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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10
    한윤형의 이영훈 사태 독해와 독자의 상상이라는 쟁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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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윤형의 이영훈 사태 독해와 독자의 상상이라는 쟁점

  한윤형의 이영훈에 대한 포스트(http://yhhan.tistory.com/m/post/view/id/1305)를 읽고 떠오르는 단상을 메모한다. 이 포스트의 내용을 4단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영훈은 일부 사람들의 상상과 달리 일본군 '위안부'를 강제가 아닌 자발적 참여에 의해 구성된 것이기에 잘못된 게 없다고 '긍정'한 적이 없다. 오히려 이영훈은 이 문제를 더 설득력있게 비판하는데 다만 차이는 1)신뢰성 높은 사료들에 근거하고 있다는 '실증성의 측면과 2)'민족'이 아닌 '인권'의 이름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데 있다

1-1. 한 가지 부연하자면 여성권이라는 쟁점이 있다. 이는 인권이라는 문제틀 중 일부로서만 귀결되지 않는다. 이영훈과 그의 독자로서 한윤형이 '위안부' 문제가 식민과 청산이라는 '민족' 문제틀로 환원될 수 없는 성차별 내지 가부장제의 측면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 부분에서 일본인과 조선(한국)인은 지배 대 피지배자가 아닌 (대칭적이지는 않지만) 공모자로서 묶인다.

2. 이러한 인권 및 여성권의 측면에서의 반박은 빈약한 실증과 상상적 증오에 기초한 민족주의적 접근보다 오히려 제대로 된 비판이 될 수 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영훈에 대한 몰이해와 거부는 저널과 키보드워리어를 포괄한 우리 사회의 담론공간이 얼마나 빈곤한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계몽주의적인 논평이다. 하지만 이는 꼭 엘리트주의로 해석될 수는 없는데 1)지은이가 요구하는 역사학적 감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에게나 가능한 엄청난 수준이 아니라는 것과 2)섣부른 독자들을 나무라면서도 이러한 독자들의 현 위치에 대한 책임을 '저널'이라는 구조적 측면에 다루고 있다는 것이며 3)(아마도) 자신이 이러한 사태에 대한 '아는 이'의 죄책감까지는 아니더라도 '목격한 이'로서 상황을 개선해보겠다는 책임감을 이 포스트를 씀 자체로 해서 보여줬기 때문이다.

  여기에 내가 (쟁점을 흐트릴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서, 그리고 한윤형이 겪고 있는 부당한 부담들에도 불구하고) 잉문학도로서 덧붙이고 싶은 테마는 '독자의 상상'이라는 것이다. 계몽주의적 관점에서 모호한 상상은 정확한 인식으로 인도되어야만 하는 일종의 질료에 불과하다.
  하지만 일부 인문학자들(대표적으로는 스피노자나 프로이트)은 이 도식에 일말의 망설임을 품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이 지긋지긋한 '상상'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유한한 인간들의 삶에서 지울 수 없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수많은 상상들이 과거에나 현재에나 교정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인류는 지금 멸망과 같은 절망적 상황에 이르지 않았으며 역사를 좀더 주의깊게 관찰한다면 이러한 상상이 몰이해와 증오같은 부정적인 것만이 아닌 긍정적인 것으로 기능했던 예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스피노자의 [신학-정치 논고]에서의 유대 민족 분석).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는 잘못된 상상을 올바른 인식으로 이끄는 것이 아닌, 상상을 중립적인 것으로 재인식하고, 그것이 어떤 조건에서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것으로 전화하는지 그 메커니즘을 알아내어, 우리에게 이로울 수 있는 방향으로 상상을 활용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다시 한윤형의 포스트로 돌아가보자. 한윤형은 이영훈이 '친일파'로 볼릴 만한 혐의가 있지만 이런 주장들은 논쟁의 여지 없이 부차적인 것으로 반박되거나 무시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영훈이 오히려 효과적인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접근틀을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그럼 그 '효과'의 기준은 무엇일까? 일반적 역사학적 '상식'? 그렇게 걸고 넘어질 구석도 있다만 '상식인'이라는 말의 이데올로기성에 그 누구보다도 예리하고 생동감있는 지적을 해왔던 한윤형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런 지적은 악의적일 우려가 크다. 적어도 이 사안에 있어서 그가 잠정적으로나마 근거하고 있는 가치는 분명한 거 같은데 앞서 말한 인권과 가부장제 문제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상상에 근거한 것이든 어쨌든 '민족'의 편에 있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런 <서구적인> 접근이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물론 아무리 오리엔탈리즘이 논술교재로 쓰일 만큼 대학재학/졸업자들의 일반적 교양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독자 모두가 인권의 서구중심주의적 성격을 숙지하고 독자에게 반감을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독자는 냄새를 맡고 '뭔가 아닌데...'싶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독자는 이영훈에 대한 인식과 마찬가지로 한윤형의 변호도 그렇게 상상적으로 읽는 것이 아닐까?
  이런 질문들은 아직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다(그리고 정직하자면 이게 실증이 가능한지도 모르겠고, 근시일 내에는 그를 시도해볼 기회도 없을 것 같다. 이는 내 잘못만은 아니라 잉문학 방법 일반이 가지고 있는 단점 또는 장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만일의 경우에 사태가 이러하다면, 서로 다른 편('민족'과 서구적 보편성으로서의 '인권' 내지 '페미니즘') 사이의 대화는 어떻게 가능할 것이며 어떻게 공통의 문제(여기서의 사례는 일본 우익의 '위안부' 문제 부인)에의 대처는 또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렇다고 한윤형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을 시도했다가 잘 안 되니 문제를 남에게 돌리고 있다고 말했다가는 그 사람만 바보가 되는 것이다.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1)인권이나 페미니즘의 보편성이 비록 그 기원에서나 역사 에서나 심지어는 히잡사태같은 현재의 정치적 쟁점에서나 '서구중심주의'적인 성격과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보편성이 역으로는 그에 못지 않은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해 왔으며 이는 다문화주의가 강조되는 '지금' 유럽 어딘가가 아닌 '여기'에서도 그러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연령, 성별, 국적의 차이에 근거한 폭력을 당했을 때 '인권'은 (비록 공하기도 하지만) 이에 저항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객관적 수준의 정당성의 토대를 만들어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택지이다(혹은 그렇게 보인다). {사실 이런 한윤형의 '오리엔탈리즘'(?)적 지향은 그의 저술에 어느 정도 일관된 것인데 그렇다고 이것이 그의 '외설적 중핵'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성향은 그의 글이 추구하는 '현실성'에 부차적으로 따라나오는 것에 불구하다. 따라서 한윤형을 이런 관점에서 비판하고자 하는 이는 우선 '오리엔탈리즘'적인 세계를 비판하던가 그 세계를 더 나은 가치에 기초하게 만들 비전을 들고 나와봐야 할 것이다.}
2)한 사람에 한 생각만 하고 사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생각 중에는 온갖 가치들이 서로 경쟁하고 다투고 있다. '민족'과 '인권' 둘 다 중요하다고들 생각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윤형의 이영훈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할 때는 그 둘 중 하나에 호소하여 다른 경향을 누르거나 반성해 볼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학적 전제에 비추어 볼 때, 계몽주의적 글쓰기는 '한A하는 사람을 B하는 사람으로 만들기'보다는 'A와 B 사이 있는 사람을 한 쪽으로 가깝게 이끌기'로 다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한윤형의 입장의 정당성을 고려하더라도 우리의 질문이 멈출 필요는 없을 것이다. 즉 상상이 우리의 의사소통의 미숙함만이 아닌 기본양식이기도 한다면 우리는 그 양식의 연약함과 난폭함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어떻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활용할 것인가? 그래서 누군가들은 우리가 주장의 올바름이 아닌 세계관 환상의 영역에서 다른 이데올로기와 경쟁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이런 질문들이 결코 말을 올바른 근거에 위치시키려는 계몽주의적 노력을 훼손하는 것으로 이어져서는 아닐 것이다. 상상력이 인식의 근본조건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지성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어쩌면 상상을 실재적인 것으로 가정하는 것 자체가 게으른 지성의 직무태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있어서는 안 된다. 무엇이 올바르고 그렇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대답이 요구되는 순간, 이런 접근은 자신의 무책임함을 여설히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이런 접근이 어떤 판단을 도울 수 있으며 나아가 판단의 선택지 자체를 흔들어 놓는 담론적 무기가 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갖춰져야 한다(나는 진태원같은 이데올로기론에 관한 이론적 작업은 이런 작업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기초 토양다지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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