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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5

책을 읽어도 그리 즐겁게 읽히지 않는다. 책을 읽은지 오래 되었다보니 뭔가 알았던 것들에 더 붙여가는 재미도 없고, 지금 내가 읽은다 한들 이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소용이 없다는 것은 지금 써먹을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애당초 내가 읽은 것들은 써먹을 수가 없는 종류의 지식들이었다. 물론 내가 그것을 조금 나중에 알았다 할지라도.

 

써먹을 수 없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다. 하나는 단기적인 맥락으로  내가 이걸 나중에 내 지식들에 갖다 붙일 때까지 과연 기억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나중에 읽는 게 맞지 않나 싶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장기적인 맥락으로 말이나 글로서 생업을 꾸리거나 무언가를 하겠다는 결의가 꽤 많이 무뎌진 상태에서 이런 글들을 읽는 게 의미가 있을까, 설사 읽더라도 예전처럼 관심사가는대로 읽는 게 아니라 그 종류와 분량을 골라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렇다고 책을 보는 게 아예 싫은 것은 아니다. 온갖 눈앞의 또는 다음날 아침의 고민으로 괴로울 때 책을 읽고 있노라면 현실과 조금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아주 가끔은 그런 것들을 느낀다. 닥치는대로 읽을 때의 "언젠가는 도움이 되겠지" 식의 지루함을 느낄 때도 있지만 정신이 환기되는 것을 느낄 때도 있더라. 돌이켜보면 이런 청량감은 마구 읽을 때는 못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책의 소중함을 깨달았다거나 책이 이런 기능도 있구나 하고 감탄할 마음은 별로 들지 않는다. 이건 그냥 최소의 청량감일 뿐이다. 요즘 좀 그만큼 지쳐있다.

 

 

 

사실 이것 말고도 항상 쓰고 싶은 것들이  있다. 내가 대체 어디까지 왔는지 앞인지 뒤인지 옆인지 위인지 어찌 됐건 좌표가 어디인지 재보려면 하는 수 없다 글을 써봐야 한다. 글이 사회를 바꾸는지 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생각'이라는 것에 물리적인 위치를 측정하게 해주는 좌표의 기능을 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좀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글의 이러한 기능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쓰지 못하면 촉박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쓰고 싶었다. 근데 평상시에는 그게 정말 안 되더라. 매일 운동하기로 마음먹고 헬스장 1년치를 끊었다가 3일 나가는 사람처럼, 글을 어쨌건 평생 쓰며 살아야 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죄책감의 이자만 불리며 그러고 지내고 있다. 이렇게 뭔가 쓰는 것도 정말로 쓰고 싶었던 것들에 대한 죄책감을 잠시나마 덜기 위해서이다.

 

훼이버릿이라도 모아 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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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하지만 항상 그 말만으로는 논쟁이 온전히 형성되지 못하는 쟁점들이 있다. 폭력, 고통, 꼰대, 피해자. 이 말들은 매우 주관적인 기준을 가지며 오히려 그러하기 때문에 성립된다. 가해자는 스스로가 가해자임을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가해자다.

 

 

가해자가 폭력임을 인정하는 상황은 그 이전에 합의로 이어질 수 있기에 논쟁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피해자의 고통이 객관적으로 옳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피해자는 항상 자신이 고통받았다고 믿기에 정당함을 호소하며 이 과정에서 가해자의 동의는 필요없다.
 
그래서 이런 종류들의 논쟁은 항상 1인칭에서 시작되고 또 1인칭에서 진행된다. 시작은 필연적이지만 후자는 꼭 그렇지 않다. 따라서 이런 쟁점의 대화는 억울할지라도 상대 입장이 '가능'하다는 걸 잠정적으로 인정한 상태에서 진행될 필요가 있다. 가해자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무지로 인해 가해자가 되었으나 그 정체성의 객관적 정당성을 피해자가 주장하는 고통에 근거하긴 어려운 상황. 그렇다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게 애초에 그게 안 되니 이런 상황에 도달하지 않았나.
 
이럴 때는 말만이 아닌 힘이 개입해서 상황을 조정한다. 당사자의 비동의에도 불구하고 결론을 짓거나 압력을 통해 당사자가 특정 정체성을 받아들이기를 유도한다. 헌데 내가 생각하기에 민주주의 시대의 장점, 그리고 인간의 고유함은 말을 힘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들을 가졌다는 것이다. 가장 제도적인 것으로는 법이 있고 가장 일상적인 것으로는 비판, 설득같은 다른 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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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 쓰다만 일기같은 일기다. 다시 보며 내 고질적 콤플렉스를 떠올린다. 무엇이든 완성하지 못함. 무엇이든 하다가 말았던 시절들. 그것들은 내 문제였을까 아니면 그때마다 내가 핑계를 대었듯이 상황이 부족했기 때문일까 둘 다일까. 어찌되었건 간에 다시는 자괴감에 다시 빠져들지 않게, 나보고 항상 무책임했다고 핀잔을 주었던 누군가에게 느꼈던 야속함과 분노를 당당하게 돌려줄 수 있게 끝까지 하는 무언가를 해볼 수 있을까. 하고 싶다. 그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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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며 산다는 것 혹은 폭력적인 평범함의 모종의 건강함

작년 이맘때쯤의 내가 올해 이맘때쯤의 나의 모습이었으면 했던 것 중 하나가 "평일과 휴일의 구분"을 느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평일과 휴일, 나아가서는 학기중과 방학이 구분되지 않는 삶을 살면서 아 그야말로 부레옥잠 개구리밥같은 삶을 살고 있구나 싶었다.

 

계속되는 휴식에 몰려드는 배부른 권태감, 그리고 이렇게 서서히 붕붕 떠다니거나 아니면 이런 사람들만 모인 집단 속에서의 크고 작은 명망에 집착하며 살 것이라는 위기감, 그리고 과연 이런 삶을 사는 이가 정치적으로 올바르거나 이론적으로 정교하지는 못해도 대가를 치르며 자기 삶을 꾸리며 사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권리'를 가지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등. 이런 감정 속에서 '평일'과 '일과'를 가진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참 이 고민 자체로 자신이 '특권층'이라는 걸 여실히 드러내는 그런 고민을 했었다.

 

오늘을 살고보니 어느 정도는 원하는대로 이뤄졌구나 싶다. 마음먹고 계획짜고 자기 하기 나름이라지만 피로에 쩔어 책 한자 눈에 넣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일과 후의 인간 관계 역시 내가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일과에서의 권력을 의식하며 조직해야 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물론 꼭 이런 것은 아니고 내가 시간을 그렇게 쓰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지 못한다는 사실이 뭔가 부담감을 느끼게는 한다는 점에서 이는 나를 속박하고 있다.) 속도와 눈치가 중요한, 예정되거나 계획된 시간에 하지 못하면 밤에 잠을 줄이고 시간을 들여 해치우면 되는 식의 해결을 상상하기 힘든 과제들을 마주치고 있다. 그리고 과제에 실패할 경우 자괴감만이 아니라 남에게서 데미지를 직접 입고 있다. 이제 매를 때리는 사람은 그래도 안쪽 사람인 '내'가 아니라 남이다. 그리고 그러하기에 나는 다음에 상대에게 맞을 피해에 미리 익숙해지기 위해 자괴감의 강도를 조금씩 올리고 있다. 

 

이쯤되면 꽤나 우울해 보이긴 하다만 뭔가 우울만으로는 덜 비참한 듯한 느낌이 든다. 내가 지금 맞이하고 있는 곤란은 뭔가 더 설명이 더해져야 한다. 이를테면 남들로부터 맞는 그 매가 참 '합리적'인 것으로 판단된다는 게 한 예화가 될 수 있겠다. 실제로 내 업무미숙으로 남들이 피해를 보는 것도 맞고 남들이 매를 주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항상 충고도 준다.

 

아, 충고라! 얼마나 기만적인 말하기인가! 그 꼰대들의 자기합리화 언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이게 어느 집단에서는 일반적인 것도 같다만 그렇지가 않다. 그 충고라는 것들은 항상 어떤 구체적인 실천을 지시하고 있으며 자기이익으로만 말할 수 없는 인간적인 걱정 혹은 애정도 담고 있다.

 

설령 사실이 그렇더라도 그것이 아직 모든 게 불투명한 나로서는 내 나름대로 이를 앞의 방식대로 부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안 된다. 왜냐면 물러설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러서면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계속 인생에서 도망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항상 내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와 사람과 일거리와 함께 할 수 없는 이상 언젠가는 다시 여기로 돌아오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 아닐까.

 

예전에는 내가 뭘 하든 말든 잘 하든 말든 별 상관이 없었다. 잘 안 되거나 못 하면 떠나버리면 된다. 다른 곳에서도 다른 할 일이 많다. 아예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있다. 시간을 어떻게든 보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남에게 그리 큰 피해를 주거나 하지도 않았다. 내가 그리 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것이 그것들은 어쩌면 죄다 "사소한"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무서운 책을 읽는다고 무서운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내가 회의 한번 빠졌다 해서 누군가가 억울하게 피해를 보는 것도 아니다. 요란스럽게 '모든 것'과 '새로운 것'에 대해 말해왔지만 그 요란함은 빈수레를 가리려는 종소리.....도 안 되고 그냥 무얼 먹었으니 무얼 싸듯이 무얼 읽거나 봤으니 무얼 내보낸다는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정반대다. 나는 말그대로 "일"을 하며 살고 있다. 길고 넓게 보았을 때 아주 큰 득이나 실이 나나 남들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지만 어쨌든 무언가가 분명히 눈앞에서 일어나기는 일어나는 그런 "일"들을 하고 있다. 여러모로 병들었지만 모종의 건강함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건강함을 굳이 가지고 사는 게 행복한 삶은 아닌 것 같다. 그럼, 남은 선택지는 무엇인가? 권태 속에서도 건강함 속에서도 살기 싫다면? 다른 길을 구태여 찾으려는 사고 습관 역시 부레옥잠 인생다운 것일 게다. 다른 길은 이 길들 '안'에서 찾아질 것 같다. 

 

평범함이 가진 폭력성에 대해서 푸코 등을 읽으며 배울 대로 배웠고, 또 그걸 뼈저리게 느끼며 지내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이런 삶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힘 또는 굳건한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내가 처음부터 글러먹어서일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어떤 하나의 예감은 든다. 평범하게 살든 비범하게 살든 어떻게 살든 간에 평범한 삶이나 하다 못해 평범한 삶을 살려는 의지조차 거치지 않는다면 아무렇게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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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생은 누구인가?

"다섯권의 독서와 직관으로 할 수 있는 얘기를 백권의 책을 읽으면 더 정교하게 할 수 있다는 자기정당화를 체계적으로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이 아닐까여..." -Y 모씨와의 대화 중

 

"한국 사회에서 가장 안 움직이는 나약하고 안이한 부류들. 아무도 안 읽는 글을 읽거나 쓰는 데 홀로 만족하고, 교수의 심부름을 하느라 온 청춘을 다 보내도 끝내 저항하지 않을 자들. 시간강사들의 열악한 현실이 가까운 미래인 줄 알면서도 그저 참는 자들. 대학원에서 공부한다는 것이 꼭 죄짓는 것만 같다." -오혜진 [원문 링크]

 

누가 뭘 할 거냐고 물으면 항상 당당하게 "일단 대학원생"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요즘 누가 이후에 뭘 할거냐 물어보면 같은 대답을 하긴 한다만 굉장히 다른 느낌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일단 대학원생..."

 

대학원생이 정말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학부의 뭔가 비체계적이고 건성건성인 수업이 아니라 제대로 각잡힌 커리큘럼에 뇌를 단련하고 그리하여 뭔가 더 낫고 잘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금도 그 욕심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기대가 많이, 꽤나 심하게 줄어들었다. 이런 일종의 '실망'은 단지 '대학의 현실'을 알아서만이 아닌 것 같다. 여기에도 어떤 좀더 '개인적'인, 또 그러하기에 다른 이들에게도 더 잘 들어맞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적인' 맥락이 있다.

 

뭔가 도망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한 것이 사회에 책임과 소속감을 느끼며, 그러기에 사회에 지적인 활동을 통해 무언가를 기여하려는 것과는 다른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저 나는 그냥 학생이고 싶어했던 것은 아닐까. 익숙한 것을 계속하려는, 관성 속에 살려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이가 하는 말과 글이란 과연 세상이라는 운영체제와 호환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일까 아니면 몇몇 만의 비밀 채팅방일까. 

 

좀더 꼬아서 이야기해보자. 부모의 기대와 달리 성숙한 인간과 시험을 잘보는 모범생 사이에는 갭이 있다. 고등교육으로만은 완성되지 않는 그런 인간적 면모와 교활한 지혜, 그리고 공부를 통해서 얻을 수 없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훨씬 더 쉽고 더 명확하게 얻어지는 통찰력과 순발력 등. 나는 이 둘 사이의 갭을 눈치채고서는 내가 지금까지 사는 식으로 살아도 되는 곳으로 가려한 것이 아닐까.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요즘 대학원생이 된다는 것에 대해 내가 느끼는 감정은 이렇다. "인생을 유예하기" 인생이라는 언젠가 갚아야 할 부채에 대한 상환을 조금만 더라며 유예하기. 이 부채를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빌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누구에 대해서만 말해보자면 그토록 부정했지만 결국 '철이 들며' 알아가게 되듯이 부모에 대한 빚일까? 아님 멋진 인생을 살겠다던 자신에 대한 빚일까(그래서 우리는 "아직 잠깐만..."이라 말하며 등교하는 것일런지 모른다) ?

 

몇 년 전에 어떤 선배가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었더랬다. 원하던 대학에 과에 지도교수를 만났지만, 뭔가 마음이 편치 않다고, 스스로가 이 길을 와야만 했는지, 이것밖에 할 수 없었는지, "결국 여기로 왔구나"하는 식의 패배감이 든다고. 대학원생들 스스로가 내가 말한 부분에 무지하다거나 정직하지 못하거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과 그녀들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 매우 충분히 이야기를 하고 있다(나누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대학원생의 자의식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들의 초상은 분명히 우리 사회의, 특히 젊은이들의 어떤 재미있는 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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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 앞에서: 이상한 모자 님의 글을 읽고

요즘 살면서 절대 이런 진보넷같은 곳에 안 들어올 사람들을 만나며 지내고 있다. '직장'이란 곳이 그런 곳이 아니겠나. 그런데 그렇게 평범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참 이래저래 좌절감을 경험하고 있다. 뭐 잘 놀지 못하거나 업무 능력이 달린다던가 그런 일도 일이겠지만 이런 것들은 내 자의식 과잉에서 비롯된 부분이고, '잡담' 시간에 주로 좌절감을 느끼곤 한다.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 부동산 이야기, 주식 이야기, 재테크 이야기, 대학 이야기, 심지어 법이나 정치 이야기.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자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었구나 싶다. 이 사람들이 나를 보고 순진하다고 하는 것이 나의 본모습(어둠의 급진 이론가?허허)을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모습을 알면 더더욱 '자기 상상에만 충실하구나'싶다 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고 있다.

 

물론 삼국지적 세계관마냥 세계를 과도한 현실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보아 오히려 비현실적이 되는 경우들도 있다. 특히 정치 얘기에 관해서는 그러하다. 만화 대물급의 세계관. 하지만 그렇게 자신들과는 조금 떨어진 정치 이슈가 아닌 삶과 연관이 있는 것이면 이들은 그 어떤 전문 지식도 두려워하지 않고 습득한다. 내가, 그리고 누군가가 딱히 '배울 필요 없다'라고 기각했던 지식들을.

 

그런 맥락에서 난 요즘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만약 세계가 하나의 교실이라면, 나는 그 곳에서 어떤 학생일까. 그냥 뒷자리에 앉아서 이어폰을 끼고 딴 생각을 하며 그저 어서 졸업을 하기를 기다리는 그런 친구가 아니었을까? 가끔 세상을 저주해 보기도 하고 노트에 몰래 굉장한 소설을 써보면서 뿌듯해 하는 그런 친구. 

 

내가 무얼 하지, 그리고 그 무엇을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다시 역으로 내가 하려는 그 무엇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있었기는 한 것이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이런 생각을 기록할 기회를 준 이상한 모자 님의 글을 펌질해 놓는다. 

 

 

'대중의 바다에서 만납시다' 따위의 슬로건에 감탄한 일은 없다. 하지만 그 슬로건이 담고 있는 특정한 측면에는 동의가 되는 부분이 있다.

 

이를테면, 대중의 바다에서 만나자는 것이 우리가 좀 더 사기를 잘 쳐야 하고 잔머리를 잘 써야 하고 그래서 대중들을 더 잘 등처먹어야 한다 이런 얘기면 전혀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대중의 바다에서 만나자는게 진짜 아무리 아닌 척 해도 뼛속 깊이 운동권일 수 밖에 없는 우리끼리 지지고 볶고 이러지 말고 좀 뭐라도 일반적(?)인 차원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해라.. 이런 얘기면 난 정말 가슴 속 깊이 동의할 수 있다.

 

참 한심스럽다고 생각하는데, 소위 운동권들 정말 웃긴다. 사회주의자라고 떠들며 소위 이론 얘긴 끝없이 늘어놓으면서 현안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사회주의를 얘기하는 것은 좋은데, 그래서 강만수의 메가뱅크론에는 찬성할 건가, 반대할 건가? 반대한다면 무슨 대안이 가능한가? 당연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무슨 얘기를, 좀 얘기를 해야지.. 할 말이 없으니까 대충 민주당 입장을 베낀다. 한나라당보다 왼쪽에 민주당이 있고 민주당 왼쪽에 우리가 있으니까 우리 입장에서 입장이 없는 얘긴 민주당거 가져와 얘기해도 될 거라는 나쁜 습관이다. 민주당 정치인들이 신자유주의자라고 옛날에 욕한 게 다 소용없게 되어버렸다.

 

내 얘기는 좌파를 확실히 하자는 얘기도 아니고 선명한 이념을 말하자는 얘기도 아니다. 제발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 입으로 말을 하라는 것이다. 대중의 바다에 나가서 대중에게 사회주의를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말을 들으란 말이다. 대중의 말을 듣고 뭘 해야 할지를 정하라는 말이다. 레닌이 좋아하던 일과 중의 하나는 '평범한' 사람들의 편지를 받고 몇 번을 되풀이해서 읽거나 그런 사람들을 데려다 놓고 떠드는 말을 몇 시간이고 앉아서 듣는 것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제일 한심한 사람들이 '운동은 그만하고 정치를 하자'고 떠들면서 대중과는 대화 한 마디를 못하는 사람들이다. 대화라는 것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하는 것이다. 남의 얘긴 듣지 않으면서 자기 얘기만 하는 것이 대화가 아니다. 대중들이 물론 자기들 귀에 좋은 소리 하는 말을 좋아할 것 같지만 그거 다 웃기는 생각이다. 대중이라는 존재는 늘 우리가 기대하는 정도에 비해서는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멍청했지만 우리가 무시하는 정도에 비해서는 놀랄만큼 똑똑했다. 오늘날의 대중들은 출근길에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들으며 출근해서는 조선일보를 보고 퇴근길에 CBS 시사자키를 듣는다. 내 말이 의심스러우면 출근길, 퇴근길에 버스나 택시를 타봐라. 지하철을 많이 이용해서 라디오는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면 승객들이 손에 뭘 들고 있는지 한 번 확인해보라. 정치를 입에 달고 사는 여러분이, 그런 소시민들에 비해 세상사에 얼마나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

 

운동권이라면 누구나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운동권은 만능이 아니고 다 자기가 해야 할 역할이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최소한 현실정치를 논하려면 남들이 뭘 가지고 얘기를 하는지는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정말 엉성한 수준이라도 대중들이 말하는 주제에 '우리의 입장'을 가지고 한 마디 얹을 수 있어야 정치가 시작되는 것 아닌가? 그냥 술친구 숫자를 늘리는 것이 정치인가? 지역정치를 한답시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정치인가? 대중들이 말하는 것에 그저 옳소, 옳소 외치는 것이 정치인가? 보수정치에 비해 우리가 얼마나 빈약한 기반을 갖고 있는가를 한탄하기 전에 그들로부터 혹시 배울만한 것은 없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물론 잘 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그냥 혼자 술 먹는 김에 답답해서 써봤다. 님들끼리 하는 진보대통합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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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20대를 살길 원하는 몇 사람들 : EM님의 '학생'을 위한 포스트를 보고

 

1. 최근 슈리 님의 포스트 [좌파는 성매매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트위터와 블로그에서 소란이 한바탕이 일어났었다. 나로서는 그 글의 원문은 읽지 않았지만 그 텍스트를 둘러싼 비판들은 한윤형 님과 구멍 님의 글을 중심으로 보았다. 어째서 공평하지 못하게 그렇게 읽었냐하면 거만하지만 최선을 다해 솔직한 말로 그 포스트가 어떤 내용으로 쓰여있을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떤 태도에 입각해 쓰여있을지 충분히 예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걸 예상하고서 그 글을 태연히 볼수는 없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질낮은 글을 눈에 담을 시간이 없다는 지적 우월감/자만감과 개인적 다급함이 중첩된 것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 자신이 정확히 저런 글을 써보고 그것으로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자존감을 획득하던 사람이었기에 드는 복잡한 감정이기도 하였다. EM님의 말씀처럼 이 집단은 '스승'이나 '선배' 없이 시작을 했다. 그 전에도 이런 사람들이 없던 것은 아니다.

 

 

2. 하지만 차이를 들어보자면 크게 2가지 정도가 일단 떠오르는데 우선

 

1) 왕고가 없는 들뢰즈 이후의 현대정치철학 : 2000년대 중반 이후 번역출판된 (주로) '들뢰즈 이후의 현대정치철학'를 통해 읽었다는 것. 나는 이런 단순한 사실만 포착하고 있다가 지인의 지적을 듣고 이 사실의 특이성을 느꼈는데 그것은 '선배가 없다는 것'이다. 독해가 맞든 그르든 맑스는 김수행이 있었고 그것의 비판인 알튀세르는 과천 연구실이 있었고 또 그것들과의 비판적 긴장을 유지하려 들뢰즈에는 이진경이 있었고 네그리에는 조정환이 있었다.

  하지만 들뢰즈 이후에 등장한 지젝, 바디우, 랑시에르 등에는 '선생'이나 '선배'로 대표될 얼굴이 딱히 없었다. 물론 먼저 나보다 그 책들을 영어로 읽은 선배들의 번역을 통해 우리가 읽게 된 것이긴 하지만 해당하는 이가 지젝을 전문적으로 번역할 의지를 가질 사람이었다기보다는 그냥 좋은 책 한권 번역하자는 식으로 던져주고 간 경우가 많았다. 관련 연구까지는 아니어도 잡문들은 꽤 많았었던 것 싶긴 하지만 앞서의 이름들에 비견할 존재감(이것이 경중의 의미는 아니다)를 가진 사람은 딱히 없었다. 지젝에 이성민 씨가 있다 하지만 이성민 씨의 이름이란 것은 앞서의 이름들과는 참 다른 것 같다. 

  이러한 선배없음은 잉문학도들의 어쩌면 과잉되어 보이는 자의식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본다. 눈 앞에 아무 것도 없었기에 태초부터 논의를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야말로 세계를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고 말할 용기/오만을 가질 수 있었다. 

 

2)웹을 통한 과잉전시: 다른 한가지는 이들이 글과 생각이 너무 많은 시선에 너무 오랜 시간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제 분수에 맞는 관심을 받는데 멈추지 못했다라는 말과 같을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다른 맥락도 있다. 이전과 같은 경우에는 EM님이 말씀하셨다시피 글을 아는 사람들에게 보이고 이들의 자문을 받거나, 아님 홀로 좀더 생각할 시간을 가지거나 하면서 글이 완성될 시간을 더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텍스트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속도는 이런 답답함을 참지 못한다. 심지어 생각이 시작되고 있는 과정에서도(이를테면 이 블로그 자체도 예외는 아닌) 전시와 독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후 사태는 이번 일에서 보았다시피 잘 알 수 있다. 원문이 뇌에서 다른 이의 눈으로 들어가는 시간도 빠르고 이 속도는 말과 말이 오가며 가속도를 붙여 가다 견딜 수 없는 경지에 오면 어느 한쪽이 폭발하고 서로 평행선을 그리는 식으로 사태가 마무리된다. 이 부분의 심리 역시 EM님이 잘 지적해 주셨다. EM님은 다른 이들은 별로 발휘하고 싶어보이지 않는 배려를 발휘해 슈리 님의 상황을 그나마 상대적으로 슈리님의 입장에서 말씀해 주고 계신다. 내가 그런 EM님의 말에 동의를 느끼는 것은 앞서 말했듯 나 역시 그런 글, 거칠게 한 줄로 요약하자면 어떤 대상이나 내용을 다루는 것보다는 어떤 신중하거나 (무엇보다도)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중요한 연극적인 글을 쓰는 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글을 쓰고 그런 글에 리플을 다는 와중 지금 슈리님이 처했을 법한 정신이 우왁!!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태는 기술의 발전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친 가설을 들어보자면 외톨이 먹물 지망 대학생들의 소비의 장이 공동체 내지 놀이터가 학생회와 연계된 학회에서 인터넷 서점을 매개한 인문학 출판시장으로, 생산의 장이 학회 발제문이나 레포트, 운동 문건이나 대자보, 타세력과의 토론문에서 블로고스피어나 인터넷언론 등으로 이동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주의: 다른 얘기도 그렇지만 이 부분은 특히 가설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며, 글쓴이의 학생운동 무경험이라는 어떤 치졸한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판타지일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 만약 이 가설이 맞다 하더라도 이 가설 자체는 중요한 중간고리들을 빼먹고 있는데 이를테면 '게시판' 문화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한윤형의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나 [안티조선운동사], 김민하의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가 어떤 역사적 기록들과 재밌는 해석들을 보여주고 있다.

 

 

3. 원래는 요즘 내가 하는 일이 항상 그렇듯 좀 뭔가 센치하게 쓰려 했던 포스트인데 어쩌다 나름의 원인분석이 이렇게까지 길어졌다.......사실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이런 것보다는 다른 것이었다.

 

잉문학도로서, 내가 요즘 자주 생각하는 문제로서 '머리로서 사는 사람'이 현실과의 접점을 찾을 때 '몸으로 사는 사람'이나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을 무시할 수밖에 없는지.

 

20대가 공부를 해야 되는 나이라는 예감을 가지면서도 가지게 되는 불만이나 불안들. 아 나보고 닥치고 배우라는 거냐 네가 배울 만한 사람인지 증명도 안 해 놓고. 공부를 하고 글을 써서 뭔가를 바꾸거나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여를 할 수 있을까하는. 또 그때까지 있다보면 나도 저 축쳐져 10명도 안 되는 사람이 읽는 글을 쓰고 만족하며 사는 시간강사 선배들처럼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지 않으려면 지금 뭐라도 함께 해나가야 되는 것이 아닐까. 

 

내가 갈법한 길에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닮고 싶지 않기에, 심지어 나까지 포함해서 그러하기에 느끼는 미칠듯한 불안정함. 이런 걸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이들에 대한 질투와 벗어난 양 시늉하는 이들에 대한 불신과 증오.  

 

대강 이런 쟁점들. 사실 이런 것들이 나는 진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중요한 원인들이 그렇듯이 이 원인들 역시 안다고 해서 뭔가 속이 시원해지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당장 해결될 수 없음을 알고 더 답답해지기도 하는 그런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EM님의 조언들이 참 고마울 수 있고 동의가 된다만 절반의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나머지 절반을 EM님이 답해줘야 하는 것은 아니며 사실 그 다른 누구라도 그리하지 못할 것이다. 

 

 

5. 하지만 물론 이 글과 관련될 사람 중에 이런 말들을 곧이곧대로 들을 사람이 없는 것이 일단 내가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섣부른 비관에 빠졌다고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상황을 자신들에게 대입시킨다고 하거나. 아니면 내가 주장하는 차이들은 가상적이거나 기껏해야 눈꼽만한 거라고 까이거나. 나는 이런 좌절들을 몇 번 경험했다. 그래서 또 자가소비용 글을 쓰는구나 싶기도 하지만, 내가 먹을 채소를 내가 기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다 싶어 끄적여 놓는다.

 

그리고 관련된 글 을 트랙백한다. 사실 이 블로그 전체가 이 글과 관련된 것일 수 있지만 이 글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명시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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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써보자 + 왜 분노하지 못할까

1. 이렇게 번호로 시작하는 포스트는 확실히 읽는 부담이 덜하다. 우선 길어야 2~3문단 내로 한 논지가 끝난다는 예감이 든다. 이 예감은 "끝까지 안 읽어도 메세지 하나는 읽겠군"이나 "하나 읽고 쉬었다 또 하나 읽는 식으로 읽으면 되겠군" 식의 안도감으로 이어진다. 음식으로 비유를 하면 크라운산도와 냉면으로 예를 들 수 있겠다. 질소포장된 봉지과자들과 달리 크라운산도는 한 봉지를 까도 2개만 먹으면 되지 전체를 먹지 않아도 괜찮다. 냉면은 그냥 먹으면 면을 씹고 끊느라 지치지만 가위로 잘라먹으면 먹었다 숨좀 고르고 다음 젓가락을 들 수 있다. 

 

그동안 뭔가를 써야겠다 싶은 생각을 많이 했다. 펜으로 종이에 글을 쓰는 습관은 메모 수준도 들이지 못했으니 안 되고, 컴퓨터를 잡게 되었다. 워드는 쓸쓸했고, 트위터는 지금도 잘 쓰고 있지만 뭔가 다른 글쓰기를 해야 겠다 싶었다. 호흡을 가진 활자 맛을 알아서 그런 것인지, 그나마 상대적으로 익숙하다 싶은 게 글인데 긴 글 비슷한 것이라도 쓰지 않으면 그야말로 '탈숙련 노동자'가 된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그냥 자기와의 대화 시간을 늘려보겠다 싶은 심산인지. 아마 이렇게 주저리대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모두이겠지. 

 

항상 마음은 먹지만 잘 안 되는 것이 한정식같은 블로그를 꾸리려 마음을 먹지 말자는 것이다. 재료도 없고 들일 품도 없는 주제에 당연하다. 하지만 옆동네 맛집이란 것들이 3분요리같은 것을 상에 올려놓고서 한정식이네 하고 있는 꼴을 보면 죄다 뒤짚어 엎고 싶은 심정이 들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긴 글'을 못 쓰다 보면 단타성으로 투덜거리게 되는데 이 꼴이 사실 징징대는 거랑 그리 별다를 바가 없고, 스스로가 뻔뻔하지 못해 이런 점을 생각해 보면 결국 나도 저치들이랑 같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안 쓰니 저치들보다 훨씬 못한 인간이 아닌가....생각을 하면 열불이 터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긴 글을 앞으로 쓰겠다는 장담은 차마 호기롭게 하지 못하겠다. 그렇다면 난 대체 뭘하고 있는 것인가. 아마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이게 내가 원해서 그런 건 아니니 이해 좀 해달라는 말을 길게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걸 써서 어쩌자는 거지...힘들게 달려온 사람들에게 상은 아니어도 물이라도 줘야 할텐데 "아무것도 없음 ㅈㅅ ㅋ" 이러고 있으니.... 게다가 반성의 전시를 통해 블로그들에 흔하디 흔한 넋두리들과의 '차별화'를 꾀하고 있으니 이건 돈까스 위에 치즈 한장 얹어놓고 치즈돈까스라고 우기고 있는 꼴이다...

 

2. 얼마 전 자전적 텍스트에 대한 논평 하나를 들을 일이 있었다. 가장 최근인 대략 4개월 전 그 텍스트에 대해 들은 평은 "지인이 아니면 볼 필요가 없다" "너무 오글거린다" "항상 끝까지 하는 거라곤 하나도 없는 회피의 삶이었다" "별 특이한 것도 없는데 엄청 길다"는 것들이어서 나 스스로도 그런 면이 있구나하면서 또 역시 한 때의 기억으로 남기려던 텍스트였다. 본래 제한적 시간에 제한된 사람들과 나누고자 했던 글이고 그래서 더이상의 피드백은 없이 이렇게 끝났구나 하고 있던 와중에 최근에 한 피드백을 더 들을 수 있었다.

 

우선 피드백 자체가 왔다는 것이 긍정적이었으며 내용 역시 매우 긍정적인(혹은 낙천적인) 것이었다. 그 평은 나를 위로해주는 것 또는 나로 하여금 스스로를 기만케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었는데 이 나이 때 이렇게 사적인 부분에 대한 정리를 해놓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자전적인 것은 나중에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다"보다 내 비대한 인정욕의 갈증을 달래주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지만 이 말은 지금 해봤자 아무 짝에도 의미가 없다. 사적인 것에 집중한다는 말 자체도 좀더 구체화되어 반성의 거울로 동원되어야 할 테고 추진을 해야 뭐라고 말을 하지....

 

이런 듣기 좋은 말보다 훨씬 크리티컬한 지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텍스트 어디에도 "화를 낸 일"이 없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는 과거를 돌아보는 데 있어 분노와 같은 격렬한 감정이 전혀 섞여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뭔가 쓰고 싶었다.

 

트위터를 들여다 보면 사람들이 온갖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을 본다. 정부의 정책부터, 진보정당의 배신, 폭리를 취하는 사학 재단, 오역이 난무하는 번역서, 서비스가 안 좋은 식당 등등. 이 일들에 있었던 시간에 내가 살았고 또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이 일들과의 거리가 그리 '멀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이런 일들에 별로 화가 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대학 시작부터 순차적으로 쓰자면 학생운동권의 과반공동체에 대한 소홀함, 과반공동체에 헌신하지 않는 이들의 비협조, 고도의 이론서를 접하지 않는 세속인의 활자생활, 운동과 세상을 망친다고 본 얼치기 이론가들과 그의 워너비들, 나태한 교수들 등의 대상이 있었던 것 같다. 헌데 어느 순간 나는 이런 분노의 전부 내지는 거의 모든 것들이 굉장히 '거짓'되었다고 느껴졌다. 욕먹을 각오하고 말하면 난 솔직히 프롤레타리아의 애환은 물론이고, 저기 저 철거민들의 고통조차도 공감이 되지 않는다. 동일시가 되지 않는다. 내 삶의 어떤 장면과도 중첩되지 않는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솔직한 정서의 최대치는 "안타깝다"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에게, 그녀들에게 도약하기에는 내 상상에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너무 없다.

 

나 자신이 이런 '장애'를 안고 있다보니 남들의 분노와 같은 감정을 볼 때도 매우 엄격한 기준이 작용된다. 격렬한 감정을 믿기 힘들다. 그 감정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어떤 특이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기민한 노력과 항상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애씀을 부인하거나 죄악시하고 싶진 않다. 난 이것을 사회관계의 중요한 기초 중 하나로 여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게 '정직'한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직의 절대적 기준을 상정하지 않더라도 상대적으로도 그것도 꽤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 공간에 온 것은 굉장히 '의식적'인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아마도 큰 일이 없는 한 이렇게 의식적으로 이 공간에서 집중할 수 있는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려 할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이 바닥의 글을 보고 한소리를 얹어왔다는 관성이 이런 의식적 관심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크게 절약해 줄 것이다. 어느 순간들에는 완전히 대체해 주기는 하겠지.

 

굉장히 허무주의적일 수 있는 내용을 썼는데 요즘은 그냥 사람 사는 문제가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자신을 어딘가로 억지로 끌고 가거나, 익숙한 모에 요소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 그 곳에 자리잡고 사는 것. 그래서 사람의 삶은 그 어떤 외적 내적 굴곡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일관성을 띠게 된다. 그 일관성들이 여러 자극을 받고 또 자신을 관철시키며 삶의 형태를 만들어 간다. 하지만 그렇게 형성되는 삶이란 것이 그 전개가 예정된 형태의 것은 아니다. 삶은 예측불가능했고 여전히 그렇다. 하지만 어떤 길을 따라가고 있는 것은 맞다. 다른 야심은 많이 죽었지만 이런 부분들을 곱씹으며 살아가고 싶다는 소망 정도는 가지고 싶다.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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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더러움

내 문제가 무엇일까 무엇이었을가 곰곰히 생각해 본다. 그리고 복잡하고 다양하게 제시된 가능성들을 어떻게 게 (남뿐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이해가능한 규모로 축소 또는 간명화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본다. 먼젓번 포스트 몸으로 사는 사람과 머리로 사는 사람이 그런 것이었다. 오늘 이걸 다른 방식으로 요약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말이 더러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말이 더러울 수도 있고 그래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걸 조금만 더 생각하고 지냈더라면 내가 했던 논쟁 아닌 논쟁의 많은 부분들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아주는 아니지만 강박을 덜어 조금은 더 즐겁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이쯤에서 어머니 모습이 한 장면 생각난다. 
내 눈에는 더없이 깨끗하기만 한데 어머니는 끊임없이 쓸고 닦으신다. 내가 더럽고 게을러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머니의 청소는 과도한 측면이 있으시다. 조금만 덜 하셔도 좀더 본인 시간을 가지고 여유롭게 지내실 수 있을텐데.

내가 말을 가지고 했던 게 이런 거랑 비슷한 거였다는 생각이 든다. 유명한 누구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는 그리 큰 개판도 안 벌여본 편이긴 하지만. 그때는 '용인'이 '도피'라고 생각했기에 얼룩 한 점도 허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논쟁적 공격이건 소통을 위한 교통정리건 그러했다. 생각해 보면 말이 다르다하더라도 현실에서는 같거나 같을 수 있는 것이다. 완전히 같진 않고 구체적인 부분이나 쟁점에서 그럴 수 있다. 물론 근본적 차이가 있기에 일시적 만남밖에 지속될 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잊혀지는 중요한 점은 사람은 만나면서 변하기도 하고, 변절의 형식이 아니라 가르침과 배움의 형식으로 그리 변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좌충우돌하면서 세계는 변화한다. 진보는 선로 위에 놓인 과정이 아니다. 

그렇게 나는 말 사이의 거리와 현실 위에서의 거리를 착각했다. 다른 사람의 내 삶으로의 침입을 허락하질 않았다. 현실 속에 살기 보다는 그닥 엘레강스하지 못한 현실을 타박했다. 밤섬 식으로 예를 들자면 여자 연예인은 변을 보지 않으며 실제로 변을 보는 여자 연예인을 만나면 넌 그래서는 안 된다고 다그치는 것처럼.



이런 맥락에서 내가 지금은 아주는 좋아하지 않는 로쟈의 가장 좋아하는 글 한편이 생각난다.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 관한 비평이다. 

 확실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는 홀든에게 중요한 깨달음인데, 현실을 ‘진짜와 가짜’, ‘순수와 부정’이라는 이분법적인 틀로만 재단할 수는 없다는 깨달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부로 떠나기로 결심한 홀든은 마지막 인사를 전하러 피비의 학교에 찾아갔다가, 계단 벽에서 외설스러운 낙서를 본다. 그는 참지 못하고 이를 지우지만, 그런 낙서는 여기저기에 널렸고 심지어는 칼로 새겨져 있기까지 하다. 100만 년을 걸려 지우러 다닌다고 해도, 온 세계의 더러운 낙서들을 다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홀든 역시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는 얼핏 절망으로도 보이지만, 어른으로 가는 길목에서 느끼는 체념이기도 하다."


“설사 선생이 변태라 하더라도 내게 정말 잘해 준 것만은 확실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경찰을 짭새로 부르고, 남성을 마쵸로 부르고, 어른을 꼰대로 부르고, 조언자를 파쇼로 부르는 순간 잊혀지는 건 이런 것이다. 물론 잘해주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이게 나약한 현실긍정에 그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인식을 포함한 지반 위에서 생각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 된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혼자서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함께서는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함께'에 포함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과 어떻게 '함께'해야 되는지 고민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를 알게 되며 그리하여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야 할지를 상상해 볼 수 있게 된다.

꼰대스러운 이야기다.ㅎㅎ 하지만 동시에 피해갈 수 없는 이야기이다. 또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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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사는 사람과 머리로 사는 사람

몸으로 사는 사람은 상황 속에 뛰어들고 과제가 주어지면 반응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머리로 사는 사람은 상황과 거리를 두고 과제가 주어지면 거기에 반응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두고 생각을 하는 식으로 '반응'하곤 한다. 가끔 무언가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도중에 일어나는 잦은 회의로 인해 길게 가지를 못한다.

나는 최근 매우 거칠기 짝이 없는 이 구분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고 느꼈다. 이 때 '적지 않은'이란 상대적인 형용사인데 어떤 현대정치철학의 개념에 자신이 부합하냐, 어떤 이론적 준비가 갖춰졌느냐,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의 철학적 내지는 거시적 의미를 알고 있느냐의 기준들보다 그러하다는 것이다. 몸과 머리의 이분법을 내가 따라왔던 이 모든 가치기준을 상대화시키는 것을 가능케 해준다. 그리고 이 가치기준에서 폄하되어 왔던 삶과 모습들에 대한 재평가, 나아가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역시나) 지적인 기초를 마련해준다. 

여기서도 지적 기초에 집착하는 것은 내가 아직도 머리로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겟지. 나를 포함한 이런 사람들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는 않지만 크지는 않다. 유물론 대 관념론이라는 식상한 구분을 들여놓고 싶지 않고, 자기반성이 또 한번 나중에 반성할 일을 만들게 하고 싶지 않다. 만약 이 구분에서 한 쪽에 속했다고 간주되는 사람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그가 어디 한 쪽에 속해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 사람 자체가 모자라서 그러한 경우가 훨씬 많다. 

나는 그저 내가 적어도 조만간에는 몸으로 사는 사람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이분법이 시사하는 것을 좀더 이해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 리스트를 작성한다. http://blog.aladin.co.kr/toeuzen/4767949


...............고 알라딘 블로그에 쓴 걸 옮겨 놓습니다. 이 주제는 이 포스트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암시적으로 다뤄왔고 앞으로도 꽤나 오랫동안 명시적으로 쓸 것 같은 떡밥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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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또는 공놀이라는 경계선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작성했던 자전적인 텍스트에서 나는 한 주석에서 내 삶이 이 텍스트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요약될 수 있음을 시사했던 적이 있다. 대강 '몸으로 사는 삶이 아니었다'는 얘기였을텐데 보다 구체적으로 이는 유년기 청소년기 시절 축구를 못했다는 사실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남성 집단에서 요구되는 덕목이 몇 가지 있다. 적당한 강도와 빈도의 욕설, 적당히 질펀한 유머, 적당한 횟수의 분노 등드르등등등.... 이 계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운동'이다. 운동이라는 것이 결국 좋은 몸을 갖추기 위함이라는 점을 볼 때 몸이 더 결정적인 것 같지만 여기서 논의하고 싶은 시기는 20대보다도 훨씬 아래 멀게는 유치원 가까이는 중학교 정도 시절의 남성 사회다.

축구, 넓게는 공놀이 능력의 유무로 나뉘는 위계는 성적을 통한 위계만큼 공식화되어 있지 않지만 싸움을 통한 위계만큼 은밀하지는 않다. 그리고 이 공놀이 능력을 통한 위계의 중간자적 성격은 이 위계가 다른 두 위계보다 좀더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는 핵심요인 중의 하나이다. 성적은 학생들 사이에서 매우 직접적이고 공식적인 우월감/열등감을 불러일으키는 데다가 선생님이나 어머니의 직접적인 제재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뭔가 '타율적'인 가치기준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싸움은 보다 자생적(?)인, 혹은 그런 것으로 느껴지는 가치평가체계이기는 하지만 '승자'에 들어가는 사람의 비율이 매우 적은 데다가 위계 체계 전체도 성적처럼 1등부터 꼴등까지 주루룩 나온다기 보다는 20:80 식으로 상층 일부만을 부각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에 보편적인 기준이 되고, 보편적인 기준으로 느껴지기에는 부적절하다.

그에 반면 축구는 우선 '자생적'이다. 축구 시간은 외부의 권력(선생님/부모님)에 '의존'하거나 '침해'받지 않으며, 오히려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데다가 때로는 "수업/자습 그만하고 축구하고 싶어요" 식으로 학생들의 집단적 자유를 요구하는 언표로서 활용되기도 한다. 그것은 '학생들의 것', '우리의 것'으로 간주된다.
  거기에다가 적지 않은 수, 그러니까 '다수'가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다. 초등학교 때는 떼로 몰려다녀 공을 한번씩 건드리며, 중학교 때는 공격수/수비수/골키퍼, 고등학교 때(정확히는 월드컵 이후 고등학교 때)는 좀더 포지션을 세분화하며 형태야 어쨌든 다수가 '참여'하게 된다. 만약 팀이 이기면 자신이 골은 넣지 않았지만 승리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에 기뻐할 수 있고, 패배하게 되면 자신의 실책에 자책감을 느끼고 다투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무엇의 '일부'로서 그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사회 거의 모든 일이 그렇듯 여기에도 '소수'가 존재한다. 이 소수가 옳다 불쌍하다 어쨌다 덧붙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냥 이 소수를 설명해 보고 싶다. 나 자신이 그 일부인 그 소수를. 아니 일단 그냥 돌이켜나 보자.

축구 공놀이의 위와 같은 '보편적' 성격은 이 놀이가 남성 사회에서 주류/비주류를 나누는 데 핵심적인, 보다 '근본적'인 역할을 하게 해준다. 여기에서 배제되었던 이들 중 모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소수는 아닌 일부는 '비주류의 감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익히게 된다. 그리고 그 감성은 자신만의 '공간'을 찾는 것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메탈이든, 책이든, 재패니메이션이든, 천재 드러머 요시키든, 전기기타든, 심지어 학생운동이든....

공놀이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일단 공놀이 능력을 기준으로 한 가치체계일 것이다. 그리고 이 가치체계가 효력을 발휘하는 근거는 바로 '몸'에 연결되기 때문이다. 즉, 공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는 몸을 자신의 몸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공놀이 능력은 단순한 도구활용능력이 아니라 자기통제력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 자기통제력의 성격은 공부나 시험같은 타율적으로 부과된(혹은 그런 것처럼 보이는) 가치체계에 순응하는 (마찬가지로) '신체적'인 실천들과 대비되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나는 내 신체를 남이 아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움직인다. 즉, 나는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나에 대한 지배자이다."

여기에서 공을 잘 가지고 노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는 기술자와 비기술자가 아닌 마치 주권자와 노예의 형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여기서의 노예가 앞서의 주권자가 아닌 다른 것에 굴복한 것으로 표상된다는 점은 유의해야 한다. 하지만 어쨌든 이것은 자유와 굴복이라는 이항대립으로 표상된다.

물론 이런 이항대립 자체는 체육시간이라는 외부의 권력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시적'인 데다가 축구를 잘하는 '주권자'가 '노예'에게 노예로서의 의무를 지키도록 요구하는 '주인'은 아니라는 점에서 '가상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주권자와 노예의 형상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어디에서? 노예의 머리 속에서. 그리고 주권자의 머리 속에서. 둘의 관념이 서로 영향을 직접 미치지는 않지만 자신의 관념에의 포획('나는 상/하층이야')과 타인의 관념에 대한 짐작('쟤는 자신이 상/하층이라는 걸 알겠지')이 결국 결과적으로는 어떤 권력이 작동하게끔 만든다. 이 권력이 폭력적인 형태를 꼭 띠는 건지는 상황에 따라 다른다. 다만, 한 가지 거의 확실한 것은 이 권력이 주체를 형성한다는 것, 다른 말로는 개인들의 자의식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꽤 오래 가는. 그리고 이 자의식은 결국 끼리끼리 모여 놀게 한다는 점에 있어서 '물질적'인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나는 '진보'를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 중 축구를 하지 않으며 월드컵같은 걸 미워하는 데에는 엘리트주의적 정서만이 아닌 이런 학교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P.S) 방법론에 대한 메모 하나: 이 분석은 이 자체로는 완결되지 않았다. 학교문화/학교권력관계에 대한 분석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다른 두 축인 성적과 싸움이라는 화두가 설명되어야 하며 나아가 이 세 축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어떤 복합적 양상을 띠고 나타나는지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수행하지 않아도 '축구를 통해 본 학교권력관계' 정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이는 분석적으로는 맞아도 총체적으로는 틀리기에 '사회분석'을 자임할 수준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이 글은 또 역시 자전적인 되뇌임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이 말을 굳이 덧붙이는 이유는 '분석'과 '자전'의 개념적 수준을 구분해 주화입마에 빠지는 것을 스스로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이 구분이 '자전'을 포기하는 것 또는 자전과 분석이라는 두 범주를 완벽하게 분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님은 물론이다.

P.S2) 소녀시대 애호에 대한 단상: 내가 소녀시대를 좋아하는 것도 이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그녀들의 현재 몸에 대한 시각적 즐거움, 성적 욕망이 핵심적이기는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아이돌의 댄스라는 신체에 대한 통제력, 그리고 몸을 움직여 양적으로는 '적지 않은' 질적으로는 '자신과 가족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돈을 번다는 사실, 거기서 도출되는 다른 결론 신체에 대한 통제력과 연계되는 삶에 대한 통제력. 축구를 잘했던 친구들과 달리 그녀들은 꽤 먼 거리(물리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성적으로도(남성이라는 성적 경쟁의 대상이 아닌 여성이라는 성적 욕망의 대상))에 있기에 질투 없이 마음껏 그녀들을 응원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할 게다.
  내가 가장 감동을 받곤 하는 그녀들의 활동은 인터뷰나 라디오 방송같은 '활자의 형식'으로 이해가능한 컨텐츠라는 것은 시사적 내지 징후적이다. 나는 내가 가장 자신있는 방식 또는 내가 가장 자신없는 방식으로부터 도피하며 도달한 그 방식으로 그녀들은 가졌지만 나는 가지지 못한 그 '신체'라는 화두의 궁금증에 다가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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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의 충격』에서 두 가지 메모: 친밀성 공간의 형성, 지식소비의 변화

1. 마이크로인플루언서와 웹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친밀성(?) 공간의 형성

우선 마이크로 인플루언서의 정의

"나는 '이처럼 자신에게 가장 좋은 정보를 제공해 주는 사람'을 마이크로 인플루언서라고 부른다. 작은 공간에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란 의미다. 일반적으로 인플루언서는 배우나 지식인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작은 커뮤니티 안에서 정보의 발신축이 되는 사람들은 꼭 유명인만은 아니다. 아주 평범한 생활을 하는 블로거나 마니아들도 많다. 작은 정보의 공간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강력하다."(168쪽)

때문에 대중적 소비, 즉 국민적(national) 차원에서의 상품소비와 정보교환 양식이 붕괴되고 있는 미들미디어(『신문, 텔레비전의 소멸』참조. [링크]) 시대에는 일반적인 의미의 인플루언서보다 마이크로 인플루언서가 마케팅의 측면에서도 중요해진다고 사사키는 말한다.

내가 첨언하고 또 나중에 더 알아보고 싶은 것은 이렇게 마이크로 인플루언서를 중심으로 형성된 미들미디어 내지는 크고작은 취미공동체가 어떤 독특한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이 공간의 특징은 사실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취미공동체'로 국한하기도 굉장히 애매하다. 이 공간은 어떤 종류의 영화나 음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모였지만 특정한 정치적 지향이나 식성을 공유하기도 한다. 때로는 특정한 종류의 인간적 성격이나 농담 방법에서의 친밀성을 가지거나 가지게 된다. 일종의 '부족'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는 어떤 특정 목적을 위해 일시적으로 모인 '소모임' '스터디' 개념과는 굉장히 다른 종류의 성격의 것이다.

웹을 통해 꽤 많은 시간을 보낸 나는 지금 와서 돌아보자면 그런 종류의 공동체 몇 곳에 이미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지갱프는 그러한 공동성의 가시적 형태였으며, 두리반은 어쩌면 그러한 공동성의 물질적 형태일 수 있다는 가설을 일단 제기해 놓아 보고 싶다. 이 둘은 어떤 더 큰 경향의 일부로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너무 당연한 말인데 그렇다고 해당 공간들이 가지는 의미가 이 경향의 '일부'로 축소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해당 공간들이 가지는 다른 의미 역시 재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런 공간은 대중적인 문화소비양식(아이돌), 정보교환양식(검색엔진)보다 훨씬 더 인격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렇다고 '가족적'은 아닌데 무언가 굉장히 강한 정서적 동일시을 수반한 친밀성들이 이 공간에는 항상 따라다닌다. 이는 '내가 선택했다'는 자발성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 자발성을 가능하게 한 기술적 사회적 조건의 변화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사사키의 논의는 사회과학 저술은 아니고 저술이 목표로 한 바 역시 큰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었기에 이런 의미를 따질 필요가 없었지만 나는 이런 점들이 궁금해졌더랬다. 그리고 전체 사회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런 크고작은 공간들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가 무엇인지도 궁금해졌다.


2. 형식으로부터 자유를 얻어가는 내용, 지식처리방식의 변화, 지식의 변화

사사키는 아이튠스로 인해 음악이 앰비언트화되었다고 말한다. 앰비언트란 음악시장의 경향을 추리면서 사사키가 만든 말로 음악의 소비양식이 뮤지션과 연도가 쓰여있는 '앨범'에서 우선 음원을 먼저 듣게 되는 '파일'로 변하면서 음악을 즐기는 데 있어서 신곡과 옛날 곡, 그리고 유명 뮤지션과 무명 뮤지션 사이의 구분이 의미가 없게 되고 그저 무엇이든 간에 음악을 통해 어떤 '분위기' 내지 '환경'을 즐기게 된 그러한 변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예전에 음악은 패키지 형태로 유통되었는데, 패키지의 물리적 감촉이야말로 음악의 커다란 특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레코드판과 재킷은 소중하게 취급되었고, 그 둘은 일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패키지가 벗겨지면서 음악과 감상자가 직접적으로 접속하게 되었으며, 음악 너머에서 전체를 포괄하는 사운드가 보이기에 이르렀다."(180쪽)


*이 설명이 추상적으로 느껴지면 다음과 같은 책의 인용을 참고할 수 있다.

   우선 브라이언 이노의 말이다. "내 딸들은 각자 5만 장의 앨범을 가지고 있다[아이튠스를 통해]. 두왑부터 시작해서 모든 팝 음악의 역사가 담겨 있는 앨범들이다. 그런데 그 애들은 어떤 음악이 예전 것이고 어떤 음악이 요즘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 며칠 전 밤에 그 애들이 프로그레시브 록인가를 듣고 있어서, 내가 '어라, 이 노래 처음 나왔을 때 다들 지루하다고 하지 않았었나?'라고 하니까 '어, 이거 옛날 노래야?'라고 대꾸하는 것이 아닌가? 내 딸의 세대에 속한 살마들에게 모든 음악은 현재에 속해 있다."

  그리고 사사키의 말이다.
 
"1960년대의 올드록에서 2000년대의 최신 팝 음악까지 모든 음악이 같은 지평선 위에 존재하게 되면 음악을 고르는 순서도 '들으면 기분 좋아지는 음악'이나 '친구들이 추천한 음악' 따위가 기준이 된다. 이렇게 되면 '예전 음악은 시대적 맥락에 따라 들어야 한다'거나 '새로운 음악은 어쨌든 한 번 들어 본다'는 기존의 음악 감상 방법은 의미를 잃게 된다.
  지금 음악의 세계에서는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 신보나 밀리언셀러, 혹은 음악 차트를 중심으로 하는 매스컴 중심의 음악 소비 스타일이 ㅈ머점 쇠퇴하고 그 자리에 '언제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 듣고 싶을 때 듣는' 태도가 강화되고 있다. 음악의 앰비언트가 진행 중인 것이다." (22~3쪽)

이러한 변화는 전자책을 통해 책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게 사사키의 판단이다.

"책은 음악과 달라서 마이크로화되기 힘들기 때문에 통합된 하나의 세계관을 가진 콘텐츠로서 유지된다. 하지만 리패키지되면서도 책도 그 너머에 존재하는 '더욱 커다란 무엇'인가를 보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책이라는 장치, 그리고 책을 둘러싸고 있는 맥락인가? 왜 우리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지금 여기에 서 있는가? 이 책은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책을 통해 우리는 어떤 세계와, 어떤 사람들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 그것은 책과 책을 읽는 독자가 만드는 공간에 따라 다양하게 바뀌겠지만, 책을 통해서 이러한 세계와 우리는 더욱 강하게 연결될 것이다."(180쪽, 강조는 인용자)

여기에서 "이러한 세계"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나 싶다. 첫번째는 앞서 말한 마이크로 인플루언서라는 느슨한 중심을 통해 형성된 온라인/오프라인의 친밀성 공간이다. 두번째는 음악의 앰비언트와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듯이 내용의 교환이 형식으로부터 보다 많은 자율성을 확보하게 된 그러한 세계이다.

음악에서 뮤지션과 앨범 년도가 중요하지 않듯이 책과 그에 담긴 지식 역시 그러한 양상을 겪고 있지 않나 싶다. 특정 이론이나 사상가에 대한 훈고학적 주석은 일부 오타쿠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는 사양되고 있다. 트위터가 대표적일 텐데 사람들에 지금의 맥락과 상황에서 단번에 이해가 가능하고 진전된 인식을 제공하는 초식들을 선호하고 그런 트윗들이 리트윗된다. 그렇다고 저자의 이름이 내용에 대한 존중이 쇠퇴하는 것은 아닌데 까마득한 고전들의 짧은 구절이 타이밍에 맞춰 올라오는 것들을 보면 그러하다. 전혀 다른 역사적 배경에서 쓰였던 말이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고 요약하는 말로 인용되고 마구 읽힌다. 이를테면 어떤 저자에 대한 압도감과 경외심을 표현할 때 버지니아 울프의 프루스트에 대한 코멘트가 인용되는 식이다. 나아가 이런 인용은 매우 압축적으로 그 사람의(혹은 그 사람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지적인 생애사를 축약해 주기도 한다.

나는 바로 앞 포스트에서 개인적인 관심사 혹은 나름의 자기분석에 기반한 지적 문제의식, 그리고 출판사 보도자료에 대한 리딩을 토대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모종의 공간을 형성했다. 하지만 이 공간은 나의 것만은 아닌데 남이 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뿐만이 아니라 이런 문제의식의 공유가 이런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고, '블로그'를 읽고 그래서 자신의 삶의 연속성을 반성적으로 형성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행해지고 있다. 음악에서의 소비양식의 변화가 향유방식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했듯이, 서적소비양식의 변화가 지적섭취양식의 변화, 조금 오버하면 지식을 통해 자아형성방식의 변화를 촉발하기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변화 자체를 예찬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하지만 한 번 돌아보는 것이 의미가 있지는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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