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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독서 후기
-대학생활과 니체를 엮어서
1. 말뜻으로야 대학은 ‘큰 학문’을 익히는 곳이지만 솔직히 말해 우리[footnote]앞으로 주어로 사용할 이 대명사로 ‘대학생 모두’를 포괄하고 싶은 욕심은 없다. 하지만 이게 꼭 나 자신만의 아주 특수한 경험일 뿐이라고는 생각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footnote] 자신이 학문적 열정이나 배움에의 의지에 따라 자발적으로 이곳에 들어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이곳 고려대 같은 소위 ‘명문대’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기억을 되살려 자신은 소신에 따른 것이었노라고 주장이야 할 수 있겠다만 거칠게 말하자면 학벌을 바라는 마음이, 좀 변호를 덧붙여 말하자면 수능을 준비하며 받은 고통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은 마음이 거기에 섞여 있지 않았었더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아마 지금 대학을 다니는 우리의 ‘소신’이란 오랜 시간에 걸쳐 혹은 학창 시절에 만들어졌다기보다는 그보다는 훨씬 뒤인, 스스로의 상상보다는 최근의 시기에 형성된 것이 아닐까?
추상적인 표현으로 의미를 흐리며 주장을 신비화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대학생활에서 그런 소신이 형성되는 순간, 마치 그것이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순간 중의 하나로 수강신청기간을 들고 싶다. 전공과 교양, 주전공과 이중전공을 더해 약 30개, 선택교양과 핵심교양을 더하면 거의 300개에 가까운 강의들 중에서 우리는 적게는 4과목 많게는 7과목을 ‘선택’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 때 어떤 강의를 선택하거나 거부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에 근거하곤 한다.
“이건 내 적성/취향/관심이라서(혹은 아니라서)…”
습관처럼 흔히 사용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적잖이 당황스러운 말이다. 먹어보지 않은 음식에 대해 취향을 논할 수 있을까? 물론 아롱사태보다는 옥돔회가 ‘내 취향’이라고 말을 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취향이란 얼마나 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일까. 직접 음식을 먹어보면 실은 아롱사태가 더 입맛에 끌리거나, 둘 다 비싸기만 비쌌지 삼겹살보다 맛은 없다거나하는 경우가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만약 그럴 가능성이 높다면 내가 지금 여기서 둘 중 어느 것이 ‘내 취향’이라고 말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말일까.
강의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정규교육과정동안 대학에서 배울만한 지식들을 충분히 접했다고 볼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가 자신의 적성/취향/관심에 따라 무슨 강의를 선택한다고 말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꼭 개설된 강의의 내용들을 전부 다 알아야만 선택의 자유/자격이 주어진다는 억지를 부리고 싶지는 않다. 안다면 강의를 더 들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희미한 스케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나의 무엇에 따라 어떤 강의를 선택/배제한다’는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아예 그런 수사를 사용하지 않던가 말이다.[footnote]물론 공강시간의 고려나 주변의 추천, 학점을 잘 준다는 소문 등 외적 요인에 근거해 시간표를 구성되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항상 나의 ‘무엇’에 근거하는 작업이 동반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는 점에서 논지에 대한 완전한 반박 논거는 될 수 없을 것 같다.[/footnote] 그럼에도 우리는 판단을 내릴 만큼의 충분한 앎을 (채 가지기도 전에) 가지고 있다고 암묵적으로 가정한다. 강의에 대한 앎이든,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앎이든 말이다.
2. 하지만 한 번 선후관계를 뒤집어서 생각해 보자. 나는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알기 때문에 이 강의를 선택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강의를 선택하며 ‘나는 이런 것을 궁금해 하고 이런 것을 배울 욕심을 가진 사람’이라는 확증을 사후적(ex post facto)으로 얻는 것일까? 전자는 어렵지 않게 일상적으로도 생각하고 있으니 이번에는 후자의 가능성을 한 번 밀고 나가 보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호기심의 거만함을 비판하는 도덕적 판단이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분석적인,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일 수 있는 가정 하나를 말해 보자. 그것은 우리는 어떤 강의를 선택하는 행위에도 확고한 존재에의 열망, 자신이 발을 딛을 안정된 토대를 얻고 싶어 하는 그런 열망이 잠재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의 ‘적성’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하고, 나의 ‘취향’을 강조하고 싶어 한다. 이렇게 덧붙여지는 술어들을 통해 주어의 존재는 직접적으로 검토되지 않지만 당연한 것으로 간주된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굳이 술어를 늘려가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수다스럽게 말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빈 수레가 요란하다”라는 속담이 시사해 주듯이, 어쩌면 진실은 우리 각자 자신의 적성/취향/관심(그리고 그 술어를 통해 확증되었던 주어로서의 “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일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아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수강신청이라는 일상적인 순간에도 자신에 대해서 무언가 설명하고 싶어 하는 것일는지 모른다.
비슷한 관점의 인간학의 한 예를 우리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니체는 3부에서 ‘금욕주의적 이상’을 당시의(어쩌면 오늘날까지의) 인간이 겪고 있는 근본적인 실존적 문제로서 언급하는 동시에 마지막 절인 28절에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인간은 자신의 의미의 문제 때문에 괴로워했다. (…) 그의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니었고,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가?”라는 물음의 외침에 대한 해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가장 용감하고 고통에 익숙한 동물인 인간은 고통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고통의 의미나 고통의 목적이 밝혀진다고 한다면, 인간은 고통을 바라고, 고통 자체를 찾기도 한다. 지금까지 인류 위로 널리 퍼져 있던 저주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였다.―금욕주의적 이상은 어떤 점에서 보더라도 지금까지 있었던 최상의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보다는 낫다. 이 이상 속에서 고통은 해석되었다. (…) 해석은 (…) 새로운 고통을 가져왔고, 좀더 깊고, 좀더 내면적인, 좀더 독이 있는, 삶을 갉아먹는 고통을 가져왔다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인간은 그것에 의해 구출되었다. 인간이 하나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그 후로 더 이상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같은 존재가 아니었고, 불합리나 ‘무의미’의 놀이공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인간은 무엇인가를 의욕할 수 있었다.”[footnote]프리드리히 니체, 김정현 옮김, 『선악의 저편 ․ 도덕의 계보』, 책세상, 2002, 540쪽. 강조는 니체의 몫.[/footnote]
거칠게 간추리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확증해 줄 의미를 갈망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고통과 같은 대가가 따르더라도 인간은 그것을 감수하며 나아가 자발적으로 원하기까지 한다. 니체에게 인간은 스피노자(혹은 니체 자신이 상상한 스피노자)가 가정하듯이 방어적으로 자기보존만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은 예수의 희생에 비추어 스스로를 죄인으로 간주하는 기독교와 같은 어리석은 종교[footnote]이는 니체의 주장에 대한 요약이지, 논자 자신의 생각과는 거리가 있다.[/footnote]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의미’라는 말은 언어학적 개념을 넘어 실존적인 기능을 갖는 기제로서 사용되고 있다. 공리주의적으로 보았을 때 납득이 되지 않는 종교적 믿음은 인간은 의미를 위해서라면 고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존재라는 인간학에 기초했을 때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
(니체의 이러한 논의를 금욕주의적 이상의 그 발생과정을 비판적으로 추적하는 동시에, 그것의 기만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의 조건’을 이루고 있다는 것(“최상의 ‘어쩔 수 없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의미에의 갈망은 인간을 고통에 종속시키는 부정적인 기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삶의 근본 조건으로서 삶을 유지시키는 힘이기도 하다. 우리는 R1절에서 이 가능성에 대해 좀더 자세히 다뤄볼 것이다.)
3. 우리는 이런 인간학을 [서양현대철학특강]이라는 수업과 우리 자신의 관계를 통해 경험적으로 증명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서양현대철학특강]은 공리주의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왠만해서는 피해야 할 과목이다. 무슨무슨원론같은 담백한 강의도 아니며, 철학과 졸업을 위해 필수로 들어야 하는 강의도 아니다. 화목6교시는 [서양고대철학]의 수금7-8교시에 비하면야 낫지만 그리 괜찮은 시간표는 아니다. 강의안에 쓰인 철학자들의 이름은 초반의 데카르트나 중반의 푸코 정도를 제외하면 생소한 이름들로 학생들이 이에 대한 사전 지식을 넉넉히 가지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게다가 푸코는 철학과에서 수업으로 가르쳐 지지도 않는다. 학점을 잘 받기에 그리 좋은 과목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 수업은 비전공 학생들의 수강 비율이 다른 철학과 수업에 비해 오히려 높다. 개이는 자신의 선(先)지식에 기초한 높은 학점에 대한 기대율이 낮다는 논거로 쓰일 수도 있지 않을까?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생략되고 시시때때로 제출하는 레폿으로 대체한다기에 편해 보일 수도 있다만, 3학년 정도 되면 ‘편하겠다’는 생각보다는 ‘학기말에 고통스럽겠고만’하는 미래를 어렵지 않게 예견할 수 있다.
높은 학점도 생활상의 편리함[footnote]출석을 안 부르는 것은 수강신청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정보였다. [/footnote]도 기대하기 어려운 강의에 “고통”을 자처하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수강신청을 했다. 왜일까? 그것은 우리가 ‘무언가 다른 것,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그것을 니체의 관점을 빌리자면 “고통의 의미” 혹은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바벨의 도서관」에서의 보르헤스의 말을 빌리자면 “변론서”[footnote]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황병하 옮김, 『픽션들』, 민음사, 1997, 137쪽.[/footnote]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보르헤스의 이 단편은 ‘삶’을 증명하기 위해 ‘앎’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가상의 도서관’이라는 하나의 사유 실험을 통해 명료한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주제가 작품의 전부인지는 알 수 없고, 그렇게 주장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다만 이 작품이 우리의 자기인식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 위해 이 단편과 우리의 수업을 비교하며 논지를 전개해 보도록 하자.
보르헤스는 도서관은 “모든 책”, 그러니까 인간이 품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우리가 그것을 찾을 수 있건 없건 간에 어쨌든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소식이 세간에 알려졌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흥미롭게도 “어떤 보물의 주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footnote]『픽션들』, 같은 쪽.[/footnote] 개별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교과서적이고 제한적인 주제만을 다루는 것처럼 느껴졌던 기존의 강의들이 아니라 이 강의의 강의안을 발견했을 때의 우리의 기분 역시 비슷하지 않았을까? 앞서도 말했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강의안을 봤을 때, 우리는 아직 그 ‘앎’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보물의 주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은 ‘앎 자체’보다는 ‘앎에 대한 기대감’에서 비롯되었다. 마치 수강신청은 앎으로 가는 시작임에도 불구하고 수강신청을 클릭하는 순간의 기분은 뭔가 지식을 이미 알게 된 듯한 그런 느낌을 들게끔 한다.[footnote]나는 책을 사거나, 시험기간 도중 시험 이후의 일정을 짤 때 비슷한 감정을 느끼곤 한다. [/footnote]
그러나 <도서관/교수>가 가진 지식의 넓이는 너무 넓어서 우리는 그것을 곧바로 인식할 수 없다. <도서관에 들어설 때/수강신청을 할 때>의 기대와는 달리 총제적인 지식에 대한 직관적인 인식은 불가능했다. <분명히 제한된 수의 알파벳으로만 쓰여 있음에도 불구하고/외국어도 아닌 한국말로 강의가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어떤 맥락이나 질서를 이룬다고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왜 MCV로만 쓰여 있는 책이 특정한 의미를 가지는지/왜 푸코 수업 도중에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가 나오는지 또는 왜 아감벤 수업 전에 베토벤을 들어야 하는지> 명확히 알 수 있지만 적어도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타당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하지만 이렇게 내가 소외된 남의 앎이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실 이 책들은 쓸모없다고 생각하며 불태우는 “정화자들”[footnote]『픽션들』, 139쪽.[/footnote]/과연 교수가 정말 답을 가지고 있을까 회의하는(그래서 결석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도서관」의 화자는 도서관의 전능성에 대해서 뚜렷한 의심을 표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도서관은 분명히 답을 가지고 있으며, 또 꼭 완벽한 답은 아닐지라도 무의미한 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로서 상정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을 크게 화자와 같은 ‘믿는 쪽’과 정화자와 같은 ‘믿지 않는 쪽’ 둘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후자들이 보기에 전자들은 너무 순진해 보일는지 모르겠다. 또 변론서에 집착해 서로 헐뜯고 헤치며 미쳐가는 사람들을 보면 불쌍하고 한심해 보일는지도 모르겠다.[footnote]아직 수업에서는 이에 등가적인 사례들은 없는 것 같다. 도서관을 헤매는 이들만큼의 간절함은 없기 때문인 걸까? 하지만 이해를 하지 못해 심히 고민하는 것 정도는 어느 정도는 수강생들의 일반적인 심정이 아닐까. [/footnote] 하지만 책의 존재를 믿지만 찾지 못한 자의 감정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화자의 절규를 미루어 볼 때, 이들의 믿음이란 게 그리 단순하고 순진한 것만은 아닌 듯싶다.
“그래서 나는 미지의 신들에게 한 사람―단 한 사람, 설사 그게 몇천 년 전일지라도―이래도 좋으니 그 책을 들춰보고, 그것을 읽어본 사람이 있기를 기도했다. 만일 영광과 지혜와 행운이 나의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이 다른 사람의 것이라도 되게 하소서. 비록 나의 자리가 지옥이라 할지라도 천국이 존재하게 하소서. 내가 능멸을 당하고 죽어 무로 사라져 버린다 해도, 단 한 순간, 단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당신>의 거대한 <도서관>이 정당한 것이 되도록 해주소서.”[footnote]『픽션들』, 140쪽.[/footnote]
만약 화자의 믿음이 ‘광신’이라면, 그래서 「유다에 관한 세 가지 다른 이야기」[footnote]『픽션들』, 244-256쪽.[/footnote]의 루네베리처럼 자신이 진짜 ‘앎’(유다가 신의 아들이라는 비밀)을 얻었다고 확신하며 그에 대한 비판이나 무관심은 비밀을 감추기 위한 신의 계획의 일부라고 전도시켜버리는 사람이라면 과연 이런 절규가 그에게 필요했을까? 순백의 믿음을 찾는다면 「도서관」보다는 루네베리를 보는 게 좋을 것이다. 루네베리는 지옥에 가는 게 분명하다는 것을 알며, 또 거기서 자신의 구세주를 만날 것이라는 것을 안다.
인용한 부분은 책이 존재한다는 당당한 확신보다는 변론서가 제발 있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막다른 궁지에 몰린 자의 절박함이 느껴진다. 여기에는 “그 책”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밑에 깔려 있다. 이런 공포가 기저에 깔려 있기에 「도서관」의 화자의 믿음은 양가적이다. 완전한 앎(니체의 말을 빌면 “의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이 실현되지 못해 매우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을 마냥 거부할 수만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 도서관에 머무는 화자는 굳건한 믿음에 기초해 있는 것이 아니다. 니체의 표현을 빌자면 도서관은 그에게 “최상의 ‘어쩔 수 없는 것’”인 셈이다. 강의 내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하지만 출석체크를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강의에 꼬박꼬박 나와 무언가를 듣고 있는 학생들(몇 명이나 될런지는 잘 모르겠다)이 「도서관」의 화자보다 정도는 덜하겠지만 이런 고민에 시달리고 있는 이들이 아닐까?
4. 그런데 만약 정말 “변론서”, ‘앎’을 얻었다면 어떻게 될까? 사실 이건 무의미한 가정이다. 왜냐하면 도서관은 개념상 완전히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수업은 사정이 조금 다를는지 모른다. 수업의 내용은 언젠가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수업에서 찾고자 하는, 찾기를 기대하는 각자의 근원적 질문에 대한 답은 도서관의 “변론서”와 사정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다른 단편들에서 과감하게도(혹은 무모하게도?) 이 질문에 대한 실험적인 답변들을 던지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유다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이외에도 「신의 글」[footnote]보르헤스, 황병하 옮김, 「신의 글」, 『알렙』, 민음사, 1996, 163-171쪽.[/footnote]과 「기억의 천재, 푸네스」[footnote]「기억의 천재 푸네스」, 『픽션들』, 173-189쪽.[/footnote]에는 모든 것을 ‘알아 버린’ 사람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삶을 위해 앎을 찾았지만 정작 그 앎을 찾으면 삶은 별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동굴을 벗어나 태양을 보게 된 이는 플라톤이 전제하듯이(혹은 바라듯이) 다시 동굴로 돌아오지 않는다. 「신의 글」의 치나깐은 자유, 젊음, 불멸, 복수, 문명 등 그토록 바라던 모든 것을 실현시킬 14개의 글자를 알게 되었지만 그것을 아는 순간 그는 삶을 초월하여 그런 세속적 바람들을 더 이상 갖지 않게 된다. 「푸네스」에서는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되는 대신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고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된 대신 자신의 수명보다 훨씬 일찍 늙게 된 기억의 천재가 등장하지만 우리는 그에게서 불행해 하는 기색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세 경우 모두 앎의 풍요로움에 일상적 삶의 감정이나 욕망들은 고이 묻혀 버린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자신들에게 불행한 일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이 단편들에서 (세속적) 삶과 (완전한) 앎을 반대편에 놓인 것들로, 대치되는 것들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전제는 깨달음을 얻은 이가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유한한 인간들은 절대로 “변론서”에 접근불가능하다는 것이 가정된다는 점에서 볼 때 어쩌면 「도서관」에도 어느 정도는 내재된 전제인 듯싶다. 「도서관」은 무한(물론 이 무한의 지위는 더 구체적으로 해명될 필요가 있다)의 도서관 앞에 섰을 때 인간이 어떤 존재로 전락하는지를 명쾌하게 한 문장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모든 것이 이미 씌어졌다는 명백한 사실 앞에서 우리는 폐기처분되어 버리거나 환영으로 돌변해 버린다.”[footnote]『픽션들』, 142쪽.[/footnote]
하지만 이렇게 삶에 대치된 앎이라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질문을 보다 정확히 하자면, 어찌 되었든 <완전한 앎을 얻을 수 없는/초월할 수 없는> 존재인 ‘우리’에게 <완전한 앎/초월된 삶>을 상상하는 것은 어떤 실천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물론 보르헤스가 이 작품을 통해 꼭 어떤 삶의 윤리적 이상을 제시하려고 의도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또 이런 거친 질문은 작품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사유들을 질식시키기도 한다.[footnote]실제로 이 글에서는 바벨의 도서관이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유한/무한이나 필연/우연과 같은 쟁점은 구체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다.[/footnote] 그러나 뭔가 읽었으면 그것을 자신의 삶과 연관지어 다루고자 하는, 그리하여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 욕망이 떠오르는 것은 철학적 사변에만 집중할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또 당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보르헤스의 신비주의적인 (일종의) ‘결론’에 심취하기보다는 지금까지의 논의에 기초해 나름의 실천적인 결론을 ‘쥐어짜’ 보고자 한다.
R1. 우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지금까지의 논지를 따를 때 ‘존재의 불안’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던 인간의 유한함 혹은 불완전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통에 매달리게끔 하는 부정적인 기제로만 느껴진다. 하지만 불안은 꼭 ‘고통만의’ 조건인 것일까? 어쩌면 기쁨이나 활력같은 삶의 긍정적 요소들 역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치나깐은 14개의 문자를 알게 되면서 신의 괴로움과 모멸감을 잊는 것만이 아니라 누릴 수 있는 행복과 영광도 모두 포기한다. 이것이 역으로 시사하는 바는 유한함은 인간의 삶의 부정적 면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긍정적인 면 역시 수반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윤리적 지침은 “변론서”의 앎을 얻는 것이 아니라 앎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덜어내는 것이 아닐까? 앎이나 기억 못지않게 무지나 ‘망각’ 역시도 능동적인 삶의 조건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니체는 『도덕의 계보』의 2부 1절에서 망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망각이란 천박한 사람들이 믿고 있듯이 그렇게 단순한 타성력vis inertiae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일종의 능동적인, 엄밀한 의미에서의 적극적인 저지 능력이며, 이 능력으로 인해 단지 우리가 체험하고 경험하며 우리 안에 받아들였을 뿐인 것이 소화되는 상태(이것을 ‘정신적 동화’라고 불러도 좋다)에 있는 동안, 우리 몸의 영양, 말하자면 ‘육체적 동화’가 이루어지는 수천 가지 과정 전체와 마찬가지로, 이것이 우리의 의식에 떠오르지 않는다. (…) 여기에서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지 장치가 파손되거나 기능이 멈춘 인간은 소화불량 환자에 비교될 수 있다. (…) 그는 무엇도 ‘해결’할 수 없다.”[footnote]『도덕의 계보』, Ⅱ.1, 396쪽. 이 절과 함께 니체의 망각이론의 주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부분으로는 Ⅰ.10 절이 있다. “자신의 적, 자신의 재난, 자신의 비행(非行)까지도 그렇게 오랬동안 진지하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것은 조형하고 형성하며 치유하고 또한 망각할 수 있는 힘을 넘치게 지닌 강하고 충실한 인간을 나타내는 표시이다.”(370쪽)[/footnote]
이 인용문을 이해해 보기 위해, 그리고 유한함-무지-망각이 삶의 능동적 조건이라는 주장을 구체화하기 위해 들뢰즈의 니체 독해를 우회해 보도록 하자.[footnote]질 들뢰즈, 이경신 옮김, 『니체와 철학』, 2001, 민음사, 201-6쪽.[/footnote] 들뢰즈는 우선 프로이트가 “위상학적 가설(hypothèse topique)”라고 부르곤 했던 삶의 도식을 설명한다. 그것은 흥분을 수용하는 것과 그것을 항구적인 흔적으로 보존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작용으로서 하나의 체계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 유명한 (흥분을 받아들이는) 의식과 (그것을 흔적으로 보존하는) 무의식이라는 인간 정신에 대한 이원론적인 구분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들뢰즈가 보기에 프로이트에 앞서 이 가설을 제시했으며, 나아가 프로이트 자신보다 이 가설을 발전시킨 사람은 니체이다.
프로이트(혹은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프로이트)가 의식이 정신적 활동에 끼치는 영향력을 상대화하기 위해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만든 반면에, 니체는 오히려 이원론적 구분을 통해 의식이 가진 적극적 기능에 초점을 맞춘다. 만약 정신이 무의식의 형태로만 존재한다면, 그리하여 흥분이 주어지는 대로 흔적으로 남게 된다면 니체의 은유처럼 우리는 “소화불량”에 걸린 것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어제를 기억하는 데 오늘을 다 쓰기 때문에, 오늘을 살 수는 없는 기억의 천재 푸네스처럼. 니체 윤리학(?)의 유명한 개념쌍인 “고귀한 인간”과 “노예”의 구분을 위한 단서가 여기에서 하나 제시된다. 노예, 즉 원한의 인간의 주요한 특징은 바로 “놀랄 만한 기억력”이다. 니체에게 있어 이는 결코 정신적 능력의 우월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어떤 것을 잊는 데 있어서의 그 무능력”, “흔적 이외의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footnote]『니체와 철학』, 208쪽, 강조는 인용자.[/footnote]을 의미한다.
반면 “고귀한 인간”은 경우는 설사 원한을 가지게 되더라도 “바로 잇달아 오는 반작동으로 수행되고 약해지기 때문에 해독을 끼치지 않는다.”[footnote]『도덕의 계보』, 370쪽.[/footnote] 이렇듯 흔적이 의식에 침범하여 인간의 자율성을 박탈하는 사태를 막아주는 “초-의식적인 적극적 능력”이 바로 망각이다. 항상 과거에 자신이 받아들인 것에 집중하는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원한의 인간과 달리, 고귀한 인간의 의식은 망각을 통해 “새로운 수용성에 의해서 항상 재생되는 껍질, <새로운 것들을 위한 장소의 새로운 영역>”으로서 남게 된다. 망각(앎을 덜어냄)은 더 이상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수동적으로 촉발되는 현상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의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 행하는 매우 능동적인 행위, 하나의 주요한 능력으로서 규정된다.
물론 보르헤스가 망각을 하나의 능력으로 긍정하지 않는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는 「푸네스」를 마치면서 푸네스에 대해 “나는 그가 사고를 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의심이 들곤 했다. 사고를 한다는 것은 차이점을 잊는 것이며, 또한 일반화를 시키고 개념화를 시키는 것이다”[footnote]『픽션들』, 188쪽.[/footnote]라는 말을 한다. 어쩌면 이 단편 전체는 니체의 통찰을 훨씬 간단하고 짧은 분량으로 소화해낸 텍스트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여기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싶다. 니체에 근거할 경우, 우리의 유한함, 불완전성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 그것은 완전한 앎, 변론서의 결여이기에 앞서 그런 과잉된 지식으로부터 삶을 지키려는 적극적인 힘의 작용의 결과인 것이다. 「도서관」은 「신의 글」과 달리 그리고 「푸네스」보다는 다양하게 ‘참된 지식’을 얻지 못한 인간들의 군상의 구체적인 묘사를 제공하지만, 도서관에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을 능동적으로 묘사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자신이 다루고자 하지 않은 주제를 다루지 않았다고 해서 비판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작품이 인간 삶의 제한적인 측면만을, 니체에 따르자면 근원적이지 못한 측면만을 다뤘다고 이야기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R2. 헌데 이렇게 꼭 결론을 쥐어짜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보르헤스가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보이는 주제에 대해 ‘왜 관심을 안 보였느냐’는 식의 강압적인 질문을 던져가면서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른, 어쩌면 가장 근본적일 수 있는 다른 결론을 내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보르헤스랑 우리랑은 애초에 공감할만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크게 그 사정이 납득돼 공감이 되는 고민1과 대체 이런 고민을 왜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고민2, 이렇게 두 가지 종류의 고민이 있다고 쳐보자. 적어도 프리모 레비의 경우, 그가 겪은 육체적/정신적 고난을 미루어 봤을 때 우리는 그의 고민에 어떻게든 공감을 할 수 있기에 고민1에 속한다. 하지만 고민2의 경우, 보르헤스의 작품에서 유한과 무한의 논의같은 고민들에 공감을 하는 것은 경험적으로는 매우 어렵다.
어쩌면 보르헤스의 고민은 거칠게 말하면, 맑스주의적 용어로는 ‘쁘티부르주아적 근성’, 옛말로는 ‘팔자좋은’ 소리, 요즘말로는 ‘허세’에 다름 아닌 것이 아닐까? 굳이 거친 말들을 사용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만약 이런 격렬한 거리감을 느끼고, 실제로도 서로가 고민하는 문제가 다른 사람이라면, 보르헤스의 고민에 공감할 필요가 있을까? 수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제시되는 교재, 선생님의 말 등등 제공되는 가르침에 ‘공감하는 척’을 하곤 한다. 하지만 조금만 솔직해지면, 강의실 밖으로 조금만 걸어 나가면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물론 이 ‘척’을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연기’의 과정을 통해 지식이 축적되거나 깨달음을 얻으면서 정말로 진짜 그 고민에 공감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 배움의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배워서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경우가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후자일 경우, 네가 배움이 모자라서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다만 전혀 그 ‘다른 삶’을 원하지 않는 이야기에게 이런 논변은 설득력이 없으며 때로는 황당하게 들리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상황이라면 모를까, 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아예 보르헤스와 같은 텍스트와의 접점이 아예 부재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 글 초두에 말했듯이 우리는 어떤 ‘기대’를 가졌음을 수강신청 행위를 통해 표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글은 그런 접점에서 출발해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에 제시된 흥미로운 사유의 가능성 중 하나를 나름대로 쫓아가고, 좀더 욕심을 부려 여기에 기초해 다른 단편들과 니체 등 다른 텍스트들을 함께 읽으며 윤리적 시사점을 도출해 보려고 시도한 글이다. 보르헤스와의 희미한 접점을 가졌다고 생각되는 그 수강생들 중의 한 명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기대’라는 접점이 보다 즐거운 만남으로 이어졌는지는 한 편의 글을 작성해본 지금도 불분명하게 남아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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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게 된 상황에 있어서나"가 이런 의미였던 거죠...? ㅎㅎ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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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상황뿐만 아니라 '그래도' 정직하려 임하려는 자세(저의 어림짐작일련지?) 모두 구멍 님의 혈고(血稿)에서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ㅎㅎ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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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우리는 어떤 강의를 선택하는 행위에도 확고한 존재에의 열망, 자신이 발을 딛을 안정된 토대를 얻고 싶어 하는 그런 열망이 잠재해 있다는 것이다.<-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요즘의 젊은이들은 이러한 경향이 지나치게 커져 있는 것 같습니다. 뭐, 간단히 말해 애들이 어른이 되질 못하고 있다고 봐도 될 것 같은데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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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구멍이라는 닉을 사용하시는가 보군요 ㅎㅎ 저도 닉을 선점당해 좀 이상한 이름을 쓰고 있다능 ㅠㅠ말씀해 주신 것에 덧붙이자면 저도 어쨌든 "젊은이"는 맞는 것 같은데, "요즘"이 특히 그러지 않는가 하고 여쭤보신다면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뭐 일단 글을 염두에 두었을 때도 대학생들을 염두에 둔 것이 맞지만, 한편으로는 안정된 토대를 얻고자 하는 열망은 훨씬 보편적인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불안정성에서 오는 공포는 세대보다는 시대에 특정한 것이 아닌가 싶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성숙 문제에 관해서는 이런 사회적인 괌점을 취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어른"이 되기 싫어서 '안' 된다기보다는 수강신청에서나 자존심을 세우게 하는 상황이 그리 '못'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조건이 주어졌는데 생떼를 쓰는 경우도 있겠지만, 조건이 주어지지 않을 경우를 생각하지 않으면 성숙론은 유의미한 개입보다는 개탄조의 비난으로 전락하기 쉽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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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에 전적으로 수긍이 갑니다. " 뭐, 간단히 말해 애들이 어른이 되질 못하고 있다고 봐도 될 것 같은데요" 라는 식으로 말해서 마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겼을 것도 같네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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옙, 제가 좀 민감하게 반응한 거 같기도 한데요, 요즘 들어 스스로가 말하는 것이 '개탄'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다보니 또 그런 것 같습니다ㅎㅎ제가 일본 문화에 그리 익숙하지 않아서 말씀해 주신 작가들은 잘 모르겠군요ㅎㅎ 그래도 주변에 일본문화에 꽤나 익숙한, 소위 "오德"을 쌓은 분들이 많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주워듣기는 합니다. '일본 소설'이라는 게 단지 취향만이 아니라 한 세대나 집단의 정서를 반영한다면 개인적 관심이 없어도 접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기도 하구요. 말씀해 주신 텍스트 추천은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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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 박가분씨랑 친분이 있지 않으신가요? 박가분씨 블로그에서 게슴츠레님과의 논쟁에 덧붙여....였나 뭐 그런 포스트를 본거같은데, 박가분씨도 "오를 좀 쌓은" 걸로 아는데 ㅎㅎ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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옙, 박가분 씨랑은 현재 같은 학교에 재학 중입니다. 학교 다닐 때 알게 된 것은 아니고 블로그를 통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알게 되었지요.말씀해 주신 '논쟁'에 대해서는 일단 저 자신이 생각이 정리가 덜 된 상태여서 그리 만족스럽게 말을 하지 못한지라 논쟁이라 부르긴 좀 민망하네요.ㅎㅎ 잘은 모르지만 박가분 씨 역시도 일본문화에 대해서 잘 아시는 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