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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04
    관념론 비판의 관념성 블라블라(2)
    닉네임
  2. 2010/12/31
    다시 한 번 더 돌이켜보기(7)
    닉네임

관념론 비판의 관념성 블라블라

1.
  좌빨의 영원한 떡밥 관념론 비판은 사람들이 관념론의 허구성만 지적하지 사람들이 왜 관념론에 빠졌는지 유물론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않는다는 점에서 관념론적이다. 야박하다. 이런 야박함은 꼭 좌빨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일반적인 실수이기도 한데 이를테면 얼마 전 서평을 쓴 박상훈의 『정치의 발견』에서도 볼 수 있다.[링크] 박상훈은 자꾸 진보파와 대중이 공유하는 '상식'의 그릇됨에 대해서 말하는데, 이는 '비판'이라기보다는 '개탄'의 형식으로 행해진다. 그가 중요하게 언급하는 알린스키 말마따나 "타인의 가치를 존중"하기는커녕 사람들을 시야좁음을 나무라는 데 정신없는 데, 아니 교육이 모자라서 악의가 있어서 사람들이 그러겠나. 살고 겪으면서 정치인들로부터 실망을 겪고 겪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박상훈도 이걸 모르는 건 아니고, 오히려 그래서 정치가의 역할이 이제부터라도 중요하다라고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만 왜 이런 좋은 생각을 '기술'만 하지 '실천'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시야좁음을 나무라는 일의 시야좁음.

  그런 맥락에서 관념론 비판이 유물론적으로 행해지기 위해서는 관념론 비판이라는 형식을 우회할 필요가 있다. 관념론 비판의 유물론적 실천은 간접적으로만 성취될 수 있다. 또한 이는 비판의 비판이라는 부정적 형태가 아닌 형태와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철학이나 품평이 아니라 다른 철학 또는 '사회과학'의 형식이 중요해지는 게 이런 부분이 아닐까 싶다. 나는 얼마 전 사사키 아쓰시의 『현대일본사상』에 대한 서평[링크]의 마지막 부분에서 서평의 후반부에서 아즈마의 사회학/심리학/공학/법학에 대한 관심을 인상깊게 보았다는 기록을 했는데 대강 이런 개인적이라면 개인적인 문제의식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좀더 멀리가면 EM님의 포스트를 보고 맑스가 철학에서 경제학으로 전환한 것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면 비슷한 방향의 생각을 한 적이 있더랬다[링크]. 발리바르와 예술인생 님을 인용한 다음 포스트의 3번 역시도 이 상념의 계열에 놓을 수 있다[링크]. 좀만 뒤져보면 몇 개 더 찾을 수도 있겠다.) 물론, 어떤 분과학문을 택하냐보다는 어떤 문제를 얼마나 충실히 다루었냐는 치명적인 질문을 피해가는 핑계로 쓰여서는 안 된다. 그래도, 그 문제를 다루는 데 아무 도구나 괜찮은 것은 아니지 않을까.

  원래 내 학술적 욕심은 이런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관심을 유지한 상태에서 거대 이론의 문제를 다뤄보는 것이었다. 요리를 직접 하기보다는 불을 피우는 것. 그런 욕심은 서발턴과 우리 안의 파시즘론을 까면서 공부계획을 잡아본 다음의 포스트에 드러나 있다[링크]. 물론 이 때 거칠게나마 했던 생각은 내 사유까지는 아니어도 독서를 하면서 잠정적이나마 흔들리지 않고 책을 읽어가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하지만 해당 문제에 이 때 생각했던 것처럼 접근하는 것이 온당한 것인지는 지금 와서는 좀 잘 모르겠다 싶다. 그렇다고 뭔가 감이 잡히는 길로 가자니 한번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일이기도 하고...


2.
  그리고 아예 멀찍이 다른 길을 가볼까 하는 생각도 있다. 얼마 전 누군가 나에게 "무슨 공부를 할 것이냐도 좋은데 무슨 일을 할지 고민해 보라"라고 한 적이 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참 고마운 조언이었다(그러고 보면 난 2008년부터 참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왔더랬다. 운이 좋았다.). 사사키의 [현대일본사상]에서 느꼈는데 서평에서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것 중에 하나가 좋은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글을 읽히는 것도 중요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면 글쟁이로서의 활동이라는 것이 아즈마처럼 퍼포머티브한 것을 포괄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아니면 아예 퍼포머티브한 측면만 담당을 하는 식으로 분업을 하든가. 물론 아즈마의 '성과'라는 것이 매우 모호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고, 이는 콘스탄티브한 측면에서의 결함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만, 퍼포머티브한 측면은 여튼 우리가 글쓰기의 내용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만은 크게 통제해보려고 한 적이 없는 것이 아닌가(아닌가?).

  글쓰기와는 다르게 (상대적으로) 적지 않은 자원의 동원을 요구하는 일임은 틀림없는데, 여튼 그런 생각도 해보았더랬다. 어느 것이든 간에 조만간에는 꽤나 요원한 것이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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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더 돌이켜보기


1
"K군, 그러니 영미권의 유명 대학원에 진학할 만한 경제적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간곡히 권하거니와 학문의 세계에 발을 디디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될 수 있으면 인문학, 특히 철학은 하지 말기 바랍니다." -진태원,「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K군에게」, [링크]

당연하게, 그리고 그 당연함이 관성적이라고 비판적으로 자각하면서도 대학원 진학을 당연하게 목표로 삼아왔더랬다. 그런데 요즘, 그리고 특히 이 글을 보고 나니 내가 말과 글, 넓은 의미에서의 '언어'를 통해서 하고픈 일이 꼭 4~10년의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을 요하는 일인지 잘 모르겠다 싶기도 하다.


2
방금 본 아즈마 히로키에 관한 소논문은 그가 어렸을 적 "세상의 근간이 되는 뭔가를 저는 쓰고 싶어요."라고 말했으며 그에 맞추어 자신의 사회적 삶을 살아왔다고 평가하고 있다. [링크

아카데미에의 강박감은 불확실한 미래뿐만이 아니라 그 미래를 준비하는 현재 자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를테면 대강대강 이런저런 지식을 민첩하게 탐독해야 되는 상황에도 '날림으로 하면 안 되지'라는 생각에 장기적인 공부 플랜들을 짜곤 한다.

그저 '읽는 것'에서의 속도도 이러한데 '쓰는 것' 또는 '써야 하는 것'에 대한 속도는 거의 정지 상태와 마찬가지가 된다. 게다가 만약 그 사람이 진심이든 간지용이든 정치적 내지 '실천적' 언어사용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이런 갑갑함은 거의 족쇄처럼 느껴질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부지런함으로 커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카데미에의 강박감과 그곳에서의 수련이 지적 책임감이라는 중요한 미덕을 고양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 역시 확실하다. 하지만 이게 지적 책임감을 실천하는 유일한 길인지는 의심스럽다.

항상 입습관처럼 되뇌이는 말이지만 "뭔가 잘못됐다. 죄를 지었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생각이 또 머리에 맴돈다. '초심'같은 있지도 않았던 것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고, 그냥 지금 현재 시점에서 내가 무얼 하려고 하는지 생각해 봐야 겠다.



3
좀 진태원 씨의 조언의 논지와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온 셈인데 이야기가 이렇게 온 데는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기록 차원에서 언급하자면 그저께 H와 어제 또다른 H와의 대화가 영향을 주었다.

그들이 말한 내용보다는 내가 정리한 내용을 말하면 이렇다. 나는 '지적 차원'에서 타인과의 변별성과 사회적 의미를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어찌됐든 공부도 하면서 뭐가 덤으로 얻어걸리면 좋겠다'는 전제에 기초하고 있을 우려가 크다.

이런 사고에서 출발한다고 꼭 잘못된 길로 가리라는 법은 없지만 인생을 좀더 '생산적'(이 말이 논쟁적이라는 것은 명시해 두자. 하지만 그렇다고 이 말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보기에 사용한다.)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공부주제'보다는 '일'의 관점에서 플랜을 짜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이는 공부 자체를 위해서도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어떤 공부를 하고 싶다'보다는 '어떤 삶을 살고 싶다'를 사고하기, 혹은 후자를 우위에 놓은 뒤 전자를 사고하기.물론 공부와 삶을 대립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주의를 요하는 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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