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
좌빨의 영원한 떡밥 관념론 비판은 사람들이 관념론의 허구성만 지적하지 사람들이 왜 관념론에 빠졌는지 유물론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않는다는 점에서 관념론적이다. 야박하다. 이런 야박함은 꼭 좌빨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일반적인 실수이기도 한데 이를테면 얼마 전 서평을 쓴 박상훈의 『정치의 발견』에서도 볼 수 있다.[
링크] 박상훈은 자꾸 진보파와 대중이 공유하는 '상식'의 그릇됨에 대해서 말하는데, 이는 '비판'이라기보다는 '개탄'의 형식으로 행해진다. 그가 중요하게 언급하는 알린스키 말마따나 "타인의 가치를 존중"하기는커녕 사람들을 시야좁음을 나무라는 데 정신없는 데, 아니 교육이 모자라서 악의가 있어서 사람들이 그러겠나. 살고 겪으면서 정치인들로부터 실망을 겪고 겪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박상훈도 이걸 모르는 건 아니고, 오히려 그래서 정치가의 역할이 이제부터라도 중요하다라고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만 왜 이런 좋은 생각을 '기술'만 하지 '실천'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시야좁음을 나무라는 일의 시야좁음.
그런 맥락에서 관념론 비판이 유물론적으로 행해지기 위해서는 관념론 비판이라는 형식을 우회할 필요가 있다. 관념론 비판의 유물론적
실천은 간접적으로만 성취될 수 있다. 또한 이는 비판의 비판이라는 부정적 형태가 아닌 형태와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철학이나 품평이 아니라 다른 철학 또는 '사회과학'의 형식이 중요해지는 게 이런 부분이 아닐까 싶다. 나는 얼마 전 사사키 아쓰시의 『현대일본사상』에 대한 서평[
링크]의 마지막 부분에서 서평의 후반부에서 아즈마의 사회학/심리학/공학/법학에 대한 관심을 인상깊게 보았다는 기록을 했는데 대강 이런 개인적이라면 개인적인 문제의식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좀더 멀리가면 EM님의 포스트를 보고 맑스가 철학에서 경제학으로 전환한 것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면 비슷한 방향의 생각을 한 적이 있더랬다[
링크]. 발리바르와 예술인생 님을 인용한 다음 포스트의 3번 역시도 이 상념의 계열에 놓을 수 있다[
링크]. 좀만 뒤져보면 몇 개 더 찾을 수도 있겠다.) 물론, 어떤 분과학문을 택하냐보다는 어떤 문제를 얼마나 충실히 다루었냐는 치명적인 질문을 피해가는 핑계로 쓰여서는 안 된다. 그래도, 그 문제를 다루는 데 아무 도구나 괜찮은 것은 아니지 않을까.
원래 내 학술적 욕심은 이런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관심을 유지한 상태에서 거대 이론의 문제를 다뤄보는 것이었다. 요리를 직접 하기보다는 불을 피우는 것. 그런 욕심은 서발턴과 우리 안의 파시즘론을 까면서 공부계획을 잡아본 다음의 포스트에 드러나 있다[
링크]. 물론 이 때 거칠게나마 했던 생각은 내 사유까지는 아니어도 독서를 하면서 잠정적이나마 흔들리지 않고 책을 읽어가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하지만 해당 문제에 이 때 생각했던 것처럼 접근하는 것이 온당한 것인지는 지금 와서는 좀 잘 모르겠다 싶다. 그렇다고 뭔가 감이 잡히는 길로 가자니 한번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일이기도 하고...
2.
그리고 아예 멀찍이 다른 길을 가볼까 하는 생각도 있다. 얼마 전 누군가 나에게 "무슨 공부를 할 것이냐도 좋은데 무슨 일을 할지 고민해 보라"라고 한 적이 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참 고마운 조언이었다(그러고 보면 난 2008년부터 참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왔더랬다. 운이 좋았다.). 사사키의 [현대일본사상]에서 느꼈는데 서평에서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것 중에 하나가 좋은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글을 읽히는 것도 중요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면 글쟁이로서의 활동이라는 것이 아즈마처럼 퍼포머티브한 것을 포괄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아니면 아예 퍼포머티브한 측면만 담당을 하는 식으로 분업을 하든가. 물론 아즈마의 '성과'라는 것이 매우 모호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고, 이는 콘스탄티브한 측면에서의 결함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만, 퍼포머티브한 측면은 여튼 우리가 글쓰기의 내용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만은 크게 통제해보려고 한 적이 없는 것이 아닌가(아닌가?).
글쓰기와는 다르게 (상대적으로) 적지 않은 자원의 동원을 요구하는 일임은 틀림없는데, 여튼 그런 생각도 해보았더랬다. 어느 것이든 간에 조만간에는 꽤나 요원한 것이다만...
댓글 목록
부가 정보
관리 메뉴
본문
'관념론 비판의 관념성'은 앞으로도 계속 안고 가면서 생각해야 할 좋은 주제인 것 같습니다-최근에 '어느 길을 가야하나'란 물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어차피 세상이 좀 더 나은 곳이 되어가는 과정 안에서 한 사람 혹은 한 가지 역할만으로 모든 것들이 충족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것이 누군가의 태만함 혹은 고민의 포기를 허락해주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만, 이 점을 인지한 후에 '어느 길을 갈까'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 좀 더 수월해지지 않나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길을 어떻게 갈 것인가'라는 물음에 집중할 시간이 늘어난달까요.
지난 반년동안, 저는 문학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설 뻔하다가 다시 문학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논문이라는 제도의 탓도 있습니다만, 바깥의 다른 학문(사회과학, 철학 등)을 접하면서 제가 지금까지 몸에 익혀온 문학의 (쉽사리 규정되지 않는)방법론=시선이 그것들과 또 다른 강점이 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본문에 언급된 아즈마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2』에서 어느덧 요즘에는 사회과학책 밖에 보지 않게 되어버렸다고 한다면, 저 또한 지난 1년간의 독서는 그쪽에(사회과학 및 '이론') 편중되어 있다가 다시금 문학을 돌아보게 되었달까요. 사회과학에 비해서 그 유효성을 직접적으로 주장하기 곤란한 편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사회과학이 유효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쪽에도 어떤 유효함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여정이 게슴츠레님의 고민에 쓸모있는 참고가 되리란 생각은 하지 않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언급하신 바가 스스로의 각오를 상기시키는 면이 있어 적습니다.
"무슨 공부를 할 것이냐도 좋은데 무슨 일을 할지 고민해 보라"는 말을 저는 "좋은 학자보다는 좋은 인간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로 간직해왔네요. 좋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부가 정보
관리 메뉴
본문
문학에 대한 사회학적 관심이 아니더라도 글쓴이들에게 문학에 대한 관심은 회피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ㅎㅎ 비그레이님의 고민이 좋은 결실을 맺어 저도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