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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22
    데카르트적 주체와 근대성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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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적 주체와 근대성의 경계


질질 끌던 레폿 하나가 마무리되어 업뎃한다. 1차적으로는 학점의 강제에 의해 씌여진 글이지만, 정직하게 해당 주제와 관련하여 해오던 고민을 녹여내 보려고 했다. 가세트의 분량이 많은 것은 이 레폿의 원래 커리가 그 책이기 때문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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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Ⅰ. 데카르트와 근대성에 대한 두 가지 질문

 

  지젝은 『까다로운 주체』의 서문에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선언』을 패러디하여 오늘날 현대철학계에서 데카르트적 주체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혹은 처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데카르트적 주체라는 유령이. 모든 학술 권력들은 이 유령의 성스러운 사냥을 위하여 동맹하였다. (새로운 전체론적 접근법을 지향하면서 ‘데카르트 패러다임’의 권좌를 노리는) 뉴에이지 반계몽주의자와 (데카르트적 주체를 담론적 허구이자, 탈중심화된 텍스트적 기제들의 효과라고 보는) 후근대적 해체주의자. (데카르트의 독백적 주체성으로부터 담론적 간주체성으로의 이동을 역설하는) 하버마스적 의사소통 이론가와 (작금의 약탈적 허무주의에서 절정에 이르는 근대적 주체성의 지평을 ‘횡단’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존재의 사유에 대한 하이데거적 지지자. (자아의 고유한 무대라는 것은 결코 없으며 단지 경쟁하는 힘들의 복마전이 있을 뿐임을 경험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인지과학자와 (무자비한 자연 착취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유물론을 비난하는) 심층 생태론자. (부르주아적인 사고하는 주체의 환영적 자유는 계급 분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비판적 (후-)마르크스주의자와 (이른바 무성적 코기토라는 것이 사실 남성의 가부장적 형성물임을 강조하는) 여성주의자. 자신의 적들로부터 데카르트적 유산과의 인연을 아직 철저하게 끊지 못했다고 비방을 받지 않았을 학술적 정향이 어디 있는가? ‘반동적’ 적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보다 ‘급진적’ 비판가들에 대해서도 데카르트적 주체성이라는 낙인을 찍으며 비난을 되돌리지 않았을 학술적 정향이 어디 있는가?”(지젝, 9~10)

 

  비판자들의 기나긴 목록에서 볼 수 있듯이 서양현대철학에서 데카르트적 주체에 대한 평가는 이론적인 면에서나 실천적인 면에서나 매우 좋지 못한 편이다. 이 목록을 계속 보고 있노라면 심지어 서양현대철학이라는 모호한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한 필수사항으로 데카르트적 주체에 대한 비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도대체 데카르트적 주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렇게 많은 입장의 논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 것일까? 이것이 이 글이 대답해 보고자 하는 첫 번째 질문이다.

  열거된 사람들 각자가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겠지만 일반화의 위험을 감수하고 이들의 주장을 묶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데카르트적 주체인 “사유하는 나”(Cogito)는 이성의 능력에 대한 과도한 확신에서 비롯된 타자든 세계든 자신 이외의 것은 허용하지 못하는 독단적 주체이며, 이러한 철학적 전제로부터 오늘날 우리 사회에 파괴적인 결과(대화의 실종, 존재에 대한 맹목, 자아라는 인지적 착각, 생태 파괴, 계급차별과 성차별)를 불러일으킨 근대성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 또는 가장 대표적인 표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2절에서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é Ortega y Gasset)의 데카르트 독해를 통해 코기토의 맹목―가세트가 “근원적 고독”{오르테가 이 가세트, 『철학이란 무엇인가』, 167. 이하 인용은 QF로 표기하고 페이지 수만 병기한다. 모든 인용문에 대한 강조는 인용자의 몫이다.}이라 부르고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 데카르트가 아닌 데카르트주의를 가리켜 “자기대화(monologue)”{가라타니 고진, 『탐구1』, 13~18.}이라고 부른―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헌데 또 요즈음에 들어서는 데카르트적 주체를 복권하려는 시도들이 하나둘 등장하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복권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데카르트적 주체에 가해진 비판은 과도하게 또는 잘못 행해져 데카르트 내에 잠재되어 있는 근대성의 문제들을 넘어설 이론적 가능성을 고사시켰다. 우리는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근대성의 기원이라 불리는 데카르트를 ‘다시 읽음’으로써 탈근대성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젝 역시 앞서 인용한 문장에 이어서 “지금이야말로 (…) 데카르트적 주체성의 유령이라는 소문에다 데카르트적 주체성 자체의 철학적 선언을 대치시킬 절호의 시기”라고 주장하며, 이 노선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만약 데카르트에게 탈근대의 가능성이 내재해 있었다면, 근대성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돌렸던 우리는 그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걸까? 이것이 이 글이 대답해 보고자 하는 두 번째 질문이다. 우리는 3절에서 “모든 극복은 곧 보전”(QF, 220)이라고 말하며 데카르트의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가세트와 데카르트의 회의와 신 존재 증명에서 “결코 내면화할 수 없는 타자성”{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157쪽, 이하 인용은 T로 표기하고 페이지 수만 병기한다. }을 보는 가라타니 고진, 그리고 타자성을 『방법서설』과 『철학의 원리』의 “Cogito ergo sum"이 아닌 『성찰』의 “Ego sum, ego existo”에서 찾는 장 뤽 마리옹(Jean-Luc Marion)의 논의를 참조해 데카르트를 다시 읽어볼 것이다.{앞서의 인용을 통해 암시된 슬라보예 지젝의 데카르트적 주체성 해석은 여기에서 논의되지 않는다. 지젝은 데카르트를 읽기 위해 독일 관념론 전통과 하이데거, 프랑스 정신분석학의 논의를 활용하기에 논의를 개괄하고 검토하는 데 매우 큰 부담이 따른다. 또한 여기서 지젝의 관심은 데카르트의 텍스트에 대한 직접적인 독해보다는 학계에서 ‘데카르트적 주체’라고 이야기되고 있는 범주를 데카르트 이외의 이론적 자원을 동원해 재조명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기에 다른 논자들의 작업과 성격이 매우 달라 함께 논의되기 어려운 측면을 가진다.}

  이 세 사람의 논의가 데카르트의 탈근대성이라는 매우 중요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 필수적이거나 충분한 논의임을 주장할 자신은 없으며 이 글 자체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저 이들의 논의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데카르트를 해당 주제와 관련해 읽을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참조점 몇 가지가 분명해 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Ⅱ. 데카르트와 근대성

 

  가세트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의 7장에서는 철학적 내용을 내재적으로 살펴봄으로써, 8장에서는 고대와 중세 철학과의 차이를 짚어나감으로써 근대 철학, 나아가 근대성의 시작으로서 데카르트 철학의 위상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우선 데카르트가 그랬듯이 감각된 사물들의 실재성을 회의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데카르트는 “깨어 있다는 것과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구별해 줄 어떤 징표도 없다”(성찰, 36)고 말하며 현재 지각하고 있는 것이 현실의 사물인지 꿈의 사물인지 질문을 제기했다면, 가세트는 일반적 지각과 환각의 차이가 단지 약간의 지속성과 상대적인 공통성 밖에 없다며 “삶은 정확하면서도 단조로운 꿈, 혹은 일상적이면서도 끈질긴 환각”(QF, 149)에 불과할지 모른다고 말한다. 이어서 데카르트의 「제2성찰」의 초반부(성찰, 42)를 떠올리게 하는 “해저의 역류”의 비유(QF, 150)를 들면서 감각에 대한 회의의 결과를 “사물, 자연, 인간, 총체적 외부세계는 명백한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요약한다. 데카르트의 경우, 꿈의 가설에 의해 반박되지 않는 기하학적 공리와 같은 “단순하고 보편적인 것”들에 관한 이야기와 이것조차 회의하게 만드는 “유능하고 교활한 악령”의 가설(성찰, 37~41)이 나오지만 이 부분의 생략이 대중강연에서 데카르트의 핵심논지를 전달하는 데 치명적인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우주 속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직 “의심과 내가 의심한다는 사실”뿐이다. 왜냐하면 의심한다는 사태를 의심한다면 “의심은 스스로 자신과 충돌할 것이며 결국 붕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기 위해서는 나는 내가 의심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의심은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QF, 152) 하지만 의심의 근원적 실재성은 의심이라는 특정한 정신 활동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다. 가세트는 이러한 의심이 “사유, 사고의 일종”(QF, 157)이며 사실 사유야말로 “근원적 사실”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이는 사유를 의심하거나 부정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부정한다는 것” 역시도 “사유하는 것이기에 사유는 우주 내에서 그 존재가 결코 부정될 수 없는 유일한 것”(QF, 154)이 된다. 여기서 비롯되는 것은 오직 사유만이 실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사유하는 사물은 우주 내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물에 관한 나의 사유는 의심의 여지없이 존재한다.”(QF, 154~5) 하지만 이것이 세계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세계의 존재” 못지않게 “세계의 비존재” 역시 의심이 가능한 명확하지 않은 사태이기 때문이다.(QF, 151) 우리에게 명확한 것은 다만 사유 한 가지뿐이다. 하지만 사유의 실재성은 물리적 사물에 근거한 것이 아닌 오직 스스로부터 나온 것이다. 가세트는 사유의 이러한 자기준거적 성격을 “자기 자신에 존재를 부여한, 스스로 사실이 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고유한 특권”(QF, 161)이라고 표현한다. 관념론이란 “명백하게 사유와 관념이 아닌 그 모든 것은 사유된 혹은 관념된 데에 기반을 둔 것으로 해석하면서 모든 존재에 관한 설명의 한 체계를 구성하려는 시도”(QF, 162)에 다름 아니다.

  가세트는 이런 관념론이 데카르트가 개시한 것으로 이후의 근대 철학 역시 근본적으로 관념론의 계보에 속한다고 본다.(QF, 162) 이런 관념론은 한 철학 사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근대’라는 한 시대를 특정지우는 것이기도 하다. 가세트의 이러한 언급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의 사유 개념과 고대와 중세의 다른 유사한 개념들과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고대 철학에서 영혼(Psychē)이란 결코 육체로부터 독립된 개념이 아니었다. 영혼은 “하나의 호흡, 가벼운 미풍”과 같은 것으로서 “어떠한 내적 자아도 가지고 있지 않”은 “육체 내에 침잠”된 것이었다.(QF, 178) 물질로부터 독립성을 가진 정신(Nous)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그것 역시 고대인들의 유일한 우주였던 육체에 관한 우주(QF, 178)에 속한 하나의 힘으로서 간주될 뿐이었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심리학을 생물학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였다고 한다.(QF, 179) 중세에서는 고대와 달리 육체와 물질의 질서에 속하는 우주 바깥의 초월적 존재가 상정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신이었다.(QF, 186) 이런 기독교적 신 개념이 가진 문제는 어떻게 하면 세계 밖의 신이 세계 안의 인간과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는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의 영혼을 “우주적이며 현세적인” 것, “육체에 대한 실재”가 모두 부정된 존재로 상정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영혼은 고독하게 신과 대면하며 오직 영혼과 신만이 기독교에서의 실재로 간주된다. 이렇게 볼 때 중세의 영혼 개념은 근대를 예비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나 데카르트로 이어지는 쪽으로 발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적 영혼을 도입하면서 부정된다.

  근대의 관념론은 고대나 중세와 달리 외부세계의 실재를 인정하고 거기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찾는 것이 아닌 오히려 “외부세계를 단순한 나의 사유로 전환”시키는 방식으로, “생적 신념에 대한 의식적 부정”(QF, 162)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런 관념론적 우주 내에서는 “다른 모든 사물들의 존재 방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 방법을 지닌 어떤 한 사물”이 발견되는데 “스스로 존재하는 데, 스스로 자신을 인식하는 데 그 존재적 기반”(QF, 164)을 두는 사유가 바로 그것이다. 육체를 비롯한 다른 사물들은 사유의 인식에 의해서만 실재성을 인정받으며, 이는 사유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사유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개념이며 따라서 철저히 자기준거적인 성격을 가진다. 가세트가 보기에 이런 정신 개념은 근대에 들어와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데카르트에 이르러 물질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는 그 자체의 본질적 속성으로 인해 분리되었다.”(QF, 165) 이러한 성격을 지닌 사유에게 붙여진 이름이 바로 의식이다. “이 용어에는 자신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 자신을 스스로 소유하는 것, 스스로 자신을 반영하는 것, 자신의 내부를 지향하는 것, 내적 존재 등과 같은 사유의 구성적 요소”가 명시되어 있다. 가세트는 이것이 바로 “근대성을 규정하는 가장 특징적인 개념”(QF, 163)이라고 본다.

 

  이쯤에서 왜 데카르트적 주체성이 근대성의 원리 내지는 표상으로 이야기되는지 분명해질 것이다. 데카르트의 관념론은 육체와 우주에 종속된, 혹은 육체나 우주의 다른 사물들과 더불어 우주의 일부로만 거론되던 주관적 정신의 지위를 완전히 역전시켰다. 이제는 세계가 사유에게 자리를 배정하는 것이 아닌 사유가 세계를 구성한다.

 

 

 Ⅲ. 데카르트와 탈근대성

 

  관념론의 주체가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왜냐하면 데카르트적 주체가 “초도덕적인 의미”에서의 이기주의, 즉 ‘절대적 이기주의’의 주체이기 때문이다.{진태원, 「불가능한 타자 : 장-뤽 마리옹의 타자성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45쪽. 이하 IA로 표기하고 페이지 수만 병기.} 절대적 이기주의는 언뜻 보면 직접 어떤 비도덕적인 행위를 저지르지는 않는 순수이론적인 영역에 국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모든 형태의 이기주의의 가능성의 조건”을 이룬다는 점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고진은 이러한 이론적 전제에서 “타자의 타자성이 사상”되며 “타자와의 대화는 자기대화가 되며 자기대화(內省)는 타자와의 동일시”되는 윤리적 문제가 제기됨을 지적한다. 여기서 ‘타자’는 대화의 상대방같은 인격적인 의미를 넘어 좀더 광범위한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문명의 타자인 생태계, 부르주아의 타자인 프롤레타리아, 남성의 타자인 여성 등등. 코기토의 ‘타자에 대한 맹목’이 이러한 온갖 실천적인 문제의 근본 문제들에 전적인 책임을 지니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들의 기초 논리를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코기토 자신에게도 불행한 것인데 가세트에 따르면 코기토는 세계와의 연결을 상실한 채 “정신은 오직 자아와만 교섭하며 자아로부터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근원적 고독”의 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결국 의식이란 고유한 사적 영역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감금하는 하나의 유폐인 것이다.”(QF, 167){195페이지의 유럽의 중국 황제라는 비유도 재미있으며 이해도 좀더 용이하다. “‘나’는 영광으로 가득 찬 가도를 달려왔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에 대해서는 그 어떤 불만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은 모두 향유했기에 ‘나’에게는 더 이상 누릴 영광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유 있는 불만을 표출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내부로 세계를 삼켜버리고 나서 근대적 ‘나’는 홀로 구성적으로 홀로 남겨졌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예로 중국의 황제를 들 수 있다. 그는 지고한 위치에 있기에 친구를 가질 수 없다. 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곧 황제가 그 친구와 동급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 황제에 대한 명칭 중의 하나가 바로 ‘고독한 인간’이다. 관념론의 ‘나’는 유럽의 중국 황제이다.”}

 

  1. 대상과 공존의 운명에 놓인 주체 (오르테가 이 가세트)

 

  가세트는 이어지는 9장에서 데카르트의 관념론적 주체론의 성과를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내재적인 비판을 수행함으로서 코기토가 “근원적 고독”에 빠져나올 길을 모색하며, 10장에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근대성 이후의 철학의 형태에 대해서 이야기를 펼친다.

  데카르트의 이야기를 자신의 언어로 전달하고 있는 와중에도 가세트는 번번이 관념론에 철학적인 불만을 가지고 있음을 언뜻 내비친다. 그는 이 주관성의 철학이 북부 유럽인들과 달리 자신의 조국인 스페인과 같은 지중해 국가의 사람들에게 쉽게 납득되지 않으며 나아가 이 사람들의 “삶에 대한 관심을 상실”케 함을 논한다. 그러면서 관념론이 폐기되고 근대성이 부정되는 새로운 시대가 싹트고 있으며 근대 기간 동안에 소외된 스페인과 같은 나라의 사람들이 “위대한 부활의 가능성”을 가지게 될 것임을 주장한다.(QF, 158~9) 다른 날의 강의에서는 근대성과 관념론의 극복을 시대적 과제 내지 사명으로 논하고 있다.(QF, 198~9) 하지만 그는 동시에 근대를 “쉽게 극복하리라는 환상”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하며, “근대 이상이 되기 위해서는, 근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근대적”이어야 함을 논한다.(QF, 159~60) 가세트의 이 언급은 그저 멋진 은유나 각오를 보여주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데카르트 철학을 극복하는 그의 논리의 특징을 잘 암시해 주고 있기도 하다. 그는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 결코 근대성의 발견을 부인하고 고대로 회귀하는 식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관념론은 우리에게 있어 지적 상승의 디딤판이었다. 지금 우리는 관념론의 아래가 아니라 그 위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QF, 193)

  근대를 부정하지 않고 근대를 넘어선다는 가세트의 데카르트 비판의 논지를 축약하자면 흥미롭게도 ‘데카르트는 충분히 데카르트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보기에 데카르트는 관념론이 가진 역사성, 고대나 중세와 구별되는 이론적 진전에 충실히 추진하지 못했다. 따라서 가세트는 관념론의 내재적인 모순을 지적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우선 그가 보기에 관념론의 가장 큰 철학적 성취는 ‘존재’라는 말을 다르게 이해할 가능성을 마련했다는 것이었다. 항상 존재를 본질적이며 정태적인 것으로, 우주의 다른 존재들이 의존할 견고한 무엇으로 이해했던 고대인―가세트는 대표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 개념을 언급한다.(QF, 209)―과 달리, 관념론의 사유라는 존재는 “결코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활동적으로 존재를 자신에게 스스로 부여하는 존재이다.”(QF, 202) 가세트가 보기에 “하나의 사유가 존재하기 위해서, 즉 존재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받침대가 될 기체(hypokeimenon)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유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사유는 “단지 자기 자신을 지시하는, 자신을 스스로 창조하는 것에 성립하는” “불안한” 존재이다.(QF, 202) 따라서 관념론의 핵심 원리는 “사유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이렇게 “우리에게는 충분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에 (…)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사유의 불안한 존재성을 견디지 못하고 고대로부터 지속되어 왔던 정적인 존재로 회귀해 버린다. 그는 사유 자체가 홀로 설 수 있다는 사실을 용인하지 못하고 “사유의 존재 뒤에서 존재-사물, 정적인 개체를 추구한다.”(QF, 204) 따라서 “그에게 있어 사유는 이제 더 이상 실재가 아니다. 데카르트가 사유를 일차적 실재로 발견하는 순간 사유는 잠재적이며 정적인 다른 실재의 단순한 표명 혹은 특질로 전환된다.”(QF, 205) 그리고 이런 고대로의 뒷걸음질을 보여주는 정식이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이다.(QF, 203) 가세트는 앞부분의 “나는 생각한다”는 자신이 정식화한 관념론의 원리인 “사유는 존재한다”와 같다고 말한다. 문제는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로 넘어가는 데 있다. ‘그러므로’를 거쳐 존재하게 된 ‘나’는 더 이상 관념론이 보여준 역동적인 존재방식을 지닌 사유가 아닌 그저 낡은 실체론의 ‘사물’일 뿐이다. 이렇게 “데카르트는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세계를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말했던 방식 그대로, 그가 취했던 행동 그대로 이 세계를 취소해 버리고 또한 무효화시켜 버린다.”(QF, 205. 209~212는 이 논지를 다시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세트는 주체에 이어 ‘대상’을 논함으로써 “자신이 내세운 명제를 충실히 완성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 방법을 발명하지 못하는 관념론의 무능함”을 입증하려고 한다. 앞서 주체에 관한 논의에서는 관념론의 아이디어(“사유는 존재한다”)와 데카르트의 최종적 입장(“사유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이 구분되어 전자가 옹호되며 후자가 비판되었던 반면, 대상에 관한 논의에서는 이러한 구분선이 명확하지 않은 채 관념론의 세계관이 총체적으로 비판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관념론의 원칙에 따를 때 “사물은 우선 ‘의식의 내용’에 다름 아니다.”(QF, 212) 하지만 가세트가 보기에 이 ‘의식의 내용’이란 ‘둥근 사각형’과 같이 심각한 모순을 지니고 있는 표현이다. 관념론에 따르면 ‘극장이 존재한다’고 할 때 이 극장은 만약 나로부터 독립적인 ‘외부’가 아니라 나의 인식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만약 극장이 20미터 높이의 연장을 가진다면 그것을 포괄하는 나의 사유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 극장 크기만큼의 연장을 가지는 것이다. 만약 이렇다면 사유는 더 이상 관념론이 가정하듯이 독립적이고 자기준거적인 존재가 아닌 연장성을 가진 존재가 되어버린다. 이를 반박하기 위해 사유 내부에 있는 것은 극장이 아닌 극장의 상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극장 자체가 우리 내부에 존재하지 않음을, 극장은 나의 외부에 존재함을 시인하는 셈이 된다.(QF, 214)

  그렇다면 극장이라는 대상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유의 내부에도 외부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세트는 사유와 극장, 주체와 대상이 “더불어” 존재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부터 관념론을 극복하려는 가세트 자신의 입장이 보다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가세트는 주체와 대상의 존재는 고대와 근대의 경우처럼 한 쪽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상호의존적, “공존”적인 관계에서 존재한다고 본다. 우선 관념론에서 강조된 대상의 주체에 대한 의존성이 부각된다. “세계는 나로부터 독립해 스스로 존립하는 실재가 아니다. 이것은 나에 대해 내 앞에 존재하는, 나와 직면해 존재하는 것으로 그 외 아무것도 아니다.”(QF, 216) 그리고 대상 혹은 세계에 대한 주체의 의존성이 부각된다. “극장은 나의 내부에 존재하지도 않고 나와 혼융되어 있지도 않다. (…) 극장 혹은 그와 같은 사물들이 없다면 나의 시각 행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주체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QF, 216) 가세트는 이를 “주체성과 세계가 함께 존재하는, 즉 두 존재의 공존”(QF, 218)이라고 정리한다.

  하지만 외부의 실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고대의 실체론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가세트는 실체론과 관념론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논의를 그저 그럴싸하게 묶어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세트는 10강에서 자신이 9강에서 주로 사용한 “공존”이라는 표현이 살 수 있는 오해에 대해 해명하며 이런 문제에 대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세계와 ‘더불어’ 존재한다는 이 근원적 사실을 공존(coexistance)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큰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 단어는 “단지 한 사물이 다른 사물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각 사물은 각자의 존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QF, 231) 헌데 가세트의 주체와 세계의 더불어 있는 상태에서 주체란 절대 고대의 정태적인 정신 개념이 아닌 명백히 자기준거적인 내성을 가진 주체이다. 그리고 세계란 바로 이 주체와의 관계 하에서만 실재성을 부여받는 것으로서 “활동적 존재”(QF, 231)의 성격을 가진다. 내성 역시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그랬듯이 홀로 고독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세계와의 관계 하에서만 존재하는 “활동적 존재”이다. 이리하여 고대의 존재 개념인 “사물”과 근대인의 존재 개념인 “내성”과 “주관성”에 이어 새로운 존재 개념이 “”이 정식화된다. 가세트는 이를 “주체 및 사물과 함께하는 내성”을 의미한다고 말한다.(QF, 227) 상기의 특징들을 살펴볼 때 가세트가 고대나 근대 관념론의 존재 개념을 반복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싶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존재 개념의 갱신이 앞서 간략히 제시한 근대성의 맹목을 뚫고 탈근대성의 지평을 열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먼저 가세트가 자신의 ‘삶의 철학’에서 등장하는 세계가 정말 ‘활동적 존재’인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주체의 앞에 서있는 것은 주체에게 문제를 제기하지도 주체의 욕망이나 주장을 좌절시키지 못하며, 주체에 반(反)해 자신의 바람이나 권리, 존재를 주장하는 또다른 ‘주체’가 아닌 매우 얌전한 사물인 ‘극장’이다. 자신의 바람과 권리를 스스로 주장하지 못하는 사물을 사례로 드는 것은 의심스럽다. 따라서 가세트에게 있어 ‘타자에의 개방’이란 주체의 고된 자기반성을 통해 성취되어야 할 윤리가 아닌 자명한 사실에 불과하다. 가세트는 “폐쇄된 존재와 달리 정신은 경이로울 정도로 열린 존재”로서 “이 ‘극장을 본다’는 것은 내가 아닌 것을 향해 ‘나를 연다’는 것이다.”(QF, 219)라고 말하며 ‘타자에의 개방’이 특별한 노력이 아닌 단순한 인식만으로 손쉽게 확보될 수 있다고 본다. 과연 여기서 가세트는 자신이 비판하는 관념론자들과 얼마나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관념론자들도 거들떠보지 않을 매우 극단적인 형태의 관념론을 상대하고서는 관념론을 극복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는 ‘나와 세계’와 ‘우리와 세계’라는 구도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데 이는 좀더 강한 의미에서의 타자가 고려될 수밖에 없는 ‘나와 우리’, ‘나와 너’라는 구도를 떠오를 수 없게 한다는 점에서 징후적이다. 그는 나, 너, 우리를 모두 주체 혹은 주관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뭉뚱그린다. 주체와 세계가 더불어 공존하는 세계에서 자기준거적인 존재는 여전히 정체가 모호한 주체 혼자이다. 타자는 등장하지도 않으며 세계와 사물은 자기준거적/자기입법적 주체로부터 활동적일 수 있을 권리를 하사받았을 뿐이다. 가세트는 내성의 세계관을 비판하면서 스스로 역시 또다른 내성의 세계(자신 앞에 놓인 사물들에게 좀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할 뿐인)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닐까?

  이는 윤리학이나 실천철학의 층위에서만 제기될 수 있는 질문들만은 아니다. 한걸음 물러서자면 철저히 형식적인 관점에서 사람이 아닌 사물의 예 역시 어쨌든 ‘타자’의 일종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등장하는 사물은 언제나 주체의 관심에 의해 매개된 것으로 거기에서 벗어나는 ‘사물 자체의 모습’ 혹은 ‘사물의 다른 모습’은 단 한 번도 문제가 되지 않다. 나에게 맛있는 음식은 보편적으로 맛있는 것이고, 나에게 즐거운 음악은 보편적으로 즐거운 음악일까? 그에게 포착되는 사물은 주체와의 관계 아래에서 (주체에 의해 규정된다는 의미에서) “활동적”이기에 역설적이게도 (주체를 배신하는) 다른 성격을 가질 수 없는 ‘고정적’인 성격을 띤다. 그는 ‘사물 자체의 모습’이 고대의 실체론으로의 복귀라고 생각해 경계했지만, 이 경계는 주체에 의해 기대된 사물만을 보는 자기중심적인 인식론으로 귀결된다. 가세트는 “삶을 철학의 제일 원리로 설정함에 따라 우리는 처음으로 철학 연구를 추상이 아닌 지점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QF, 223)며 인식론적 질문들이 모두 끝난 것처럼 말하지만 결론적으로 볼 때 그는 관념론의 인식론을 좀더 교묘한 방식으로 반복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거울을 보듯이 사물 속에서 자신의 흔적을 찾는 관념론자였으며 사물들 역시 고대나 근대와는 다른 획기적인 존재 방식을 부여받은 것 같지는 않다. 정리하지면 사유를 실체화하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비판하며 다른 인식론적, 존재론적 가능성을 여는 것 같아 보였지만 그는 하나의 고정적 존재(주체) 대신에 두 개의 고정적 존재(주체와 세계)―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주체 하나이다―를 상정하는 식으로 문제를 봉합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가세트의 텍스트에서 데카르트적 주체를 비판하는 부분과 관념론적 대상 개념을 비판하는 부분 사이가 매끄럽지 못한 것은 이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전자에서 주체의 ‘불안’한 존재 방식이 결론으로 도출된다면 후자에서는 주체와 대상의 상호의존성이 결론으로 도출된다. 주체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에서 앞 결론이 뒷 결론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만 이런 연결이 꼭 필연적인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앞의 결론은 뒷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고 보다 풍부한 결과들을 낼 수 있지 않을까? 고진이 주목하는 데카르트적 주체의 단독자적 성격은 이러한 가능성의 한 예로 보인다. 우리는 Ⅲ-2절에서 이를 함께 살펴볼 것이다. }

 

  2. 의심하는 주체와 신의 모습을 한 타자 (가라타니 고진)

 

  가세트와 같이 관념론을 또다른 관념론으로 대체하지 않고서 어떻게 근대성을 넘어설 수 있을까? 일본의 저명한 문예비평가이자 사상가인 고진은 탈근대성의 지평이 오히려 데카르트에게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고 본다. 그의 독창적인 혹은 도발적인 데카르트 독해는 일본에서 1986년 출간된 『탐구1』에서부터 그의 대표적인 주저 중 하나인 『트랜스크리틱』(2001)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론적 기획의 핵심부를 구성해 왔다.

  그는 우선 데카르트의 이론적 동기에 주목한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여행’ 경험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그는 흥미롭게도 여행을 하면서 자신이 기존에 가졌던 사고들이 무너졌음을 고백한다. 야만인들로 안 사람들 역시 이성을 사용할 줄 알았으며,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것이 확실한 인식이라기보다는 관습이나 선례였었다는 것, 동의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진리가 아니라는 것 등등. 고진은 데카르트의 여행은 그저 나와 다른 것을 즐기기 위한, 그렇게 “차이를 소비(해소)”하기 위한 것이 아닌 조국과 자신을 떠나 “차이 또는 결코 내면화할 수 없는 타자”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세상이라는 책을 연구하고 얼마간의 경험을 쌓으려고 애써 몇 년의 세월을 보낸 후, 어느 날 나는 나 자신도 연구하자, 그리고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선택하는 데 정신의 전력을 기울이자고 결심했다. 그리고 나는 내 조국을 떠나고 내 책을 떠난 덕분에, 그것들을 떠나지 않고 있었을 때보다 훨씬 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T, 144에서 재인용)

  고진은 데카르트의 핵심은 널리 알려진 테제인 “cogito ergo sum”이나, 가세트가 “나는 사유한다”에서 찾는 자기준거성이 아닌 데카르트의 철학 체계를 추동시킨 회의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본다. 회의의 결과로서 제시된 ‘사유하는 나’가 아닌 회의 그 자체인 ‘의심하는 나’를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심하는 주체의 지위는 매우 독특한 것이다. 그것은 데카르트가 여행을 하면서 느꼈듯이 기존의 자신, 경험적이고 심리적인 자기의 자명함을 의심하면서 지각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 의심하는 주체의 ‘나를 의심하는 나’라는 역설적 지위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나’(초월론적 자기)라는 토대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성을 지닌다. 의심하는 나는 경험적인 자기도 아니고 초월론적 자기도 아니다. 그것은 철저히 회의하겠다는, “나는 비판한다”라는 일종의 “결의”로서의 “단독적(singular)인 실존”이다.(T, 149) 고진은 이 의심하는 나의 역설적 지위를 스피노자의 『데카르트의 철학 원리』에서 말한 “나는 사유하면서 존재한다.”(ego sum cogitanus)는 테제를 인용하여 규정한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cogito ergo sum”을 정식화하며 의심하는 나를 사유하는 나로 ‘도약’시키고 있다.

 

“실생활에서 극히 불확실하다고 알고 있는 의견에도 때로는 그 의견이 의심할 수 없는 것인 양 따르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단지 진리 탐구에만 전념하기를 바라고 있으므로 완전히 반대의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거짓된 것으로 간주하여 던져버리고, 그런 다음에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내 신념 안에 남아 있는지 어떤지를 보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중략) 나는 그때까지 내 정신에 들어온 모든 것은 내 꿈의 환상과 마찬가지로 참되지 않은 것이라 가상하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곧바로, 내가 이렇게 모든 것은 거짓이라고 생각하려 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는 필연적으로 무언가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이 진리는 회의론자의 어떤 터무니없는 상정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고 확실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이 진리를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1원리로서 이제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데카르트, 『방법서설』, T, 148에서 재인용)

 

  고진은 이렇게 도약이 일어난 후, 『방법서설』에서 초반부에서 볼 수 있었던 ‘나를 의심하는 나’의 존재론적 위상은 더 이상 문제시되지 않게 된다고 본다.(T, 150) 이를테면 『성찰』 중 사유하는 주체(res cogitans)가 등장하는 제2성찰에서는 ‘의심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 의심하는 주체와 사고 주체 사이의 관계는 명료하지 않으며 별다른 언급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같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고진은 아직 『성찰』의 데카르트에게는 의심하는 주체라는 질문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고 보는데 그는 그 흔적을 당황스럽게도 제3성찰의 의 존재증명에서 찾는다. 제2성찰에서 확보된 사유하는 나의 실재성은 제3성찰에서 신 존재증명 과정에서 ‘불완전한 것’으로서 다시 인식된다. 사유하는 나는 자기준거적인 존재일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만일 내 자신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나는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고, 어떤 것을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 어떤 것도 나에게 결여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성찰, 74) 여기서 ‘의심’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도록 하자. 이러한 의심의 동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나보다 완전한 무언가의 존재자’인 바로 신이다. 고진은 ‘신’이란 주체로 하여금 다시 “‘의심하는’ 것을 강요하는 차이이고, 결코 내면화할 수 없는 타자성”(T, 157)이라고 말한다. 타자는 주체의 ‘사유하는 나’로서의 폐쇄적인 자기준거성을 무너뜨리지만 ‘의심하는 나’로서 존재할 수 있게 자극해 줌으로써 주체로 하여금 의심하면서 존재하는 “외부적 실존”이라는 또다른 준거성을 확보하게 해준다.

  또한 고진이 보기에 이 신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다. 고진은 『방법서설』의 여행에 관한 부분과 제3성찰의 신 존재증명을 더불어 읽음으로써 데카르트에게 신이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며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 다른 것”, 즉 “시간적 ․ 공간적 담론의 차이성”(T, 157)이라고 본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자신이 속한 지평을 의심하며 다른 지평과의 차이를 인식하는 “인류학적 코기토”(T, 143)이며, “시스템 사이의 ‘차이’에 대한 의식”으로서 “숨은 시스템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T, 166)

  가세트의 주체-대상 공존론과 달리 고진에게서는 후항에 주체의 인식에 포획되지 않는 타자가 들어선다. 이런 주체-타자의 구도에서 타자는 주체로 하여금 자신의 자명성에 끊임없이 의심케 하고 그러한 한에서 타자이며, 또 주체는 그렇게 의심하는 한에서 주체로서 성립한다. 흔히 데카르트의 코기토론은 신이 아닌 이성의 확신에서 비롯된 자명성을 특징으로 하고, 신 존재증명은 세계의 실재성을 보증하기 위해 요청되었지만 결국 코기토와 모순을 빚는 데카르트의 철학적 실패를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된다. 반면 고진은 그것이 지칭하는 경험적인 사태는 명확하지 않지만 데카르트의 코기토론이 자명성에 확신이 아닌 의심에서 비롯되었으며, 신 존재증명은 이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해 주고 있기에 모순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데카르트의 철학적 실패는 사유하는 주체와 신 사이의 모순이 아닌 의심하는 주체에서 사유하는 주체로의 도약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3. 초월적 타자 또는 대화적 타자로서의 신 (장-뤽 마리옹)

 

  고진은 참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는 적어도 ‘타자로서의 신’에 관해서는 유사한 주장을 저명한 데카르트 연구자인 마리옹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마리옹은 1986년의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프리즘에 관하여(Sur le prisme mètaphysique de Dacartes)」(김동규(2008), 96~103쪽 참조)과 1991년의 「에고는 타인을 변질시키는가? 코기토의 고독과 다른 에고의 부재(L'ego altère-t-il autrui? La solitude du cogito et l'absence d'alter ego)」라는 논문(IA, 44~51 참조)에서 꾸준히 데카르트 철학 체계 내에서 신의 타자성에 관한 논의를 전개시켜 왔다. 우리는 마리옹을 따라감으로써 데카르트에 대한 그의 해석뿐만이 아니라 고진의 데카르트론에 대한 평가 역시 함께 살펴볼 것이다.

  마리옹은 철학사의 견해를 충실히 따라 데카르트 철학 내에서 신이란 코기토보다 완전하기는 하나 그 완전하다는 속성은 이미 이성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본다. “즉, 이러한 규정들이 신을 우리의 합리성에 종속시킨 다음, 충족이유율을 따라서 신에게 최고의 지위를 부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김동규(2008), 97) 하지만 그는 고진처럼 추론의 영역에서 벗어난 신의 개념이 데카르트에게 존재함을 논한다. 즉, “탁월한 타자성”으로서의 “유한한 실체인 에고의 세력권에서 독해 있는 무한한 신의 관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IA, 49) 그러나 「코기토의 고독」에서의 마리옹은 이 논의를 좀더 전개시켜 이런 신적인 타자성이 곧바로 “에고에 의한 타자 그 자체의 인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고 본다. 그 이유는 타자성의 근본적인 분할이 존재하기 때문에, “무한하고 초월론적으로 격리되어 있는 (전적인) 타자”인 신과 “유한하고 경험적으로 획득될 수 있는 타자”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둘은 등치될 수 없으며, 신적인 타자는 경험적이고 일상적인 타자를 사유하기 위한 그 어떤 근거도 제공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신적인 타자성은 자족적인 에고를 가능케 하는 전제 조건으로서 에고의 타자에 대한 맹목에 근원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다.(IA, 49~51)

  이에 비추어 봤을 때, 우리는 고진의 데카르트론을 거부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점에서는 그렇고 다른 점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선 고진은 별다른 설명 없이 『성찰』의 신 존재증명을 『방법서설』의 여행 이야기와 같은 수준에 위치시키고 있다. 이는 타자성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은폐할 위험을 가진다. 하지만 고진이 이 타자는 ‘초월적’인 타자가 아니라는 점을 반복해서 말하는 점을 볼 때, 그는 타자성의 분할에 대해 맹목적이기는커녕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주변적 언급이 아니라 고진의 주체-타자론에서 꾸준히 이론적 핵심을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굳이 그 근거를 무리하게 『성찰』의 신 존재증명에서 찾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텍스트적 정확성에서 고진은 분명히 실수를 저지르고 있지만 데카르트에서 찾아내려는 탈근대성의 실마리를 “초월적이지 않은 상대적인 ‘타자’”(T, 157)로 본다는 점에서 마리옹과 공통점을 가진다.{그렇다고 고진의 주장이 가진 고유성이 마리옹의 논의와의 공통점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고진의 존재론은 정확히 말하면 (가세트와 같은) 그냥 주체와 타자의 구도가 아닌 ‘의심케 하는 타자’와 ‘의심하는 주체’의 구도이다. 여기서 핵심을 이루는 개념인 ‘의심’, 경험적 주체와 초월론적 주체의 차이가 가진 탈근대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말과 사물』에서의 푸코의 데카르트 분석의 검토 등을 포괄하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다시 「코기토의 고독」에서의 마리옹의 논의로 돌아와 보자면, 확실한 것은 신적인 타자가 아닌 타자성을 데카르트 자신에게서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데카르트에서 탈근대성의 단초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며 이 노력은 1993년 「에고의 근원적 타자성(L'altérité originaire de l'ego)」에서 『성찰』의 재독해로 나아간다. 마리옹은 데카르트에 대한 고전적 해석들이 'cogito ergo sum'이나 'ego cogito, ego sum'과 같이 <사유= 존재> 도식에 적합한 정식에 집중할 뿐, 제2성찰에 등장하는 “나는 존재한다, 나는 현존한다.(ego sum, ego existo)”(성찰, 43)라는 정식을 무시한다며 비판한다. 마리옹은 제2성찰에서만 등장하는 이 테제는 단순히 부정확한 문학적 변형물이 아니라, 이전의 테제들을 넘어서는 이론적 진전, 에고의 근원적 타자성을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그는 여기서 신이 에고와는 다른 질서에 위치하는 격리된 존재가 아니라 “에고의 대화자”로서 등장하고 있으며 이 대화적 타자의 관계를 전제하고 해당 정식을 읽을 때 에고의 근원적 타자성이 논증될 수 있다고 본다.{아쉽게도 필자의 능력의 한계와 해당 작업에 요구되는 지적 노력의 방대함으로 인해 논지를 더 깊게 전개할 수는 없을 듯싶다. 마리옹은 이후 자신의 탈근대적 사유기획을 후설과 하이데거 등 데카르트 이외의 자원을 활용해 전개한다. 마리옹의 데카르트론은 이를 고려해 총체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코기토의 고독」과 「에고의 근원적 타자성」에서의 마리옹의 논의에 대한 상세한 요약과 비판적인 검토는 진태원(2008)을, ‘존재 없음'(sans l'être)과 ’줌‘(donation)이라는 마리옹 자신의 사유기획에 대해서는 김동규(2009)를 참조.}

 

 

 Ⅳ. 결론과 추가적인 질문들

 

  지금까지 우리는 오르테가의 강의를 따라 (1)데카르트가 어떻게 근대성을 특징짓는 이름인지를 살펴보고 (2)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세 사람의 논의를 통해 데카르트에 내장된 탈근대적 가능성이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는 식으로 서론에서 제시된 두 질문에 대해 대답을 시도해 보았다. 비록 세 사람의 국적이 다르며, 가세트와 나머지 둘의 경우에는 살았던 시대나 지적 배경 자체가 다르다만, 셋 모두가 데카르트가 펼친 근대성의 자장 안에 있으며 또한 시공간적인 차이에 구애받지 않는 보편성에 주목하는 작업 방식이 철학의 고유한 독단 내지 특권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논의가 꼭 무리한 것만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데카르트에 대한 집중적 학습의 경험이 없기에 불가능한 해당 논자들의 작업에 대한 직접적 평가 대신 이 글을 작성하면서 들었던 몇 가지 의문점들을 열거해 보는 것으로 마무리를 대신해 보자. (1)우선 꼭 데카르트에서 탈근대성을 찾아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논변의 도발적 효과에 집착한 나머지 우리는 근소한 사실들에 과잉된 의미를 부여하는 무리하고 비생산적인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또한 근대성이라는 거대한 사태가 꼭 철학적으로 규정되고 철학적으로 극복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근대성에 대한 비철학적 규정은 불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면 철학적 규정과 비철학적 규정들 중 본질적인 것은 무엇이며 그들 사이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근대성이 비철학이나 비학문적인 활동이 아니라 철학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거나 극복되어야만 한다면 그 근거나 당위는 무엇일까? 또 철학적으로 극복된다면 그 극복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질문들은 다음과 같은 한 질문으로 종합될 수 있다. 어쩌면 데카르트와 근대성의 연루를 지적하면서 제기된 문제들은 데카르트의 타자에게서, 철학의 타자에게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탈근대성의 외양을 한 근대성의 지평 안에 유폐될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런 질문을 곁에 두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참고문헌

가라타니 고진(1998), 송태욱 옮김, 『탐구1』, 새물결.

가라타니 고진(2005), 송태욱 옮김, 『트랜스크리틱』, 한길사.

김동규(2008), 「데카르트의 존재신론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철학논집』15집,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김동규(2009), 「장-뤽 마리옹에게서 현상학의 최종원리와 줌의 현상학: 후설과 하이데거를 넘어서」, 『철학연구』86집, 철학연구회.

르네 데카르트(1997), 『성찰』, 문예출판사.

슬라보예 지젝(2005), 이성민 옮김, 『까다로운 주체』, 도서출판b.

오르테가 이 가세트(2006), 정동희 옮김, 『철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진태원(2008), 「불가능한 타자 : 장-뤽 마리옹의 타자성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철학사상』29집,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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