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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필요없다] 독서회 후기

이 책은 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진보세력 내부에서의 성차별 문제와 이에 대한 극복 시도들에 대해서 주로 다루고 있다. 부제는 비록 "진보의 가부장제에 도전한 여자들"이지만 여기서 "진보"는 주로 학생운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가부장제"는 성소수자보다는 생물학적/사회적 남성/여성 간의 차별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주제의 제한성은 인터뷰이의 성격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이 책이 던지고자 하는 쟁점, 권위주의와 차별에 대항하는 집단 자신 역시 저항대상의 논리를 나름의 방식으로 체화하고 있음을 드러내려는 목적의식에도 기인한다.

 

우리 독서회는 총 2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1회 독서회는 참가자들이 이 책의 경우들과 중복되는 자신의 사례와 경험들을 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항상 컵을 씻는 여성들, 외모꾸미기에 대한 아니꼬운 시선들, 더 큰 문제틀 뒤에 부차적으로 취급되는 젠더차별, 마치 이야기만 하면 전체 운동/담론의 진행을 방해한다고 여기는 의견들 등등.

 

한 참석자는 요즘은 이런 담론 자체가 일반화되어서 그런지 좀더 가부장제라는 것이 교묘한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이야기들을 접하고 있으면 가끔 자신도 성차별 문제가 정말 중요한 것인지 있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한다고 했다. 전희경의 말을 빌어보자.

 

"1990년대 중반 이후 '흡수와 포함' 논리가 약화되면서 좀더 세련된 형태로 등장한 '후원자 노릇' 전략으로, '여성, 환경, 장애 등 다양한 적대'라는 수사를 통해 새롭게 부상하는 다른 목소리들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동원'하려는 시도다. (...) 1990년대 중후반에 이르자 학생회 선거에 교육, 환경, 여성, 인권, 장애, 성정치 등의 이슈들이 마치 패키지처럼 단골로 언급되기 시작했고, 이 이슈들 사이의 관계는 '진보운동(좌파운동)'이라는 큰 틀 속에서 '대등한 연대'를 이루자는 슬로건으로 정리됐다."(207쪽)

 

우리는 지금 이 책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경향성은 아마 더 늘어났으면 몰라도 줄지는 않았을 것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는 진지한 문제제기나 고민거리보다는 "응 그래 그래 알았어 우쭈쭈"라는 반응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것 같으면서도 성가시고 무엇보다 '김빠진' 쟁점인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이 책은 과거에 대한 참고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유효한 지적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얘기를 나누면서도 이 책의 입장과 완전히 동일화하기 힘든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희경은 운동권 내부 업무의 분업이 성차별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운동권 내 분업은 객관적 능력과 적성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남자는 중요한 일이 어울리고, 여자는 이걸 뒷받침하는 일이 어울려"같은 식의 편견에 기초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나아가 객관적 능력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이러한 편견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수사로 사용되었다고 그녀는 본다.

 

참석자 중 하나(남성)는 이런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실제 업무에서 이를 정확히 적용하기는 어려운 점을 있다고 토로했다. 이를테면 어떤 직장에서는 컴퓨터로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여성은 컴퓨터와 별로 친하지 않은 경향이 있어서 이러한 마무리 작업을 맡기기가 어렵다. 실제로 일이 마무리되어야 하는 시간이 있는데 마냥 기다려 줄 수도 없으며 일의 완성도 역시 격차가 없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것을 여성 개인의 책임으로 물을 수가 없는 것이 여성이 기계와 친하지 않은 것은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젠더상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일을 여성에게 맡기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해법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국가나 회사 차원의 여성 대상의 컴퓨터 특강?

 

2회 세미나에서는 비슷하지만 또 다른 방향에서 이 책과 동일시하기 어려운 지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다른 참석자(여성)는 어떤 사태를 '성폭력'으로 규정하고 누군가를 '가해자'라고 부르는 것이 역으로 폭력의 행사일 수 있다고 말하며 이를 '가해자 엄벌주의'라는 프레임으로 불렀다. "우리가 하는 일에 찬성하지 않거나 반대하는 사람은 모두 잠재적/현실적 마초다" "내가 고통받는 것을 모른 척하는 것은 폭력이다"는 식의 논의. 자신의 주관적 고통을 절대화하여 정치적 올바름과 가치평가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이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단죄하는 형태.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수긍을 하면서 동시에 수긍하는 데 곤란함을 느꼈다. 왜냐면 남성이기 때문이다. 섣부른 동의는 "그래 역시 너는 말이 통하는 여자야"하는 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유혹은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부터 작거나 큰 형태로 이어져 왔다. 1회 세미나에서 나는 어떤 식으로든 이 책에 대한 동일시와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으며(물론 이런 동일시가 외면으로 이어지는 것에 주의하면서 혹은 그렇게 보이기를 연기하면서) 지인의 피해자중심주의 비판을 은밀하게 참고해 왔었다. 이런 과정에서 잊혀지게 되는 것은 내가 실제로 가부장적 편견에 기초해 타인에게 주었던 편견, 그리고 이 사회에서 이뤄지고 있는 그런 종류의 일들이다.

 

이를테면 전희경이 이 책에서 강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성차별에 대한 문제제기는 운동(이나 좀 더 큰 일)의 전진에 해가 된다"는 논의는 현재의 학생운동 집단에서 앞서 말했듯 좀더 교묘한 형태로, 그리고 주변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나같은 경우에는 내 타임라인 상의 지잡동이라는 집단의 일부 회원들 사태같은 예가 이에 해당했다. 성폭력에 대한 정황이 분명해지고 있음에도 이들은 자신이 부당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이런 자잘한 문제제기들 때문에 자신들의 "대의"가 무시되고 있다고 분노했다. 한 논평자는 이 사태를 보며 "유능한 활동가"가 매장되고 있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이 때 주목해야 할 것이 이들이 동원했던 프레임이 바로 앞서 말한 '가해자 엄벌주의'와 흡사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나르시즘에 기초한 가해자라는 낙인 찍기. 그렇다면 앞서 그 참석자가 말한 맥락은 틀린 얘기일까?

 

여기서 우리는 '결백한 말', 어떤 상황에서 쓰이든 정당한 말을 찾는 것이 문제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피해자의 고통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옳은 상황이 있고, 가해자라는 낙인을 문제시삼아야 되는 상황이 있다. 말의 옳고 그름은 그 내용만이 아니라 그 말이 쓰이는 맥락에 근거한다. 나와 같는 남성이 '가해자 엄벌주의'에 대한 프레임에 공감할 때의 위협 역시 이런 부분에서 등장할 것이다. 말하는 사람의 위치와 듣는 사람의 위치.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관계를 수반하는 것임을 자각하는 순간부터 둘의 관계에 대해서 말할 때는 고도의 도덕적 긴장이 요구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상대방의 입장을 들으면서도 완전히 공감하거나 동일시하는 것은 어떤 맹목일 수 있음을 이해하기.

 

이런 것들을 [오빠는 필요없다] 독서회에 남성 참석자로서 2회 참여하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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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필요없다] 2차 세미나

일시 : 2011년 11월 6일 일요일 정오 즉, 12시 (아점은 먹고 오시기를 권장!)

장소 : 합정역 6번 출구

읽을 범위 : 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 3부부터 끝까지

 

(*) [오빠는 필요없다] 마무리 세미나를 합니다. 저번 세미나에서는 이 독서회가 항상 그렇듯이 책의 내용과 본인의 경험이 겹치는 부분들을 말하며 진행되었습니다. 논의된 주제는 여성주의적인 주제를 왜 남성은 계속 반문하는 반면 여성은 직관적으로 이해하나, 왜 가부장성에 대한 비판은 '격렬한' 반응을 낳는가, 이런 지식들이 어떤 교양으로 자리잡은 사회에서 가부장성은 어떻게 변화된 형태를 띠고 나타나고 그걸 가부장성으로 보는 건 온당할까, 능력은 젠더차별적인 것인 동시에 객관적인 것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능력에 따라 여성을 차별하지 않고 그렇다고 능력을 허구적인 개념으로 비판하지 않으면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까, 저자가 너무 상투적인 푸코주의적 표현에 묻어가지 않나, 100인위라는 대목에서 조심하는 것 같다 무서운 일이라더라, 감성과 이성의 대립이 문제인가 남성의 감성과 여성의 감정의 이중평가가 문제인가, 맑스주의와 페미니즘의 대립점은 무엇이고 왜 저자는 90년대 페미니스트들은 이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고 말하는가 등을 이야기하였습니다.

 

(+) 이번에 온다고 하고 못/안 오신 분들 이번에 꼭 뵈용. 신규 참석 문의는 xleexyz@naver.com @bideologie입니다. 진보넷 메일은 잘 열어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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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읽기

일시 : 2011년 10월 30일 일요일, 오전 11시 

장소 : 합정역 근방 까페

커리 : [오빠는 필요없다] 2장까지

 

(*)당분간 휴식기를 가졌던 독서회를 재개합니다. 이번에 읽을 책은 전희경의 [오빠는 필요없다]는 책으로 진보세력의 가부장제적 성격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인터뷰를 대강 30명 정도 따서 책을 구성하셨더군요.

 

(+)개인적으로 요즘 페미니즘에 일부러라도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중입니다. 저자신의 이론중심주의가 어떤 학문의 '남성적' 권위를 추종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물론 이런 반성에 동원되는 '남성적' 형용사도 남성적일 수 있겟죠), 개인적으로는 최근 실패한 이성과의 관계에서 페미니즘적 감성이 없다고 지적을 당해서요. 뜨끔하기도 했고 끝난 마당에는 화가 나기도 해서 그래 그 페미니즘이 뭔지 보자는 심정도 없지는 않습니다. 

 

(++) 그러면서 든 생각이 페미니즘에 대해서 그런 감정을 가졌던. 것이 이번 처음은 아니더군요. 페미니스트를 바라볼 때 저의 생각은 너무 작은 문제에 골몰한다던가 한계가 있다든가 그런 생각들을 많이 했고, 또 그의 역편향으로 그런 마초성을 극복해야 된다며 모든 가치판단의 준거를 제가 '여성중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고틀에 맞추기도 했습니다.  

  지금 와서도 뭔가 정돈이 안 되는 느낌입니다.  사적이라고 왜곡된 문제들이 사실은 공적이었다는 것을 폭로하면서 시작되는 정치 속에서, 그러면 사적인 영역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 남성이 여성주의자라고 자칭하는 것은 입페미라는 기만인지, 그렇다면 남성은 페미니즘적 반성을 유지하는 유사-페미니스트로서 존재하는 게 최선인지. 이렇게 페미니스트라는 용어가 자의식의 차원에서 논의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닌지 등등. 트위터 세계의 김영하조영일, 성노동, 야외속옷건조, 빅자지쇼 등등의 이야기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왜 하필 이 주제들, 성에 관련된 것들이 입장이 어떻건 격앙된 반응들을 이끌어내는지도 궁금하고요.

 

  이번에 이 책을 보면서 이런 의문들에 대한 모든 답은 아니더라도 생각을 정리할 출발점을 얻고 싶습니다. 이게 제가 이 책을 함께 읽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문의사항은 xleexyz@naver.com로 주세요

 

(**)시간 및 장소는 합의하에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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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전인권, [박정희 평전] 첫 모임

일시 : 2011년 8월 6일(토) 13:00

장소 : 명동성당 근방 스위트번

커리 : 전인권, [박정희 평전], 한 3장까지

 

(*)일전에 읽어야지 했던 전인권 씨의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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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자기만의 방』두번째 읽기 모임

일자 : 2011년 7월 24일 일요일 오전10시

장소 : 명동 마리

커리 : 정민우, 『자기만의 방』, 5장 "고시원, 집과 집 없음의 경계 지대" ~ 끝까지

 

(*)한 책을 마무리하는 자리입니다. 재개발 반대 농성장이라는 장소와 주거공간을 통해 본 청년세대(혹은 그 반대)라는 책이 함께 하는 자리인만큼 서로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리는 없고 그냥 우리가 그랬듯이 뭐라도 보고 생각이나 합시다.

 

사실 이 책이랑 그 공간은 매치가 잘 안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번 세미나에서 말했듯 이 책은 현장은 우리 일상 밖이 아닌 안 또는 바로 옆에 있다고 말하는 책이죠. 반면 마리는 그보다는 역시 학교나 가족, 친구 등 폭력이 배제된 알상 '밖에 있는', 그래서 나로 하여금 투신의 대가를 크든 작든 요구하는 그런 곳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밖에 나왔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가는 '안'이라는 게 있고, 그 '안'이 사실 '집'이 되지 못한다는 걸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라는 억지를 부립니다). 

 

아니어도 다른 것도 많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구요. 여튼 이 날 봅시다. 그날까지 그곳이 무사하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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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자기만의 방』독서회 첫 모임

일시 :  7월 17일 오전 10시

장소 : 명동 마리

범위 :  정민우, 『자기만의 방』, 4장 "유령들의 집"까지

 

(*)공지가 늦었습니다. 다음 모임은 정민우의 책을 읽기 시작합니다. 분량이 많은 관계로 둘로 나눠 격주로 한달에 걸쳐 읽을 예정입니다. 고시원에 살아본 많은 분들이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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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 『87년 6월 항쟁』사후 공지 및 다음 책 후보 세 권

일시: 2011년 7월 1일 저녁 9시

읽은 책: 김원, 『87년 6월 항쟁』

 

(*)오랜만의 독서회 소식입니다. 그동안 김원 씨의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을 읽고, 김원 씨의 책 한 권을 짧게 더 읽자고 의견이 모여서 이 책을 읽었습니다. 한 가지 정도만 기억을 해두자면 이제 제법 '민주화'가 어떤 진실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것 같습니다만 그것이 실제로 어떤 걸 가렸는지를 직접 보는 것과 그랬을 것이라는 짐작하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전자가 개념의 우주에서 상대에 대한 혐의를 가지고 움직인다면 후자는 실제 일어난 것들에 대한 충실함으로 움직이지 않나 식으로 정리해 보고 싶습니다. 과거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기보다는 우선 내 주변의 일상과 비슷한 매커니즘(이를테면 이 책에서 반복되는 테마인 감정 "분노/불안/공포" 등등)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리하여 현실이 움직이는 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 이것이 역사책의 장점이고, 또 구술사가 가지는 장점같습니다.

 

(+)어제 그래서 구술사 책을 좀 보자는 식으로 이야기가 되어서 추천되었던 것인 박찬승의 [마을로 한국전쟁]입니다. 한국전쟁을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으로 보거나 다른 식으로 '해석' 의미도 있겠지만 사실 마을 단위에서 사람들이 느끼고 움직였던 것은 다른, 좀 더 일상적인 기제일테고 그게 뭔지 '이해'보자는 떡밥이었지요. 저희가 지금껏 읽었던 김원 씨의 책 2권 처럼요.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993960 알라딘 책소

http://blog.jinbo.net/simppo/75

 

근데 사실 어제 추천하려고 했는데 추천하지 못했던 책이 두 권 있습니다.

 

한 권은 이건범의 [내 청춘의 감옥]입니다. 80년대 학번의 기구한 라이프스토리라는 맥락에서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과 [87년 6월 항쟁]을 참고하며 읽으면 어떨까 싶더군요. 주변인들의 평도 매우 좋고 재밌게 읽히는 것 같고...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993960 알라딘 책소개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10617154142 프레시안북리뷰

 

나머지 하나는 정민우의 [자기만의 방 : 고시원으로 보는 청년 세대와 주거의 사회학]입니다. 젊은 층의 주거문제라는 메인 아이디어, 그리고 '석사' 학위논문이라는 재밌는 위치와 그 시기에 하고 있는 저자의 고민이 저희의 경제적 현실과 '대학원생' 유머(?)에서 보이는 생애사적 현실의 고민과 맞닿은 지점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터뷰를 많이 따서 진행한 책이라 '구술사'의 맛도 느끼며  볼 수 있을 거 같고요.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985499 알라딘 책소개

http://blog.aladin.co.kr/717962125/4872300 얼그레이효과 님의 인용 및 포스트

 

이 세 권의 책 중에 다시 한 번 골라볼 것을 제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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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2회

일시: 2011년 6월 18일 토요일 7시

장소: 합정역 6번출구

범위 : 김원,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 보론 부분 전부.

 

-오랜만의 공식 공지입니다. 금요일에 김원 씨 책 나머지 부분을 다 읽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의도를 아예 한 것도 안 한 것도 아니지만 지금 저희가 특정 개인과 집단에 대한 내재적 접근을 시도한 책을 주로 읽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저는 다음 책 후보로 대강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1. 김원 씨 책을 한 권 더 보는 겁니다. 세미나에서 한 번 보고 싶다고 한 '여공'이라던가 아니면 비교적 짤막해 금방 끝날 수 있는 '87년 6월 항쟁'이 좋을 것 같습니다.

 

2. 프랑스에서 임신거부증으로 자기 아이를 3명이나 죽여서 이슈가 된 사건이 있었나 보더군요.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하는 와중에 해당 여성의 심리를 내재적으로 이해해 보려고 한 시도가 있었는데 책으로 나오고 한국말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가엘 게르나크 레비의 [나는 임신하지 않았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8250526  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경우는 아니지만 이런 이해의 시도 자체가 재밌지 않을까 싶더군요.

해당 책 한줄평에 얼그레이효과 님이 언급한 푸코의 책도 괜찮을 거 같습니다.

 

3. 예전에 보려다 만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도 괜찮을 거 같습니다. 최근에 김원 씨도 박정희 관련서를 냈던데 같이 봐도 좋을 것 같고요. 물론 개부담이겠지만.....

 

다른 추천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쇼.....세미나원 한 분의 제안에 대해 답해보자면 전향에 관련된 책은 직접 없지만 적어도 우회는 하는 커리가 되어가는 것 같네요. 아예 말나온김에 후지타 쇼조의 책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지만 그 책이 어떤지 아직 보질 못해서...

 

4. 아니면 좀 뜬금없긴 한데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어떤가요. 제가 요즘 트위터 하면서 ㅄ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서 뭔 얘기 하는지 궁금킨 하더군요. 어디 보니 미디어 연구 관련 10대 도서 중 하나로 선정되어 있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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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이종영,『내면성의 형식들』3회 독서회(수정)

일시 : 2011년 5월 22일 29일 오전 10시 반
장소 : 합정역 6번 출구
범위: 이종영,『내면성의 형식들』, '파시스트적 내면성의 형식들'부터 '꼬뮌주의적 내면성은 가능한가'까지, 들뢰즈 가타리를 지적하는 보론 부분은 스킵. 

(*)파시스트적 내면성 부분에서 재밌는 포인트 중 하나는 잠재성과 현실태를 엄밀히 구분하려는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를테면 히틀러는 파시스트가 아니다 내지는 파시스트에 만족할 수 없었다고 이종영은 말하는데요, 저는 이것이 일부 군부만이 아닌 일반인들의 파시즘과 연루를 지적하면서도 이런 일반인들의 심성 자체를 마치 그것 자체로 범죄가 될 수 있는 양 평가하는 담론의 과도성을 피하는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에서 일상적 파시즘론이 유행한 이후 파시즘에 관한 분석비판담론과 차별화되는 지점이죠. 이걸 짚는 게 중요한 이유는 이런 담론의 형식이 사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파시즘'이라는 말을 여기저기에 쓸 때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젓번에 역시 비슷한 말인 '부르주아'를 잠깐 보기도 했었죠. 뭐 여튼 난삽하게 인상비평은 이 정도까지 늘어놓고 이번주에 뵙겟습니다.

(+)참석율 저조로 1주 연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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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성의 형식들] 오늘 부분 중 발췌 및 다음 예상 커리들.

오늘 부르주아적 내면성 가족 부분을 읽었습니다. 이종영은 화폐를 얻음으로써 부르주아가 어떤 불안을 회피하고자 한다고 말하는데 그 불안의 정체를 가족에서의 가부장적 향유에서 찾습니다. 이 가부장적 향유는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지요.

우선 근대 부르주아 핵가족의 구성원리로서의 '사랑'이 전근대적 가족들에 비해 가진 해방적 측면을 이야기합니다. 밑인용문이 왠지 이종영스러워 옮겨 놓아봤습니다.

"공동체는 부부의 공동체적 귀속성을 확인하면서 사랑을 한계화하고 탈가치화한다. 공동체적 연대성에 비하면 개인적 사랑은 사소하고 시시한 것에 불과하고, 그리하여 개인적 사랑은 언제나 공동체적 연대성에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가 사랑 없이 결혼한 자들이 사랑으로 맺어진 자들에 대해 행하는 피학-가학적 복수의 일종임은 물론이다. 희생자들이 승리자들에게 복수하는 것이다. 공동체적 질서에 짓눌려 사랑을 쟁취하지 못한 보잘것없는 자들이 무리를 지어 고립된 사랑의 승리자들에 대해 행하는 피학-가학적 복수"(96~97쪽)



그리고 근대 핵가족의 성차별적 본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인용도 필연적이라기보다는 역시 이종영스러워서...

"에릭 홉스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정은 전쟁의 세계 속에 있는 평화의 오아시스, 다시 말하면 전사의 휴식처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인공 중심주의', 즉 주인공과 동일시하려는 감정이입을 피해야 한다. 이 문장에서 '전사'는 어떤 악한 침입자들과 대결하는 정의의 전사가 아니다. (...) 그는 부르주아 사회의 구성원리인 경쟁을 자기화하고 다른 경쟁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을 치르는 전사이다. 그는 남들을 제거하고 살아남기 위해 야비한 일들을 하고, 집에 돌아와 휴식을 취한다. 그러나 도대체 가족은 어떻게 하여 그에게 사회와 똑같은 전쟁의 무대가 아닐 수 있을까? 사회에서 그처럼 전쟁을 치르는 그는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그는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그처럼 변화할 수 있을까? 사회에서 이리였던 그가 집에서는 양이 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집에서는 이미 승리자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사회는 이처럼 이해하면 된다. 남자들이 이미 여자들을 제합해 놓고서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인다고. (...) 사회나 가족 둘 중의 하나를 이상화할 필요는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사회와는 달리 가족에서는 전투가 이미 끝났다는 것, 그래서 규칙으로서의 공공성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110~111쪽, 강조는 저자.) 



가부장적 향유에 대한 이야기. 역시 맨마지막 문장이 이종영스럽니다.

"중요한 것은 남성적 사랑과 여성적 사랑의 그러한 접합구조가 부르주아 가부장들에게 중요한 존재의미를 부여해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성이 그들에게 여성적 사랑을 행하는 한에서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한다. 가족 내에서의 지배가 위협받지 않는 한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가족에 바치겠다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치욕이 가족을 위해 감수되는가?"(112쪽)



이런 가부장적 향유가 사실 상품에 대한 욕망보다 근본적임이 강조되는데 모든 상품형식은 여성성 형식이라는 재밌어뵈는 주장이 나옵니다.

"'여성성 형식'은 어디까지나 상품형식의 '모델'이기 대문이다. 즉 최고의 상품형식은 적어도 남성게게는 여성의 형식(일반화시켜 말한다면 성적 형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존재는 창녀이다. 상품들이 여성성 형식을 취하려고 노력하지만, 창녀는 그 자체가 여성으로서의 상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창녀야말로 모든 상품의 이상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그러나 그렇지 않다. 창녀는 상품형식의 이상형이 결코 아니다. (...) 창녀는 오히려 최악의 상품형식이다. 상품형식은 여성성 형식을 모델로 삼지만, 여성 자체로서의 상품인 창녀는 결코 최상의 상품형식이 아니라 최악의 상품형식이다. 왜냐하면 '여성'을 찾아서 창녀에게로 가는 돌아오는 것은 '상품'뿐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프랑스에서 창녀를 뜻하는 '쀠뗑(putain)'은 한국에서처럼 대표적 욕설일 수밖에 없다. 좌절의 원한이 담겨있는 욕설."(128~131쪽)



막간에 본인이 왜 정치의 대상을 '선'이 아닌 '정의'로 보는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는 여기서 '선'을 정치의 대상으로는 담론들이 반도덕의 외양을 한 도덕주의인 경우가 많고, 그래서 항상 결론이 "깨어나세요. 주체여..."식으로 간다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나는 정치의 이념적 대상을 정의로 규정한다."(138쪽)

"현실적 정치는 이념으로 정의를 내세우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러한 이념의 허구 아래서 부정의를 비호한다. 바디우와 라자뤼스는 정치의 대상으로서의 정의가 허구적 이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이제 정치가 보다 적극적으로 선을 지향할것을 주장한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정치의 대상이 선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선은 개인적 선택의 대상이고,정치적으로는 부과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146쪽)



일단 이종영은 부르주아적 내면성이라는 게 부르주아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이 부르주아적 사회에 사는 모든 이들의 거의 일반적 심성이라 전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보편성을 부인하고 "나는 부르주아 '이상'의 존재야. (그걸 부르주아라고 깜으로써 확인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놈들을 볼셰비키적 내면성으로 부릅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이 이를 현실의 운동권이랑 곧바로 비교하면 그냥 그저그런 흔한 짜증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것. 이종영 이야기가 결국 그런 것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여튼 우리는 정승같이 써먹을 수도 있음. 

"볼셰비즘은 타자를 분류하고 낙인찍는 기계이다. 여러 가지의 형태의 이단들이 존재한다. (...) 이러한 모든 형태의 낙인들은 최종적으로 귀착되는 한 중심을 갖는다. '부르주아'라는 중심이 그것이다. (...) 낙인찍기의 효력은 혁명 이전, 혁명기, 혁명 이후의 세 시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혁명 이전의 낙인찍기는 정파간의 권력투쟁을 반영하는 것이고 운동으로부터의 배제로 귀결되는 것이겠지만, 타자를 '악'으로 규정짓고 자신을 '선'에 위치시키는 '도덕적' 향유의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한 '도덕적' 향유는 타자를 정죄함으로써 자신을 살리려는 위선의 극단적 형태이다."(187~8쪽)


여기서 이종영의 부르주아라는 말의 (반半)개념적 지위에 대한 코멘트를 참조해봅시다. 이 님은 부르주아라는 말이 순전히 낙인찍기용이라 보진 않습니다.

"부르주아가 점하고 있는 위치란 어떤 것일까? 부르주아란 어떤 자들일까? '부르주아'라는 용어의 일상적 용법이 단지본가계급만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과학적 노동은 일상적 언어 용법과의 거리두기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부르주아라는 용어의 일상적 용법이 맑스주의와 레닌주의에서 설정된 노동자계급의 '적'의 범주에 대한 일종의 전(前)개념적 일상감각을 표현해 준다는 것이다. (...) 그러한 전개념적 일상감각은 모호하기 짝이 없다. 반면 그렇다고 하여 그러한 전개념적 일상감각과 구분되는 계급의 개념이 엄밀한 과학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데서 문제가 성립한다."(32~33쪽)


심지어 지금 한국에도 유행하는 낙인 떡밥 "부르주아"에 관한 이야기.

"낙인의 대상이 되는 행위양태는 낙인찍는 자 자신의 행위유형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낙인찍은 자는 낙인찍히는 자들의 내면을 샅샅히 이해하고 있는 것이고,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탄압은 가혹해진다. (...) 애초부터 모두가 부르주아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낙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다. 심지어 노동자계급 출신들도 말이다. 레닌이 말했듯이 노동자들도 그 자생적 행위에 있어서 부르주아적이기 때문이다. (...) 부르주아들이 서로를 부르주아적이라고 낙인찍는다. 그 누구에 대해서도 "당신은 부르주아다"라고 말할 수 있고, 그처럼 낙인찍힌 자는 그 말에 결코 항거할 수 없다. 그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 이처럼 모두가 '원죄'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낙인은 단지 상대를 제거하기 위한 구실이다."(188~9쪽)

이래서 이런 류 개싸움에서는 선빵이 중요. 나중에 말하는 놈은 무조건 '변명'처럼 들린다. 

이행 대안 미래를 타자비판을 통한 자기구원이라는 추상적 종교적 주체론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인간적인(휴머니즘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실존조건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관점에서 생각해볼 것을 주문하는 대목. 역시 마지막 문장이 이종영스러움.

"물론 이행은 변화를 요청한다. 이행의 두 핵심적 장소는 가족과 생산단위(공장과 회사)이다. 볼셰비키는 이행을 인간의 조건을 부정하는 어떤 비(非)인간적 괴물의 탄생으로부터 사고하려 한다. (...) 필요한 것은 피도 눈물도 없는 볼셰비키적 '강철'도 칸트적 초월성도 아니다. 다만 인생의 보잘것없음과 쓸쓸함에 대한 공감, 자기파괴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자기에의 배려'로 충분하다."(221쪽)





그리고 다음에 뭔 책을 읽을까 노가리를 깠는데요, 부르주아라는 말이 나온 김에 피터 게이의 <부르주아전>을 보는 게 어떠냐, 그리고 볼셰비키적 내면성이 나온 김에 김원의 <잊혀진 걸들에 대한 기억>을 볼까 그랬습니다. 뭘 보든 지금 사는 데, 적어도 남들을 '부르주아'라고 까고 뭔가 대단한 것 한 것처럼 아는 사람들이 넘실대는 트위터에서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르주아전(서해역사책방14)
카테고리 역사/문화 > 서양사 > 유럽사 > 유럽사일반
지은이 피터 게이 (서해문집,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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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것들에대한기억1980년대대학의하위문화와대중정치
카테고리 정치/사회 > 정치/외교 > 각국정치 > 한국근현대정치
지은이 김원 (이매진,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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