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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8/03
    2010/07/31~08/03 : 유물론적 일상(?), 소덕스토리, 밤섬해적단 리뷰 준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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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7/08
    2010/07/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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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0/06/14
    앞으로 쓸 혹은 쓰고 싶은 포스트(4)
    닉네임

2010/07/31~08/03 : 유물론적 일상(?), 소덕스토리, 밤섬해적단 리뷰 준비


1.
김원태 씨의 논문 발제를 세미나에서 다뤘다. 항상 그렇듯이 처음 정리할 때 최대한 신경을 쓴다고 썼건만 세미나에서 논의하는 과정에서 부적절하거나 미흡한 부분들이 드러났다. 이런 부분을 반영해서 블로그 포스트도 수정을 해놓았다. 수정된 부분은 해당 포스트에 적혀 있다.[링크]


2.
최근 우울감과 짜증의 빈도가 높아졌다. 첫째 이유는 날씨가 더워서이고, 둘째 이유는 조만간 일신상의 적지 않은 변화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런 외적 요인들에 휘둘리는 사람들을 나름 한심하게 쳐다보고 나 자신은 그러지 않겠노라고 여러 번 다짐했었더랬다.
  나는 내 자신의 지성과 의지의 존재와 그것의 상대적 우월성을 믿었었고, 좋은 선생님의 도움으로 그런 자신의 엘리트주의적 경향에 대해서 반성을 어느 정도 하게 된 지금에도 그것은 남아 있다. 아니, 어쩌면 그런 반성 능력 역시 나의 능력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보다 교활한 형태의 우월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철덕후스러운 소리를 하지면 이런 의미에서 나는 칸트주의자였다.) 하지만 이런 반성에 대한 반성을 수행하는 것도 나이다. '홀로 방구석'에 행하는 사고 실험으로는 이런 자폐적인 상황을 벗어나기 어렵다.
  뭔가 더 큰 깨달음을 얻는 때는 이렇게 스스로의 찌질함을 마주치게 되는 순간, 풀어서 말하면 '아 나도 남들과 같은 상황에 놓이면 비슷한 생각을 하는구나'라고 느끼는 순간이다. 일상에서 유물론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정교한 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냥 나 자신이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유물론적 일상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출발은 된다는 것이 요즘 드는 생각이다.


3.
어제 꿈 하나를 꾸었다. 내가 가수가 됐는지 뭐가 됐는지 모르겠지만 여튼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는 방송국의 대기실인가 쫑파티장인가에서 아이돌 가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소녀시대가 들어와 왔는데, 꿈이 깬 지금 생각해 보면 놀랍게도 곧바로 나를 쳐다보고 살짝 놀랍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꿈 속이었으니 난 그닥 놀라지는 않았고 처음에는 뭔가 부끄러워 벽 뒤에 숨었으나 효연과 누님 동생하며 마치 그녀들을 원래 알고 있었다는듯이 이야기를 나눴다. 효연과 주로 반갑다 시덥잖은 농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태연과 써니가 멀찍이서 나에게 (각오하고 쓰는 포스트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쓰기에는 참 민망한 표현이지만)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두 분이서 다가왔는데 태연(참고로 나는 태연의 팬이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옆에 태연의 팔짱을 끼고 있던 써니가 내가 아닌 태연에게 말을 했는데 그 말이 나의 오늘 분량의, 어쩌면 향후 몇 개월 분량의 행복을 책임졌다. "야, 너 쟤한테 할 말 있대매?"

  내가 기억하는 꿈의 내용은 여기까지이다. 정작 태연은 나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써니의 말을 통해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는 사태, '그녀가 나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다', 꼭 적극적인 관심이 아니더라도 '용건이 있다'는 사태가 그렇게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태연이 친한친구 마지막 방송에서 강동원의 종방 축하 멘트를 듣고 "여러분, 들으셨어요? 태연이라고 5번 말했어요!"라고 말하며 비명을 질렀는데, 처음 볼 때는 그저 참 좋았겠구나 싶었는데 이제 뭔가 그 마음이 이해된다(태연에게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환상에서 나오는 기쁨은 보너스다). 태연이 올해 자기 생일 아마도 SM빌딩에서 있었던 파티에서 "요즘 팬서비스를 왤케 잘 해주시느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답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팬들이 낯설고 그리고 무섭기도 하고 그랬는데, 매일 부모님으로부터 부모님 매장에 찾아온 팬들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하다보니 아 이제는 팬들에게 다가가야 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운운. 별 거 아닌 짧은 답변, 립서비스일 수 있지만 사고하는 데 드는 소량의 열량과 소량의 시간을 팬을 위해서,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나를 위해서 사용해줬다는 이런 멘트는 뭔가 감동스럽다. 이것이야말로 조련... 좋은 무대도 무대지만, 사실 (태연에게는 정말 미안하게도) 음악보다 더 좋아하는 부분은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의 일상의 (실재적이든 상상적이든) 공유, 같은 시대에 비슷한 꿈을 꾸고 비슷한 것을 느끼면 살고 있다는 이러한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실감이다.
  여하튼 이 꿈은 내가 올해 겪었던 일 중 가장 기쁜 일 중에 하나였다. 이렇게 들뜨고 나니 이런 꿈을 꾸었다는 것을 소중히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퍽이나 기쁜 일이 없이 지냈구나라는 사태에 우울해 해야할지 헷갈렸다.


4.
밤섬해적단의 가사에는 국가와 대중을 포함한 기성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의식과 일상인들의 일그러진 욕망을 조롱하는 진보적 엘리트 젊은이로서의 자의식이 혼합되어 있다. 얼핏 보기에 양자의 관계는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매우 가깝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엘리트주의, 잰 체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따라서 밤섬이 표현하고 있는 것, 우리로 하여금 목격하게 하는 것은 좀더 복잡한 형태를 가진다. 그것은 멍청해 보이는 국가와 자신이 행하는 일들의 사회적 결과를 모르고 자기자신의 자존심이나 재산을 지키기 바쁜 이기적인 대중에 대한 엘리트주의적 비판인 동시에, 또한 그런 비판을 수행하는 (유사-)지식인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 것이다. 후자의 경향이 밤섬 자신의 엘리트주의적 성향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를 밤섬의 가사에서 확인하기란 매우 어렵다. 왜냐면 밤섬의 가사는 항상 남을 '조롱하는 자'의 위치에 서있고 따라서 모순은 항상 자신의 내부가 아닌 타자의 편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밤섬은 그러한 가사 스타일에서 카타르시스를 산출하는 밴드이다.
  한 가지 추가적으로 궁금한 것은 밤섬을 듣는 사람들은 과연 어디에 동일화를 하고 있냐는, 어디에 자신의 위치를 잡고 이 음악을 듣고 낄낄(경멸적 의미는 없다)대고 있냐는 것이다. 진보적이고 쿨하기 해보이는 조롱하는 자로서의 밤섬? 그런 밤섬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고 비판하는 자? 아니면 밤섬이 조롱하는 사람? 리스너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는 통로는 항뮤직 회원리뷰나 블로그에서의 반응을 통해 확인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은데 세 번째의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는 청자의 자기방어 성향에서 비롯된 것일런지도 모르겠지만, 아티스트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을지 모른다. 밤섬의 가사에서 조롱의 대상은 그야말로 난도질당한다. 그런 난도질이 또 듣는 맛이기도 하지만 조롱의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향을 자신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나오는 일종의 공감의 실마리를 찾기도 힘들다. 이렇게 짜인 판에서 자존심의 모멸을 감안하면서까지 조롱의 대상과 동일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홍대 펑쓰들과 헤비 리스너들, 소위 진보적 젊은이들이 서로의 부차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밤섬을 즐겁게 듣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으련지 모른다.

  밤섬에 대해 즉흥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정리한 메모. 좀더 자세한 이야기는 가사 하나하나를 보며, 음악을 한 트랙 씩 집중해서 듣고 작성해 볼 예정이다.


5.
얼마 전 아이돌과 네이션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해당 포스트 링크] 한 가지 까먹은 게 있어 추가적으로 기록을 해놓는다. 사실 내가 이 문제를 문제로서 생각하게 된 동기는 승승장구 소녀시대편 마지막의 쿠웨이트에 왔다는 삼촌 팬과 친한친구 마지막 방송에서 등장했던 캐나다 미국 독일 등 다양한 나라의 유학생들의 사연을 듣고 나서이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인민덕후라고도 불리우는 정대세의 텔미 댄스가 있다.


정대세까지를 비롯한 내용들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그 진심의 강도 역시도 마찬가지로 강렬한- 다들 소녀시대(와 태연)의 활동에서 타향 생활을 이겨낼 힘을 얻었으며, 앞으로의 활동도 기대하고 무엇보다 크게 응원한다는 것이었다. 연예인이 이렇게 지리적으로 떨어진 '국민'들을 통합하는 기제로 기능했던 것은 꼭 오늘날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점을 인정하고서라도 과거의 그것과 오늘의 그것 사이에는 환원불가능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정치적으로 무얼 시사하는지는 나중의 과제로 차지하고서라도 이렇듯 소녀시대라는 '국민적' 걸그룹을 통해 형성되는 공감의 범주가 무엇인지, 그것이 사람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알아보고 생각해 보고 싶다.

(그리고 이는 꼭 소녀시대만의 특이성은 아닐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을 좀 들자면 인도 음식점에 가면 항상 인도 뮤직비디오가 나온다. 밥을 먹다가 화면을 그윽하게 쳐다보는 인도인 사장과 인도인 손님의 시선에서 꼭 이 낯선 뮤직비디오가 '인도 분위기'를 내기 위한 인테리어의 용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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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8~09


1.
블로그의 좋은 점은 굳이 형식을 엄격히 갖추지 않아도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나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고, 나쁜 점은 바로 그 좋은 점 덕분에 생각들을 기록해야 된다는 강박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마구마구 밀리다 보면 그래도 뭔가 찔끔 써보게 되는데 주기적으로 쓰는 이런 메모 포스트와 얼마 전에 쓴 [Belive와 Trust]라는 게시물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EM님의 포스트를 보고 뭔가 느낀 바가 있어서 정리해 보려고 했는데 결론은 조금은 약간의 우스꽝스럽게 trust가 장수에 유용하다는 데로 나아갔다. 이건 결론이 글의 형태로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름 글을 마무리짓기 위해 친 '유머'였는데 과연 이걸 유머로 봐준 사람이 있을지...EM님이 여기에 트랙백을 달아주셨는데 그 때 포스트를 보고 느낀 것들에 대한 명확한 표현을 얻은 것 같아 감사하다.


2.
어제 새움에서는 새사연의 김병권 부소장의 강의가 있었다. 강의의 구성은 한국경제든 세계경제든 현대 경제를 설명하는 데 있어 부채, 그러니까 '빚'이 개념으로서 유용한지를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를 통해 논한 뒤, 한국 경제를 (IMF로 인해 친숙한) 국가부채가 아닌 가계부채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었다. 가끔 강의의 명쾌함과 논의의 성숙함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강연을 간혹 볼 수 있는데 어제의 강의가 그러했다. 특히 마지막에 가정을 중심으로 한 십자도를 그리고 기업/국가/자산시장(나머지 한 항이 기억이 안 난다...)과의 관계 아래에서 가정경제를 설명하는 대목은 정말 깔끔했고 지금까지 경제에 대해서 들었던 이런저런 주장들(이를테면 김광수경제연구소의 [위험한 경제학]과 같은)을 머릿속에서 맵핑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견지에서 한국경제의 미래를 설명하는 대목이나, 소득보장과 고용보장을 나눠 요즘 진보적 세력에서는 전자 쪽에 논의가 집중된 것 같다(기본소득을 포함하여)고 평하는 대목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다만 소득보장과 고용보장의 관계를 너무 독립적으로 보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 부분은 시간이 모잘라 따로 질문을 드리지는 못했다.(이런 코멘트를 할 때 나는 김원태 씨의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김원태 씨는 [새로운 노동시간정치를 위하여: 총체적 노동시간단축으로서의 기본소득]에서 파업과 같은 고용보장을 위한 기존의 투쟁전략들이 유효성을 가지기 힘들게 된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포스트포드주의 단계에서 기본소득과 같은 소득보장 전략이 고용보장을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 논문에 대한 간략한 정리와 논문 본문에 대한 문의는 여기를 참조하길 바란다.) 

이 날의 강연은 현재 녹취 및 정리 작업 중에 있다. 아쉬운 것은 역시나 그리 많은 사람들이 강연에 오지는 않았다는 사실. 기존의 공부와 관련해서 느낀 것은 경제학적 설명이 경제주의적 결정론으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 어제 강의에서 나는 경제적 구조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행위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상상해볼 수 있는 소스(source)를 매우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어쩌면 이데올로기론 공부에서보다 많이, 그리고 보다 현실적인(주변 사람들의 삶을 떠올리며 납득을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관점에서.


3.
또 최근에 이론적 편견을 불식시켜 주는 몇몇 텍스트들을 접할 수 있었다. 성실한 이론史 연구들을 볼때마다 느끼지만 많은 경우 내가 가지고 있던 이론적 적대("나는 ...주의적 입장에 반대한다"는 말로 이어지는)는 당파적인 차이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해당 텍스트 자체에 대한 부주의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고, 또 내가 지금 열심히 하고 있는 (그리고 마치 역사 속에서 이런 고민을 한 게 내가 처음인 것 같은) 고민들은 이미 이전에 어느 정도 정교한 형태로 진행되었던 경우가 많다. 공자 님의 가르침 대로 읽는 과정과 고민하는 과정은 항상 같이 다녀야 할 필요가 있다.

해당 텍스트들 중 하나만 언급하면 김원태 씨의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 논문 [현대 자본주의와 노동패러다임의 재구성-안토니오 네그리를 중심으로]이 그러했다. 나는 '다중'의 개념으로 유명한 네그리는 진지한 사회분석을 결여한 비과학적이고 낙관적인 주체성의 이론가로 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인식에는 비판적인 시선이 전제된 것으로 '우리는 모두 예속의 운명에 처해 있다'식의 비관주의와 엮어서 역사와 사회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일의적인 성격을 부여하거나 평가할 뿐이지 사회 자체의 동학을 기능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하지 않나 하고 생각도 해보았다. 물론 이런 인식에는 나름 네그리 자신이 후기에 그러한 텍스트적 근거를 제시한다는 데에서,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의 네그리 수용이 촛불시위 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그렇게 받아들여졌다는 데에서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네그리에게는 다른 생산적인 측면이 존재하는데 이 논문은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네그리의 이론을 노동해방(노동 안에서의 해방 +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론의 구체화를 위해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여기서 제시되는 테제들, 이를테면 자본주의 분석에 있어 노동자의 우선성이나 계급구성론이 기술결정론적 노동소멸론에 대해 가지는 비판적인 함의들, 자본의 삶시간을 노동시간화 전략 같은 부분들은 스스로가 너무 앞질러 나갔었구나하는 반성을 하게끔 하는데 충분하고도 남았다. 철학자로서의 네그리가 아니라 사회분석가로서의 네그리라고 해야 되려나...

여튼 이론적 편견을 불식하는 데 있어서나 사회문제들에 대한 이론적 관점을 좀더 분명하게 하는 데 있어서나 큰 도움이 된 논문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서의 네그리론에 기대어서 촛불논쟁에서의 조정환 씨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에서 서동진 씨의 네그리론에 대해서 비판을 전개하고, 또 이를 통해서 해당 논자들의 주된 논지 자체가 놓치고 있는 이론적 지점들을 짚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또 하나의 포스트가 기약없이 예고되는군...


4.
어제 학생인권조례 관련뉴스에서 고등학교 때 제목만으로 울분을 대신해줬던 책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의 저자 배경내와 학생인권운동을 한다던 친구의 모습을 보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분노와 변함없는 그들에 대한 부끄러움과 응원심이 동시에 떠올랐다. 딱히 좁은 의미에서의 (공장)노동자의 자식도 아니었고, 이론적으로 다양한 것을 경험한 뒤 진보적 학문을 공부하자 의식적으로 택하지도 않은 내가 '진보' 비슷한 것들에 친화성을 가지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교사들의 대화를 거부하는 태도(나아가 학생과 함께 이유와 논거를 따지는 합리적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를 도전과 수치로 여기는 태도)에서 느낀 모욕감과 RATM같이 있어보이는 밴드들을 들었던 데에서 기인한다. 더이상 다른 사람들이 그런 모욕감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관련 기사 하나 "무식한 '조중동' 덕에 우리가 떴습니다" [링크]]


5.
가끔 내가 쓴 글을 다시 보고 당연하게도 '야 이렇게 생각이 나와 잘 맞다니'라고 신기하거나, 나라는 인물이 어떤 일관성을 그래도 가지고는 있구나 하면서 안도하는 때가 있다. 방금 본 지갱프의 소개글이 그런 경우 중 하나이다. [링크] 중간에 인문학 담론의 자족적 경향과 웹문화의 변화를 연결하는 대목은 너무 간략히 다뤄진 것 같아 아쉽지만 이런저런 일들을 겪은 1년 이상의 기간동안 내 생각은 어떤 핵심을 유지하고는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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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쓸 혹은 쓰고 싶은 포스트


1.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지 모르겠는데 나는 뭔가 마무리해야 될 일이 다가오면 딴짓을 2배 정도 더 하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이번 시험기간도 마찬가지여서 다음 학기 시간표를 짜보거나(헌데 난 이번 학기에 졸업이다), 시험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책을 펴본다던가(시험이 끝난 뒤에 읽으면 재미가 없다), 원대한 세미나 계획을 짠다던가(하지만 언제나 세미나의 효과는 기획 당시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이렇게 포스트를 쓴다던가 등등.

그렇게 딴 짓을 하던 와중 수욜과 목욜에 마지막 기말고사 일정이 몰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주 토욜에 [자본] 세미나에서 발제를 해야 된다는 핑계를 스스로에게 둘러대고 김원태 씨의 논문 두 편을 읽었는데, 그야말로 개안(開眼)의 경험, 바로 이거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논문의 메인 요지는 간단하다. 마르크스주의에서의 <노동> 개념은 언제나 현실사회주의 운동의 주요한 근거가 되어 왔지만, 사실상 노동 개념에 대한 이론적인 접근은 체계적으로 시도되어 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이론화가 되지 않더라도 역사 속에 존재한 여러 사회이론들은 노동에 대한 특정한 이론적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김원태(존칭은 생략)는 이를 노동 패러다임탈노동 패러다임으로 교통정리를 한 뒤, 이 두 입장의 문제설정과 해방론이 배리되지 않고 병존할 수 있으며, 또 그러할 경우에만 서로의 전략이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포스트포드주의적(두 시대규정은 중복되지 않으며 이게 또 중요한 대목이다) 단계에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논문에 대한 자세한 요약은 목욜이나 금욜에 발제의 형식으로 다시 올릴 것이다. 어쨌든 이 논문을 보고 '개안'까지 했다는 표현을 쓴 것은 추상을 다루는 이론이 복잡하기 짝이 없는 현실에 어떤 유의미한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준 그런 논문이기 때문이다.


2.
철학 공부야 참 이래저래 재밌는 것이다만, 추상도를 높이다 보면 흔해빠진 질문이지만 "이걸 어디다 써먹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제대로 공부를 하기만 한다면야 이런 고민이야 쓸데없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또 (좀 부끄럽게도) 내가 직접 하기도 했지만 최근 들어서 철학 전공 수업을 재밌게 듣는 자신을 보면서 이래저래 복잡한 심경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철학도로서의 나와 진보적 젊은이로서의 나(참 애매한 규정이다만 내 처지가 이런 애처로운 형태로밖에 규정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최근에는 한윤형 씨나 단편선 씨 같이 어쨌든 자신의 전선이라 할 만한 것들을 꾸려나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런 고민이 더 많이 들었다. 철학이 형성할 수 있는 정치적 전선이란 대체 무엇일까? 일종의 '분업' 관계를 상정해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런 구도는 인문학 덕후들(나이가 많건 적건 간에)의 자존감을 지탱해주는 버팀목 이상 이하도 아닐 가능성이 높다. 최전선에서 땀을 흘리고 뻘플과 무관심에 싸우는 사람들과 그런 이들에게 가끔 가다 술자리에서 교훈이나 내려주는 고고한 정치-형이상학자의 구도(그리고 교훈의 대가로 술값을 면제받기도 한다). 활동하는 너와 사유하는 나. 이 구도는 '너'가 사유하고 있다는 것을, '나'가 활동은 물론이요 사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매우 쉽사리 감춘다.(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여기서 어떤 특정 인물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어떤 위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


3.
이런 와중에서 김원태 씨의 논문은 크게 두 가지 용기를 주었다. 첫번째는 이론적 노력이라는 것이 일부 미식가가 아니라 모두가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그런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용기이며, 두번째는 이걸 기점으로 단편선, 밤섬해적단 등의 친구들과 뭔가 재밌고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시작해 볼 수 있겠다는 용기이다. (물론 적어도 첫번째 용기의 경우, 김원태 씨의 논문이 첫경험은 아니었다.)

두번째에 관해서는 김원태 씨 논문의 발제가 정리되면 두리반에서 캐치프레이즈 중 하나로 내걸었던 "인디음악가도 노동자다"라는 규정에 대해서 포스트를 한 번 써 볼 생각이다. 인디음악가가 노동자라고 말할 때의 정치적 함의뿐만 아니라, 노동자라면 어떤 의미에서의 노동자인지, 꼭 노동자이어야만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 등등. 뭐 이런 분석이 권태에 빠진 한국 진보정치를 해머로 두쪽낼 그런 것이 될 것이라는 바람은 추호도 없다. 그리고 행사의 의의에 질투어린 흠집을 남기고자 함도 아니다. 다만 이런 식으로 한 번 일어났던 '사건'(바디우가 운운하는 의미에서보다는 그냥 우리 삶의 한 굴곡을 형성했다는 의미에서)에서 뭔가 스스로가 '진보'를 자처한다면 그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어떤 의미어야 할지에 대해서 짚어보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해 나갈 때 그것이 어떤 형태가 될지는 모르겠다만 앞으로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서로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어야 할 '우리'의 정체가 좀더 분명해 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게 또 생겨야 앞으로 지치지 않고 공부도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고... 어쨌든 기말고사가 끝나길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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