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로렌조키에사

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5/13
    최근에 읽은 것들 100513
    닉네임

최근에 읽은 것들 100513


평소에 지속해 오던 고민과 관련하여 재밌는 시사점들을 던져주는, 다시 말해 가려운 곳을 좀 긁어주는 텍스트들을 몇 개 접했다.


1. 딜런 에반스, 「라캉에서 다윈으로」, Clockoon 옮김, 2005.

이 텍스트에 대한 촌평을 달면서 평소 한국의 라캉주의(전문적인 학술집단은 아니지만 이해가 깊든 얕든 라캉의 개념을 가지고 쓰여진 담론 일반을 지칭한다)에 느낀 점들을 함께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일단 지갱프 까페에 달았던 리플을 옮겨 놓아 보자.

정신분석 관련 서적들을 (적어도 지금보다는) 열심히 읽던 때, 주변에 심리학과 친구들과 정신분석의 과학성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었더랬습니다. 저도 정신분석에 대해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거니와, 그 친구들 역시 심리학에 대해 마찬가지여서 '정신분석은 신비주의' VS '(자아)심리학의 전제로 평가하면 안 돼' 식의 서투른 말싸움으로 끝났더랬죠. 하지만 이후에 정신분석이라는 학문 분과의 독자적 지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인 인간의 정신을 다룬다고 하는 다른 학문분과들과 소통할 수 있는지, 소통하거나 소통하지 못할 경우 이유는 무엇이며 그것이 가지는 학문적/실천적 함의는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 보게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신분석의 논리를 내적으로 철저히 설명해 정신분석의 고유성을 규명하려는 글들은 있어도, 다른 학문(대표적으로는 심리학)과의 차이점 혹은 구별되는 이론적 쟁점들을 집어가는 글들은 그리 많지 않더군요. 2005년 프랑스에서 출간되었다는 정신분석 흑서와 이에 대한 자크 알랭 밀레의 지극히 '전형적인' 반응을 보면 이런 상황은 국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8300) 이렇게 서로간의 쟁점조차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정신분석 이론들이 한국에 수입되어 들어오고 이것이 (학계보다는) 출판시장이나 블로그 공간들에서 '정신분석의 과학성'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들이 자주 발발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문제의식 아래에서 Clockoon님이 번역하고 계시는 딜런 에반스의 글은 그의 논지에 찬반은 차지하고서라도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글을 쓰든 번역하든 읽고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분석이 하나의 '의료행위'로서 한국 사회에 제도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정착되는 것이 아닐까요. 정신분석이 의학을 넘어 철학/사회과학/문화이론에 풍부한 이론적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학문 자체는 결국은 구체적 상황에서 환자를 어떻게 치료할까 고민하던 와중에 탄생된 것입니다. 환자와의 만남이야말로 정신분석이 형이상학화하는 것을 막는 '근거' 내지는 '대상' 아닐까요. 개인적으로는 임상이 실천되지 않는 이상 이런저런 논쟁들이 결국 서로 하고 싶은 말만 떠드는, 자기에게 유리한 논거만 모아 나열하는 공론(空論)장이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렵습니다.

에반스의 글은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아르헨티나에서 스스로가 "지식에 대한 민족주의적 자신감"에 빠져 있지 않은지 반성하며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을 배우고 훈련하기 시작하여, 미국에서 정신분석의 "근거"에 관한 질문을 던지게 되고 그 시기 핑커나 데넷 등의 다윈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인간 정신에 대해 이해할 다른 방법을 찾게 되는 개인의 지적 여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부분은 라캉이 정신분석의 생물학적 혹은 행동학적 근거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어떻게 구조언어학을 참조하며 자신의 체계를 건축하며, 이것이 이제는 진화심리학을 택한 자신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문제가 있는 시도인지에 대해 논증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보았을 때 이 텍스트가 던져주는 흥미로운 시사점들은 이런 것들이 있지 않나 싶다.

1)지리적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라캉주의의 위상. 에반스는 지적 여정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 중 하나는 국가별로 너무 달랐던 라캉주의에 대한 지적 분위기와 정신분석의 사회화 정도였다. 항상 어떤 지식이 주목받는 것은 그 지식의 내적 논리의 치밀함이나 보편성 때문이라기보다는 외적인 상황(지식수입상의 관심, 어떤 학문이 들어오는 역사적 계기들, 정신분석의 경우에는 임상 실천의 사회화 정도)에 의한 경우가 많다.
 프랑스나 아르헨티나에서 정신분석이 엄연한 분과학문으로 인정되는 것은 그만큼 정신분석가 훈련 과정이 제도화되고 정신분석 임상이 일상화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지금 한국에서 정신분석의 이론적 위상을 명확히 하기 위해 할 일은 정신분석의 진리를 강변하는 것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정신분석이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 잘 되고 있다면 왜 잘 되는지 문제가 있다면 왜 문제가 있는지 따져보는 작업이 아닐까.

2)라캉 텍스트에 대한 신비화. 현재 라캉을 직접 읽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만 라캉의 개념들 상상계, 상징계, 실재, 큰타자, 대상a, 주이상스 등등을 이런저런 글에 쉽게 활용하는 예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라캉이 일종의 지적 악세사리가 된 셈인데 이렇게라도 라캉이 대중화되면 좋은 것이 아니겠냐는 관점을 필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이런 논의들이 지극히 불철저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충격을 생각하면 오히려 훨씬 돌아가는 길이다. 그리고 이는 라캉주의자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에반스는 그 사례다.
 라캉의 모호함에 부딪쳤을 때 에반스의 경우에는 진화심리학이라는 다른 길을 걸어갔지만, 오히려 라캉에 대한 더 철저한 독해로 방향을 트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작년에 철학아카데미에서 이성민 씨가 강의한 로렌조 키에사의 [주체성과 타자성](강의를 진행하면서 번역은 모두 끝났고 아마도 올해 안에는 출간되지 않을까 싶다)같은 책은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상상계/상징계/실재 이렇게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유행하는 해석과 달리 특정 세미나(이를테면 7, 11, 20)를 특권화하지 않고 나와있는 라캉의 모든 세미나와 텍스트들을 인용하며 라캉의 이론적 전개를 일관성을 가지고 철저히 추적하려는 작업이다. 우리는 여기서 키에사가 과감하게도 상이한 텍스트 전거를 들며 라캉의 '혼동'을 지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그는 라캉을 기각하는 것이 아니라 라캉이 말하고 싶었지만 좀 더 구체화해서 말하는 것을 시도한다.
 만약 에반스가 미국 비교문학과에서의 라캉 수용에 위화감을 느꼈을 때 키에사와 같은 성실한 연구자 동료를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가정과 별개로 에반스가 진화심리학과 라캉주의를 이론적으로 비교하는 대목도 흥미로운 부분 같다. 그리고 과연 라캉이 생물학적인 요소를 자신의 이론에 모두 삭제하거나 부차적인 계기로만 축소했을까? 이것 역시 흥미로운 질문일 것이다. 라캉은 과연 생물학적 논거를 결코 가질 수 없는지...

3)라캉주의자들의 냉소적인 태도. 물론 라캉이 옳았고 진화심리학이든 뭐든 그에 반대하는 학문들 자체가 틀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학문이 얼마나 옳았든 간에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에 문제를 제기할 경우 그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것이다. 헌데 에반스가 역으로 되돌려 받은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진실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라캉주의적 "진실"의 개념에 대한 이야기를 이래저래 전개할 수 있지만, 그런 이론적 입장과 좀 더 상대의 이해를 고려하는 소통 방식 자체가 과연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이건 듣는 이의 기분을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말하는 이의 생각을 널리 공유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지점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적지만은 않은 라캉주의자들은 라캉에 대한 비판을 상대의 지적 한계 또는 실존적 입장의 맹목에서 오는 "징후"로 받아들이곤 한다. 한국에서 엄격한 임상의 부재는 이렇듯 라캉을 읽은(그것도 살짝) 이들을 '분석가 놀이'에 빠지게끔 방치하였다.

4)정신분석은 의학인가 철학인가. 에반스가 라캉을 비판하는 주된 논점 중 하나는 생물학적 근거가 불철저하며 논증이 불가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학문의 정당성이 생물학적 논거를 가져야 할지는 굉장히 어려운 주제이며 나는 만약 라캉주의적 임상이 효과를 발휘한다면 그것을 자신의 "근거"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의 라캉주의는 의학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에반스는 라캉주의적 임상이 그닥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개인적이지만) 임상의 결과 역시 함께 라캉 비판의 논점으로 제시하고 있다. 만약 라캉을 '철학'으로 읽는다면 생물학적 논거뿐만이 아니라 의학적 논거 역시 들지 않아도 될런지 모르겠다. 그리고 오늘날 담론시장에서 라캉이 유행한다면 이런 의미에서 유행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이 의학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인하면서 과연 존립할 수 있을까? 의학으로서의 지위를 분명히 하는 것과 철학으로서의 지위를 분명히 하는 일은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일까?

에반스의 라캉주의자에 대한 묘사는 정말 남의 일이 아닌 것 같다. 당장 머릿속에 나를 포함한 몇몇 얼굴들이 곧바로 떠오른다. 이렇게 이론적으로나 인성적으로나 맹목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라캉주의가 사람들로 하여금 불만을 갖게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라캉주의를 옹호하고 싶다면 사람들을 '반지성주의'라고 매도할 것이 아니라, 라캉주의에 대한 질문들이 공격적이고 거칠더라도 그것을 자신을 반성할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대중들 앞에서 지적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유효성을 입증해야 한다는 모든 학문에 요구되는 의무는 라캉주의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다.


2. 대니얼 데닛, [[자유는 진화한다]], 이한음 옮김, 동녘사이언스, 2009.

데닛은 여기서 생물학적 환원론을 비롯한 결정론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한다(혹은 할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인간의 삶이 생물학적 과정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는 자연주의적 전제는 인간의 자유를 봉쇄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은 판단을 위한 인과성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기에 인간의 자유를 증진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비결정론은 흔한상식과 달리 오히려 자유의 가능성을 파괴한다. "전적으로 무질서하고 예측 불가능한 환경에서는 진짜 눈 먼 행운 외에는 회피할 수 있다는 희망이 전혀 없다."(72쪽) 물론 반대자들은 결정론 하에서의 자유는 가짜 자유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데넷이 보기에 가짜 자유와 진짜 자유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비결정론의 옹호자들이 후자를 강조할 때, 이 자유란 마치 신과 같이 세계를 맘대로 할 전능한 자유를 의미하는 매우 과잉된 개념일 것이다.

"자연주의는 결코 자유의지의 적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의지에 긍정적인 설명을 제공하며, "모호하고 전전긍긍하는 형이상학"으로 자유의지를 과학의 마수에서 보호하려고 시도하는 견해들보다 사실 자유의지의 당혹스러운 측면들을 더 잘 다룬다."(36쪽)

"마지막으로 '피할 수 있음'이 결정론과 양립할 수 있는 것처럼, 불가피성도 비결정론과 양립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해 두자. 무언가에 관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불가피한 것이다. 당신이 결정되지 않은 번개에 맞아 죽는다면, 돌이켜 볼 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다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다. 당신은 사전 경고를 전혀 받지 못했다. 사실 번개가 칠 벌판을 가로질러야 하는 상황에 처할 때, 번개가 치는 시간과 위치가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편이 당신에게는 훨씬 낫다. 그러면 당신이 예측할 수 있고, 따라서 회피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결정론은 불가피성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친구이지 적이 아니다."(95쪽)

여기서 데닛이 시도하는 것은 생물학주의로 돌아가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초자연적인 영혼"을 "자연적인 영혼"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자유의지는 "영구적이고 변함없는 안정하고 비역사적인 구성물"이 아니라 생명의 여명기에서부터 시작된 진화의 "역사"를 거치며 형성되온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자유의지 대 (생물학적) 인과과정>이라는 오래된 대립을 해체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이 책에 굉장히 고무되었던 것은 데닛의 논리가 그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는 별개로 사회에 법칙이 있다고 상정한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부정된다고 보는 자유주의적 자유 개념을 비판하기 위한 주요한 논리적 기초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과연 구조주의나 마르크스주의 등 사회를 일관적인 법칙에 따라 설명하려는 시도들을 인간의 자유를 철학적으로 방어한다는 입장에서 반박하는 논리들을 볼 때마다 이들이 말하는 자유 개념이 매우 추상적이고 오히려 부정적(억압의 반대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이고 소극적인 규정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구조주의나 마륵스주의자들 중 일부는 숙명론적 비관주의에 반대한다고 하면서 이들의 편을 들기도 하였다.

데닛의 논지는 이런 경향들을 지적으로 비판하기 위한 훌륭한 발판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또 한편으로 인간을 철저히 자연에 '내재적인 과정'의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이런 입장이야말로 신을 인간의 영혼이나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 않는 무신론의 유일한 가능성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물론 이런 기대들은 독서를 통해 검증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3. 한국에서의 탈식민주의 수용에 관한 술자리 이야기 하나

술자리인지라 레퍼런스는 없지만 인상적인 이야기여서 한번 기록해 놓아 본다. 일제 시대 어떤 제주도 해녀 분이 행정기구를 비판하는 무언가를 했다고 한다. 해녀 분은 일제에 대항한다는 민족적 사명의식을 가졌다기보다는 어떤 행정적 부조리에 저항을 한 것이라고 한다. 헌데 이를 연구하기 위해 민족주의 역사가들이 찾아왔고, 이 투쟁을 일제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투쟁으로 해석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연구 결과가 공표되자 그 지방에 있던 우익들이 엉뚱한 일을 했다며 해녀를 강간했다고 한다.

대강 이런 내용이 어떤 탈식민주의를 표방하는 학자에 의해서 발표되었다고 한다. 재밌는 것은 여기서 그 분이 추출한 교훈인데 민족주의를 벗어나는 하위 주체의 목소리에 민족주의적 해석을 부과함으로써 폭력적인 결과가 빚어졌다는 것이다. 헌데 직접적인 책임은 강간을 행한 우익들에게 물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학자는 담론의 힘을 너무 지나치게 평가한 나머지 담론이 강간을 한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알튀세르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하지만 무지나 혐오에 기댄 '보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마키아벨리가 이것을 잘 보여주였다. 즉 그것은 모든 군사 배치 중에서 가장 취약한 요새라는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여기서 말한 세 가지 이야기들은 자기반성이 철저하지 않은 사유, 무지의 보호에 기댄 사유가 처할 수 있는 위험에 관한 사례들이라고 볼 수 없을까? 철학적 또는 의학적 합리성에 대한 반성을 거치지 않은 라캉주의, 생물학적 설명을 환원론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비결정론의 자유의지 개념, 황당한 논리로 새로운 사유를 자임하는 기묘한 탈식민주의...진영논리에 입각해 서투른 비판들에 매섭게 달려드는 것보다 남보다 가혹하게 자기를 돌아보아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