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
2.
별다른 부기 없이 공감이 가는 말이기에 생각날 때마다 보기 위해 모셔둔다.
3.
"(...)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설명적인 기능을 지닌 "원인들"의 구조가 아니라, 관찰 가능하지만 그 원인(어쨌든 주요한, 궁극적인 원인)은 "부재하는" 효과들의 구조다." -에티엔 발리바르, 「폭력과 시빌리테」 중.
이 짧은 문장은 '인식'을 함에 있어 주의해야 할 점을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앎'으로서 해당 대상이나 그 대상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지배하거나 그것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면, 그리하여 우리의 인식이 어떤 (특히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서의) '실용적' 기능을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어떤 '문제'를 단칼에 규명하려는 충동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해당 문제를 단일하든 다양하든 어떤 근원적 모순, 우리가 인식적을 넘어 윤리적으로 실패하고 마는 맹목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정리하려는 욕심을 전략적으로 참을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방금 잠깐 [명작 스캔들]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들춰봤는데 거기에서는 어떤 사람이 클림트의 [키스]를 말하면서 프로이트가 대단한 이유는 인간이 뭘 하든지 성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프로이트를 일종의 판섹슈얼리즘으로 보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 경박하다는 둥의 경박한 비판은 하지 않겠다. 사실 프로이트를 그렇게 읽어도 상관없고 또 프로이트를 판섹슈얼리즘으로부터 구출해 내려는 시도들이 프로이트를 너무 상징화하고 있다는 식의 비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기에 해당 화자가 이런 논쟁을 고려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 언표 자체로는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래서 뭐?" 프로이트가 그렇게 인간을 해석하든 말든 그런 해석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원인을 안다고 꼭 그 대상에 대해 잘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지점이 고려되지 않았을 경우 앎은 '아는 이'이 도취감 이외에는 아무 것에도 기여하지 않는 그닥 '실용적'이지 못한 것으로 전락한다. 그 앎이 다르게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 순간에는 그러하다. 그래서 '효과'를 고려하는 것(하지만 여기서 효과란 원인과 변별이 완전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성취된 것이다. 그러지 못할 경우 우리는 반-규범을 규범으로 제시하는 악순환을 반복할 따름이다), 다시 말해 앞서의 질문 "그래서 뭐?"를 던져보는 것.
다음의 훔쳐온 메모까지 더하면 나 자신이 철학 자체라기보다는 '철학적 접근'들에 대해 일종의 문제의식을 느끼는지가 조금은 더 명확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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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만 하더라도 2번 항목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와 같은 명제에 대해 흔쾌히 동의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좀 더 조심스레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화화된' 대상을 탈신화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요. 그러나 제 기억을 거슬러 생각해보면, 탈신화의 추동력 자체가 일정정도는 신화화된 대상을 수용한 이후에 나올 수 있는 게 아닌가요? 2번 항목에서 언급하는 깨달음은 역설적으로 그것이 비판하는 사유가 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더불어 '탈신화하기'를 가르쳐준 선학들 또한 우리 안에서 신화화되고 있지 않던가요? (이런 종류의 질문이 여러 개 가능할 것 같습니다-개중에는 의미있는 것도, 무의미한 것도 있겠지만요)그런 점에서 저는 2번 항목에서 이야기하는 태도를 우리가 한번쯤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임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보편적'이 되기에는 그 역시 '특수한' 교훈이 아닐까 싶어요. 별개로, 남과 다른 업적을 이룩한 인물을 그려낼 때 그를 일정정도나마 신화화하지 않는 서술이 가능할 것인가란 물음도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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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살아가는 데 어떤 상황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 교훈'이라는 게 어디 있긴 하겠습니까ㅎㅎ 저는 그런 욕심까지는 부리고 싶지 않고, 더 강하게는 부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축입니다. 그것 역시 3에서 경계하고 싶었던 그런 태도인 것 같기도 하구요. 그와 별개로 덧붙이신 두 개의 질문들에 답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제 생각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