민들도 한번 새로운 시각에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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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소와 뜨끔함

1.

개인적인 사정으로 몇 년간 공부를 멈추었다가 다시 시작해 보아야 겠다 싶어 철학아카데미에서 강좌 하나를 듣고 있다. 어제는 강좌 뒷풀이가 있었는데 자기소개를 하다 보니 나보다 2년 나이가 적으신 분이 있었다. 예감은 했지만 결국 이런 때가 왔구나 싶었다. 그러니까 강좌든 세미나든 그냥 술자리든 어디든 간에 내 의지로 자율적으로 찾아간 인문학/사회과학 관련 모임에서 더이상 "최연소"가 아니게 되는 날 말이다.

 

2.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 자리가 최연소가 아닌 채로 맞이하게 되는 최초의 자리는 아닌 것 같다. 저번주에 다녀온 EM 님의 대잔치 자리에서도 이미 난 최연소가 아니었다. 말이 나온 김에 EM님의 포스트 하나를 더 언급하고 싶다. 몇 년 전 진보평론에 실었던 세미나 발제문에 대한 EM님의 촌평이다.

 

3.

EM님은 여기서 매우 과도한 표현들을 써주고 계신다. "잘 씌였다"거나 "길다"든가, 무려 "뜨끔함"이라던가. 지금 읽으면 정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나이가 얼마나 먹었다고 회고하는 것도 웃기지만 저 시기의 나는 정말 야심찼던 것 같다. 부족한 외국어 실력은 이제부터 천천히 보충하면 되고 책은 계속 읽고 정리 안하는 습관도 고치고 등등.....고등학교 때 품었던 펑크락커가 되겠다는 꿈만큼이나 황당한 꿈도 있었는데 지젝처럼 영어로 책을 써 돈과 명예를 얻겠다는 것이다. 저 시기에 그렇지는 않았고 저 시기로부터 한 2년 전 쯤에 그런 야심을 품었던 것 같다.

 

4.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때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실망스럽고, 또 지금의 나로서는 그래저래 이 정도여서 다행이야 하는 그런 수준의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야심은 둘째치고 어학능력은 전혀 진척이 없으며 건강이나 금전 등 자기관리 측면에 있어서도 평균적인 이 나이 젊은이 수준의 한참 이하이다. 생활인으로서나 어줍잖은 지식인 흉내쟁이로서나 수준 이하인 셈이다.

 

EM님이 저 포스트에서 품어주셨던 "뜨끔함"은 요즘 내가 모든 최연소들과, 그리 나와 달리 공부를 끊지 않고 이어온 지인들에 대해 훨씬 증폭된 형태로 훨씬 빈번한 빈도로 가지는 감정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하는데 요즘의 나는 주변의 거의 모든 인물과 사물에서 솥뚜껑들을 보곤 한다. 몇 년 사이에 위치가 바뀌었고 (내가 짐작하기에) EM님과 달리 뜨끔함으로부터 자신을 지킬만한 줏대도 아예 없다고는 못하지만 그리 넉넉하게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5.

EM님처럼 고마운 시선, 그러니까 좋은 시선이기에 고맙기도 하고 지금 생각해보니 시선 자체가 고마웠다는 의미에서의 고마운 시선을 주셨던 분들의 이름들을 생각해 보았다. 아니 사실 거의 매일 생각한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었고 적은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들 일부에게는 배신감을 안겨주었던 것 같고, 아직 주지 않았더라도 지금 내 모습을 보이면 배신감을 드릴 거 같다. 한편으로는 그러기에 깨소금맛을 안겨줄 수 있는 사람들도 생각이 난다. 내가 죄를 지은 사람들, 혹은 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죄를 지었다고 내가 자기정당화하고 있다고 우기는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과 함께 매일매일 생각난다.

 

6.

이제는 조금 늦은 나이에 외국어를 익히고 책을 읽어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또 스스로에게 어떤 도움을 구할 수 있을까? 최연소였을 시절, 공부는 언제나 항상 최선이었지만, 최연소를 추억하는 지금, 공부는 항상 차악으로 생각되곤 한다(물론 최악은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다). 최연소의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위대하거나 그런 사람은 못 될 거 같다. 최연소가 아닌 지금은 나 자신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쪼그라든, 어쨌든 내 과도했던 기대보다는 쪼그라든 나 자신을 긍정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더 높이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낮게 가지 않기 위한 시도들을 고민하고 있다.

 

솔직히 즐겁진 않다. 그래도 뭐 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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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태원, [‘포스트’ 담론의 유령들: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링크 : http://blog.aladin.co.kr/balmas/6020636

 

대강 절반쯤 읽었는데 쟁여놓고 읽고 싶고, 또 지인들과 공유하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링크 주소를 옮겨 놓는다. 진태원 선생님(항상 조심스러운 호칭이다...)이 이런 문제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알고 계셨지만, 이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글을 쓰시리라고는 생각을 안 했다. 아무래도 본인이 가끔 말씀하시듯 민족문화연구원이라는 직장 덕(?)에 유일한 유럽 철학 전공자로서의 본인의 사회적 기원과 역할에 대한 성찰을 계속 하시고 계신 걸까....

 

사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흔한 답은 동구 사회주의권 몰락이라는 건데 이를 인정하면서도 좀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레벨에서 "포스트주의" 문제를 조명하는 부분을 보며 두고두고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부분 인용만 잠깐 옮겨 놓는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쇄적인 몰락은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 관한 논의가 이미 1970년대부터 널리 전개되고 있었지만)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말 그대로 급격한 변화였고 한 시대의 종언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이러한 답변은 설득력이 있다. 사회주의의 몰락, 마르크스주의의 종언, 냉전의 종식, 근대성의 종말, 국민국가의 몰락 등과 같이 각종 종말에 대한 담론은 새 천년의 시작을 눈앞에 두고 급속히 확산된 바 있다.

 

하지만 이 답변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우선 이 답변은 ‘외부 현실의 변화’가 왜 꼭 그렇게 급격한 ‘내부의 사상적 변화’를 수반해야 했는가라는 반문에 대해 제대로 답변하기 어렵다. 실제로 1992년에 창간되어 19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국내 인문사회과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이론]이라는 학술지, 세계사적인 변화에 대응하려는 마르크스주의적 시도를 대변하던 그 학술지의 존재는 단순히 외부 현실의 변화만으로는 급격한 사상과 담론의 변화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포스트주의, 혹은 포스트-포스트주의로서의 나 자신에 대한 생각들은 블로그에 기회가 닿는 대로 남겨 놓았지만, 여기에도 기록해 놓았었다(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622144446&section=04).

 

이제 새해다. 여러가지 생각이 들면서도, 언제까지 이것만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는데 싶은 것이 에라 모르겠다 싶다 ㅎㅎㅎㅎ 에휴 될대로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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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세미나 웹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블로그로는 세미나 운영에 곤란이 있을 것 같아서 아는 분 홈페이지에 신세를 지게되었습니다.

 

주소는 http://weirdhat.net/xe/t2w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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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세미나 후기 : [[감정노동]]

  블로그에는 공지하지 못했지만 현재 '노동'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세미나를 진행중에 있다. 세미나는 크게 두 순서를 나눠 진행할 예정이다. 1) 우선 노동에 대한 개념적이고 이론적인 접근을 접해볼 것이고, 2) 그 후에는 노동이라는 말만큼이나 지금의 우리에게는 모호한 단어지만 '한국 노동 현실'에 대해서 알아가 볼 것이다.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이 노동이라는 말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사회라는 말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공부에 활용할 자료는 누구나 약간의 돈만 있으면 쉽게 획득할 수 있고 휴대도 편한 인문학/사회과학 계열 출판사에서 나온 국내/외국 저자의 단독 저서가 1차 텍스트가 될 것이나, 기회와 능력, 시야가 되는대로 논문, 기사 등의 자료를 2차적으로 참고 할 것이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알리 러셀 혹실드의 [[감정노동]](1983)이다. 원제는 번역 제목과는 조금 다른 [[The Managed Heart : Commercialization of Human Feeling]]이다. 이가람에 이해 번역된 20주년 기념 증보판을 교재로 쓰고 있으나, 증보판에 들어와서 어떤 부분이 수정/가필되었는지는 확인이 불가하다. 다음에 읽을 책들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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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히, [[그림자노동]] - 절판된 관계로 제본함

해리 브레이버맨, [[노동과 독점자본]] - 역시 절판, 제본 예정, 번역이 좋지 않은 관계로 가능하면 영어본도 참고

마이클 부라보이, [[생산의 정치 :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공장체제]] - 시판중

어슐러 휴즈, [[사이버타리아트]] - 시판중

후마니타스에서 나온 각종 노동 문제 관련 서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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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간의 독서회나 세미나 짬밥을 미루어 볼 때 과연 내 끈기가 여기에 나온 커리나 끝까지 함께할 수 있을런지 자신이 서지 않지만 대강의 계획은 이러하다. 세미나 실참여 인원은 나를 포함해 4명이며, 1~2명이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추가 합류의사를 밝혀왔다. 새로 합류할 사람들과 나 자신의 좀더 정확한 독해를 위하여 [[감정노동]] 세미나 후기를 정리해 보겠다. 다음 세미나 일정은 11.6(화) 동대문운동장 또는 동대입구역 근처 진보평론 사무실이며, 범위는 [[감정노동]]의 8장과 9장이다.

 

1. 이론적 전제와 개괄

내가 보았을 때, [[감정노동]]의 책으로서의 이론적 대전제는 감정은 주체에게 내재된 자연적인 것인 동시에 외적 영향에 따라 바뀌는 변형가능한 것인 동시에 주체의 의지와 노력을 통해서도 조절할 수 있는 통제가능한 것(즉, Managed Heart)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감정은 개인적인 것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1장의 주석8(310쪽)은 이러한 맥락에서 개인/주체-사회/환경의 관계를 설정한 3명의 학자 또는 3명의 방식을 언급한다.

 

1) 첫번째 [[고독한 군중]]의 데이비드 리즈먼은 개인의 감정 유형에 따라 각각 사회와 다른 관계를 맺는다고 말했고(개인>사회),

2) 여기에 더해 로버트 립튼은 감정 혹은 성격의 유형이 고정된 것이 아닌 사회의 요구에 따라 변형된다고 말하였고(사회>개인),

3) 혹실드는 이 논점들을 인정하면서도 "적응력의 좀더 적극적인 요소", 즉 주체가 자신의 감정이 사회의 요구와 감정법칙에 부딪쳤을 때 어떻게 수긍하면서도(적응) 벗어나는지(비적응)에 주목하기로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적 전제가 책 전반에서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지 않다는 점은 유의해야 한다. 혹실드는 필요에 따라 1)의 논점을 강조하거나(ex ; 200~206, 지위형/인격형 통제 체계에 관한 논의), 2)의 논점(ex : "우리가 내재적이라고 여기던 감정들은 언제나 사회적 형태로 만들어져 이용되었다는 말이 된다."(34))을 강조한다. 그러나 1)의 논점이 강조되는 부분들은 부분적 분석이나 예시에 머물러 있고 2)의 논점이 강조되는 부분의 분석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6장, 7장의 논의가 감정노동이 수동적으로 부과되는 측면만이 아닌 능동적으로 행해지는 측면을 덧붙이는 것을 볼 때, 혹실드의 감정 개념에 대한 최종적인 이론적 전제는 1부 전반에서 전개되는 3)의 측면이 아닐까 싶다. 

 

  1부는 이러한 이론적 관점에 대한 사회학적 예증 혹은 검증들이다. 인간의 감정이 자의적이고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의 욕구, 외부의 요구 등에 요인에 따라 일정한 규칙성을 띠게 되며, 그 과정에서 감정의 변화와 감정 변화를 위한 기술들(즉, 감정노동)이 각종 조사자료들을 통해 예증되며, 기술의 메커니즘은 스타니슬라프스키의 [[배우수업]]에 나온 연극 기술을 예시로 들어 서술된다.

 

  2부는 이러한 감정법칙이 당시의 산업환경, 노동조건과 관련하여 어떤 양태를 띠고 어떤 논점에서 사회적인 수준의 문제로 간주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서술되고 있다. 6장은 감정노동자의 대표적인 사례로서의 승무원의 경우가 다루어지고 있다. 7장은 또다른 감정노동자의 대표적인 사례인 동시에 승무원과 정반대 방향의 감정노동을 하지만 유사한 양상을 보여주여 감정노동이라는 이론틀의 일반성을 입증하는 추심원의 경우가 다뤄지고 있고, 8장은 젠더 불평등의 관점에서 본 감정노동에 관한 여러 논점들을 짚고 있으며, 9장은 진정성은 역사를 초월한 보편적인 가치가 아니며, 감정노동으로 인한 소외라는 역사적 배경을 가진다는 점을 지적하며 논의를 갈무리하고 있다. 

 

 

2. 1부 : 감정체계의 개인적인 면

  1장은 서문을 보충하여 책의 전체 내용을 개괄하고 있다. 그만큼 책 전체에서 논쟁적으로 다뤄질만한 부분이 압축되어 있기도 하다. 우리는 대강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도출하였으며, 연관된 인용구는 다음과 같다. 

 

Q1. 감정노동은 특수한 노동(일부 서비스 업종에 제한)인가 일반적인 노동(화이트/블루칼라를 포괄)의 특정 속성인가? 

아마도 이 책은 (...) 항공 승무원과 가장 관련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우리 자신의 감정을 어느 정도 관리해야 하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모두 부분적으로 항공 승무원이라고 볼 수 있다.(26쪽)

Q1-1. 이와 연관하여 저자는 육체/정신/감정노동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데 이는 어떤 수준에서 온당하고, 어떤 수준에서 그렇지 않은가? (21쪽)

Q2. 감정의 조작과 관리, 즉 감정노동이 인간에게 내재하는 속성이라면 감정노동이 현재의 역사적 단계에서 변화된 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수준에서 사회적 문제인가?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고 기대하는지 또는 무엇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감을 잡아 보려고 애쓰는 것은 감정 그 자체만큼이나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 감정법칙을 따르거나 벗어나는 것도 별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조직화된 사회에서, 법칙이 눈에 보이는 행동에만 적용된 적은 한 번도 없을 것이다. (...) 요즘 새로워진 것이라며, 점점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개인적인 목적에 다라 감정을 자유재재로 다루던 본능적 능력에 관련해서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감정에 관해 도구적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과, 대기업이 개인의 이런 거리 두기를 구성하고 조종한다는 것이다."(37쪽, 38쪽도 함께 참고)

 

  2장에서는 승무원 연수 사례를 통해 우리는 현실에서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기업 차원에서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살펴본 후, 감정에 대한 생물학적 해석(감정은 주어진 것으로 능동적으로 바꿀 수 없다)에 반대하여 감정은 통제가능한 것이라는 본인의 이론적 전제를 제시한다. 

"우리가 감정이라는 것에 관해, 주어진 방식에 따라 내부의 감각에 귀 기울임으로써 또는 환경을 정의하거나 감정 자체를 다스림으로서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감정이 얼마나 유동적이면서 재구성하는 기술에 따라 쉽게 바뀔 수 있는지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다."(45쪽, 볼드 강조는 저자, 밑줄 강조는 인용자)

  이어서 감정이라는 자아의 부분적 요소가 자아에게 있어 얼마나 본질적인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발제자 개인으로서 크게 이론적으로 중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이 가정은 뒷부분, 감정노동의 상업화에 따른 개인적이고 정신적인 피해를 강조하는 부분의 이론적 기초를 이룬다. 관련된 논의를 선취하자면 상업화는 감정노동의 강도를 불가능한 수준으로 상승시키고, 개인은 이로 인해 자아의 실마리를 잃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는 2장 말미에서 추가적인 질문을 도출했다. 현재 이론틀에서 자아는 개인 정신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 간주되고 있으며 혹실드는 자아의 수동적인 측면(생물학적 본성, 사회적 규정)에 반하여 능동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잇다, 하지만 이는 인간 주체에 있어 자아라는 능동적인 측면과 이질적이고 나아가 지배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정신분석학 이론의 논의는 참고하지 않은 것이다. 혹실드는 낸시 초도로우 등의 정신분석학 논의를 가끔 인용하며 동의를 표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이론적 전제에는 포괄하지 않는다. (245쪽의 논의는 정신분석학에 대한 개괄적 이해를 혹실드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이는 이론적으로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러한 참고 회피가 필연적으로 어떤 이론적 맹목을 가져온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말을 쓰지만 같은 결론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더 나은 결론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의 능동성이라는 전제는 "참된 자아"라는 자기계발/힐링 서적 류의 대안아닌 대안으로 나아가는 기초가 되는 것은 아닐까. 사회적인 문제에 개인적인 대안이 제시되는 것이다. 우리는 53~54쪽에서 제시된 그러한 저자의 대안을 비판하였다. 

진심에서 우러나는 것처럼 보이는 감정 표현 전반에서 상업성을 띤 감정 표현을 구별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미소를 받아들이되 사회공학이 그 안에 집어넣은 것을 거른 뒤 정말 우리만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것만을 취하자. (...) 최종적으로는, 등 뒤에서 누가 뭐라고 하건 누가 눈앞에서 웃건 관계없이 우리 고유의 소유물로 남게 될 내면의 보석인 '참된 자아'에 관한 생각을 채워가는 것이다." 

  허나 인용문을 옮겨놓은 지금 이 구절은 '대안'을 제시하기 보다는 일종의 비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저자는 9장에서 진정성이라는 대안의 허구성을 비판한다. (245쪽 참고)

 

  2장이 감정이 통제가능한 것(Plastic Emotion)을 말했다면 3장은 이 자아 통제, 감정관리 혹은 감정노동의 기술,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이는 크게 표면행위(surface acting)와 내면행위(deep acting)로 나누어지는데 이를 우리에게 조금더 일상적인 말로 바꾸면 겉치레와 자기설득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혹실드는 감정통제기술들을 연극에 비유해서 설명하는데 이 때 근거가 되는 것은 러시아의 연출가 스타니슬라프스키이다. 표면행위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말그대로 걸치레이다.

표면 행위를 통해 햄릿이나 오필리어의 감정을 보여주기 위해, 배우는 외면적인 몸동작을 만들어내는 무수히 많은 근육을 움직인다. 이 직업의 주요 도구는 정신이 아닌 몸이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이러한 표면행위를 비웃으며 그 자신이 메소드 연기라 부르고, 혹실드의 내면행위의 한 전형이라 본 기법을 창안한다. 감정을 직접 자극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내면행위의 일종이지만 메소드 연기는 그보다 고차원의 내면행위에 속한다. 그것은 "훈련된 상상력"(59쪽)을 이용한다. 길거리에서 동냥하는 거지의 객사를 연기하기 위해 이태리 여행 중에 본 거지가 죽은 애완 원숭이를 보고 슬퍼하는 "감정 기억"을 동원하고, 폭풍우에 휘말린 상황을 연기하기 위해 자신이 폭풍우에 빠지고 보다 세부적으로 온몸이 젖는 등의 상황을 상상력을 동원해 가정해 본다. 

  혹실드는 이런 내면행위가 위대한 연출가의 특별한 아이디어가 아닌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실연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옛 연인의 나쁜 면을 일부러 떠올리는 것이 그 예이다. 하지만 이러한 연극의 비유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적 기능에 국한될 뿐이다. 혹실드는 연극과 실제 삶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명히 한다. 

연극과 삶을 구별하는 것은 환상이 아니다. 둘 다 환상을 가지고 있고, 환상을 필요로 하고, 환상을 사용한다. (...) 연극에서 환상은 커튼이 내려가는 순간 사라지고, 관객들도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개인의 삶에서 환상이 사라지는 데 따르는 결과는 예측할 수 없으며 치명적일 수도 있다. 사랑이 끝나고, 청혼을 거절당하고, 정신병원 침대가 하나 더 채워질지도 모를 일이다.(71~72쪽)

  지금까지 우리는 감정의 개인적 통제에 관해서 다루었다. 혹실드는 2장의 남은 절에서 감정인 개인 수준이 아닌 기업과 같은 보다 큰 사회 조직의 수준에서 다뤄질 수 있고, 그에 따라 어떤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 논의는 4장으로 곧장 이어지지 않고 2부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어진다. 

 

4장은 감정의 성격에 대한 이론적인 논의를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사회적인 차원에서 조명한다. 감정이 외부영향에 의해 촉발되고, 주체 또는 자아의 노력에 의해 변화되는 일련의 과정들은 자의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과 장소, 배역에 따라 일정한 법칙을 가진다는 것이다. 혹실드는 결혼식장과 장례식장, 가정에서의 감정법칙과 주체가 이를 준수하려는 감정관리의 노력들을 기술한다. 

 

5장은 정확하게 이해가 되진 않지만 4장에 대한 이론적 부연이 아닐까 싶다. 혹실드는 피터 블라우라는 사람을 인용하며 감정법칙을 준수하는 개인들 간의 "직선적 교환"과 "법칙 자체에 질문을 던지고 법칙을 좌지우지"(108쪽)하는 "즉흥적 교환"에 대해 말한다. 이에 대한 자질구레한 사례들과 각 사례들에서의 감정의 움직임에 대한 추측성 사설들이 서술된다. 아마도 혹실드는 감정법칙이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닌 개별 주체들의 행위에 따라 각각 다른 양상을 띠고 때론 법칙 자체가 변화하기도 하는 역동적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뚜렷한 근거는 찾지 못하겠다. 

 

 

3. 2부 : 감정체계의 사회적인, 그리고 상업적인 면

  6장에서는 드디어 책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항공기 승무원 사례에 대한 분석이 나온다. 혹실드는 6장뿐만 아니라 책의 전 부분에 걸쳐 감정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지나치리만큼 명확하게 구분한다. 승무원 개인의 감정체계는 항공업계의 기업 논리와 만나 공적 차원으로 변형된다.(122, 155쪽) 승무원은 감정노동을 수행하는 대표적인 사례로서 다루어진다. 따라서 승무원이라는 사회적 집단의 역사적 등장은 감정노동의 역사적 등장이기도 한 것이다(Q1.의 질문은 여기서는 일시적으로 생략하자. 대신 Q2.에 대한 제한적인 대답이 나온다).

  역사적 과정(규제, 파산, 정책 등)을 거쳐 미 항공업계는 1980년대 이전 가격 경쟁을 지나 1981년 서비스 경쟁의 시대에 돌입한다.(123쪽) 항공권 가격이 비슷해지자 타 기업과 다르고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따라 이윤의 크기가 달라지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승무원의 역할이 강조되게 되었다.  승무원은 항공업계 광고의 중심소재가 되었으며, 주 고객인 남성 사업가의 성적 환상에 부응하는 외모를 갖추는 제약과 매너를 갖추는 감정노동의 증가를 경험하게 되었다. 승무원은 이제 승객들의 안전을 관리하고 음식을 제공하는 것 이외에도 만족스러운 감정을 생산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게 된다.

  따라서 항공업계는 면접장에서의 순간적인 친교능력을 시험하는 등 감정관리를 인사 평가 항목에 반영하고, 또한 자사가 추구하는 승무원의 이미지에 걸맞는 종류의 외모와 사교성을 가진 자원을 고용하기 시작하였다. 

채용하는 처지에서는 기본적으로 똑똑하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사람, 긴급상황에 안전 지시를 내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여자가 하는 명령은 듣지 않으려는 승객도 다룰 수 있는 사람,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심정에 공감할 줄 알고 회사의 목적을 위해 그런 공감을 이용하고 계속 조작하는 과정에서 멍해지지 않고 버틸 만한 사람을 찾는다.(131쪽, 강조는 인용자)

  이어서 연수 과정에서 외모에 관한 온갖 통제 규정들(거들 착용, 눈 화장, 가발, 허벅지 사이즈 측정)에 관한 사회고발적 서술이 이어진다. 외모에 대한 통제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승무원 노동자로 하여금 '그 외모에 걸맞는 감정'을 가질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열의를 연기하는 강사, 웃음을 자아내는 할로윈 분장, 그리고 승무원의 상징인 "미소 짓는 얼굴"을 가질 것으로 기업은 개인에게 주문한다. 기업은 매뉴얼과 강의를 통해 비행기가 직장이 아니라 마치 집인 것처럼 생각하라는, 스타니슬라프스키의 메소드 연기를 연상케 하라는 주문을 한다.(139~141쪽) 혹실드는 이러한 승무원들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일이 어려워질 때, 기내가 혼잡하고 비행기가 연착할 때,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고 흡연자들이 시끄럽게 비흡자들과 말다툼을 할 때, 음식이 떨어지고 에어컨이 고장일 때야말로, 집과 객실을 같은 것으로 보는 논리는, 기내에 흐르는 음악 방송과 카트에 쌓인 주류에 둘러싸인 채, 감정을 억누를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보여주는 진정한 기념물이 된다.(145쪽)

이런 비행 상황에서의 감정노동은 승객이 아닌 승무원에게만 요구된다는 점에서 "일방적"(144쪽)이다. "이런 상황들이 되면 승객들은 짜증을 억누르지 않을 특권을 행사한다. 승객은 '분노의 화신'이 된다."(145쪽) 이런 나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승무원들은 스타니슬라프스키가 감정 기억, 연상 등의 테크닉을 동원한 것처럼 업무용 언어로 말하기, 퇴근하면 끝이다 식으로 연상하기 등의 테크닉을 동원한다. 혹은 동료 직원들과 농담과 험담을 늘어놓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부연하면 혹실드는 노동자들의 유대감이 사기 진작과 회사를 향한 악의 형성이라는 양가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만 우리는 후자로 흘러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냐는 촌평을 하였다.) 면접에서의 사교성 테스트처럼 고용된 승무원 노동자의 감정관리 기술에 대해서도 평가가 시행되고 인사 고과에 반영되는데 이를 가능케 하는 제도로 "고객 엽서 제도"와 "고객 설문조사"가 등장한다.(152쪽) 

  이런 사례 분석에서 혹실드는 감정노동에 대한 이론적인 세 가지 소결과 한 가지 결론을 제시한다.

첫째, 감정노동은 이제 사적인 차원의 행위가 아니라 공적 행위로서, 한 사람의 손에서 다른 사람에게 판매되는 것이 된다. 감정노동을 지시하는 사람은 이제 감정노동을 하는 개인이 아니라 돈을 받고 다른 사람을 선발하고 훈련시키며 감독하는 무대 관리자다.

둘째, 감정 법칙은 이제 그저 어떤 사람과 사적으로 협상할만한 개인적인 재량의 문제가 아니라, <승무원 업무를 위한 항공사 지침>, <월드 항공 비행 지침서>, 연수 프로그램, 각급 사무장들의 담론 속에서 공적으로 정해진다.

셋째, 사회적 교환은 좁은 통로를 통해서만 일어나도록 강요된다. 그 경계를 따라 숨을 곳이 있을 수는 있겟지만, 개인적으로는 감정을 채울 곳을 찾기 위한 공간은 훨씬 적다.

(...) 감정 체계가 상업적인 환경 속으로 끼워져 들어가면 감정 체계는 변형된다. 감정 관리를 위한 행위와 그런 행위를 다스리는 법칙, 베풂의 교환 저변으로 이익의 동기가 들어가게 된다.(155쪽)

혹실드는 곧바로 이어 "오늘날 누가 그 이익을 보고, 누가 비용을 감당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초반에 제시한 Q2.의 사회적 문제 측면에 대한 대답을 일부 얻는다. [[노동과 독점자본]]이 인용되며 자본가의 노동자의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라는 문제의식이 등장한다. 브래이버맨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감정노동이라는 영역은 혹실드 자신이 새롭게 조명한 영역이고, 같은 점이 있다면 이 영역에서도 통제는 지속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통제의 양상은 해당 산업이 처한 역사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서 다른 양상을 띤다. 여기서 서비스 경쟁에 곧바로 뒤이은 능률 향상이라는 역사적 변화가 제시된다. 경쟁의 강화로 고용 규모는 축소되고, 수용 승객이 늘어남에 따라 승무원 개인별 노동강도는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런 노동조건의 변화, 악화에도 불구하고 승객에게 무조건적으로 친절해야 한다는 감정노동 요구는 지속되는 것을 넘어 증가하였다. 하지만 기업은 이 증가된 감정노동 수요를 승무원을 보충한다던가 서비스 쿠폰을 지급한다는 식으로 해결하지 않고 승무원이 현장에서 처리할 것을 주문한다. 노동자 개인은 변형이 불가능한 상황, 감정노동이 불가한 상황에 이르러 극단적인 스트레스를 경험하게 된다.(부연하여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널리 알려진 용어 대신 능률 향상이라는 다소 모호한 단어가 등장하는 이유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론은 책이 1983년에 나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동조건의 악화에 대한 대응으로서 태업과 노조활동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혹실드는 이를 노동자의 건전성이 떨어진 증표가 아닌 통제권을 되찾아오기 위한 시도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노자 갈등은 이런 측면을 명시적으로 표현보다는 전문성 대 서비스라는 구도를 통하여 진행되곤 한다.(168쪽) (부연하여 우리는 왜 파업의 사례를 책에서 볼 수 없는지 혹실드가 승무원의 태업이 가진 고유성을 강조하는 것이 노동 문제에 대한 맹목이 아닌지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6장의 마지막 절은 노동자가 감정노동 과정에 부딪히는 정신적 문제에 대한 단계를 임의로 설정하고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지금까지의 혹실드의 감정노동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 절 마지막 문장에 요약된다. "감정이 도구가 될 수는 있지만, 누구의 도구란 말인가?"(176쪽)

 

  7장은 추심원 사례를 분석한다. 추심원과 승무원과 하는 일의 내용은 정반대(친절하지 VS 윽박지르기)이지만, 노동의 성격은 동일하다.(감정의 통제) 능률 향상이라는 역사적 국면에 진입하였을 때 노동자의 통제권이 극단적으로 축소되는 것도 동일하다. 

  추심원 사례 분석과는 별도로 이 장에는 Q1. 감정노동은 특수한 것인가 일반적인 것인가에 대해 실마리가 될 구절이 나온다. 혹실드에 있어서 감정노동은 노동의 특정 성격이 아닌 특정 직업군을 지칭하는 개념이라는 것이 여기에서 분명해진다.

첫째, 이런 직업은 사람들과 직접 얼굴을 보거나 일대일로 통화를 해야 한다. 둘째, 이런 직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다른 사람의 감정 상태를 만들어내야 한다. 예를 들면 감사하는 마음이나 두려움 등을 말이다. 셋째, 이런 직업에서는 연수와 감시를 통해 고용주가 직원들의 감정적 활동에 관해 어느 정도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다. 직업군 안에서도 이런 특성은 어떤 직업에서는 발견되지만 다른 직업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190쪽, 199쪽도 참조)

직업은 각 사회경제적 수준마다 노동자에게 감정적인 부담을 지우지만, 이 부담은 감정노동을 수행하는 것하고는 큰 관련이 없다. 일이 단순하고 지루한 경우가 많으며 일을 하는 과정도 노동자의 통제 밖에 있는 하층 계급의 경우, 감정에 관한 과제는 절망과 분노, 두려움의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다. 감정을 모두 억눌러야 하는 경우도 많다. 이것은 끔찍한 부담이 될 수 있지만 그것 자체로는 감정노동이 아니다. 공장 노동장, 트럭 운전수, 농부와 어부, 지게차 기사, 배관공과 벽돌 쌓는 직공, 단기 투숙용 호텔의 객실 담당 여직원, 세탁실 노동자들은 항공 승무원이나 추심원들처럼 일에 전반적으로 자신의 개성을 개입시키거나, 사교성을 활용하거나, 감정노동을 직업적 구조에 종속되게 하지 않는다."(197쪽)

  우리는 이러한 결론은 감정노동 이외의 노동에는 마치 감정적 부담이 없거나 적은 것처럼 평가할 우려가 있다고 비판했다. 혹실드는 감정노동이 마치 중간계급에 국한된 것처럼 말한다.()199~200쪽) 동시에 감정노동의 특수성을 지적하는 것은 후기에 언급되듯이 의사와 같은 전문직에 비해 저평가되는 간호와 같은 노동을 재평가하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점도 함께 이야기했다.(252쪽)

  마지막 절은 감정노동과 육체노동이 가정을 통해 계급재생산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감정노동을 하는 상층 계급의 부모는 "네 감정이 중요하다"라는 메세지와 "감정을 잘 관리하는 법을 배워라"라는 메시지를 섞을 것이고, 반면 하층 계급의 감정노동자는 "감정을 잘 관리해라"라는 부분만을 강조할 것이다. 반대로, 감정노동을 특별히 하지 않는 상층 계급의 부모는 "감정을 잘 관리해라"라는 부분은 강조하지 않고 "네 감정이 중요하다"라는 것을 강조할 것이다. 육체노동이나 기술노동을 하는 하층 계급의 부모의 경우는 어느 쪽의 메시지도 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204쪽)

 

  8장에서는 감정노동을 젠더불평등의 관점에서 조명한다. 여성이 전반적으로 사회에서 돈, 권력, 권위, 지위에 남성에 비해 독립적으로 접근하기 어렵기 때문에 감정노동은 양성에게 동일하게 요구되지도 동일한 양태로 경험되지도 않는다. 문제의 양태는 보다 세부적으로 4가지로 분류된다.

  1) 다른 자원이 없는 여성들은 감정을 자원으로 삼아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물질적인 자원을 획득하려 한다. 그러나 이런 노동은 다른 노동에 비해 비가시적이기에 보상이 뚜렷하게 지급되지도 않으며(이반 일리히, "그림자 노동"), 때문에 이런 교환은 투명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2) 시장에서 남성이 추심 쪽으로 특화된다면, 여성은 승무원 쪽으로 특화된다. 즉, 요구되는 감정노동의 종류가 다르다. 때문에 보육이나 갈등관리같은 노동은 여성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성에게 할당되는 경우가 발생한다.(210, 223쪽)

  3)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감정노동의 영역에도 이어지 감정노동 직종(특히 그중에서도 여성)으로 하여금 직업적인 불이익이나 폭력에 더 노출되게 한다. 여성의 감정은 "합리적이지만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거나 "합리적이지 않기 대문에 무시해도 되는 것"(219쪽)으로 간주된다. 또한 분업에 있어서도 주도적인 위치와 지위를 차지하기 힘들며 "결과적으로, 여성들은 '감정 원칙'에 대항할 보호막을 얻지 못한다."(229쪽)

  4) 2)와 이어지는 문제의식으로 각각 다른 감정노동이 부과되기에 상업화를 통해 경험하는 소외의 종류도 다르다. 여성은 여성성으로부터, 남성은 남성성으로부터 소외된다. (231쪽~)

 

  9장은 "노동조건을 제어할 수 없"(238쪽)는 노동자가 과도한 감정노동 요구에 직면했을 때 겪을 수 있는 심리적 문제를 노동자 자신의 노동과정과의 심리적 거리를 기준으로 3가지(쇠진, 자책, 소외와 냉소)로 구분한다. 이 세 가지 경우 근본적인 문제는 "맡은 배역에 자아를 어느 정도 개입시키면서도 그 배역이 자아에 부과하는 스트레스를 최소로 하면서 개인의 자아를 배역에 맞추는 방법이다."(238쪽)

  이어서 감정노동이 일반화된 사회에서의 감정의 가치위계의 변화에 대한 분석이 행해진다. 혹실드는 라이오넬 트릴링의  [[진지함과 진정성]]을 근거로 논의를 전개한다. 16세기 동안 사회의 이동성이 증가하자 감정을 연기하는 기술, 기만은 고결하지 못한 것이 아닌 처세술로서 인정받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진지함의 가치는 평가절하되었다. 하지만 이런 기만의 부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진짜 감정 도는 '자연스러운 감정에 부여된 가치"(240쪽)를 절상시키는 효과를 일으킨다. "자발성은 이제 되살려야 할 어떤 것이 되었다."(243쪽) 혹실드는 그 예증으으로 "내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는 감정과 '교감하는 것'을 강조하는 심리 치료가 증가"(242쪽)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2012.10.27(토) : 초안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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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텍스트 독자의 자괴감에 대하여

신문기사건, 책이건 간에 1차 텍스트에 비해 비평을 읽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다 보니 쥐뿔도 없으면서 마치 뭐 좀 되는 것마냥 착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판단능력 상실.ㅜㅜㅜㅜ - @illoser

나는 한국사 연구자가 아니다. 광해군에 관한 1차 사료들을 하나하나 살핀 적도 없고, 2차 연구 자료들을 꿰고 있지도 못하다. 따라서 이 글의 초점은 오항녕의 주장이 학문적으로 타당한지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연구자들의 몫이다. 두 학자의 논지를 대비해 쟁점을 명확하게 하는 것, 그것이 이 글의 목표다. - 김덕련, [광해군을 보는 두 가지 시선], 프레시안북스

http://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21005133643&section=08&t1=n

 

1.

첫 번째 인용한 트윗을 봤을 때, 친구로서 그리 자신감 없을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 내심 찔렸다. 나 자신이야말로 1차 텍스트에 대한 독해 능력은 없이 누가 연구하고 번역한 것들을 '읽는' 사람이고, '쓰는' 것이라고는 트윗이나 가끔 길게 맘잡고 써봐야 서평인 사람인 탓에 조언할 처지가 아닌 것 같아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분수에 대한 자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나름 대중인문서나 약간 심화된 연구서, 논문 등을 열심히 읽었던 시기에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무작정 번역자를 믿지는 않을 정도의 안목은 생겼지만 검증할 외국어 능력은 없었으며, 그리 좋지 못한 2차 텍스트들에 들어있는 빈약한 정보와 넘치는 근거없는 편향에 불만을 느낄 정도는 되었지만 1차 텍스트에 접근하고 해석할 독해력은 없었다. 뭘 읽어도 핵심에 가닿지 못하는 찝찝한 기분은 "언젠간 정말 프로페셔널하게 공부를 해서 몇 분야는 정확히 알고 싶다. 텍스트에 대한 인상이 아닌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싶다"는 욕심으로 이어졌었다.

 

하지만 대학이라는 테두리를 조금만 벗어나자마자 아쉽게도 스스로에게 그 욕심을 이어나갈 끈기가 조금 부족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현재는 공부에의 욕심은 일단은 접어둔 상태이다. 하지만 살던대로 살다보니 결국 대중인문서를 읽진 않더라도 습관적으로 구매하는 그런 일상을 보내고 있다. 여전히 주로 사는 책은 대중인문서, 2차 텍스트이다. 문제는 계속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2차 텍스트(대중인문서)의 독자의 자괴감'이라는 문제 말이다.

 

 

2.

보다 전문적인 공부라는 방법을 통해 해소하려고 했던 이 문제에 대해서 대강의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뚜렷한 언어로 사고하거나 말하지는 못했다. 윗 트윗을 보고 "자기 생각이 중요하다"는 도움안되는 멘션을 보낼 때까지도 그러했다. 그러던 와중 프레시안북스에서 두 번째 인용의 "2차 연구 자료들을 꿰고" 부분을 읽고 몇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 문구는 인식, 지적 성취의 어떤 차원을 환기시켜주었다. 즉, '2차 텍스트의 목록과 그 텍스트들 간의 관계를 아는 것은 1차 텍스트에 능통한 것보다는 못할 수 있지만, 뚜렷한 계획없이 2차(그리고 1차) 텍스트를 접하는 것보다는 '향상된' 수준, 차원이 아닐까?'라는 생각 말이다.

 

대중인문서는 (애매한 말이지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관심을 잘 가지지 않는 분야에 대해 좀더 많이 보다 정확히 "알고" 싶은 사람들이 찾는 책이다. 그 시작은 기쁘고 힘차지만, 모든 아마추어리즘이 그러하듯이 아마추어는 아마추어에 만족할 수만은 없다.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대중인문서 독자들은 세계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남들이 만든 세계에서 이리저리 헤멜 뿐이라는 느낌에 무력감에 빠진다. 그리고 이런 2차 텍스트에 대한 무력감은 1차 텍스트에 대한 열의로 이어진다.

 

이런 무력감과 열의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이는 일부 천재를 제외하고서는 더 높은 지적 성취로 나아가기 위해서 겪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독자는 '지금 당장' 가공되지 않은 1차 텍스트를 소화할 수 없으며, 소화능력을 갖추기 위해 대학원을 가거나 전문적 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각자 자신의 생애과정에 있어 너무 많은 기회비용을 치뤄야 한다. 마땅한 처리방법이 찾지 못한 이 무력감과 열의는 자신의 한계에 대한 자괴감으로 전환된다. 이렇게 인문지식 일반에 대한 흥미는 사라져 가고, 그렇게 책에서 멀어져 간다. 

 

그렇지만 이런 자괴감은 자신에게 너무 야박한 일이 아닐까? 하나의 비유를 들어보자. 우리 모두는 음식을 먹고 좋아하지만 요리사가 되겠다거나, 맛집블로거가 되곘다는 욕심을 품진 않는다. 물론 집에서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대접하고 싶고, 인상깊게 먹었던 음식을 기록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야 보편적인 것이지만 그 정도인 것이다. 지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활자를 읽고 좋아하는 이들 모두가 연구자나 비평가가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머리'의 활동에 '입'의 활동만큼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것은 어떨까?

 

딜레탕트, 그러니까 잡학다식한 일상인의 수준에 만족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만족감은 오래가지 못한다. 더 많이, 정확히 알고 싶은 욕구는 그런 기만으로 충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아까 집요리와 음식포스팅의 비유로 다시 돌아가보자. 그리고 " 2차 연구 자료들을 꿰고"라는 인용으로 돌아가 보자. 앎에도 이런 중간 층위가 있다. 아예 모르는 건 싫고, 잘 알면 좋겠지만 꼭 선택지가 이 두 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은 안다"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며 그 자체로 좋지 않을까?

 

 

3.

최근 한국 출판시장에서 이런 수준에서 쓴 책, 2차 텍스트 독서 경험을 묶어낸 책들이 몇 권 떠오른다. 한윤형의 [뉴라이트 사용후기](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7691022)와 전성원의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9062197)이다. 연구자 혹은 1차 텍스트 독자가 2차 텍스트 독자 자신이 2차(3차 혹은 n차??) 텍스트를 쓴 경우이다. 이 책들은 2차 텍스트를 읽고 나온 책들이 몇 가지 빈약한 개괄 및 입론과 2차 텍스트 저자의 주관을 요약하지 않고, 그 자체로 1차 텍스트 또는 1차 텍스트의 1차 텍스트인 세계 자체에 대한 앎을 증진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책도 홀로 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책은 항상 더 많은 책의 일부이다. 이 책들은 나름의 질서를 갖추는데 실제 세계가 최상단을 차지하고 있고 1차와 2차, n차가 각각 밑단을 이루고 있는 계단식 분수의 모습은 적어도 아닌 것 같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양도 적고 질도 나빠지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물은 다시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오기도 한다. 수평적 네트워크 형태는 아닌 것 같지만 직관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글에서 나온 글이 글 이상의 것에 대해 알게 해주는 그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마법처럼 일어나곤 한다.

 

 

4.

이런 질서의 구체적 양태에 대해서는 지금 잘 모르겠지만 그 조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저자 개인의 탁월함도 있겠지만 사회적 요소, 출판시장이 그것이다. [자본]에서 가르쳐 주었듯이 무한한 확대재생산이라는 고유한 욕구만을 따르는 자본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상품이라는 형식을 통해 세계의 사물들 간의 유통속도를 가속시킨다. 인간의 앎 역시 상품이라는 옷을 입어 책이나 기타 다른 사물을 통해 유통되기 시작했다. 단순히 속도의 가속이 책의 신비한 질서를 구성한 것은 아니겠지만 출판시장이라는 키워드는 항상 생각하면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되지 않나 싶다.

 

 

5.

난삽한 상념을 수습하며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우리 인문학 애호가, 학부생, 대학원생(특히 석사) 여러분, 힘냅시다! 화이팅! 우리가 읽는 글도 쓰는 글도 세상에 존재가치가 있어욧!!^^..... 스스로를 조금더 긍정하자. 정확히 어떤 층위에서 어떻게 긍정해야 할지 알고서 그리하도록 하자. 스스로를 꺾는 법도 알아야 하지만, 지키는 법도 알아야 크든 작든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인용한 김덕련 기자의 비교서평은 심지어 2차 텍스트에 정통하지 않아도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한다. 저 기사가 보여주고 있는 신중함처럼 그렇게 한발한발 나아가는 것이다. 오늘 트위터에서 보고 위로가 되었던 말을 마지막에 적어놓아 본다. 

 

그 일을 멈추지 않는 이상 당신이 얼마나 천천히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 앤디 워홀 봇(@ndwarhol_kb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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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12.10.7(Sun)

1차 윤문 및 가필)   2012.10.9(T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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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포스트 : 금정연의 박노자 서평에 대하여

오랜만에 퇴근후 침대에 눕지 않고 책상에 앉았으며, 또 오랜만에 트위터 별통의 링크 또는 기사를 읽거나 아이돌이나 음악, 게임 동영상을 보지 않고 블로그에 포스트를 써본다. 포스트라는 단어는 참 마음에 들게 적절하게 겸손한 것 같다. "글"이라기에는 민망한 건 둘째치고 적절하지 않은 활자뭉치 정도가 쓰일 것 같기 때문이다.

 

 

1.

참으로 낯뜨거운 멘붕글이 블로그 1페이지에 자리하여 어떤 사람들은 걱정시키고, 어떤 사람들은 실망시키고, 어떤 사람들은 핀잔을 날리게끔 한지 몇 개월이 지났다. 이러한 수치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내 생활습관이다. 퇴근후에는 도통 의자에 앉기를 거부하고 눕는다. 최근 내 행태를 관찰해본 결과, 위인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 중 하나는 "시간이 남을 때 '눕지 않고' '않는다'"가 아닐까 싶다.

 

위인, 그것도 활자와 관련된 위인이 되기 위한 다음 스텝은 책을 편다는 것이다. 물론 책을 읽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책을 든다"와 "책을 읽는다" 사이의 거리와 "책을 편다"와 "책을 읽는다"의 거리는 꽤나 다른 것 같다. 전자가 후자의 세제곱수는 되는 것 같다. 대학생 시절, 자다가 일어나면 눕든 앉든 스탠드를 키고 논문을 읽고, 책에 줄을 긋고 그러다가 예의 집중력 부족이 오면 엎드려 자고 다시 일어나서 10분이라도 읽고 권태로운 저녁식사를 하고, 다시 읽고 그러다가 잠을 자고, 그렇게 지냈던 대학생활 때는 느끼지 못했던 거리감이다.

 

 

2.

게다가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이다. 나는 첫번째 밥을 먹고, 두번째 눕지 않았으며(실은 한시간만 누웠으며), 세번째 방안에서 대강 운동을 하고, 네번째 샤워를 하고.....그리고 다음이 중요한데 다시 눕지 않았다!! 앉으려는 포지티브한 의지를 가졌던 건 아니지만 서있을 수 없었기에 우연히 앉았고, 그 다음에는 "여기까지 오다니 뭔가 참 특별한 날이다" 싶어 무언가를 쓰고 싶어졌다. 그래서 금정연 씨의 책 [[서서비행]]에서 서평 하나, 박노자의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는 서평에 대해 뭔가 쓰려한다.

 

재밌는 글이다. 이 글은 박노자가 책에서 주장하는 바에 대해서 쓰지 않고 있다. 이를테면, 반민족주의, 반파시즘, 복지국가 등등의 논의들 이야기들 말이다. 사실 요즘 누가 박노자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비판적 사회평론, 그리고 어쩌다 이런 명칭을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른바 "인문학" 시장에서 박노자의 존재는 뭐랄까....상징만 남아있는 기분이다. 이방인적 시각으로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해부하는 젊은 학자라기보다는 이미 그저 그런, 이런저런 주제에 나올법한 주장들의 집합체 같은 느낌이다.

 

유행이 지났다면 지났다고 할수도, 언제든 참조가능한 진보적 의견의 한 표준을 만들었다면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이런 이미지는 그의 "신간"에게는 딱히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박노자의 이름은 어쨌든 '지금' 이런 것이다. 이 서평은 이런 박노자의 이름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일화와 함께 시작한다. 

 

"가벼운 농담과 함께 술잔을 나누던 우리는 이내 취했고, 2차를 갔으며, 다시 3차를 갓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8090'이라는 간판을 걸고 잇는 작은 바. 나는 조금 놀랐다. 한떄 유행했던 '7080'에 이어 '우리' 또한 어느덧 네 자리 숫자로 호명되는 추억 장사의 고객님이 되었으리라곤 상상도 해본 적 없기 때문이다."(262)

 

그리고 서평은 박노자의 "신간"을 향해 가지 않는다. 정확히는 그 신간의 내용을 쫓아가지 않는다. 서평은 8090이라는 간판에 놀랐듯이 박노자의 신간에서 비슷한 놀라움을 느낀다. 한 때 박노자는 그 온동네 소문날곳 안날곳 다 소문난 "운동권 그룹 내 억압적 문화"에 은밀한 불만을 가지던 대학생에게 "그가 그때가지 막연하게 품고 있던 어떤 의혹, 또는 불만들에 대해 비교적 명확하게 사고할 수 있게 했던 것"(264)이었기 때문이다.

 

이 신앙고백과 같은 문장은 이 [[서서비행]] 책 거의 전체가 그러한 것처럼 능청스러우면서도 솔직하다. 글쓴이가 지금 박노자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때의 저자(그리고 나같은 일종의 "박노자 키드")가 받은 느낌은 정확히 이런 종류의 추상적인 '깨달음' 비슷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파시즘의 내면화라든가 민족주의적 주체라든가 박노자의 어휘를 활용하여 깨달음의 내용에 대해서 뭔가 더 말할 수 있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뭔가 알았다는 그 기분 자체가, 뭔가 읽어서 표현을 얻었다는 기분 자체가 소중한 것이다. 서평자에게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박노자는 그런 맥락에서는 일종의 첫 경험이었다. 그걸 떼쟁이 고등학생 사고에 지적 의장을 입혔다고 할 수도, 비판적 사고에 싹의 틔웠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박노자는 마치 맨몸의 거렁뱅이에게 옷이란 걸 알려주었고, 내 개인적 불만들이 사회적 문제들에 연결되어 있으며, 때문에 내 불만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당당한 사회비판일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흥분되지 않나. 사회와 나라니.

 

하지만 이 모든 말은 내가 지금의 나이기에 해보는 정리의 활자들이다. 서평자는 이렇게 구구절절히 경험을 쪼개지 않는다는 점에서 능청스럽게, 하지만 그러면서도 지금 자신이 터득한 약간의 직관을 통해 한 문장으로 경험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솔직하다. 

 

 

3.

박노자 다음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많은 남자들이 그랬듯이 군대가 있었고 직장이 있었다. 그는 일 이외의 삶의 영역에 관심을 지출하기 어려운 직장인이 되었으며, 더욱 악재인 것은 그가 지금껏 자신의 삶에서 핵심적인 부분으로 삼아왔던 사물을 업무의 대상으로 다루는 직장을 가지게 되었다. 사물은 책이고 직장은 인터넷 서점 MD이다. 사회비평서들에 "그래, 맞아, 그런 문제들이 있지...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266)"라고 말하는 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불평은 현실과의 타협이라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솔직함이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냥 그는 그때그때 자신에게 중요한 문제를 생각하는 데 있어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이다 혹은 그러려고 인위적으로라도 노력하는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이런 불평을 하는 것 자체가  "본인도 원치 않는 일이었으니, 애시당초 보지 않는 편이 편했다"(267)고 말하기도 한다. 복잡한 심경이다. 생각 자체가 복잡하다기보다는 그냥 뭐라 할말이 없어 복잡한 심경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그는 일을 그만둔다. 물론 박노자를 읽었기 때문은 아니다.

 

 

4.

그리고 그는 서평을 쓰기 위해 박노자를 다시 읽는다. 박노자라는 이름을 '뭔가 배워야 할 사람'이나 '업무상 만나야 했던 사람'이 아닌 사람으로 만나기 좋은 사회적 위치와 경험들을 가지고서 박노자를 읽는다. 역시나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밑줄을 긋지만 그가 발견하게 된 것은 어떤 정치적 지향이나 사회의식, 참여의지가 아니다.

 

"그는 깨닫는다. 그는 이 책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자면 K에게는 박노자의 입장에 대해 가타부타할 자신의 입장이랄 게 없었던 것이다."(271)

 

역시나 솔직한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글쓴이는 박노자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달리해온 것처럼 보이지만 일관되게 자신의 삶의 시기시기마다 박노자라는 이름이 가졌던 의미에 대해서 솔직한 모습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사후적이지만)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박노자의 이미지 변천사는 개인의 것만이 아닌 세대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박노자, 홍세화같은 저자의 유행이 보편적이기보다는 세대적이었다는 가정을 해볼 때, 이 세대적 독서에 대한 기억은 역으로 해당 저자에 대한 보편적 평가가 될 수도 있다. 

 

이런 독해의 정당성은 박노자의 텍스트가 독자의 세계관에 구체적인 흔적을 남길만한 힘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책 자체에 보편적으로 따르는 성질 때문이기도 하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사사키 아타루가 한 말처럼 책이란 덮고 나면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다시 펴보면 알게 될 것도 같지만 우리는 책을 펴놓은 채 살아갈 수는 없다. 박노자는 사회과학의 견지에서 봤을 때 결코 좋은 저자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 책과 독자가 겪은 시간의 두께 자체가 무언가를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이름이 되었다.

 

때문에 나는 이 서평을 '박노자의 신간'이라는 애매한 대상에 대한 훌륭한 서평이고, 사실상 거의 가능한 유일한 형식의 서평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박노자는 이런 사람이었고, 그의 신간 출간을 통해 이런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은 내가 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책이다. 

 

 

5.

글을 다시 돌아보니 버려야지 했던 습관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ㅎㅎ 쓸데없는 만연체, 현대정치철학에서 배운 무언가 대상을 정하고 자꾸자꾸 승화시키기, 번역투 문장 등 기술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다. 내가 지난 몇 년간 열폭에 체념하면서 얻었다고 생각했던 사고습관들이 글에는 크게 반영이 안 되어 있다. 사고를 글에 심어넣질 못하고 있다. 

 

ㅎㅎㅎㅎㅎ에효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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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문자메세지, 블로그

1.

 

나의 외부와의 접촉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뤄진다. 오프라인 만남과 온라임 관음/방백이다.

 

오프라인 만남은 꽤나 애로가 많은 상황이다. 내 멘붕과 열폭, 그리고 몇 가지 사건들은 나로 하여금 만날 수 있는 사람과 만나고 싶은 사람의 폭을 좁히고, 만나기 싫은 사람 혹은 만나고는 싶지만 그러자니 슬프기도 하고 막상 만나고 나면 힘이 빠지는 사람의 폭을 넓혔다.

 

온라인에서의 접촉은  PC가 아닌 스마트폰을 통해 주로 이뤄진다. 스마트폰에서의 관음은 트위터와 프레시안북스, 네이버 웹툰을 습관적으로 들춰보는 것으로 이뤄진다. 방백 역시 트위터에서의 중얼거림, 아주 가끔의 멘션으로 이뤄진다. 이런 생활습관은 기존에 가지도 있던 생활습관들을 바꾼 것인데 문자메세지와 블로깅이 그것이다.

 

문자메세지는 뭔가 나에게나 남에게나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다. 감정 배설을 하기에는 너무 사적이고,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정말 한 손으로도 다 셀수 없다. 그에 비해 타임라인은 농도를 분산시킬 수 있다. 1:1로 만나 서로 마주보는 뉘앙스가 아니라 여럿이 만나 옆 사람 이야기를 듣는 뉘앙스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문자 메세지는 주로 약속시간이나 장소를 잡는 용도 외에 쓰질 않는다.

 

블로깅은 너무 외로운 일이 되었다. 애초에 눈에 잘 안 띄길 바라며 만든 장소이지만 주변 사람들과는 공유할 있는 장소였으며 했다. 하지만 리플이 달리지 않는다. 트위터도 멘션이나 메세지가 안 오긴 하지만 가끔 훼이보릿되었다는 알람이 뜨면 "아 그래도 누가 보긴 하는구나" 정도의 느낌이 든다. 값싼 인정들이 고맙다.

 

 

2.

 

그래도 오랜간만에 한 긴 글 쓰기와 블로깅,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공개로 달린 리플이 잊고 있던 맛을 일깨워줬다. 트위터에서의 인정과는 다른 종류의 인정에 대한 맛이었다. 좀더 진했었다. 그 기분에 책읽기 세미나에도 나가봤지만 왠지 과거의 나 자신의 세미나 간사 시절을 떠올리게 하면서 부끄러워서 더는 나가지 못할 것 같다.

 

또 간만에 블로그에 즐겨찾기를 해놓은 이웃 블로그들을 한 번 순회해 보았다. 예전에는 꼭 하루 1회이상은 하던 일이었다. 무연 님의 홉스봄에 대한 잡담 http://muhanhan.tistory.com/437 에서는 멋진 저자의 멋진 책을 읽고 또다른 멋진 저자가 되고 싶다는 나 자신의 욕심을 다시 환기할 수 있었다. 진태원 선생님의 최근 포스트 담론에 관한 학회 요약문 http://blog.aladin.co.kr/balmas/5701827 에서는 선생님의 꾸준함과 내가 열전 보듯이 보고 머리속에 정리했던 인문학자들의 캐릭터들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여자 대학 선배의 수영일기 http://blog.naver.com/cherrysand 라는 포스트는 제목만 기분이 아주 조금은 괜찮아지는 경험을 하고 그 이유에 대해서 내가 평소의 성찰들을 통해 준비한 분석들이 떠올랐지만 지금 그냥 머리속에서 지우고 있다. 이 포스트를 읽을지 말지는 모르겠다.

 

 

3.

 

일할 때는 그리 그리워한 주말이 옆을 지나가고 있다. 열심히 번 돈도 피씨방에서 소모되고 있다. 주말에 기대되는 일이 없어진 것은 조금 되었다. 사실 주말이 뭐 그리 흥분되어야만 하는 일이겠는가. 자기 자신의 주제를 가지고 월 단위 년 단위로 생각하고 사는 착실한 인간상에게는 그리 흥분되지도 울적할 일도 없는 그런 일이다. 아직도 이러는 것을 보면 나는 여전히 대학생은 대학생이다. 나 자신의 이 대학생적인 부분들을 가지고 아마도 앞으로도 긴 시간을 쓸데없이 고민하며 뭔가 쓰고 그럴 것 같다. 그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고 생각하고 써야 할까.

 

이렇게 지금 있다. 이 얄팍한 기록으로 무언가 남이 나를 이해해줄 참고자료라던가 나중에 내가 나를 기억할 기록을 남겼다고까지는 말하면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그냥 하릴없어서 썼다고만 말하기에는 뭔가 억울하다.ㅎㅎ 별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이제 내 자리와 내 성격에 맞게 게임이나 하러 가야겠다. 남들이 보기에는 시시한 플레이를 하러 ㄱㄱ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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