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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8/05
    트위터 일기1: 정치를, 그리고 진보를 생각하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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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일기1: 정치를, 그리고 진보를 생각하기


트위터에 이제 좀 재미가 붙었다. 원래 트위터를 하기 전에도 싸이월드나 까페, 블로그 등을 통해 댓글을 실시간으로 교환하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트위터는 아예 따로 게시글없이 이런 노가리를 까도록 되어 있는 매체...라고 생각하며 쓰고 있다.

가끔 뻘글 정도를 올리거나 남의 이야기를 엿듣거나 하다가 오늘은 이야기판에 조금 껴보았는데 한겨레 훅(hook)에 실린 글 두 편에 관련해서이다. 첫 번째 글은 노정태 씨의 글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가지 않았다>[링크]와 그에 대한 비판적 논평인 홍명교 씨의 글 <지식인들은 관념의 숲으로 넘어갔다>[링크]이다. 트위터에서의 논의를 옮기기 전에 우선 해당 글들의 논지를 조금 정리해야겠다.



1.
대강 첫번째 글의 논지는 이렇다. 노정태(존칭은 생략)는 친기업적으로 보이던 이명박 대통령의 최근 행보인 대기업 비판을 그저 레토릭이라고 비난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두 가지 결론으로 나아가는데 1)이러한 대통령의 말과 태도를 보수언론과 기업들을 무시하기 힘들 것이며 우리는 여기서 무자비한 자본의 독재로서의 신자유주의("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음모론적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국가권력은 껍질만이 아닌 시장을 통제할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권력을 행사하는 대표 즉 대통령을 뽑는 것은 국민이라는 점에서 국민들 역시 투표와 같은 정치적 행위를 통해 우리의 삶을 괴롭히는 자본을 규제할 수 있다.

"지금 필자는 이명박의 립서비스에 혹해서 그를 옹호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정 반대이다. 이명박이건 노무현이건, 대통령이라면 대기업과 재벌들에 맞서 이쯤은 말하고 실천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면에 깔린 ‘진정성’은 별개로 하더라도 말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정치적 권력의 전환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랬던 적이 없다. 권력은 언제나 국민에게 있고, 그 국민들의 대표자들에게 있다."

2)그런데 노정태는 맨 마지막에 좀 기묘한 문장을 덧붙이는데 다음과 같다.

"이명박을 비판하고 비아냥거리기에 앞서 그의 ‘친서민 행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보자. 그 편이 진보정치에 더 도움이 되는 일 아닐까?"

마지막 문장은 해당 문장의 내용을 전달하는 것 이외에도 그 앞의 내용 전체를 그 문장에 이르는 과정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진다. 특히 노정태의 글처럼 시사적인 이슈를 짧은 분량에 일관된 논지를 갖추고 쓰는 성격의 글의 경우 이런 마지막 문장의 효과는 더욱 강력하다. 신자유주의가 자본이라는 전능한 악마의 지배가 아닌 국가의 영역, 정치의 영역에 의해 좌절되기도 한다는 사회분석은 (물론 논쟁의 여지는 분명히 있다만) 적절할 수 있지만, 진보진영이 이명박의 친서민 행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정치적 지향으로 이어져야 할 이유는 없다. 



홍명교(역시 존칭은 생략) 씨의 글은 노정태의 글에 대한 분명한 반대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그 논지를 전개하는 방식은 흔히 우리가 시사적인 글에 기대하는 말끔한 형식을 취하고 있지는 않아서 좀 세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두번째 문단은 지젝에 친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이야기로 마무리되고 있다.

"(...) 아마도 노정태씨가 보이는 태도야말로 종말기적인 태도의 한 가지 징후가 아닐까? 거기에는 어떤 공포마저 엿보인다. 경제문제에 대한 심각한 공포, 요컨대 우리가 신자유주의 시대의 초국적 금융자본이라는 벽에 대해서는 절대 깨뜨릴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 혹은 그것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식의 허무주의!"

헌데 노정태는 분명히 대통령 선거와 같은 정치를 통해서 기업들을 바로 우리 국민들의 통제 아래 놓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홍명교는 노정태가 하지 않은 이야기, 오히려 그가 하려 했던 이야기의 정반대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레토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000년대 초반 즈음부터 시작된 지젝의 정치적 작업을 알 필요가 있다. 지젝은 생태주의, 여성주의, 다문화주의 등등 오늘날 소위 "진보적"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담론이나 사회운동들이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변혁'에 회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다들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없는 절대 질서로 인정한 상태에서 이런저런 정치 활동을 통한 (그가 보기에는) '사소한' 변화들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지젝의 독창적인 견해라기보다는 맑스주의 역사 속에 꾸준히 존재해 왔던 경향이기도 하다. 맑스주의 담론 지형에서는 이런 식의 논의를 '정치주의 비판'이라고 흔히 부른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윗 인용문이 어째서 노정태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해 볼 수 있다. 이 비판이 초점은 맞았다 할지라도 유효한지에 대해서는 추가적으로 논의를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정치주의 비판은 이후 네번째 문단부터 시작되는 홍명교의 노정태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의 주논지를 구성하는 하나의 기둥이 된다. 읽기에 쉽지만은 않은 이후의 논지를 나름 축약해 보자면 이렇다.
 1)우선 이명박 대통령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달리 자신의 신자유주의적 성격을 가리는 레토릭에 익숙치 않았다. 요즘의 반기업 드립은 그런 사탕발림 스킬을 좀 배우게 된 데 불과하다. 삼성에서 볼 수 있듯이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의 국가가 초국적 기업들에게 쪽도 못 쓰고 있는데 어떻게 국가의 힘을 그리 과대평가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국가는 파국에 이르는 극심한 독점을 막는 최소한의 역할을 할 뿐이다.

여기까지 보았을 때, 홍명교는 정치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적/경제주의적 비판을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개별 인간들의 정치적 행위라는 그 자체로 자율적인 동기나 효과를 가진 것이 아닌 억압적인 경제구조(자본주의든 신자유주의든, 이 글에서 둘의 구분은 그리 명료하지 않다. 하지만 어떤 글에서는 신자유주의조차도 자본주의 비판의 회피라고 보기도 한다)의 부산물일 뿐이며, 여기에서 피지배층이 해방될 가능성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한겨레 훅에 있는 홍명교의 다른 글들에도 이런 논지는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

2)하지만 마지막 문단은 조금 다른 논지가 전개되고 있는데, 이 부분은 홍명교의 최종 입장을 좀더 정교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문단은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가지도, 넘어가지 않지도 않았다"로 시작한다. 이 문장은 그저 역설을 강조하는 문학적 악세사리로 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글의 내용은 좀더 심화된다.  만약 홍명교가 경제주의적 입장을 고수했다면 이 문장은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던가 "나중에 넘어갈 것도 없이 권력은 처음부터 시장에 있었다"라고 썼어야 됐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앞 문단의 다음과 같은 말을 살펴보자.

"그는 마치 신자유주의라는 경제 심급이 온전히 ‘대통령제’라는 정치기구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인과론적으로 말하지만, 이 세상 그 어떤 관계나 이데올로기도 한 가지 원인에 대한 한 가지 결과로 형성되지 않는다."

홍명교가 반대하는 것은 '정치가 무언가를 결정한다'라는 입장 전체라기보다는 '정치가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관념에 대한 비판인 것처럼 보인다. 즉, 대통령과 선거같은 정치적 기제의 무능력보다는 그것은 경제적 구조에의 종속성과 그로 인한 영향력의 분명한 제한이 홍명교의 최종적 입장이 아니었을까...라고 나는 추측해 본다.

물론 곧바로 글의 전체적인 성격상, 그리고 인용문 뒤에 곧바로 이어지는 문장으로 볼 때 홍명교는 여전히 정치주의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보면 ①홍명교가 자신의 최종 입장을 글 전체에 녹여내지 않은 논쟁 전략을 택했다던가, ②이런 스타일의 글쓰기가 낯설기에 녹여내지 못했다던가, ③그의 최종 입장 자체가 경제주의와 정치주의 사이에서 혼동하고 있다던가 등의 추측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홍명교 씨와 구면인 나로서는 아마 ③이 아닐까 싶다. 이런 주제를 다루는 홍명교 씨의 이론적 기반은 알튀세르의 정치/경제/이데올로기 세 심금들 간의 상관관계에 대한 논의와 최근 지젝의 맑스주의적 자본주의 비판으로의 회귀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알튀세르 자신이 '최종심급'으로서의 경제라는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다는/못했다는 점에서 이 혼동은 알튀세르 자신의 혼동이기도 하다.)



2.
본격적인 트위터 담소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해당 텍스트들에 대한 너무 자세한 논평을 한 것 같은데 사실 어쩔 수 없는 것이 이후의 대화들에 비롯된 의견들의 충돌이 이런 텍스트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비일관성 내지 모순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트위터가 뭔가 공적이면서도 무게감이 조금은 떨어지는 매체이기도 하다는 점을 고려해 대화를 나눈 사람들의 이름은 굳이 말하지 않겠다.

우선 대화는 혹자1이 본인은 노정태의 글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홍명교의 반론이 뜬금없다는 평을 명확한 이유는 밝히지 않고 올렸다.
 이에 대해서 혹자2는 자신은 홍명교의 글 전체 논지에 동의하며 그 이유는 노정태가 마치 신자유주의를 한 국가의 층위에서 거부할 수 있는 정치적 선택지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말 아래에는 신자유주의가 개별 국가의 층위에서는 거부할 수 없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한 단계라는 판단이 깔려 있다. 그리고 혹자2는 노정태와 같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일국적인 이해와 비판이 최장집과 같은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홍명교가 이런 글에 지식인들의 관념론적 경향을 비판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혹자1은 '진보적 지식인'이 벼라별 이야기가 나오는 집단이라고 말했다. 좀 풀어보자면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적 경향이라고 비판하는 진보적 지식인들도 있다는 것이다. 혹자2 역시 이 부분에 있어서는 홍명교의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말은 과도한 감이 있다는 데 동의를 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혹자1이 노정태의 글에 동의하면서 전제하고 있던 정세 판단인데 그는 참여정부 시절 개혁 실패에 대한 알리바이 담론으로 국가 무력론이 과도하게 부각되었다는 것을 지적했다.

대강 이 대목에서 대화에 끼어들었는데 내 논지는 대강 이랬다. 노정태의 글에서 지적되고 있는 국가와 정치의 유효성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이며 오히려 홍명교의 글에서 신자유주의를 인간의 실천으로는 극복이 불가능한 절대적인 지배 원리로 격상시키고 있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보적 지식인'의 문제는 신자유주의를 일국적인 차원에 국한시킨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를 세계적인 지배 원리로 보아야 할지 일국의 정책 수준에서 선택이 가능한 것인지 혼동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혹자2는 홍명교가 신자유주의의 권력 구조를 단일하게 이해하는 것은 납득이 안 가지만 노정태의 낙관적 정치주의에 대한 비판을 정확히 했다고 말했다. 혹자1은 노정태 비판을 삼성과 같은 기업의 영향력을 절대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닌 참여정부가 시장에 권력을 이양했다는 식으로 전개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 즈음에서 내가 잘 몰랐던 것, 그리고 우리들의 논의의 1차적 지평에서 배제되어 있던 것은 위에서 분석한 노정태의 2번 결론과 홍명교의 2번 결론이었다. 노정태가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데에서 멈췄던 것은 아니었으며, 홍명교가 경제적 구조의 규정성만을 과도하게 강조한 것도 아닐 수 있었다. <일국적/세계적>이라는 트위터 유저들끼리의 논의에서 추가되기도 했지만 이는 맑스주의 담론 내에서는 <정치행위/경제구조> 구도의 또다른 변형이기도 하다. 각자의 2번 결론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면 혹자1은 홍명교의 글에, 혹자2는 노정태의 글에 그리 어렵지 않게 동의를 할 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논의의 모든 부분이 이런 텍스트 자체의 모순에 대한 몰인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데 노정태가 강조하는 정치주의의 낙관성에 대한 비판은 혹자1 역시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시장이 권력으로 넘어간 것이 필연이 아니라 참여정부의 이양, 즉 정치적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는 그의 코멘트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3.
대강 이렇게 정리될 수 있을 줄 알았던 논의는 오늘 저녁에 혹자2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좀더 복잡해 지기에 이르렀다. 혹자2는 트위터에서보다 훨씬 강하게 노정태의 글에 대한 반발과 홍명교의 글에 대한 찬성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선거를 통해 뭔가 바꿀 수 있다는 식의 노정태의 글에서 표현된 정치주의를 처음부터 납득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경제주의라고 퉁치고 넘어갈 수 없었던 데에는 나 자신의 경제주의 비판에 대한 반대도 있었지만 그가 가지고 있던 나름의 현실 정세에 대한 판단이 컸다. 그는 최근 지방선거를 사례로 들며 한국 정치에서의 진보정당의 입지를 보라고 말하며 이런 상황에서 선거를 통해 '무언가를 바꿀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 언제까지 바뀌지 않을 거 같냐는 내 질문에 농담조로 자신이 죽기 전까지는 그럴 거 같다고 말했다.

실례일 수도 있지만 나는 농담을 진담으로 잘 듣는 사람이고, 이렇게 특히 예민할 수 있는 주제에 관해서 섣부른 농담은 혼선만 야기한다고 생각하는 조금 답답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이 발언 역시도 그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한국사만 보아도 80년대 독재 정권과 오늘날의 일상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죽기 전에 진보정치가 이뤄지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은 좀 과한 농담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조봉암의 예를 들며 역사 속에서 그나마의 진보정치가 고사된 것을 예로 들었는데 아마도 역사가 꼭 진보하는 것은 아니다는 식의 이야기를 전달하려 했던 것 같다.

나는 거기에 앞으로의 역사적 과정의 가변성을 강조하며 앞으로의 미래를 낙관할 근거도 없지만 비관할 근거도 없다고 말했으며, 그는 비관의 근거는 충분히 있는 거 같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의 기저에는 개인적 요인 이외에 최근 한국 정치 지형에 대한 파악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해 관계에 맞추어 투표를 하지 않는 상황을 거론하며 선거 자체가 근본적 한계를 가지는 맹목적 제도라는 비판도 지나가면서 언급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다면, 즉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정치적 노력 자체가 무용하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느냐고 말하자 그는 "봉기?"라고 웃으며 말했다.



4.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나서 나는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고, 이렇게 포스트를 쓰게 되었다. 아마 해당 인물이 이 포스트를 볼 것이 분명하지만 또 그러기에 우선 내 정확한 생각과 당황스러움, 특정 경우에 있어서는 모종의 실망감같은 정서에 대해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혹자2와의 대화 도중에 나는 '무엇을 진보적으로 바꾼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질문했다. 아무래도 혹자2는 진보정당 혹은 진보정치세력의 집권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진보적이라 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한 사회구조의 형성을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혹자2로부터 후자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는 고진의 마르크스론에 근거해 '신용을 형성하지 않는 화폐'를 자본주의를 극복한 사회, 공산주의의 정의로서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솔직히 나로서는 매우 당황스러운 경험이었다. [트랜스크리틱]과 같은 고진의 해당 텍스트에서 자본론 독해와는 별도로 신용을 형성하지 않는 화폐에 대한 논의는 너무나도 추상적으로 제시되어 있어서 그것의 정치적 가능성은 현실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무책임하다고 할만할 수준이다. 설사 고진이 자본주의의 근본 원리를 꿰뚫었다 할지라도 마치 도미노 쓰러지듯이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고 새로운 제도들이 창안될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용을 형성하는 화폐의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는 그 어떤 공통점도 가지지 않는 것일까? 그의 공산주의는 나에게는 너무 흐릿하게만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이런 흐릿한 이상은 유토피아주의의 어떤 종류로 분류될 수 있고 그것 나름의 유효성을 가진다고 생각하지만 공산주의의 이상으로서는 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남은 하나는 진보정당 혹은 진보정치세력의 집권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데 이것이 공산주의의 필요조건일 수는 있으나 공산주의 자체일 수는 없다. 꼭 진보정당 혼자가 집권해야만 진보적 제도를 설립하는 것만은 아니며 거기에는 다른 정당과의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계급투쟁이나 사회운동과 같은 정당 밖의 국민이나 대중 자신의 직접적인 정치활동이 큰 역할을 차지한다. 그리고 나아가 이런 정치활동들은 그것이 놓인 경제적/사회적 구조와 특히 동아시아의 경우 그것의 지정학적 국제정치학적 조건과 결부되어 검토될 필요가 있다. 요새 유행하는 대중들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는 혹자2 역시 어렵지 않게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봉기?"라고 말했을 때 혹자2가 생각해 보고자 한 것 역시 선거활동을 넘어서는 이런 부분에 대한 고려 였을 것이다.
 다만 내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그의 비관의 속도다. 내 생각에 비관을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런 주제들에 대한 최소한의 검토가 필요하다. 그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현 정세에 대한 판단이 이런 총체적인 관점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재빨리 비관하고 재빨리 봉기 내지 혁명이라는 말을 내세우는 것은 정말 황당하다. 게다가 대중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맞지 않게 투표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한국사에서 '진보'라는 말이 가지는 함의를 고려하지 않은 몰역사적인 언급이며, 설사 역사적인 부분을 고려해도 문제가 있다고 치더라도 애당초 그런 질문들을 다뤘던 사유의 도구들이 널리 번역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도구들을 활용해 인식도 하기 전에 비관하는 것이 허용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물론 공적인 담론장도 아니고 매우 사적인 자리였으며 이런 종류의 분석과 판단을 행하기에는 시간이 매우 부족햇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것까지만 말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 사적인 자리에까지 이런 기준을 적용하는 게 너무 답답할 수도 있다만 나는 이건 공적/사적 발언의 문제가 아니라(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한편 자신의 정치에 대한 사유 태도를 근본적인 반성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정말 무언가를 바꾸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무언가에 대해서 이래저래 단죄하거나 푸념하기를 원하는가? 나 자신도 후자의 경향을 분명히 가지고 이를 즐기지만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남이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너무 답답해지고 화가 나기도 한다. 스스로가 그런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도 하고 나나 잘하면 될 거 같기도 하지만 가끔은 이런 이야기들을 속시원하게 해보고 싶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 해봤다(심하게 느껴졌다면 미안하다).

논의를 시간의 순서에 따라 전개하다 보니 혹자2에게 비판이 집중된 것 같지만 사실 방금 말한 논점은 노정태와 홍명교, 그리고 이 둘의 글을 둘러싸고 신자유주의의 개념적 정의가 부정확하네, 정치경제학의 틀에 갇혀 있네라고 촌평을 한 '논평하는 자'들 모두 에게도 각자 정도는 조금 다르지만 해당하는 말이기도 한다. 이론과 개념, 입장은 정치를 사유하는 데 유용한 갑옷이기도 하지만 자기자신을 가두는 감옥이기도 하다. 이 해당 논자들은 모두 몰역사성을 공통점으로 지니고 있다. 현 사회 조건에 대한 기초적인 인식과 고려 없이 특정한 개념이 옳네 마네를 논할 뿐이다. 이건 인식과 토론이 아니다. 각자의 신념과 규범에 대한 강변일 뿐이다.
 사실 나는 (주로 발리바르를 통해) 좌파의 국가소멸론에 대한 반성을 하고 있는 터라 노정태의 논리에 고개가 많이 끄덕여 지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의 어두운 뒷면에 대한 역사적인 고려는커녕 개념적인 고려(국가의 양면성)도 없는 것 같아 당황스럽다.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라는 단일한 원리가 아니라 다양한 심급의 관점에서 분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지만 또한 한국사회의 변화라는 시간의 맥락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제한적인 지면이라는 점은 고려를 해야겠지만 이런 식의 글쓰기가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어디인지 정말 (비꼬는 게 아니라) 궁금하다.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글쟁이의 역할이라고 믿기에, 그러기에 현상 곳곳에 얽힌 역설들을 최대한 그대로 노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노정태의 이런 제한적인 글쓰기의 실천으로 목표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곧 단행본이 나온다고 했으니 거기서 좀더 그의 생각을 좀더 잘 알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반면 홍명교의 글은 처음에는 솔직히 "또 구조야..."라며 움찔했지만 이명박 정권을 반기업 레토릭을 말하는 최근뿐만 아니라 총체적으로 나아가서 전 정권들과 신자유주의 체제의 연속성이라는 맥락에서 평가하려 했다는 점에서 결국 손을 들게 된다. 이 글은 노정태의 글의 몰역사성에 대한 비판이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그도 생각했을 법한 주제, 그리고 생각했었다는 근거가 글에 묻어있는 주제, 경제 구조 역시 전일적이지 않고 정치적 결정과 같은 외재적 요인들로 인해 동요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사유와 정세 판단이 오롯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야 할 지점에서 그는 가장 '급진적인 것', 이를테면 지젝에 기대어 버린다.
 그외 트위터들의 반응은 상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혹자1의 국가무력론이 참여정부 때 주된 떡밥이었기에 노정태의 글이 그런 맥락에서 유효하다는 판단은 분석의 총체성은 결여하고 있는 것처럼 얼핏 보이지만 글의 제한성에 대한 자각(처음부터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과 그 글의 위치에 대한 정확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매우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감각에 기초해 쓰여지는 글들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모든 글이 논문으로 쓰일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논문으로 쓰인 글들이 담고 있는 인식은 이런 감각의 글들을 통해서 자신의 독자들을 찾아가며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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