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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1/06/13
    글을 써보자 + 왜 분노하지 못할까(2)
    닉네임
  2. 2011/02/19
    정직과 부정직(4)
    닉네임

글을 써보자 + 왜 분노하지 못할까

1. 이렇게 번호로 시작하는 포스트는 확실히 읽는 부담이 덜하다. 우선 길어야 2~3문단 내로 한 논지가 끝난다는 예감이 든다. 이 예감은 "끝까지 안 읽어도 메세지 하나는 읽겠군"이나 "하나 읽고 쉬었다 또 하나 읽는 식으로 읽으면 되겠군" 식의 안도감으로 이어진다. 음식으로 비유를 하면 크라운산도와 냉면으로 예를 들 수 있겠다. 질소포장된 봉지과자들과 달리 크라운산도는 한 봉지를 까도 2개만 먹으면 되지 전체를 먹지 않아도 괜찮다. 냉면은 그냥 먹으면 면을 씹고 끊느라 지치지만 가위로 잘라먹으면 먹었다 숨좀 고르고 다음 젓가락을 들 수 있다. 

 

그동안 뭔가를 써야겠다 싶은 생각을 많이 했다. 펜으로 종이에 글을 쓰는 습관은 메모 수준도 들이지 못했으니 안 되고, 컴퓨터를 잡게 되었다. 워드는 쓸쓸했고, 트위터는 지금도 잘 쓰고 있지만 뭔가 다른 글쓰기를 해야 겠다 싶었다. 호흡을 가진 활자 맛을 알아서 그런 것인지, 그나마 상대적으로 익숙하다 싶은 게 글인데 긴 글 비슷한 것이라도 쓰지 않으면 그야말로 '탈숙련 노동자'가 된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그냥 자기와의 대화 시간을 늘려보겠다 싶은 심산인지. 아마 이렇게 주저리대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모두이겠지. 

 

항상 마음은 먹지만 잘 안 되는 것이 한정식같은 블로그를 꾸리려 마음을 먹지 말자는 것이다. 재료도 없고 들일 품도 없는 주제에 당연하다. 하지만 옆동네 맛집이란 것들이 3분요리같은 것을 상에 올려놓고서 한정식이네 하고 있는 꼴을 보면 죄다 뒤짚어 엎고 싶은 심정이 들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긴 글'을 못 쓰다 보면 단타성으로 투덜거리게 되는데 이 꼴이 사실 징징대는 거랑 그리 별다를 바가 없고, 스스로가 뻔뻔하지 못해 이런 점을 생각해 보면 결국 나도 저치들이랑 같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안 쓰니 저치들보다 훨씬 못한 인간이 아닌가....생각을 하면 열불이 터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긴 글을 앞으로 쓰겠다는 장담은 차마 호기롭게 하지 못하겠다. 그렇다면 난 대체 뭘하고 있는 것인가. 아마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이게 내가 원해서 그런 건 아니니 이해 좀 해달라는 말을 길게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걸 써서 어쩌자는 거지...힘들게 달려온 사람들에게 상은 아니어도 물이라도 줘야 할텐데 "아무것도 없음 ㅈㅅ ㅋ" 이러고 있으니.... 게다가 반성의 전시를 통해 블로그들에 흔하디 흔한 넋두리들과의 '차별화'를 꾀하고 있으니 이건 돈까스 위에 치즈 한장 얹어놓고 치즈돈까스라고 우기고 있는 꼴이다...

 

2. 얼마 전 자전적 텍스트에 대한 논평 하나를 들을 일이 있었다. 가장 최근인 대략 4개월 전 그 텍스트에 대해 들은 평은 "지인이 아니면 볼 필요가 없다" "너무 오글거린다" "항상 끝까지 하는 거라곤 하나도 없는 회피의 삶이었다" "별 특이한 것도 없는데 엄청 길다"는 것들이어서 나 스스로도 그런 면이 있구나하면서 또 역시 한 때의 기억으로 남기려던 텍스트였다. 본래 제한적 시간에 제한된 사람들과 나누고자 했던 글이고 그래서 더이상의 피드백은 없이 이렇게 끝났구나 하고 있던 와중에 최근에 한 피드백을 더 들을 수 있었다.

 

우선 피드백 자체가 왔다는 것이 긍정적이었으며 내용 역시 매우 긍정적인(혹은 낙천적인) 것이었다. 그 평은 나를 위로해주는 것 또는 나로 하여금 스스로를 기만케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었는데 이 나이 때 이렇게 사적인 부분에 대한 정리를 해놓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자전적인 것은 나중에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다"보다 내 비대한 인정욕의 갈증을 달래주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지만 이 말은 지금 해봤자 아무 짝에도 의미가 없다. 사적인 것에 집중한다는 말 자체도 좀더 구체화되어 반성의 거울로 동원되어야 할 테고 추진을 해야 뭐라고 말을 하지....

 

이런 듣기 좋은 말보다 훨씬 크리티컬한 지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텍스트 어디에도 "화를 낸 일"이 없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는 과거를 돌아보는 데 있어 분노와 같은 격렬한 감정이 전혀 섞여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뭔가 쓰고 싶었다.

 

트위터를 들여다 보면 사람들이 온갖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을 본다. 정부의 정책부터, 진보정당의 배신, 폭리를 취하는 사학 재단, 오역이 난무하는 번역서, 서비스가 안 좋은 식당 등등. 이 일들에 있었던 시간에 내가 살았고 또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이 일들과의 거리가 그리 '멀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이런 일들에 별로 화가 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대학 시작부터 순차적으로 쓰자면 학생운동권의 과반공동체에 대한 소홀함, 과반공동체에 헌신하지 않는 이들의 비협조, 고도의 이론서를 접하지 않는 세속인의 활자생활, 운동과 세상을 망친다고 본 얼치기 이론가들과 그의 워너비들, 나태한 교수들 등의 대상이 있었던 것 같다. 헌데 어느 순간 나는 이런 분노의 전부 내지는 거의 모든 것들이 굉장히 '거짓'되었다고 느껴졌다. 욕먹을 각오하고 말하면 난 솔직히 프롤레타리아의 애환은 물론이고, 저기 저 철거민들의 고통조차도 공감이 되지 않는다. 동일시가 되지 않는다. 내 삶의 어떤 장면과도 중첩되지 않는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솔직한 정서의 최대치는 "안타깝다"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에게, 그녀들에게 도약하기에는 내 상상에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너무 없다.

 

나 자신이 이런 '장애'를 안고 있다보니 남들의 분노와 같은 감정을 볼 때도 매우 엄격한 기준이 작용된다. 격렬한 감정을 믿기 힘들다. 그 감정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어떤 특이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기민한 노력과 항상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애씀을 부인하거나 죄악시하고 싶진 않다. 난 이것을 사회관계의 중요한 기초 중 하나로 여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게 '정직'한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직의 절대적 기준을 상정하지 않더라도 상대적으로도 그것도 꽤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 공간에 온 것은 굉장히 '의식적'인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아마도 큰 일이 없는 한 이렇게 의식적으로 이 공간에서 집중할 수 있는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려 할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이 바닥의 글을 보고 한소리를 얹어왔다는 관성이 이런 의식적 관심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크게 절약해 줄 것이다. 어느 순간들에는 완전히 대체해 주기는 하겠지.

 

굉장히 허무주의적일 수 있는 내용을 썼는데 요즘은 그냥 사람 사는 문제가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자신을 어딘가로 억지로 끌고 가거나, 익숙한 모에 요소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 그 곳에 자리잡고 사는 것. 그래서 사람의 삶은 그 어떤 외적 내적 굴곡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일관성을 띠게 된다. 그 일관성들이 여러 자극을 받고 또 자신을 관철시키며 삶의 형태를 만들어 간다. 하지만 그렇게 형성되는 삶이란 것이 그 전개가 예정된 형태의 것은 아니다. 삶은 예측불가능했고 여전히 그렇다. 하지만 어떤 길을 따라가고 있는 것은 맞다. 다른 야심은 많이 죽었지만 이런 부분들을 곱씹으며 살아가고 싶다는 소망 정도는 가지고 싶다.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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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과 부정직

두리반이나 홍대 청소 노동자 투쟁. 이 둘의 소식을 다리 건너서 전해 듣고 있고 투쟁의 정당성에 대한 트위터 논쟁도 보았으며 이 과정에서 스스로 뭔가 말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이런저런 입장을 정리해 보았더랬다.

헌데 정작 어제 이 두 기사를 읽고 나니 비로소 '직접' 화가 좀 나기 시작했다.

강제철거, 단전 그러나 '두리반'/[시사서울] (http://www.sisaseoul.com/news/articleView.html?idxno=37772)
[한홍구-서해성의 직설] “정말이지 빨갱이가 안될 수 없겠어요”/[한겨레]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63948.html)

이런 '뒤늦은' 화남에 나는 내가 어떤 사태, 특히 지금 여기, 현재 가까이에서 일어난 일을 접하고 해석하는 방식에 뭔가 작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왜 싸우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해당 투쟁과 나아가 투쟁 일반의 정당성과 현실성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봤던 것일까? 왜 싸우는지 공감도 하지 못했으면서 그저 아는 사람들이 화를 내니까, 어쨌든 재개발이니까 하는 식으로 간편하게 스스로의 정신적 위치를 투쟁의 편에 놓았던 것일까? 현실적 투쟁의 철학적 일반화, 타성적이고 관성적인 분노, 성격은 상이하지만 어쨌든 '나의 현실'이 아직 아닌 것을 마치 그런 것인마냥 섣불리 취하는 두 가지 방법들.


추신1) 어쩌면 이 모든 고민은 나 자신에 대한 불신이라는 또다른 경향에서 비롯된 것일런지 모른다. 나는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자각하기 시작하면 이를 말하거나 표현하는 것보다 정말 그러한지 스스로가 지칠 때까지 반문한 뒤 결국 아니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으로 끝내곤 했다(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야말로 돌다리를 부서질 때까지 두드리기. 어쩌면 부정직이라는 자기판단 역시 이런 경향의 부산물일 수도 있겠다 싶구나.

추신2) 이런 반성을 또 하나 하게 된 계기는 지적 재산권 관련 논쟁들의 패턴에 대한 단상이었다. 문화산업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 문제가 나올 때 무단복제나 다운로드 떡밥이 맹목적인 것은 맞다. 총체적으로 볼 때 이는 더 노동자들에게 더 심각하고 본질적인 타격을 가하는 착취나 수익분배구조를 놔두고 대중들의 비도덕성이 근원적 문제인양 호도한다. 헌데 이런 '진보적' 대응이 이런 질문은 대답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고 복제다운로드유저가 '올바른' 동기에서 그랬다고 볼 수 있나? 현 분배구조가 아닌 정말 그런 행위가 치명적 영향을 주는 구조에 우리가 있다면 이들 역시 사회적 문제로 간주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이런 가정은 공상적이고 질문들 역시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는 것일 수 있다. 다만 그건 샹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큰 잘못을 탓한다고 작은 잘못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 적어도 자기 시야 내의 불의에 분노할 줄 아는 사람들의 정당성.그 협소하지만 정직한 분노를 품을 줄 아는 사람들이야말로 함께하기 위해 무던히도 설득해야 될 사람들이다. 나같이 문제에 분노하기보다는 문제 해석의 우위에 집착하고 이걸로 문제를 '느끼는' 것을 면제받으려는 사람보다는...

추신3) 이런 감정을 처음 느끼는 것은 아니다. 블로그 상의 기록으로는 작년 태연 님의 생일에 관련된 포스트에 나는 스스로의 이런 '부정직함'에 대해서 지나가면서 기록한 바가 있었다(http://plebs.tistory.com/40). 아이돌과 사회문제라는 상이해 보이는 쟁점은 개인의 삶에서 이렇게 묶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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