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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1/08
    11/01/08 메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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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08 메모

1.
네오풀이 선물해준 프리모 레비의 『휴전』을 재미있게 읽고 있다. 내키지 않지만 선물했던 이의 의도와 부합하게 하지만 그리 강하지 않은 강도로 지금 내 상황과 비교해 공감하는 부분들이 간혹 있는데 다음과 같은 문장이 그렇다.

"내 속에는 오랜 배고픔과 추위, 무기력과 함께, 호기심과 거리낌 없는 가벼운 마음과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인간관계를 시작하고 나의 이 주체할 수 없는 자유를 과시하면서 마음껏 쓰고 싶은, 새롭고도 왕성한 욕구가 자리 잡고 있었다."(73쪽)

객관적으로 봤을 때 누구나 누리는 것이지만 나에게는 어떤 '인내와 노력'으로서 얻어낸 것. 그것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 그러나 이런 공감이 꼭 나의 특수한 처지 때문만은 아닌 것 보다 일반적인 주제에 관해서도 레비는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이를테면 '공연' "며칠 만에 갑작스레 마련된 공연이었고 또 그런 티가 났다. (...) 공연은 갑작스럽지 않은 무언가를, 아니 오히려 오래되고 견실한 무언가를 전제한다. 예컨대 기뻐할 줄 알고 표현할 줄 아는 능력, 젊고 발랄하고 강렬한 타고난 능력, 무대와 관중과의 애정 넘치고 다정다감한 친근감 같은 것을 말이다. 또한 공연은 공허한 과시와는 거리가 먼, 지적 추상과도, 인습과도, 전형의 안일한 반복과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 나름의 한계 내에서 따뜻하고 살아 있고 천박하지 않고 여느 것과도 다른, 자유와 주장이 가득한 공연이었다."(143쪽)

문체라는 얼굴을 가질 수 있는 활자들에게 축복 있으랴. 내 생각에 레비는 이 짧은 단락에서 (좀 오버해서 표현하자면) 서술에 있어서 냉소적 엘리트주의나 무책임한 민중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나아가 나처럼 이렇게 부정적인
(negative) 방식(흔히 분석에 사용되는)이 아니라 긍정적인(positive) 방식으로 공연이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할지에 관해 그려내고 있다(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서술을 최종적인 것으로 제시하지 않는 데도 성공하는 것 같다. 문학이라서 너무 당연한 것일 수 있지만 철학이나 사회과학의 활자들에 익숙한 나로서는 이런 묘사 자체가 참 신기하다. 덧붙이면 이런 묘사는 예전의 내가 '비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낭만적 회고가 빠질 수 있는 묘사의 안일함이나 전형적 표현에 빠지지 않고, 말그대로 그는 자신의 경험에 '부딪히고'
있다. 이 '부딪힘'. 어떻게(그 깊이와 방법에 있어서의 놀라움의 어떻게)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항상 자신을 뻗대거나 부끄러워하는 습관을 가진 나로서는 이런 방법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의 정신적 쾌활함이 부러울 따름이다.


2.

"예전에 어떤 분이 위인전을 아이들에게 읽히는 것은 아이의 성장에 그다지 도움이 안된다는 얘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지적 실천을 '천재적'으로 만드는 자신 과 주변의 서술은 '범인'들의 지적실천의 희망과 가능성을 제한하는 작용을 하는 듯 하다. 여기에서 학문함에 있어서의 조급증이 생겨나고, '범인'들은 영원히 자신의 지식을 갖지 못하고 '천재'의 작업들을 조급하게 추종하는 지적노동에 갇히게 되는 것 같다. (...)아무튼, 논문을 어떻게 무엇을 쓸 지 고민하던 중 문득 이런 생각들이 들었다. 나의 지적 실천능력과 조건, 한계, 이런 것들을 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나중에 다시 시작하는 수고를 덜지 않을가 싶어서 이다. 동시에 그 '훌륭한' 지식 위인들의 존재가 나같은 '범인'에게는 별 도움이 안된다는 점도 지적해두고 싶었다."-예술인생, http://blog.jinbo.net/alternativeasia/9

별다른 부기 없이 공감이 가는 말이기에 생각날 때마다 보기 위해 모셔둔다.


3.

"(...)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설명적인 기능을 지닌 "원인들"의 구조가 아니라, 관찰 가능하지만 그 원인(어쨌든 주요한, 궁극적인 원인)은 "부재하는" 효과들의 구조다." -에티엔 발리바르, 「폭력과 시빌리테」 중.

이 짧은 문장은 '인식'을 함에 있어 주의해야 할 점을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앎'으로서 해당 대상이나 그 대상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지배하거나 그것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면, 그리하여 우리의 인식이 어떤 (특히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서의) '실용적' 기능을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어떤 '문제'를 단칼에 규명하려는 충동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해당 문제를 단일하든 다양하든 어떤 근원적 모순, 우리가 인식적을 넘어 윤리적으로 실패하고 마는 맹목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정리하려는 욕심을 전략적으로 참을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방금 잠깐 [명작 스캔들]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들춰봤는데 거기에서는 어떤 사람이 클림트의 [키스]를 말하면서 프로이트가 대단한 이유는 인간이 뭘 하든지 성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프로이트를 일종의 판섹슈얼리즘으로 보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 경박하다는 둥의 경박한 비판은 하지 않겠다. 사실 프로이트를 그렇게 읽어도 상관없고 또 프로이트를 판섹슈얼리즘으로부터 구출해 내려는 시도들이 프로이트를 너무 상징화하고 있다는 식의 비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기에 해당 화자가 이런 논쟁을 고려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 언표 자체로는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래서 뭐?" 프로이트가 그렇게 인간을 해석하든 말든 그런 해석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원인을 안다고 꼭 그 대상에 대해 잘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지점이 고려되지 않았을 경우 앎은 '아는 이'이 도취감 이외에는 아무 것에도 기여하지 않는 그닥 '실용적'이지 못한 것으로 전락한다. 그 앎이 다르게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 순간에는 그러하다. 그래서 '효과'를 고려하는 것(하지만 여기서 효과란 원인과 변별이 완전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성취된 것이다. 그러지 못할 경우 우리는 반-규범을 규범으로 제시하는 악순환을 반복할 따름이다), 다시 말해 앞서의 질문 "그래서 뭐?"를 던져보는 것.

다음의 훔쳐온 메모까지 더하면 나 자신이 철학 자체라기보다는 '철학적 접근'들에 대해 일종의 문제의식을 느끼는지가 조금은 더 명확해질 것 같다.

"결국 이데올로기 안에 자리를 잡을 수 밖에 없음을, 철학적/유물론적 사고들은 그 아름다운 과거 속에서 사라져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 결국 현실적 효과를 갇지 못하는 철학적 비판, 반대중적 공허한 담론에 머물지 않았는가 생각해 본다. 철학적으로 이러한 '비철학' 또는 '유물론' 자체를 넘어설 필요성이 존재하지 않는한 이 담론에 머물러 있는 것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예술인생, http://blog.jinbo.net/alternativeasia/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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