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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25
    강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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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1/03/16
    철학자 유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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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1/02/14
    정의, 나아가 세계를 복합적으로 보기의 좋은 예(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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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0/08/30
    지성과 그 역할에 대한 세 종류의 코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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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0/07/19
    '공산주의'에 관한 짧은 인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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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0/06/05
    개념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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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0/05/15
    정념, 스피노자, 정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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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0/04/30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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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0/04/13
    공부에 대해 말하는 것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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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우리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용서 반대론은 매우 강력한 주장이다. 어떤 종류의 용서는 천박하고 경박하다. 그리고 피해자는 자신을 무참히 해친 가해자를 원망할 권리, 때로는 증오할 권리가 있다 (...) 하지만 최선의 용서는 우리 인간이 더없이 위대할 때가 아니라 악이 물들고 저속하게 타락해 최악의 수준에 있을 때 그들에 대한 연대감을 보여준다. 이것은 최고뿐 아니라 최악의 우리, 즉 누구나 될 수 있는, 혹은 된 적이 있었을 법한 최악의 인간을 위해 사랑을 옹호하는 투쟁이다. 물론 피해자의 요구와 피해자와의 연대감이 가해자와의 연대감보다 늘 훨씬 중요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는 가해자에게 어떤 태도를 보일지 결정해야 한다. 그들을 용서하기로 한다면, 그것은 곧 때로는 끔찍하기도 한 그 악행의 본질을 [용인하거나 침묵하지 않고] 인정하되 계속 마음을 열고 장차 뭔가 나아지기를 소망하겠다는 뜻이다. 그 소망은 종종 무참히 깨지지만, 그럼에도 몇 번이고 되살아난다." - 이브 개러드 & 데이비드 맥노튼, [[용서란 무엇인가]], 파이카, 2013, 233-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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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삶

"자아는 한편으로 자기 바깥의 우상을 섬기고, 다른 한편으로 스스로를 자신의 우상으로 구성한다. 이 둘 가운데 나중의 것이 더 중요하다. 즉 자아는 이상적인 자아상과 자신을 일치시키고 스스로를 우상으로 삼는다. 자아가 자기 바깥의 우상을 섬기는 것은 자기 자신도 그러한 우상이 되려 하거나 그 우상의 권력을 자기도 나누어 가지려 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아의 삶은 스스로를 우상으로 삼는 삶이다. 즉 자아의 삶은 일종의 꿈이다. 우상인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꿈이 그것이다." -이종영, [[내면으로]], 울력, 2012, 4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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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

"(...) 동굴 속 황제의 또 다른 특징은 자신의 심리적 영토를 가지고 있으며, 그 영토를 끊임없이 넓히려고 한다는 것이다. (...) 동국 속 황제가 심리적 영토를 넓히려고 하는 경향은 너무도 뿌리깊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코믹한 일들을 많이 일으킨다. 멀리 갈 것 없이 내 경우를 보면, 나는 스스로를 '카페트의 도사'라고 자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세상에서는 나보다 카페트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나는 친구와 카페트 이야기를 할 때, 친구는 카페트에 대해 잘 모를 것이라고 쉽게 단정하며, 무조건 내가 더 잘 아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 이유는 내가 카페트 회사에 2년 정도 다니며 매일같이 카페트와 함께 산 경험이 있고 내 친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일은 벌써 15년이 지났건만, 나는 지금도 카페트만 보면 익숙한 느낌이 들고 카페트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다 아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여러 가지 실수를 많이 했다.

(...)

  공부하는 학자로서 제일 난감했던 것은 책에 관한 것이다. 나는 플라톤을 한두 번 뒤적여본 적이 있으면 플라톤을 다 아는 것처럼 착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무엇이든 한번 관계를 맺었다 하면 내 것이 된 줄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양반이다. 《막스 베버 전집》을 사서 책꽂이에 꽂아놓았다는 이유로 막스 베버를 잘 안다고 착각한 적도 있었다.
  심지어 경제학자나 회사원인 내 친구가 플라톤 이야기를 하면, 굳이 틀린 이야기도 아닌데, 괜히 속이 뒤틀리고 이상한 느낌이 들곤 한다. 플라톤이나 막스 베버는 정치학을 전공한 나의 소유물인데, 엉뚱한 직업을 가진 의사나 경제학자가 뭐라고 하면, 다른 집 사람이 내 아파트 열쇠를 들고 있는 것처럼 이상했다는 말이다. 사정이 이 모양이니 나의 학문이 제대로 발전할 수가 없었다." -전인권, 『남자의 탄생』, 144~5쪽, 강조는 인용자.

읽고 나서 내 삶의 많은 부분들은 이러한 심리로 요약될 수 있겠다 싶었다. 잉문학과 사회과학에 대한 언급에 얽힌 것도 이게 전부는 아니지만 꽤 크고. ㅎㅎㅎㅎㅎ좀 정신줄 좀 놔야 겠다 싶다. 즐겁게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다시 뛰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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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유형

모 블로그 정주행 하다 발견. 꽤 됀 자료같은데 지금도 웃기다.

출처: pepe http://moraz.egloos.com/m/905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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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까치형 - 여기저기 찍어 보는데, 끝까지 먹는 게 없다. 이 놈 때문에 멀쩡하게 남는 주제가 없다.

암벽등반가형 - 어렵지 않으면 하지도 않는다. 부상은 곧 명예다.

두더지형 - 이 놈이 뭐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놈이 뭐 내놓을지 모른다고 기다리다가 다들 지친다. 그러나 잊을 만하면 또 꿈틀거린다.

미식가형 - 제 딴에는 핵심만 골라 공부하고 말하는데, 영양실조(지식실조)에 걸린다.

(오만한) 광산가형 - 저 혼자 금 캐고 남들은 다 석탄 캐고 있단다.

(착한)연탄집주인형 - 달동네 사람도 연탄 써야 한다고 나르듯이, 힘들고 돈 안 되는 작업(예를 들어 안 팔리는 책 번역하기) 만 골라서 한다.

해외특파원형 - 딴 나라에서는 뭘 하는지 열심히 전한다. 독자수준이 낮을 때는 남의 것을 슬그머니 자기의 창작으로 둔갑시켜서 내놓기도 한다.

목욕탕주인형 - 제 속은 안 보여주지만, 딴 놈들 껍데기 속을 다 안다.

때밀이형 - 열심히 논평해서 남의 잘못 고쳐주는 것을 보람으로 안다. 너무 빡빡 밀었다가 항의도 자주 받는다.

영웅적 순교자형 - 철학해서 저 빼놓고 세상을 다 구하겠다고 한다.

소심한 순교자형 - 한 번 틀린 것을 가지고 평생을 후회한다. 마음속으로 수없이 절필을 선언한다.

마를린 먼로형 - 수준은 낮은데, 이상하게 아무도 그를 비판하지 않는다.

타이거 우즈형 - 그에게는 굿샷과 배드샷만 있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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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나아가 세계를 복합적으로 보기의 좋은 예

"나는 정치적인 것이 경제적인 것이나 문화적인 것보다 더 근본적인 정의의 주된 차원이라고 주장할 의도는 없다. 오히려 세 차원들은 상호연관되어 서로 영향을 주는 관계에 있다. 분배와 인정에 대한 요구를 제기할 수 있는 능력이 대표의 정황에 의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은 계급 및 신분관계에 의존한다. 달리 말하자면 공적 논쟁과 공식적 의사결정에 대한 영향력은 단지 형식적인 의사결정 규칙들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경제구조와 신분질서에서 기인하는 권력관계들에도 역시 의존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토의 민주주의 이론들은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았다. 따라서 민주적이라고 주장하는 정치공동체들 내부에서조차도 불평등한 분배와 무시는 모든 시민에게 동등한 정치적 발언권을 부여한다는 정치적 원칙을 전복하기 위해 공모하게 된다. 물론 이와 반대 방향 역시 참이다. 대표불능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은 신분적이고 계급적인 부정의에 취약하다. 그들은 분배나 인정과 관련된 자신들의 이익을 요구하고 방어하지 못하게 되며, 이는 다시 그들의 대표불능 상태를 강화하게 된다. (...) 불평등한 분배와 무시에 대한 투쟁들은 만일 그것들이 대표불능 상태에 대한 투쟁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성공할 수 없으며, 그 역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우리가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 하는 것은 전략적인 동시에 전술적인 문제이다." -낸시 프레이저, [[지구화 시대의 정의]], 김원식 옮김,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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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과 그 역할에 대한 세 종류의 코멘트


"나는 역사에서 의지설을 믿지 않는다. 반면에 나는 지성의 명철성을 믿으며, 그리고 지성에 대한 민중운동의 우위성을 믿는다. 왜냐하면 지성은 최고 결정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지성은 민중운동을 지켜보면서 지난 날의 과오 속으로 다시 떨어지는 것을 막고, 또 그 운동들이 진정으로 민주적이며 효율적인 조직 형태들을 찾도록 도와줄 수 있다. 어쨌든 우리가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것을 도울 수 있다는 약간의 희망을 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 가능하며, 오직 이런 점에서만 가능하다. 어쨌든 우리 모두 지금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빠져 있는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종말론적 몽상 속에서는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 한가운데 서게 된다." -루이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297쪽.

"레닌은 혁명적 이론 없이는 가능한 혁명적 행동도 없다고 무척 적절히 말했다. 이 말은 전혀 낡지 않았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모든 결함들을 피하면서 오늘날 이 말에 의미와 생명을 줄 수 있는 형태들을 찾기만 하면 된다.
  길고도 험한 임무지만 극단적으로 볼 때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단지 지금부터 끈기 있고 엄격하게 그 일에 착수한다면, 그리고 결코 말로 때우지 않고, 성스러운 텍스트나 창시자들이거나, 조직의 지도자들이거나 대중들 자체의 자발성이거나 간에 그것들이 우리 대신 사고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언제나 '자기 스스로 사고하도록'(칸트, 마르크스) 요구한다면 말이다." -루이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600쪽, 강조는 인용자.

"나는 다른 사회 운동들이 이러한 의미의 보편적 구성요소를 가지게 될 가능성, 즉 그것들이 근본적인 인간학적 차이를 전시하면서 차별에 대항하여 보편주의적 투쟁을 선도할 가능성을 전면적으로 열어두는 것이 핵심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또한 마찬가지로 핵심적인 것은 이러한 의미로 이해된 이상적 보편성의 포현들 사이에는, 그것이 모두 동일한 형태, 동일한 부정성에 준거한다고 할지라도, 어떤 예정된 조화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아마도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것은, 단지 겅혐적 사실로서만이 아니라 인류적 이상의 구성 그 자체에 영향을 끼치는 유한성의 특징으로서, 부정성이라는 내재적으로 다중적이고 "분열되어 있다"는 점인 것 같다. 이는 그러한 부정성을 상대화하고 그것의 무조건적 성격을 박탈하도록 이끄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구성된 보편적인 것의 심급은 절대 지식의 단순성과 통일성 속에서 안식을 취하지 않으며 오히려 갈등 또는 분열을 생성시킬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도록 이끈다. 즉, 지배적 보편성이나 기존의 정치체제에 반대하는 "배제된 자들", "소수파들"(...)의 자생적 전성, 말하자면 자연적 전선이란 없다. 이는 그와 같은 통일성이 정해진 상황들 속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단적으로, 그것은 구성되어야만 하며, 심지어 선택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 이러한 문제는 철학이 이름지을 수는 있지만,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에티엔 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549쪽, 밑줄 강조만 인용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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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에 관한 짧은 인용문


"공산주의라는 이름이 붙은 당에 속해 있든 아니든 간에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비판은 자본주의가 자신의 모순들을 발전시키는 한에서 소멸될 수 없음을 해명하기 위해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어떤 이들은 진리의 이름으로(진리는 반드시 확실성과 합치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이들은 유토피아(또는 이렇게 말하는 게 더 낫다면, 희망)의 이름으로 말한다. 마지막으로 어떤 이들은 공산주의 이상의 전도되고 왜곡된 형태인 국가 공산주의가 죽었다고 말하면서 마침내 진정한 공산주의를 위한, 그리고 이론적 수준에서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위한 장이 열렸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동기야 이해할 만하지만(그것은 사회적 순응주의와의 공모를 제대로 감추지 못하는 새로운 지적 순응주의에 저항하려는 동기인데) 이런 논변은 내가 보기에는 이론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무력한 것 같다. 역사적 공산주의가 자신의 도착들을 교정할 수 있는 힘을 자기 내부에서 발견하지 못했고, 마르크스주의도 그 원인들을 진정으로 해명할 수 있는 이론적 수단들을 자기 내부에서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진리나 유토피아 또는 불멸의 이상에 대한 호소는 오늘날 이런 호소가 표현하는 욕망 자체의 공허함 이상의 내용을 갖지 못한다.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게다가 이런 입장은, 서로 각자에게서 분리될 수 없기를 바라고, 또 역사 속에서의 자신들의 실현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고, 자신들의 "세계화"로부터 분리될 수도 없기를 바라는, 어떤 이론과 어떤 운동의 경우에는 더더욱 유지될 수 없는 입장이다. 공산주의는 어떤 의미에서는, 숭고한 이상 내지 시간을 초월한 유토피아를 핑계로 삼아 역사적 파국으로부터 자신의 구원을 희망할 수 없는 유일한 이론이다(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자기 자신에게 빚지고 있다.) 그리고 만약 마르크스주의가 강령으로서 또 현실 인식의 도구로서 계속 존재해야 한다면, 다른 기초들 위에서 그렇게 존재해야 한다. 곧 자신의 분석 능력을 입증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역사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확보함으로써 그렇게 존재해야 한다." -에티엔 발리바르, 진태원 옮김, 『우리, 유럽의 시민들?』, 후마니타스, 2010, 173~4쪽, 밑줄 강조는 인용자가, 원 논문이 발표된 것은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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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에 대한 단상

개념의 외연을 넓히고 힘을 증진시키는 것은 꼭 개념을 직접적으로 대상으로 삼지 않아도, 다시 말해 철학을 통하지 않아도 가능하다. 어떤 상황에서는 철학을 통하지 않아야만 그리할 수도 있다.

이게 아마 근동이물 세미나를 통해 내가 배운 것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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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념, 스피노자, 정치론

※김은주, 「알튀세와 들뢰즈를 통해 본 스피노자 철학의 문제」(《트랜스토리아》제 5호, 2005 상반기) 에서

가령 스피노자는 대부분의 인간을 실질적으로 사로잡고 있는 정념을 단지 악으로 간주하고 이를 비웃거나 개탄하는 자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실상 그들은 인간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 바라는 대로 인식한다. 이렇게 볼 때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윤리학을 쓰는 대신에 풍자시를 써 왔던 셈이며,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정치론(Politicam)이 아니라 키메라로 간주될 만한 것, 혹은 유토피아나 저 시인들의 황금시대─여기서 정치론은 아무 필요가 없을 텐데도─에서나 수립될 수 있을 법한 것을 구상했던 셈이다."

P.S)사실 인용이 좀더 이어져야 할 것이다. 스피노자가 상정하는 윤리학은 정념과 같은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근본 조건을 부인하지 않되, 그 정념을 사다리로 삼아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려는 노력, 들뢰즈의 표현을 따르면 "실험"을 지속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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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에서

"미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어떤 대의를 위해 고결하게 죽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대의를 위해 겸허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제롬 데이비드 셀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http://blog.aladdin.co.kr/mramor/3131995

 

홀든은 자신이 잠든 사이에 앤톨리니 선생이 자신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것을 느끼고는 경악하여 바삐 짐을 챙겨 나선다. 그가 ‘변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다. 물론 이것은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는, 홀든만의 섣부른 판단이다. 날이 새자 홀든 스스로도 자신의 판단이 성급한 게 아니었을까 염려한다. 앤톨리니 선생은 단지 잠든 아이들의 머리를 어루만졌을 뿐, 이러한 행위에 이상한 감정 따위는 전혀 없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홀든은 “설사 선생이 변태라 하더라도 내게 정말 잘해 준 것만은 확실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는 홀든에게 중요한 깨달음인데, 현실을 ‘진짜와 가짜’, ‘순수와 부정’이라는 이분법적인 틀로만 재단할 수는 없다는 깨달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부로 떠나기로 결심한 홀든은 마지막 인사를 전하러 피비의 학교에 찾아갔다가, 계단 벽에서 외설스러운 낙서를 본다. 그는 참지 못하고 이를 지우지만, 그런 낙서는 여기저기에 널렸고 심지어는 칼로 새겨져 있기까지 하다. 100만 년을 걸려 지우러 다닌다고 해도, 온 세계의 더러운 낙서들을 다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홀든 역시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는 얼핏 절망으로도 보이지만, 어른으로 가는 길목에서 느끼는 체념이기도 하다.

(...) <호밀밭의 파수꾼>은 바로 홀든의 이야기이고, 그가 떠들어 댄 이야기이다. 이렇게 떠벌리는 행위 자체에는 이 세계에 대한 긍정과 사람들을 향한 그리움이 함축되어 있다. 독자들이 홀든의 모습에서 ‘반항적 영웅’의 모습을 읽어 내는 것은 주인공에 대한 과장된 해석이거나 신비화가 아닐까. 더불어 샐린저 자신의 체험이 많이 녹아들어 간 작품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오랜 침묵에 빠져 있는 작가는 홀든과 가장 닮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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