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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1/18
    [발제]김경일, 「대동아공영권의 ‘이념’과 아시아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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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김경일, 「대동아공영권의 ‘이념’과 아시아의 정체성」


2009-01-18 /[새움]동북아의 이데올로기… Seminar /발제

 

*김경일, 「대동아공영권의 ‘이념’과 아시아의 정체성」, 백영서 외 지음 『동아시아의 지역질서: 제국을 넘어 공동체로』, 창비, 2005.

 

**인용문은 “”로 표기.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인용문 내 강조는 발제자의 몫이다. 발제자의 코멘트는 가능하면 ⇒로 별도 표기하려 노력하였다.

 

1. 논의를 시작하며

 

“대동아공영권”의 정의

>“동아시아의 민족과 국가들이 근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19세기 후반 이래 이 지역을 단위로 하는 최초의 지역질서 구상”(207) ⇒ 여기서 김경일이 말하는 “대동아공영권”은 1940년 이후 등장한 협의의 대동아공영권이라기보다는 1930년대 후반부터 ‘일본’에서 등장한 각양각색의 아시아론을 말한다. 따라서 “최초”라는 말을 그리 민감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 다만 다케우치 요시미가 지적하듯이 아시아주의가 전쟁기에 급조된 것이 아닌 근대 일본의 시작에서부터 제기된 질문이었으며, 쑨원이나 안중근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이 아닌 지역에서도 아시아론이 간간히 제시되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최초”라는 표현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많은 것들을 잊혀지게 할 우려가 있다.

 

전후 일본에서의 대동아공영권 공영권의 인식

1)1960년대 중반(209):

-미국과의 관계 개선: 1951년 쌘프란씨스코 강화조약 → 1954년 미일상호방위조약 → 1960년 미일상호협력 및 안전보장조약(신안보조약)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 강화, 경제적 진출

-1965년 한일협정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관심이 부활하고 그에 대한 논의가 전개 (…) 그러나 이 시기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입장은 상대적으로 수동적이고 소극적” “미국이 주도한 태평양지역에서 군사 ․ 안보체제의 하위 파트너라는 지위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던 것”

 

2)공산권 붕괴 이후 1990년대(210):

-우파 잡지들(『쇼군!』『세이론』등)의 주도로 “[아시아․]태평양 전쟁기 대동아공영권과 1943년 대동아공동선언에 대한 재조명과 재평가”가 적극적으로 시도.

-적극적이고 공세적. 예) 이시하라 신따로오의 ‘신대동아공영권’론. “미국의 아시아전략의 틀” 안에서 아시아 “지역 헤게모니의 행사에 일정 부분 참여하고자 하는 의도”가 강함.

-“미국의 지속적인 헤게모니에 대한 일본의 점증하는 회의와 비판의식”을 깔고 있던 담론도 있었음.

 

>“이처럼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관심이 표명되어왔던 주요 계기들에서 대동아공영권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요 개념이 되어왔다”(211)

>>좋게 보면 ““전후 미국에 의해 지배된 정보공간의 가운데에서밖에” 일본근대사를 보지 않는 현상을 타파하여 자국민과 동아시아의 주민들에게 대동아공영권의 역사적 정당성을 설파하고자 하는 시도의 일환”

 

전후 그 외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대동아공영권의 인식

>“일본의 경제적 성공과 그로부터 형성된 막대한 부를 기반으로 오늘날 이 지역에서 차지한 주도적 ․ 독점적 지위에 대한 이 지역 국가들의 불안과 우려는 대동아공영권이 실제로 소멸된 1945년 이후에도 특정한 계기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표명되어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형화된 하나의 유형이 조건반사적으로 성립되었다. 특정 국면에서 지역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느껴질 때마다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은 대동아공영권의 ‘악몽’을 떠올리거나 혹은 개별 신생국가는 그에 대한 경험을 국민들에게 환기하고자 했다. 일본의 행위와 동기에 대한 설명은 쉽게 ‘대동아공영권’으로 귀속되어 강력한, 그러나 일방적인 질책과 비난을 받았다.”(208-9)

>>식민지-조선과 타이완, 반식민지-중국, 명목상의 독립이 허용되었던 버마와 필리핀, 군정통치를 받았던 인도네시아 등 지역별 상이할 수밖에 없는 시각들

 

일본만이 아닌 동아시아의 역사로서의 대동아공영권

>“(…) 대동아공영권의 문제는 일본제국이 팽창해갔던 바로서 일본근대사의 일부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일본제국이 점령한 지역의 영토와 주민들을 포함하는 동아시아역사의 긴밀한 일부라고 할 수 있다.”(208)

>>“이와 같이 대동아공영권이 일본근대사의 일부일 뿐 아니라 그 영향권 아래 있었던 동아시아사의 일부분이라는 점에서 볼 때 그에 대한 평가는 동아시아의 시각에 근거한 것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상이한 시선들이 교차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동아시아의 시각”은 가능할 수 있을까? 지금 상태로는 가능하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2. 대동아공영권의 형성에 대한 세계체제론적 접근

 

1)헤게모니 국가(영국, 미국)와의 관계

-근대화의 모델로서의 영국과 미국: “이후 중국문제를 둘러싸고 일본, 영국 ․ 미국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조성되었다고는 하더라도 적어도 193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헤게모니를 배경으로 한 베르싸유/워싱턴 체제에 충실하게 따랐다.”자금과 원자재 등 영미에의 경제적 의존.

-제국주의의 경쟁상대로서의 영국과 미국: ‘경제적 의존’에도 불구하고 시작된 ‘정치적 갈등’. “(…)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한 대륙침략은 강요에 가까운 미국의 관용에 대한 실험대이자, 19세기 후반 이래 지속된 양국관계의 파국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중일전쟁 발발 1년후 1938년 10월 미국의 일본의 문호개방 위반에 대한 항의 → 1939년 7월 미일통상항해조약 파기. 일본은 서구의 제국주의를 “구질서”로 비난하면서 (나름의 정당화 논리를 가진) 독자적인 제국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

 

2)헤게모니 도전국가(독일)와의 관계

-도전정신(?)을 심어준 독일: 미일통상조약의 폐기와 대일경제제제로 인해 궁지에 몰리던 찰나 서유럽 열강을 이길 수 있음을 보여준 독일의 사례. “유럽에서 2차대전의 발발과 독일의 승리를 지켜보면서 일본은 영국이 태평양에서 힘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강한 의구심을 가짐과 동시에, 동남아시아에서 식민지를 경영하고 있었던 네덜란드와 프랑스에 대한 도전 유혹에 사로잡혔다.” “유럽에서 독일이 주도한 ‘신질서’는 일본의 동아시아에 대한 비전을 지역블록에 입각한 세계신질서의 창성이라는 세계적 동향과 결부시킬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서구열강의 반발과 독일 ․ 이탈리아와의 군사동맹조약: 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적 간섭에 대한 보험적 정책. “일본, 구체적으로 일본 육군은 일본 ․ 독일 ․ 이탈리아 삼국의 ‘제휴강화’를 통해 동남아시아에서 프랑스 ․ 네덜란드 ․ 영국의 식민지를 손에 넣어 자급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영 ․ 미에 대한 의존 경제에서 탈각하여 ‘자주적 국방력’을 실현할 것을 의도”

-그와 함께 형성된 대동아공영권 담론. 1940년 8월 무렵부터 2~3개원의 단기간에 급속히 형성.

 

3)사회주의체제(소련과 중국 반제국주의 세력)와의 관계

-중국의 경우: “그러나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의 제창과 더불어 진행되었던 독일 ․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제국과의 군사동맹과 동남아시아에 대한 군사적 침략이 중일전쟁의 교착상태를 타개하려는 동기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흔히 지적되어 왔다.” 대동아공영권 담론이 중국 민족주의와 대립되었던 경우는 있으나 난징 정권이나 국민당이 거론되었으나 중국 공산당정권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은 ⇒ 임성모 2005에 인용된 오자끼 호쓰미가 지적했듯이 이런 정세 파악 실패는 일본의 국익에 있어서나 비군사적 아시아 공동체를 위한 중국과의 대화 채널 확보에 있어서나 해가 됨.

-소련의 경우: “1938년 이후 일본이 이른바 ‘동아신질서’를 제창하게 된 배경으로 만주에서 점차 증대했던 소련의 위협을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 1941년 4월 모스크바에서 소련과 불가침조약에 조인함으로써 공식적이고 정책적인 차원에서 해소되는 듯 보이나, 태평양헌장(1943.5)에서 볼 수 있듯이 공산주의와 소련에 대한 적개심이 상존.

-허나 동아연맹론의 이시하라 칸지나 코이소 꾸니아키의 ‘계획경제’에 대한 선호라던가, 조르게 사건과 연루된 오자끼 호쓰미의 경우에서처럼 친공산주의적인 담론도 있었음.

 

 

3. 대동아공영권, 제국주의 담론의 자기모순

 

無사상의 사상으로서의 대동아공영권

-하시까와 분조오: “그것의 사상적 성격은 “낭만적인 신화적인 활달함”과 “무언가 신비로운 철학, 국학적인 심정주의 같은 것의 분출”로 기억되는바, “사상적인 내용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신화적인 요소들이 매우 범람할 가능성을 가지고 나타났던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다케우치 요시미: “(…) 대동아공영권은 “아시아주의를 포함한 모든 ‘사상’을 압살한 위에 성립한 의사사상”이고 “아시아주의의 무사상화의 극한상황”이라고 서술했다.” ⇒ 여기서 우리는 다케우치가 공을 들여 제국주의 담론으로서 기능한 대동아공영권과 정치적 이상으로서의 아시아주의를 구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케우치 요시미에 관해서는 이후 가라타니 고진의 『역사와 반복』이나 쑨거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에서 보다 자세히 다루어질 예정이다.

-야노 토오루: “(…) ‘대동아공영권’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마치 보자기와 같이 알맹이는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개념으로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의 대화에서 생긴 발상은 아니었다”라고 지적한다. 대동아공영권은 “체계적인 사상이나 이론에 기초하여 생겨난 구상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의 아시아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안출된 일련의 이데올로기의 극한 형태”라고 보면서, 이는 “그 전신인 동아신질서가 중국침략을 사후에 정당화하기 위한 고육책이고, 즉흥적인 슬로건에 지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후신인 대동아공영권이나 그 전신인 만몽생명선”도 사상적 실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다.” ⇒ 야노는 동아신질서와 대동아공영권 사이의 연속설적 입장에 서 있다.

-피터 두스: “대동아공영권은 ‘단순한 씨니씨즘’ 내지는 ‘임기응변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해석했다.”

 

1938년(동아신질서선언)과 1940년(대동아공영권 구상), 단절인가 연속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중일전쟁의 교착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제1차 고노에 내각에 의해 발표된 ‘동아신질서’ 선언

>>보통 대동아공영권이 제국주의에 그럴싸한 사탕발림을 발라놓았던 것이었듯이, 동아신질서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 통설. 헌데 양자 사이의 단절이 있었다고, 동아신질서는 기만적인 제국주의 수사 이상의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됨.

 

1)단절설: 非제국주의 혹은 反제국주의 담론으로서의 동아신질서 ․ 동아협동체론

-연구자 미와 키미따다의 경우: “예컨대 전자[동아신질서]는 “아시아에 대한 역사주의적이고 도의주의적인 발상에 유래하는 사상”인 것에 대해 후자[대동아공영권]는 “권력주의적 합리주의의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미와 비판①: 동아신질서 담론을 관찰하는 데 있어 상이한 조류를 무시하고 쇼와연구회를 주축으로 연구된 동아협동체론만을 강조. 더구나 하시까와나 다케우치 등 『사상의 과학』좌담회 참석자들이 지적했듯이 동아협동체론, 동아연맹론 등은 정부 차원에서는 억압당함. “주지하듯이 대동아공영권의 구상에는 다양한 사조와 단체들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나아가 대동아공영권의 주류와 동아협동체론 ․ 동아연맹론 사이에도 일정한 거리가 있었으며, 후자는 전자에 의해 비판되거나 억압을 받았다.” ⇒ 이 부분에 대한 국내 연구로는 임성모 2005 2006을 참조. 예)오자끼 호쓰미의 우려, 대정익찬회, 흥아지도, 총력전연구소, 아시아가 있고 일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국이 있고서 공영권이 있고, 일본이 있고서 대동아가 있다”

-미와 비판②: 1938년부터 40년까지 동아신질서가 지속되다가 대동아공영권에 의해 대체되는 식으로 도식적인 이해의 위험. 실제로 동아신질서 담론은 불과 반년 정도 지속됨.

-미와 비판③: 그리고 동아신질서 담론의 큰 축을 담당했던 쇼와연구회나 동아연맹의 주장은 대동아공영권 시기에도 일정부분 계승됨. 동아협동체론의 전환에 대해서는 임성모 2006 참고.

 

2)연속설: 제국주의 담론의 내재적 탐구, 보편주의와 특수주의 간의 긴장

>아시아 ․ 태평양 전쟁기 일본의 아시아론의 다양한 층위를 사상시켜버리는 측면이 있지만, 『사상의 과학』좌담회나 단절설과 달리 대동아공영권 담론이 고유한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음을 주장.

>>“(…)당시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추진하면서 동남아시아지역과 관계를 맺었던 고위 정치인이나 군인, 관료, 학자, 문학가, 언론인 등이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상의 뿌리로서의 동양종교?: 인도문명권의 불교(이시하라 칸지의 일련종 선호)나 중화문명권의 유교(다치바나 시라끼의 왕도 사상 선호).

-탈세속적 동양문명론: “서양과 동양을 이분법적으로 인식하고 전자에 대한 후자의 우월성을 강조”, “정신과 물질을 분리하여 사고하고 전자에만 배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 “대동아전은 단순히 자원을 위한 전쟁도 아니고 경제적 이익을 위한 전쟁도 아니고 실로 동양의 최고인 정신적 가치 및 문화적 가치를 위한 전쟁”, 서양=법치주의 & 동양=덕치주의, 이시하라 칸지의 <유럽문명의 위기→서양문명VS동양문명의 세계최종전쟁→법화경에 의거한 세계통일> 등 역오리엔탈리즘 혹은 옥시덴탈리즘 팽배. 추가적인 예)니시다 기타로와 쿄토 학파, “근대의 초극” 좌담회 ⇒ 서양을 포괄하지 않는 데에서 제한적이지만 담론상으로는 내셔널리즘을 초과하는 보편주의적 성격을 가짐. ‘동양적 이념’의 세계사적 승리가 결국 서양을 포함한 세계 모두를 위한 것이라 보았을 때 외양상으로는 서양마저 포괄할 수 있음. 교토 학파가 그토록 “세계사”나 “아시아의 세계사적 운명”같은 표현을 선호했던 점을 고려해볼 것.

-가부장으로서의 일본: 사실상 ‘동양’은 ‘일본’을 표상하기 위한 기표에 불과. “앞의 이시하라의 경우에도 서구제국주의에 대한 동양적 가치의 옹호자로서 일본을 상정했으며, 도의주의나 가족주의와 같이 얼핏 보기에 유교적 담론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그것의 내용은 실제로는 일본을 의미했다.”, 니시다는 ‘동아공영권’ 논의에서 영미적 사상, 제국주의, 공산적 세계주의, 국제연맹의 민족자결주의, 그리스도교의 박애주의와 함께 중국 고대의 ‘왕도’를 배격함, 국내적 이데올로기를 넘어 “의사가족적인 국제관계 창설”(Gorden Berger의 지적, 특히 동남아시아의 경우), 국체(國體)론 ⇒ “일본의 국제적인 우월성[아시아와 서양 모두에 대한]에 대한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의 전통을 발굴하고 재정의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많은 토착적 개념들이 동원”, 일본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특수주의적 성격을 가짐.

-특수와 보편,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 제국주의 담론의 내적 모순: “그러나 자국의 고유한 전통에 대한 배타적 강조와 타자와의 소통을 통한 보편성의 확보 사이에는 늘 일정한 긴장과 모순이 뒤따랐다.” 예)1942년 5월 대동아건설심의회 제2회 총회에소의 코이소 쿠니야끼의 비판적 의견, 1941년 해군성 주최 외교간담회, 1942년 9월 26일 해군성 간담회에서의 카미까와 히꼬마시 ⇒ 전쟁의 정당성을 일본인에게만 말할 것인가 만주국과 동남아시아 등 식민지들과 국제사회에 말할 것인가? 이 질문은 수사학적 차원이 아니라 이 전쟁이 궁극적으로 어떤 (탈)국가(적 공동체)의 구성을 목표로 하는지와 깊은 연관을 가진다. 물론 1930년대 후반 동아협동체론에서 제시되었던 것 같은 각 주권국가들 간의 평등한 동아시아 공동체의 건설은 현실적으로 요원한 일이 되었고 어떻게든 일본을 우위를 포함해야만 했지만, 담론의 차원에서 이런 보편주의적 수사를 사용해야 되었다는 사실은 일본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가 국제적으로(도 심지어 어쩌면 국내적으로도?)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 그[까미까와 히꼬마시]는 일본에도 “동아지역에 타당할 뿐만 아니라 세계전쟁을 지도하고 근대지식인에 호소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한가지 더 고려해 봐야 할 것은 타이완이나 조선 역시도 이데올로기적 정당화가 필요한 지리적 공간으로 인식되었느냐는 것이다. 좌파건 우파건 일본의 담론을 주도했던 지식인들은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의 경우와는 별도로 그런 위기감 또는 필요성을 느꼈을까? 중국과 조선의 사례를 등가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공부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대동아공영권의 보편주의적 성격의 근본적 한계: ①이념적 차원에서만 논의되었지 구체적인 정책과 실행들이 뒤따르지 못한 ②아시아나 서구과의 상호소통이 아닌 “일본의 필요와 판단에 의해 일방적으로 부과”

 

3)병존설?

“구체적인 현실은 연속설과 단절설이 양자택일적이라기보다는 두 측면이 동시에 병존한다는 것을 보이고 있다.”(221)

⇒논문의 전개를 따라 단절설과 연속설로 보았지만 일단 논문에 제시된 내용만 보면 연속설과 단절설이 필연적으로 대립해야 될 이유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핵심은 일본 제국주의 담론이 내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순에 대해 단절설은 동아신질서와 동아협동체론을 보편주의로 보고 대동아공영권을 기만적인 특수주의로 보며 ‘통시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면, 연속설은 그런 시기 구분없이 사상의 내용의 내재적 분석이라는 ‘공시적’ 접근을 택한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물론 이 차이는 이론상 양립이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대동아공영권을 무사상으로 본 『사상의 과학』좌담회는 아닐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만약 이들이 무사상을 ‘사상의 부재’가 아닌 ‘사상의 특정한 성격’으로 보는 것이라면 연속설의 주장들을 소화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4. 일본의 아시아정책과 아시아의 정체성

 

>“근대 이후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인식에는 이중적이고 자기모순적인 성격이 있었다. 한편으로 일본은 이미 서구의 침략에 의해 지배되어온 아시아에서 자신만이 근대문명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고유한 전통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이러한 인식은 서구에 대한 그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근대문명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는 서구에 대한 인정과 동경이 있었지만, 자신의 고유한 전통을 유지한다는 측면에서는 서구에 대한 견제와 불안이라는 복합적 반응을 수반했다. 그리고 이는 다시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반응으로 되돌아왔다.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문명을 받아들였던 일본은 거의 대부분이 서구의 식민지로 전락한 다른 아시아 국가와 민족들에 무시와 경멸을 보냈지만, 서구에 대한 불안과 반감이 고조된 상황에서는 아시아가 동일한 문명과 종족에 속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고자 했다.”

 

서구에 대한 반대와 아시아에 대한 환대?

-1930년대 후반 이후 적어도 “서구에 대한 일본의 태도”는 “비판과 부정이라는 비교적 단일한 반응으로 응축”됨. 공식적으로는 아시아에 대해 상호 우호와 연대를 지향.

-하지만 이상주의적 아시아주의의 한계지점 ①“영원히 문화가 발달하지 않는” 지역으로서의 동남아시아, 조선반도나 중국대륙에 대한 우열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아시아주의와는 차이가 있음(야노 토오루의 주장) cf)남진론 ②“다음에 서구의 식민지배를 염두에 두고 볼 때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의 역할은 서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차원보다는 서구제국주의를 대신하여 자원의 약탈을 의도했다는 사실” (아베 히로즈미와 하라다 카쯔마사의 논의 참고)

 

서구에 대한 극복이 아닌 억압, 그리고 그 과정의 반동적(reactive) 산물로서의 아시아주의

-사실 아시아에의 이런 이중적인 인식은 서구의 시선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성립이 불가. 일본은 서구와의 동일화 욕구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했음. 그 결과 항상 자신을 “아시아의 바깥”에 두고 사고. 아시아주의는 이런 서구라는 외부적 요인과의 관련 하에 볼 필요가 있음. “일본은 아시아이고 아시아의 대표라고 하는 의식은 구미에 대한 반감이나 불안을 투영한 것일 따름”(키따오카 신이찌의 “과잉한 취약성 의식”론)

-오오까와 슈메이의 경우: 서양이 단지 “중국이나 인도와 같이 오랜 전통을 가진 강대한 나라들에 의해 대체”되었을 따름. ⇒ 국제적 관계에 대한 탈위계적 관계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전무.

⇒추가적으로 지적하면 이런 세계 인식은 전후 역사학계의 시기 구분 명칭에서도 드러남. 태평양 전쟁, 15년 전쟁, 아시아 ․ 태평양 전쟁 등 (무한한연습의 포스트 참조, http://muhanhan.tistory.com/183)

 

사례: 대동아성과 대동아회의

-대동아성: 1942년 11월, 지금까지 살펴본 제국주의의 내적 모순이 토오고오 시게노리와 토죠 히데끼 사이의 갈등으로 나타남. 결국 토죠의 입장에 따라 대동아성 설치가 진행됨.

-대동아회의: 1943년 11월 5~6일 이틀에 걸쳐 도쿄 제국의사당에서 토죠 히데끼의 주재로 진행된 회의. 난징 정부의 왕 징웨이, 만주국의 장 징후이, 타이의 왕와이다야공, 필리핀의 라우렐, 버마의 바모 등이 참석. 1941년 미국과 영국의 대서양헌장에 대항하는 대동아공동선언을 발표.

-대동아회의의 경우, 조선이나 타이완같이 주권과 독립이 인정되지 않는 나라(?)나 인도네시아나 말레이같이 자원조달이 기대되는 나라들은 제외되고, 괴뢰국이나 종속국들의 수반만 초청되었기에 근본적인 ‘한계’를 가짐. 하지만 재밌는 것은 그렇게 제국주의 담론에 거수기 역할을 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제외한 참여국 대표들이 아시아공동체의 전망에 대해 열의를 가졌다는 점. 예)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말의 사용 빈도, 대동아공동선언 중 인종차별철폐를 담은 제5항에 대한 일본과 여타 국가들의 상이한 해석.

 

 

5. 아시아공동체의 현재와 미래

 

대동아공영권의 아시아공동체 담론에 대한 기여?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주도에 의한 대동아공영권의 경험은 비록 그것이 1940년대 전반기의 불과 3~5년이라는 짧은 시기에 걸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상호공존과 연대의 형성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타율적인 군사적 해방과 아시아공동체라는 풀리지 않는 숙제

-“전쟁의 종결이 연합국에 의한 것이지 아시아의 민중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일본의 주류 여론은 패전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대동아공영권론의 주요한 특징이었던 일본의 독자성에 대한 강조와 타자로서의 아시아 인식이 지속되게 했다. 일본을 지도자로 하는 대동아공영권의 위계구조는 종전 이후 세계적 차원에서 조성된 냉전체제 아래에서 정치적 독립의 관제가 경제적 자립의 목표에 의해 대치된 채로 미국 ․ 일본을 정점에 둔 수직적인 위계체계로 재현되었다.” ⇒ 서구에 의한 타율적 해방은 아시아 민중들의 자율적 해방의 기회를 지연시켰다면, 일본에 대한 군사적 승리는 보다 근본적인 이념적 승리를 지연시켰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청산의 기회를 갖지 못한 전쟁의 유산들은 다시금 관료가 아닌 민중 본위의, 중국이나 일본과 같은 강국의 국익만이 아닌 평등한 관국민적(trans-national) 공동체의 형성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다만 오늘날에는 전쟁터가 정치나 군사적 영역이 아닌 경제적 영역으로 옮겨 갔을 뿐이다. 어쩌면 이런 경제적 팽압이 한계에 이르면 은유가 아닌 진짜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해결되지 않은 과제처럼 유령처럼 끊임없이 돌아와 산자를 괴롭힌다. 민주적 아시아공동체라는 질문은 그렇게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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