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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보겠습니다. 사실 저 말은 잉문학도들이 자신들이 생각/착각하는 의미에서의 '정치'를 표현하기 위해 쓸 때에는 님이 말한대로 법적 정의로 포괄될 수 없는 (진짜) 정의의 척도로서의 폭력을 가리키는 말일 경우가 많습니다. 마오 쩌둥의 말처럼 조반유리, 반역하는 자에게는 이유/합리성이 있다는 것이고 그 자체로 굉장히 낭만주의적 접근이죠. 이러한 추상적 개념으로는 레닌의 혁명적 폭력이나 네오나치의 반달리즘을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논점이 벤야민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하는 것인지, 그리고 이렇게 러프한 개념이 그저 맨땅에서 나온 것인지 나름의 역사적 맥락에서의 이유를 가지고 도출된 것인지는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이를 위해 진태원 선생의 관련 논문 [폭력의 쉬볼렛 : 벤야민, 데리다, 발리바르](http://blog.aladin.co.kr/balmas/3425017)에서 몇 구절들 짧게 인용하면서 이야기를 꺼내보겠습니다.
우선 다음과 같은 서술은 한형의 지적과 겹치는 지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의 이론적 대담성은 무엇보다도 법 일반을 정의의 타자로 설정한다는 점에 있다. 사람들의 상식적인 정의감에 따를 경우 법은 정의의 타자가 아니라 정의의 수호자,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본질적인 수단 중 하나다. 적어도 법이 공정하게, 원칙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그렇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좀더 효과적인 법을 제정하고 좀더 공정한 절차와 좀더 엄정한 집행을 통해 법의 원칙을 있는 그대로 실현하고 집행할 것인가 여부가 정의의 근본 문제 중 하나가 된다.
반면 벤야민에게 법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본질적인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정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장애물이다. 그것은 법이 본질적으로 수단과 목적의 관계에 따라 실행되는 폭력이며, 그로 인해 순수한 정의, 또는 순수한 폭력의 가능성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들의 "상식적인 정의감"은 진태원이 가정하듯이 <법=정의> 뿐만이 아니라 <법≠정의> 또는 <법<정의>의 형태를 띠기도 하며, 특히 사이버공간에서의 양태는 후자 쪽의 경향이 훨씬 강하다는 것이겠죠. 벤야민의 시대에는 어땠을런지 몰라도 우리 시대에서의 정의에 대한 감각은 법실증주의보다는 아나키즘에 훨씬 가깝지 않나는 짐작을 한 번 해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벤야민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을 늦게서야 깨달은 인문학도의 사례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가 처했던 시대적 상황, 정세적 맥락을 고려하면 긍정하지 못할 말도 아니지 않을 말입니다. 그의 시대적 배경이 바이마르 공화국입니다. 저도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능력이 안 되지만 어쨌든 벤야민은 당시의 시대상에서 '법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에 문제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선택지는 더 좋은 법을 만들던가 좋은 법이 좋게 행해질 수 있는 제도나 정치를 꾸려가던가 하는 길이 있겠죠. 하지만 벤야민은 그런 루트를 택하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사고를 꼬아갑니다. 누구들처럼 이게 "위대한 사유의 감행"이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냥 뭔 얘기를 하는지만 썰을 풀겠습니다.
벤야민은 (아마도) 당시의 상식에 반해 법이 정의가 아닌 부정의의 편에 있으며, 이는 '법'이라는 '목적'에 '폭력'이라는 수단이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요. 폭력에 대한 일종의 철학적 재정의입니다. 폭력이 문제적인 것은 '법에 어긋나기 때문'이 아니라 '법에 종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법은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살아가기 위한 유용한 원칙이 아닌 억압과 부정의의 도구 기만으로 가정되고 있습니다. 아나키즘적이지요. 근대 국가의 최소 구성원칙을 부정합니다. 막장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는 않습니다. 벤야민은 '목적없는 수단' '법에 종속되지 않은 폭력'을 개념화하려고 했지만 이것이 어떤 경우에도 정당하다는 식으로 논의를 전개하지는 않습니다. 그 역시 사적 폭력의 자의성과 문제점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었고, 나아가 이런 폭력들이 자신들을 '새로운 법'으로서 주장할 위험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종류의 폭력을 신화적 폭력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것에도 맞서는 종류의 '목적없는 수단'으로서의 폭력을 '신적 폭력'이라고 부르죠.
"벤야민은 그의 글 뒷부분에서 수단-목적 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곧 어떤 지정된 목적을 지향하지 않는 폭력의 가능한 사례들로서 신화적 폭력과 신성한 폭력을 검토한다. 하지만 신화적 폭력은 수단이 아닌 ‘발현’(Manifestation)이고 따라서 “비매개적 폭력”이기는 하지만, 인간과 신 사이의 경계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따라서 “폭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필연적이고 내밀하게 연루되어 있는 목적을 권력의 이름 아래 법으로 제정”(FL 162)한다는 점에서 법정립적 폭력의 하나임이 드러난다. 따라서 폭력의 비판의 과제는 이러한 직접적 폭력의 신화적 발현을 파괴할 수 있는 순수하고 직접적인 폭력, 곧 신성한 폭력에 대한 질문을 낳는다. 신화적 측면과 모든 측면에서 대립하는 신성한 폭력은 법파괴적이고 면죄해주는 폭력이며 피를 흘리지 않고 목숨을 앗아가는 폭력이다."
벤야민이 이런저런 함정들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그 함정을 성공적으로 피하고 '신적 폭력'이라는 정의의 새로운 기준을 개념화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위의 인용문만 보면 신적 폭력은 그저 신화적 폭력의 부정형으로서 좋은 말은 모아놓은 그럴싸한 개념으로 보입니다. 벤야민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폭력 일반을 긍정하지 않는 신중함을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념화에 실패했다는 고백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순수한 폭력이 어떤 특정한 경우에 실현됐는지 결정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가능하지도 절박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면죄하게 해주는 힘이 인간에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비교 불가능한 효과 속에서가 아니라면, 신의 폭력이 아니라 오직 신화적 폭력만이 그 자체로 확실히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후속 학자들의 궁금증이 시작됩니다. 진태원 씨는 이 부분을 묻기 시작한 학자로서 데리다를 인용합니다. 데리다는 벤야민의 폭력론의 이 결론부를 아포리아라고 합니다. 나갈 곳이 없다. 답이 없는 이야기라는 거죠.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은 구분될 수 없습니다. 나아가 법을 지키기위한 권력의 법보존적 폭력과 법을 처단하고 새로운 법을 수립하는 정의로서의 법정초적 폭력도 구분될 수 없습니다. 진태원 씨가 설명한 데리다의 결론을 거칠게 요약하면 대강 이렇습니다.
어떤 종류의 폭력은 법 내부에서 제한적으로 해결될 수 밖에 없는(혹은 사람들한테 그렇게 느껴지는) 사회부조리를 송두리째 근본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점에서 '해방의 약속'입니다. 제도적 조치들이 이 허황된 약속보다 결코 못한 종류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해주지는 못하는/않는 종류의 것들이죠. 하지만 동시에 이 폭력은 자신을 '역사의 완성'으로, 즉 '목적end'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또다른 종류의 '합법적 폭력'으로 전락합니다, 또는 그 출발부터 그러합니다. 더이상 '목적없는 수단'이 아닌 것이지요. 데리다의 많은 논의가 그렇듯이 모든 약은 독이기도 합니다. 데리다는 때문에 우리는 이중의 투쟁에 직면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해방적 폭력을 추구하는 동시에 그 폭력에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독성에 저항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꼭 '폭력'이라는 문제설정에 집착해야 할까요? 왜 '법'은 새로운 정의를 논하기 위한 문제설정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을 벤야민, 데리다, 진태원과 달리 개인적으로 품어보게 됩니다. 하지만 어느 한쪽을 긍정하고 부정하기보다는 일종의 분업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물론 분업의 한 파트 '폭력'에 대한 파트가 제대로 고민되고 연구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이 쪽의 논의들은 좀더 구체적인 사례분석에도 적용되어서 나름의 정치평론으로 쓰일 수 있는 꼴을 갖출 것이라는 믿음이 있긴 합니다.
음 이렇습니다.
1. 최근 슈리 님의 포스트 [좌파는 성매매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트위터와 블로그에서 소란이 한바탕이 일어났었다. 나로서는 그 글의 원문은 읽지 않았지만 그 텍스트를 둘러싼 비판들은 한윤형 님과 구멍 님의 글을 중심으로 보았다. 어째서 공평하지 못하게 그렇게 읽었냐하면 거만하지만 최선을 다해 솔직한 말로 그 포스트가 어떤 내용으로 쓰여있을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떤 태도에 입각해 쓰여있을지 충분히 예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걸 예상하고서 그 글을 태연히 볼수는 없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질낮은 글을 눈에 담을 시간이 없다는 지적 우월감/자만감과 개인적 다급함이 중첩된 것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 자신이 정확히 저런 글을 써보고 그것으로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자존감을 획득하던 사람이었기에 드는 복잡한 감정이기도 하였다. EM님의 말씀처럼 이 집단은 '스승'이나 '선배' 없이 시작을 했다. 그 전에도 이런 사람들이 없던 것은 아니다.
2. 하지만 차이를 들어보자면 크게 2가지 정도가 일단 떠오르는데 우선
1) 왕고가 없는 들뢰즈 이후의 현대정치철학 : 2000년대 중반 이후 번역출판된 (주로) '들뢰즈 이후의 현대정치철학'를 통해 읽었다는 것. 나는 이런 단순한 사실만 포착하고 있다가 지인의 지적을 듣고 이 사실의 특이성을 느꼈는데 그것은 '선배가 없다는 것'이다. 독해가 맞든 그르든 맑스는 김수행이 있었고 그것의 비판인 알튀세르는 과천 연구실이 있었고 또 그것들과의 비판적 긴장을 유지하려 들뢰즈에는 이진경이 있었고 네그리에는 조정환이 있었다.
하지만 들뢰즈 이후에 등장한 지젝, 바디우, 랑시에르 등에는 '선생'이나 '선배'로 대표될 얼굴이 딱히 없었다. 물론 먼저 나보다 그 책들을 영어로 읽은 선배들의 번역을 통해 우리가 읽게 된 것이긴 하지만 해당하는 이가 지젝을 전문적으로 번역할 의지를 가질 사람이었다기보다는 그냥 좋은 책 한권 번역하자는 식으로 던져주고 간 경우가 많았다. 관련 연구까지는 아니어도 잡문들은 꽤 많았었던 것 싶긴 하지만 앞서의 이름들에 비견할 존재감(이것이 경중의 의미는 아니다)를 가진 사람은 딱히 없었다. 지젝에 이성민 씨가 있다 하지만 이성민 씨의 이름이란 것은 앞서의 이름들과는 참 다른 것 같다.
이러한 선배없음은 잉문학도들의 어쩌면 과잉되어 보이는 자의식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본다. 눈 앞에 아무 것도 없었기에 태초부터 논의를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야말로 세계를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고 말할 용기/오만을 가질 수 있었다.
2)웹을 통한 과잉전시: 다른 한가지는 이들이 글과 생각이 너무 많은 시선에 너무 오랜 시간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제 분수에 맞는 관심을 받는데 멈추지 못했다라는 말과 같을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다른 맥락도 있다. 이전과 같은 경우에는 EM님이 말씀하셨다시피 글을 아는 사람들에게 보이고 이들의 자문을 받거나, 아님 홀로 좀더 생각할 시간을 가지거나 하면서 글이 완성될 시간을 더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텍스트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속도는 이런 답답함을 참지 못한다. 심지어 생각이 시작되고 있는 과정에서도(이를테면 이 블로그 자체도 예외는 아닌) 전시와 독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후 사태는 이번 일에서 보았다시피 잘 알 수 있다. 원문이 뇌에서 다른 이의 눈으로 들어가는 시간도 빠르고 이 속도는 말과 말이 오가며 가속도를 붙여 가다 견딜 수 없는 경지에 오면 어느 한쪽이 폭발하고 서로 평행선을 그리는 식으로 사태가 마무리된다. 이 부분의 심리 역시 EM님이 잘 지적해 주셨다. EM님은 다른 이들은 별로 발휘하고 싶어보이지 않는 배려를 발휘해 슈리 님의 상황을 그나마 상대적으로 슈리님의 입장에서 말씀해 주고 계신다. 내가 그런 EM님의 말에 동의를 느끼는 것은 앞서 말했듯 나 역시 그런 글, 거칠게 한 줄로 요약하자면 어떤 대상이나 내용을 다루는 것보다는 어떤 신중하거나 (무엇보다도)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중요한 연극적인 글을 쓰는 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글을 쓰고 그런 글에 리플을 다는 와중 지금 슈리님이 처했을 법한 정신이 우왁!!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태는 기술의 발전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친 가설을 들어보자면 외톨이 먹물 지망 대학생들의 소비의 장이 공동체 내지 놀이터가 학생회와 연계된 학회에서 인터넷 서점을 매개한 인문학 출판시장으로, 생산의 장이 학회 발제문이나 레포트, 운동 문건이나 대자보, 타세력과의 토론문에서 블로고스피어나 인터넷언론 등으로 이동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주의: 다른 얘기도 그렇지만 이 부분은 특히 가설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며, 글쓴이의 학생운동 무경험이라는 어떤 치졸한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판타지일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 만약 이 가설이 맞다 하더라도 이 가설 자체는 중요한 중간고리들을 빼먹고 있는데 이를테면 '게시판' 문화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한윤형의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나 [안티조선운동사], 김민하의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가 어떤 역사적 기록들과 재밌는 해석들을 보여주고 있다.
3. 원래는 요즘 내가 하는 일이 항상 그렇듯 좀 뭔가 센치하게 쓰려 했던 포스트인데 어쩌다 나름의 원인분석이 이렇게까지 길어졌다.......사실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이런 것보다는 다른 것이었다.
잉문학도로서, 내가 요즘 자주 생각하는 문제로서 '머리로서 사는 사람'이 현실과의 접점을 찾을 때 '몸으로 사는 사람'이나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을 무시할 수밖에 없는지.
20대가 공부를 해야 되는 나이라는 예감을 가지면서도 가지게 되는 불만이나 불안들. 아 나보고 닥치고 배우라는 거냐 네가 배울 만한 사람인지 증명도 안 해 놓고. 공부를 하고 글을 써서 뭔가를 바꾸거나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여를 할 수 있을까하는. 또 그때까지 있다보면 나도 저 축쳐져 10명도 안 되는 사람이 읽는 글을 쓰고 만족하며 사는 시간강사 선배들처럼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지 않으려면 지금 뭐라도 함께 해나가야 되는 것이 아닐까.
내가 갈법한 길에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닮고 싶지 않기에, 심지어 나까지 포함해서 그러하기에 느끼는 미칠듯한 불안정함. 이런 걸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이들에 대한 질투와 벗어난 양 시늉하는 이들에 대한 불신과 증오.
대강 이런 쟁점들. 사실 이런 것들이 나는 진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중요한 원인들이 그렇듯이 이 원인들 역시 안다고 해서 뭔가 속이 시원해지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당장 해결될 수 없음을 알고 더 답답해지기도 하는 그런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EM님의 조언들이 참 고마울 수 있고 동의가 된다만 절반의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나머지 절반을 EM님이 답해줘야 하는 것은 아니며 사실 그 다른 누구라도 그리하지 못할 것이다.
5. 하지만 물론 이 글과 관련될 사람 중에 이런 말들을 곧이곧대로 들을 사람이 없는 것이 일단 내가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섣부른 비관에 빠졌다고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상황을 자신들에게 대입시킨다고 하거나. 아니면 내가 주장하는 차이들은 가상적이거나 기껏해야 눈꼽만한 거라고 까이거나. 나는 이런 좌절들을 몇 번 경험했다. 그래서 또 자가소비용 글을 쓰는구나 싶기도 하지만, 내가 먹을 채소를 내가 기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다 싶어 끄적여 놓는다.
그리고 관련된 글 을 트랙백한다. 사실 이 블로그 전체가 이 글과 관련된 것일 수 있지만 이 글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명시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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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백 걸고 싶으신 EM 블로그 글의 트랙백 주소는 http://socialandmaterial.net/wp-trackback.php?p=1086 입니다. 마지막 숫자 부분만 포스트 주소별로 달라집니다. 트랙백 보내는 자세한 방법은 http://blog.jinbo.net/jinbone/420 를 참조하세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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쌩유!!! 저도 이젠 앙겔부처님과 이웃이 되었근여 ㅎㅎㅎㅎ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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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게슴츠레님께 보였던 어떤 면에선 주제넘는 반응들도 사실은 "그런" 맥락 안에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게슴츠레님이 잘 이해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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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흐흐 뭐 주제넘은 건 없는 것 같은데요? 언젠가는 EM님과 좀 내용이 오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하곤 합니다. 그건 그렇고 게슴츠레는 누구냐능?!!! 저는 닉네임 '닉네임'입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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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죄송함다;;;)하긴... 별로 알찬 얘길 나눠보질 못한 것 같네요. 닉네임님을 만날 때마다 다른 재밌는 이야기꾼들이 있어서인지.. ㅎㅎ 조만간 좋은 기회가 생기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