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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7/02
    김원, 『87년 6월 항쟁』사후 공지 및 다음 책 후보 세 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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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1/26
    결백한 개념은 없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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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0/01/19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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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 『87년 6월 항쟁』사후 공지 및 다음 책 후보 세 권

일시: 2011년 7월 1일 저녁 9시

읽은 책: 김원, 『87년 6월 항쟁』

 

(*)오랜만의 독서회 소식입니다. 그동안 김원 씨의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을 읽고, 김원 씨의 책 한 권을 짧게 더 읽자고 의견이 모여서 이 책을 읽었습니다. 한 가지 정도만 기억을 해두자면 이제 제법 '민주화'가 어떤 진실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것 같습니다만 그것이 실제로 어떤 걸 가렸는지를 직접 보는 것과 그랬을 것이라는 짐작하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전자가 개념의 우주에서 상대에 대한 혐의를 가지고 움직인다면 후자는 실제 일어난 것들에 대한 충실함으로 움직이지 않나 식으로 정리해 보고 싶습니다. 과거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기보다는 우선 내 주변의 일상과 비슷한 매커니즘(이를테면 이 책에서 반복되는 테마인 감정 "분노/불안/공포" 등등)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리하여 현실이 움직이는 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 이것이 역사책의 장점이고, 또 구술사가 가지는 장점같습니다.

 

(+)어제 그래서 구술사 책을 좀 보자는 식으로 이야기가 되어서 추천되었던 것인 박찬승의 [마을로 한국전쟁]입니다. 한국전쟁을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으로 보거나 다른 식으로 '해석' 의미도 있겠지만 사실 마을 단위에서 사람들이 느끼고 움직였던 것은 다른, 좀 더 일상적인 기제일테고 그게 뭔지 '이해'보자는 떡밥이었지요. 저희가 지금껏 읽었던 김원 씨의 책 2권 처럼요.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993960 알라딘 책소

http://blog.jinbo.net/simppo/75

 

근데 사실 어제 추천하려고 했는데 추천하지 못했던 책이 두 권 있습니다.

 

한 권은 이건범의 [내 청춘의 감옥]입니다. 80년대 학번의 기구한 라이프스토리라는 맥락에서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과 [87년 6월 항쟁]을 참고하며 읽으면 어떨까 싶더군요. 주변인들의 평도 매우 좋고 재밌게 읽히는 것 같고...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993960 알라딘 책소개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10617154142 프레시안북리뷰

 

나머지 하나는 정민우의 [자기만의 방 : 고시원으로 보는 청년 세대와 주거의 사회학]입니다. 젊은 층의 주거문제라는 메인 아이디어, 그리고 '석사' 학위논문이라는 재밌는 위치와 그 시기에 하고 있는 저자의 고민이 저희의 경제적 현실과 '대학원생' 유머(?)에서 보이는 생애사적 현실의 고민과 맞닿은 지점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터뷰를 많이 따서 진행한 책이라 '구술사'의 맛도 느끼며  볼 수 있을 거 같고요.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985499 알라딘 책소개

http://blog.aladin.co.kr/717962125/4872300 얼그레이효과 님의 인용 및 포스트

 

이 세 권의 책 중에 다시 한 번 골라볼 것을 제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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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백한 개념은 없다


"반면에 나는 지성의 명철성을 믿으며, 그리고 지성에 대한 민중운동의 우위성을 믿는다. 왜냐하면 지성은 최고 결정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 어쩄든 우리가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것을 도울 수 있다는 약간의 희망을 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 가능하며, 오직 이런 점에서만 가능하다. (…) 여기서 우리는 정치 한가운데 서게 된다." -루이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권은미 옮김, 2008, 297쪽.


수많은 좌파 '이론가'들의 바람과는 그 어떤 외적 조건과 무관하게 '해방'을 확실하게 보증해 주는 이론이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하게 계몽된 사람들로 이루어진 합리적인 정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어떤 문제적 상황에도 곧바로 적용할 수 있는 규범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런 내적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 원리라는 플라톤주의적 바람, 개념적 순수주의의 흔적을 이곳저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 데이비드 하비의 희망의 공간, 가라타니 고진의 자본의 축적을 발생시키지 않고 단순히 물물교환을 도울 뿐인 중립적인 통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소멸된 스탈린의 사회주의, 그 사상적 기원으로서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국가의 사멸"에 대한 옹호, 배제없는 재현/대표라는 직접적 민주주의의 오래된 환상 등등.

이 모든 개념들은 현실이 가지고 있고, 또 현실이라는 범주 자체에서 제거할 수 없는 '우연성', 노골적으로 말하면 '더러움'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 어떤 정세에서건 역사에서건 결백할 수 있는 개념을 각자 내세운다. 일단 내 지금 잠정적인 생각은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윗 개념들이 지시하는 상황은 극단적인 현실의 우연성을 통제하는 한에서만, 어떤 잘 꾸며진 '실험실'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이런 유토피아주의적 개념들의 계열에 한 두개를 더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진리'의 핵심적 계기는 투명성, 순수성이 아니라 우연성, 우발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민주주의는 해방의 보증수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개념이 어떤 구체적인 정세와 역사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분석하고 이를 고려해 이 개념에 내재된 해방적 가능성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지성은 해방을 보증하지 않는다. 해방을 보증하는 것은 현실의 실천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해방을 보증이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일 것이다. 해방이라는 범주는 그보다 훨씬 역동적인 범주로 우리는 이것을 보증하진 못하고 다만 활성화할 수 있을 따름이다.

헌데 이는 매우 역설적인 것처럼 보인다. 우발성을 포함한 개념을 우리는 여전히 개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여기서 극단적 상대주의, 경험주의에 빠져 자신의 지적 게으름을 개념의 무용성으로 전치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아니다. 나는 절대로 모든 개념이나 이론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개념'과 '이론'의 규정 또는 역할이 말 몇 마디로 현실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아닌 다른 것은 아닐까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일례로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생각해보았을 때 그것 자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만병통치약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분명히 평등-자유라는 '한걸음'을 성취해낸 것은 사실이다. 민주주의는 그 이후 우리의 삶의 모든 이상들을 규정하기에 이르렀다(나는 공산주의도 이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근대는 시작되었고 우리는 그 개념을 통해서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모든 개념이 민주주의라는 말만큼의 무게를 지닐 수는 없고, 또 그러지 못한다고 해서 무용한 것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나는 그저 '우발성을 내포한 개념'이라는 말이 이 '한걸음'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가 아닐까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진리'는 이렇게 철저히 현실과의 연루 속에서만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P.S 기본소득은 그 "한걸음"에 해당하는 개념일까? ㅎㅎ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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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의 물질성에 관하여


1.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은 이데올로기의 전능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적지 않은 이데올로기론은 이런 점을 잊고 이데올로기론의 제한된 개념들을 통해 세계를 합법칙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이렇게 전개된 이데올로기론은 결국 다시 보면 자기독백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자기독백이 가져다 주는 심리적 이익(이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경제적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가지고 명확한 '대상'을 가진 '과학'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말 몇 마디(여기에는 그 수많은 이데올로기론의 글들도 포함된다)나 '윤리'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엄연한 사회적 현실이다. 이데올로기론이 인식을 산출해 내려면 자본의 축적과 위기, 이런 이데올로기를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제도(알튀세르와 푸코가 '장치Apparatus')라고 부른 것들과의 연관선 상에서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이렇듯 경제적 정치적 현실과 이데올로기가 연관을 가진다는 말은 이데올로기 자신이 이들이 필요조건이기는 하나 동시에 이들을 필요조건으로 가진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자족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장치들과의 연관 하에서 의미를 가진다.

2.
이런 이데올로기와 장치들의 집합체를 가리켜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학문들과 마찬가지고 이데올로기 역시 '역사'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데올로기 자체가 역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역사에는 '지배의 실천'과 '복종의 내화'를 소묘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또한 '모순의 돌출'과 '봉기의 기억'을 담겨 있다. 그리고 그렇게 그런 역사가 씌어졌을 때, 우리는 무엇이 잘못 되고 무엇이 고쳐져야 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론은 이 과정에 있어 자신에게 주어진 대상을 분석할 뿐이다.

3.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전능성으로 대체할 경우, 이런 이데올로기에 내재하는 갈등을 보지 못하게 된다. 때문에 비관주의적 전망에 갇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 대중'이 '주체'로 대체되고, '정치'가 '윤리'도 대체되며, '해방'이 '용기'의 문제로 대체되게 된다. 이데올로기론은 그 모든 사회적 현실이 배제된 채 누가 더 깊은 내공을 가지고 강한 무공을 사용하는지를 겨루는 무협지로 대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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