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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3/01
    여기 지금 우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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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지금 우리

요즘 책보다 일상,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뭔가를 배우게 된다.

원래 배움 자체는 모욕적인 과정이다. 왜냐면 그것은 자신이 잘못이나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나마(혹은 뒤늦게서야, 이 뒤늦음 역시 모욕감의 한 구성요소이다)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관계로부터의 배움이란 더더욱 모욕적이다. 왜냐면 책은 나와 직접 마주하고 있지 않기에 한 대 얻어맞더라도 그것은 결국 내 허가를 통과해야 하기에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부분만 때리는 반면, 사람은 내 면전 앞에 서서 내가 아무리 좀 나중에 천천히 듣고 싶다고 말해봤자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상대방의 주의와 배려에 의해 어느 정도는 조절될 수 있지만 어쨌든 그럼으로써 '괴롭힌다'는 근본적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이 과정을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듣는 것'이다. 그것은 작은 일이지만 쉬운 일만은 아닌 것 같다(일단 잉여롭게 자기성찰에 투자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아가 답변을 시도해 봐야 한다.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상대방 역시 공유할 수 있는 형태로 호환성을 갖춰서. 그러나 이 포스팅은 이를 직접적으로 목표로 하기보다는 그 전 단계일 자신을 살짝 추스려 보는 것을 일단 목표로 하겠다...

1.
나는 얼마 전 다양 다질한 원인에서 비롯되는 내 피폐한 정신 상태에 단일한 인격적 원인을 가상으로 부여함으로써 쉽게 답을 찾으려 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인격적 원인에 대한 애착을 전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것이 그것은 '오늘의 나'이기를 억지로 거부하는 것이기 대문이다. 물론 찬찬히 보면 그 감정은 해당 인물과의 인간 관계가 아닌 외적 요소들에서 비롯된 경향이 크며, 또 그렇기에 어렵지 않게 그 열정이 그리 멀지 않아 식으리라 짐작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짓이라고 해서 내가 그 거짓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 좀 이상한 예를 들자면 이건 마치 네가 우울한 이유는 군인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군인이 '아 나는 내 감정의 원인을 알았으니 이제 우울해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가 어떤 허구 속에서 살고 있는지 잘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어쨌든 거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면, 나는 그야말로 껍질만 남을 것이다, 거짓말밖에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내가 내가 아닌 척 하는 동안 내가 내 삶으로서 누려야 했을 것들(그것이 기쁘건 슬프건 뜨겁건 차갑건)을 그대로 흘려보내게 될 것이다.

나는 오늘 여기를 살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나'가 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반쪽짜리지만 이를 부인하면 나는 그 반쪽마저도 안 될 것이다.  


2.
나는 뭔가 일을 맡게 되면 속얘기를 주변에 안 하고, 또 개인적 결정에 대한 상의도 잘 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그렇게 된 이유에는 아마도 좋게 말하면 끈끈함, 나쁘게 말하면 질척거림의 관계에 대한 기피가 깔려 있다는 게 지금 나의 분석이다. 나는 사람을 한참 찾다가도 사람이 정작 모이게 되고 서로 일상적인 관계 혹은 가족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질려버리는 경향이 있다. 자기모순적이고 편의적이다.

이 비일관성도 문제까지는 아니어도 썩 좋은 성격은 아닌 편인데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그 '개인적 결정'뿐만 아니라 '집단적 결정'에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함께 하는 일을 할 때도 나는 상의를 많이 하지는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많이 하려고 일부러 노력하다가도 조금 정신줄을 놓으면 혼자서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러다 보니 내 행위의 맥락을 남들에게 납득시키려는 노력을 거의 들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생략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해할 노력을 기꺼이 들여줄 사람들과의 그룹, '내 편'도 만들지 않았던 것 같다. 공적인 의사소통 능력의 하락과 그런 부족한 표현의 공적 의도를 이해해 줄 사적 그룹(꼭 친밀성으로 맺어지지 않더라도)의 부재.


3.
이제는 그냥 좀 그런 생각이 든다. 나도 한 번 여기 지금 우리로서 살아가 보고 싶다. 나의 편협함를 비판하기 위해 남으로서 살지도 않고, 나의 비지속성을 지적하기 위해 미래의 나로도 살지도 않고, 온정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혼자로서만 살지도 않고, '저기 훗날의 나'가 아닌 '여기 지금 우리'로서 살아가 보고 싶다. 이는 어떤 집단을 구성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근본적으로 '내' 삶에 대한 태도를 바꿔보고 싶다는 욕심이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만나든 바로 그 자리에서 '여기 지금 우리'로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공부를 하건 활동을 하건 돈을 벌건 뭘 하건 그렇게 살아 보고 싶다.

대충이나마 이렇게 신년 (다짐이라기보다는) 바람을 늦게나마 정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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