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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고대철학]수업에 제출한 레폿.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관계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수고를 조금 덜어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Ⅰ
서기전 5세기는 서양고대철학사에서 있어 하나의 중요한 단절로 간주될 만한 시기이다. 물론 그 단절의 내용이 무엇인지, 이 단절이 이전과 이후 시기와 어떤 연속성도 가지지 않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새로운 사유 운동이 등장했다는 것 자체는 부인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거스리를 따르자면 이전 시기의 탈레스부터 다원론자(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원자론자)들에 이르기까지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 자연학과 우주론과 같은 사변적이라 할 수 있는 주제들에 집중을 해왔다면, 이 시기에 등장하는 사상가들, 즉 소피스트들은 ‘정치’와 ‘도덕’과 같은 인간 사회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들에 보다 직접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거스리는 이런 사유의 경향을 가리켜 “휴머니즘으로 향한 반발”이라고 칭한다.[footnote]W.K.C 거스리, 박종현 옮김, 『희랍 철학 입문』, 서광사, 2000, 4장「휴머니즘으로 향한 반발」.[/footnote] 아테네를 활동 무대로 삼았던 소피스트들은 이오니아 학파와 엘레아 학파와 그 계승자들을 제치고 이후 소크라테스가 등장할 때까지 서기전 5세기를 긍정적인 의미에서건 부정적인 의미에서건 자신들의 시대로 기억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유의 경향, 커퍼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운동”[footnote]조지 커퍼드, 김남두 옮김, 『소피스트 운동』, 아카넷, 2003, 10쪽. [/footnote]이 성공을 거두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순수철학사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사유의 독창성이 우선적으로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론적 차이만으로 철학사를 구성하는 작업은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사후적인 것으로 자칫하면 뒤에 등장하는 특정 철학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철학사의 어떤 부분을 축소하고 왜곡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게 그랬고,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플라톤이나 헤겔이 소피스트들에게 그랬듯이 말이다. 그리고 또한 그런 작업은 사유들이 이론적 동인(動因)뿐만이 아니라 실천적 동인 역시 가지며, 그 사유가 특정한 역사적 조건 내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간과할 위험도 가지고 있다. 물론 사유의 성격 일체를 사상가들이 놓인 역사적 조건에서 연역되어 나오는 것으로 간주할 수 없음에도 어떤 사유를 깊게 이해하기 위해 그 역사적 맥락을 따져보는 작업은 중요하다. 특히 이전 철학자들의 사변적 성격에 대한 비판을 주요한 특징으로 가진 소피스트와 그 이후의 철학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이런 문제의식 아래 우리는 우선 소피스트라는 사상운동이 어떤 사회적 ․ 역사적 배경 아래에서 등장했는지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 배경 아래 흔히 알려져 있듯이 소피스트와 그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소크라테스의 관계를 극단적인 단절로만 바라볼 수 있는지의 여부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볼 것이다.
Ⅱ
아테네에 있어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끝난 후 찾아온 이른바 ‘50년기’라 불리는 시기(서기전450~400년)는 가장 번창했던 시기였다. 페르시아인이 파괴한 신전을 전례가 없는 대규모로 복원하겠다는 공공건축계획이 세워졌으며, 투키디데스(Ⅱ.38)에 따르면 일상적인 삶에서의 물적 풍요 역시 다른 그리스 시대나 초기 그리스에 비해 훨씬 컸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경제적 번영은 소피스트들의 수업료와 후원금을 부담할 물질적 토대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어째서 그렇게 많은 소피스트들이 하필이면 아테네로 모여들었는지 설명할 수 없다. 또한 같은 질문을 조금 다르게 던져보자면 어째서 경제적 자원이 다른 곳에 쓰이지 않고 소피스트들에게 지불되었는지 역시도 알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 소피스트들은 아테네인이 아닌 이방인이었다. 키케로가 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에 따를 때, 그들이 주로 학생들에게 가르친 수사학은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고 15년이 흐른 뒤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시라쿠사의 참주들이 몰락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로부터 재산을 되찾기 위해 소송을 제기하면서 탄생한 것이다.[footnote]자클린 드 로미이, 이명훈 옮김, 『왜 그리스인가?』, 후마니타스, 2010, 131쪽.[/footnote] 즉, 아테네가 처음부터 소피스트들의 본거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페리클레스의 주도 아래 대대적으로 시행된 정치제도의 민주주의적 개혁이다. 물론 아테네 민주주의의 전통이 이 시기에 급작스럽게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추방하며 서기전 594년부터 시작된 솔론의 시대에서부터 아테네의 민주주의적 제도들은 조금씩 발전해왔다. 하지만 참주정의 형태가 완전히 폐지된 것은 아니었고 일부 지도적 가문들의 지배력은 잔존해 있었다.[footnote]『소피스트 운동』, 32쪽. 『왜 그리스인가?』, 121쪽.[/footnote] 민주주의가 막연한 원칙이 아닌 국가의 제도로서 구체화될 수 있었던 시기는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고 나서였다. 서기전 462-1년에 시행된 페리클레스의 정체 개혁이 바로 그것이다.
이 때 시행된 다양한 제도적 변화들은 특권층의 지배를 억제하는 동시에 인정하는 양면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억제의 측면에 있어서는 우선 공직이 모든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공직의 개방은 공직 수행에 필요한 수당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가난한 계층에게 원칙적일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공직의 선출은 추첨을 통해 이뤄졌고, 민회가 행정관을 통제할 권한을 가지게 되는 등 보다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반면 인정의 측면에서는 군사직이나 재정직의 고위직은 추첨에서 제외, 인물의 능력에 따라 선출된다. 역설적이지만 페리클레스 자신이야말로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아테네에서 페리클레스의 권력은 거의 무제한적인 것이었다.[footnote]『소피스트 운동』, 32-3쪽.[/footnote]
두 측면 모두 아테네에서 소피스트의 수요를 증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정치적 권리에 있어서 평등의 원칙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연설 기술에 대한 수요가 크게 확장된다. “모든 조건에 힘입어 연설은 필수적인 것이 되었으며, 최고의 권한을 갖게 되었다. 연설은 민회에서도 필요하고, 평의회와 법정에서도 필요하며, 행정관의 관리 업무에도 필요했다.”[footnote]『왜 그리스인가?』, 125쪽.[/footnote] 특히 법정의 경우는 수요의 확장 범위를 잘 보여준다. 사실 평민들은 민회에 참석은 해도 그리 발언의 빈도가 잦지 않았다. 하지만 법정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변호하기 위해서 연설의 능력은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footnote]『왜 그리스인가?』, 128-9쪽.[/footnote] 토론을 통한 문제 해결이라는 정체 개혁에서 촉발된 변화는 사회문화적으로 깊숙이 들어와 개인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따라서 연설을 가르치는 소피스트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을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커퍼드에 따르면 이런 가능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생각으로 보인다. “소피스트들이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대중의 교육에 대한 기여는 아니었다. 그들의 정치와 공적인 일에서 널리 출세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가치를 지닌 값비싼 상품, 즉 문법과 시가와 산술, 그리고 체육에서 학교에서의 기본적 교육 이후에 배우게 되어 있는 2차적 교육을 제공했다.”[footnote]『소피스트 운동』, 33-4쪽.[/footnote] 즉, 소피스트들의 고객은 공직에 진출할 수 있는 모두가 아닌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가진 집안의 출세를 꿈꾸는 청소년과 청년들이었다는 것이다. 교육의 내용은 다양했으나 “출세 지향적”이었으며, 가장 핵심적인 것은 “설득력 있게 말하는 기술의 훈련”이었다.
커퍼드는 여기에 페리클레스 개인의 후원이라는 요인을 좀더 부각시킨다. 페리클레스는 “지성주의적 편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양한 사상가들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아낙사고라스, 프로타고라스와 직접적인 인간관계를 맺었으며 제논으로부터 강의를 듣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소피스트들에 대한 당시 아테네의 여론은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그리스인인 경우 이방인을 환영하는 전통이 있었고[footnote]『왜 그리스인가?』, 143쪽.[/footnote] 플라톤이 자랑스러워 한 “언론의 자유”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에서 학자들의 추방, 사상의 경직화, 분서(焚書)와 같은 박해 행위는 그리 낯선 것만은 아니었다.[footnote]『소피스트 운동』, 39쪽. [/footnote] 이런 상황에서 소피스트들에게 자신들에게 호의적이었던 페리클레스의 정치적 영향력은 큰 힘이 되어주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실제로 그는 아낙사고라스와 아스파시아를 돕기 위해 직접 개입하기도 하였다.[footnote]『소피스트 운동』, 42쪽.[/footnote]
Ⅲ
지금까지 우리는 소피스트들이 등장한 정치적 ․ 사회적 ․ 경제적 ․ 문화적 배경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런 배경들이 ‘철학사’의 핵심적인 부분을 포함되기 위해서는 소피스트들의 사상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였는지에 대한 논의가 추가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거스리가 지적하듯이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보다는 인간과 인간 혹은 인간과 사회와의 관계에, 우주론보다는 정치학이나 윤리학과 같은 보다 실천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예시로서 언급될 수 있지 않을까? 출세라는 현실적인 목적이 있었으니만큼 사변적인 주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하지만 사상의 기원이 실용적인 목적에 의해 규정되었다고 해서 그것의 내용이나 효과가 저평가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클린 드 로미이에 따르면 소피스트들에 의한 “수사학의 도약”은 그리스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으로서의 연설과 토론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법정에서 민회에서의 연설을 통해 그리스인들은 사유를 게을리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치밀하고 정교하게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서양 사유의 기초를 이뤘다고 본다. 그녀는 교육(‘덕을 가르칠 수 있는가? 덕은 유전의 문제인가, 교육의 문제인가, 관습의 문제인가?’)과 정치체제(군주정/과두정/민주정을 기초로 한 다양한 변주들)에 대한 논의를 그 예로 든다.[footnote]『왜 그리스인가?』, 172-181쪽.[/footnote] 그녀의 이러한 주장은 '고액과외교사'였기도 한 소피스트를 낙관적으로 평가한 부분이 없지 않고, 소피스트만을 주요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피스트의 전통이 서양철학사 내지는 사상사에 끼친 고유한 기여를 제대로 평가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테네 민주주의라는 배경에 기초한 이러한 소피스트 사유의 세속적 특성은 어쩌면 소크라테스 역시도 공유하는 것이다. 물론 소크라테스 자신이 돈을 받고 변론술을 가르치지는 않았으며, 이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차별점 혹은 우월성의 대표적 논거로 언급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론적 주장을 제시하고 이 주장을 삶의 규범으로 삼고자 했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보다는 소피스트들에 보다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당시에 전래된 종교를 비판했다는 점에 있어서도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과 공통점을 가진다.[footnote]프리도 릭켄, 김성진 옮김, 『고대 그리스 철학』, 서광사, 2000, 96쪽.[/footnote] 소크라테스의 사유의 가장 큰 동기를 소피스트에 대한 반대로 규정하는 플라톤의 견해와는 달리 양자는 꼭 대립하지만은 않으며 이는 아테네 민주주의라는 동일한 조건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라는 인물과 그의 철학적 태도의 고유성을 나타내는 유명한 사례인 사형 재판이 꼭 특별한 일이라고만 보기도 어렵다. 그의 죄목이었던 “도시의 신들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신을 끌어들였다”는 것은 당시 아테네의 사회적 분위기로 미루어 보았을 때 종교적 박해라기보다는 펠로폰네소스와의 패전 직후에 만연한 정치적 ․ 도덕적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반응이라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사회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소크라테스와 같은 전통 질서에 도전하는 인물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footnote]『왜 그리스인가?』, 140-4쪽.[/footnote] 그리고 이러한 식의 부당한 재판의 예는 소크라테스 이외에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아낙사고라스는 태양을 불이 붙은 돌이라고 했다가 신성을 모독했다며 쫓겨났으며, 앞서 말했듯이 소피스트들은 전통을 부정하는 사상적 내용으로 인해 잠재적인 불안에 노출되어 있었다. 아마도 소크라테스만이 극적으로 기억되는 것은 플라톤의 고전적인 텍스트들에 기인한 바가 크다.[footnote]『왜 그리스인가?』, 308-11쪽.[/footnote]
이렇게 역사적 배경을 전제하고 바라보았을 때, 사상적 내용에 있어서나, 삶의 양식에 있어서나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차이점은 통상적으로 생각되는 것만큼 뚜렷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주장은 교육에 돈을 받았는지의 여부와 죽음에 대한 태도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사상의 뚜렷한 고유성을 부정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고유성이 개별 소피스트들의 고유성과 비교했을 때 과연 확실히 구별되는 위상을 가지는 것이 온당한지의 여부가 더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고유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어쩌면 소피스트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 자신의 사상을 섬세하게 밝히는 데 장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죄 있는 피와 죄 없는 피로, 씻기고 붉게 묽든
포석 사이의 바리케이드 위에서,
열두 살 소년이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 촌놈, 너도 이 녀석들과 한패냐?" 아이는 답했다. "우리는 동지다."
"좋아."하고 사관이 말했다. "총살시켜 줄테니. 네 차례를 기다리고 있어."
아이는 보았다. 총구가 확 불을 뿜고, 동지들이 모두, 담벼락 앞에 쓰러지는 것을.
그때 아이는 사관에게 말했다. "이 시계를 집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갖다드리고 와도 될까요."
"도망갈 참이군." "돌아올게요."
"…이 녀석, 겁먹었군. 네 집이 어딘데." "저기에요, 저기 분수 옆이요. 그래도 돌아올 테니까요. 대위님."
"가 봐. 건방진 놈." 아이는 달려갔다.─빤한 속임수.
그렇게 생각하며 병사들은 사관들과 함께 웃었다.
이 웃음소리가 섞여 드는 사이로, 죽어 가는 사람들의 마지막 숨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웃음소리가 급히 멎었다. 갑자기 그 창백한 아이가 불쑥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비알라[footnote]Joseph Agricole Viala(1780~1793): 대혁명 당시 열세 살 난 아비뇽의 소년으로 국민군에 입대해 왕당파에 맞서 싸우다가 총검에 사살되었다.─역주[/footnote]처럼 씩씩하게
벽에 등을 대고, 아이는 소리쳤다. "나는 여기 있을래요."
어리석은 처형은 수치를 부른다. 그래서 사관은 놓아주었다.
아이여, 나는 알 수 없다. 선도, 악도, 영웅도, 도둑도,
모두를 끌어넣어 흘러가게 하는 회오리 속에서,
무엇이 너를 이 전투에 끌어들였는지. 하지만 나는 말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너의 마음이야말로, 가장 기품 있는 마음이었음을.
…
─빅토르 위고, 시집 《무서운 소년》에서 <바리케이드 위에서>
*가쓰라 아키오, 『파리코뮌』,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7, 11~2쪽에서 재인용.
참 이런 걸 접할 때마다 내 자신에게 부족한 '의기'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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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렇군..http://chulki.egloo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