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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3/05
    배설 - 2.두리반 & 3.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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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7/20
    2010/07/16~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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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 - 2.두리반 & 3.미디어

첫 번째 메모보다는 무게가 좀 떨어지긴 하고, 한바탕 쏟아내고 나니 굳이 적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싶지만 일단 기록 정도는 해두자.


2. 두리반

김강기명 씨의 두리반에 관한 글 "청(소)년, 그리고 정치의 한 방식-홍대 앞 철거농성장 <두리반>과 청(소)년의 집합행동"(http://www.nah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902)을 표제를 처음 봤을 때 '이거다' 싶었다.

두리반은 항상 '투쟁으로서의 유효성과 한계'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요구당했다. 내가 옆에서 주워본 것만 거칠게 단순화하면 그것이 정당과 왜 안 만나냐, 권리금 투쟁이라는 것 자체가 법적으로는 무력하고 투쟁으로서의 상징적 근거도 빈약한 게 아니냐, 용산사태에 업혀갈 것은 업혀가면서 왜 다른 사업장과 연대하여 철거폭력반대투쟁으로의 확장하지 않느냐 등등. 나름 이런 쟁점들에 대해서는 생각한 부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말은 아끼겠다. 역시 옆에서 대강 본 걸로는 두리반은 이런 지적들에 대해 주로(전부는 아니지만) '외부인의 시선'이라며 재개발반대운동의 한 실천으로서의 두리반 투쟁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식으로 대응해오지 않았나 싶다.

좀 이런 논쟁에서 소홀히 다뤄졌다기보다는(말을 계속 조심하게 된다 덜덜덜) 잘 주목되지 않은 것이 청소년운동(청(소)년보다는 청소년 자체)의 맥락이 아닐까라는 어림짐작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 두리반 상근자 거의 전원이 대학생들이 아니라 아직 20대가 되지 않은 청소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신기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더랬다.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 청소년이라는 (같은 학교와 많은 시간이라는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대학생에 비해) 조직화되기 애매한 집단이 이렇게 모여서, 거기에다가 어디 학생인권단체도 아니고 하필이면 두리반에 들어와 상근까지 하게 된 것일까? 왜 다른 단체가 아닌 이들이 여기 머물게 된 것일까? 사전에 조직화된 집단이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 집단의 조직화 정도와 그 집단에게 있어 두리반 투쟁이 가지는(그리고 가지게 될) 의미란 무엇일까?

대강 이런 점들이 궁금했고 여기에 더해 특히 이들 중 일부와 사회당의 특이한 일부(이를테면 슷)이 직접적(입당) 간접적(연대)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 이런 과정이 지금 시점에서가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아주 색다르게 평가되지 않을까 싶었다. 사회당의 거시적 변화의 의미에서, 나아가 진보(정당)운동의 인적 구성에 있어서 새로운 양상이라는 의미에서 그러지 않을까....라는 적어도 10년 후에는 터질 떡밥을 미리 물고 있었다. 지금부터 잘 기록해 놓으면 그때쯤 가서는 '정치적 조직화'에 대한 흥미로운 케이스스터디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두리반이 잘하니 못하니를 따지면 정당과 운동 이라는 정치 개념 중 무엇이 우월한지 따지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김강기명 씨의 글에 기대한 것도 이거였다.

하지만 요약기사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들여다 본 논문은 이런 앞지른 기대와는 예상보다 더 많이 다른 것 같았다. 물론 이런 논문요약 기사를 볼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중간에 기자라는 한 사람의 관심이 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강기명 님의 논문이 아닌 논문 기사 자체로만 인상비평을 해보자면 어떤 성과 운운에 대한 판단에 앞서 지금 두리반의 정치적 주체의 특이성을 포착하려 한 것은 고무적이나 이 과정에서 '몫없는 자들의 연대'나 '진정한 예외상태' 식의 현대정치철학의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이 역으로 이 문제의식을 흐리고 있지 않나 싶었다. 문제를 분석한다기보다는 문제를 장식하고 있다고 하면 좀 심할지 모르겠지만 기사로만은 그렇게 보인다. 현실과 개념의 소개팅을 넘어 현실과 개념을 넘나들어 가며 어떤 결론을 도출해야 하는데 어떤 현실이 어떤 개념에 해당한다 땡 이런 느낌.

언어의 문제도 '장황함'을 내재적으로 이해하려 했다는 것은 재밌지만 좀 과장되지 않나 싶다. 물론 논자가 두리반에 3개월 이상 머물며 현장조사를 했다는 성실성에 있어서 뭐라 할 말이 없지만 그렇기에 작업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아쉬움이 더 큰 것 같다.

그리고 이와 다소 별개로 들었던 생각이 두리반을 분석할 때 홍대라는 장소의 의미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잘 모르겠지만 나머지 중 전부는 아니지만 적지 않은 수가 사정이 어찌됐건 홍대에 적어도 한때에는 들락거리던 사람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예전의 홍대를 통해 형성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서만 모인 것은 아닌 게 모이고 나서야 "어 그때 거기 계셨어요? 와 그러셨구나ㅋㅋㅋ" 이런 식이어서 홍대->홍대인맥->두리반 식의 단순한 경로가 성립하지는 않는다. 지리적 인접성과 인맥이라는 틀보다는 홍대라는 '특이한' 장소가 지금 청(소)년들과 어떤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기에 이런 식의 어느 정도는 '느슨한'(것으로 보이는. 이 말이 두리반에서 고생하시는 분들의 공로를 부인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직화에  기여했는지 따져보면 흥미롭지 않을까 싶다. 김강기명 님의 발제에서 나온 재미에 관한 부분도 그 자체로 별개로 다룰 것이 아니라 홍대라는 장소와의 연관성에서 고려해야 할 듯 싶고(이를테면 왜 다른 투쟁장에는 인디밴드가 없는가?).

그리고 두리반에 있는 개개인의 생애사 측면에서도 재밌는 주제들이 많이 나올 것이다. 거기에 있는 어떤 사람은 인디레이블오너, 스컹크죽돌이에서 사진을 공부하기 위해 한때 홍대를 떠났다가, 다시 두리반을 통해 홍대로 돌아왔다가, 지금은 사회당 활동까지 하는 얼핏 보면 굴곡이 강한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는 그런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그 굴곡의 우여곡절에는 항상 '홍대'가 있었다. 한 인간이 정치관, 넓게는 세계관을 갖추고 그에 기반해 어떤 행동을 하는 데 있어 '장소'가 끼치는 영향력은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결코 작지는 않다.

홍대 자체는 누구말마따나 최신 상업자본에 포획된 곳일 수 있지만 그것이 개인들에게 가지는 사회적 상징적 의미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 어쩌면 두리반에 따르는 말말말들 역시 두리반이 '홍대'에 있기 때문에 겪게 되는 그런 과정일 수 있을 것이다. 농성장으로서의 두리반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놈들이 너무 많이 왔다갔다 하고, 홍대의 핫플레이스로서의 두리반이라고 하기에는 운동이라 할만한 것들을 하고 있기도 하고...두리반을 이해하는 일은 홍대를 이해하는 일과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이해는 아마 여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 시대의 어떤 사회적 조건들에 대한 이해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지금은 그게 어떤 것일지는 대강밖에는 머리 속에 그려지지 않지만은...


3. 미디어

나머지 하나는 '미디어'다. 한윤형의 [안티조선운동사]를 읽고 나서 정치의 조건으로서의 '미디어', 보다 철학적으로는 '말의 순환'이라는 테마는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주제이다. 그리고 그 뒤에 읽은 책이 사사키 도시나오의 [신문, 텔레비전의 소멸]이라는 책이다. 맨날 밥만 먹다 빵을 먹으면 원래 밀을 별로 안 좋아해도 맛있듯이 이 책이 신선하게 느껴진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 책을 꽤나 재밌게 읽었다. 인터넷, 스마트폰 등의 기술의 변화와 이와 선후를 가릴 수 없이 변해가는 사회적 변화를 넘나들어가며 서술하며 미디어의 변화, 우리 시대의 의사소통 양식 일반의 변화를 기술하고 있는 책으로서 나는 읽었다. 저자는 IT 전문 저널리스트로서 이런 변화가 신문사와 방송국, 그리고 저널리스트와 시청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며 서술했는데 이 서술 자체도 현상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재밌지만 나처럼 철학적 정치적 변화에 민감한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흥미로운 저술이 될 것이다. 나같은 경우에는 한윤형의 책을 읽고 나서여서 더더욱 그랬었던 것 같다.

이래저래 재밌는 논점이 많긴 한데 다 정리하려면 각이 심하게 나오고 한 가지만 기록해 놓고자 한다. 한윤형은 기술 조건의 변화에 의해 조중동이 털리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매스미디어라는 공론장이 사라지고 개개인의 취향에 맞춘 정보만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 보게 되는 현상을 강준만의 '사이버발칸화' 개념인용을 재인용하면서 서술한다. 정치평론을 하며 이런 기술적 변화를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진지하게 고민하려 한 데에서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이게 과연 '시대를 담아 낸다는' 의미에서 온전한 개념화인지는 조금 모자라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좀 들긴 했다.

그러던 차에 발견한 것이 사사키의 매스/미들/퍼스널 미디어 구분이다. 사사키는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바보 취급하며 그곳에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사라져 버린 것"과 같은 현상들을 예로 들으며 1980년대 후반 버블 붕괴 이후 일본에서 '대중'이 사라지고 있다는 어떤 논자들의 판단에 동의를 한다. 사람들은 대중으로서 텔레비젼을 보는 게 아니라 대중(어쨌든 자신은 아닌)이 무엇을 원하는지 살펴보기 위해 텔레비전을 한번 들춰보며 이것은 일부 평론가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인터넷과 같은 다른 미디어를 통해 선별적으로 더 효과적으로 탐색한다.

하지만 이것이 의사소통의 극단적인 개인화, 이를테면 '사이버발칸화'같은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데 사사키는 이를 미디어를 세 가지로 구분함으로써 설명한다.

1. 퍼스널미디어: 연애편지나 개인적인 메모, 혹은 주변 친구밖에 읽지 않을 신변잡기의 블로그 등 적은 인원 사이에서 공유되는 정보.
2. 미들미디어: 특정 기업이나 업계, 특정 분야, 특정 취미의 사람 등, 수천 명에서 수만 명 규모의 특정층을 대상으로 전송되는 정보.
3. 매스미디어: 텔레비전이나 신문 등 수백만 명에서 수천만 명에게 전송되는 정보.

미들미디어 자체는 잡지나 동인지에서 볼 수 있듯이 최근에서야 새롭게 등장한 매체는 아니다. 하지만 비용이나 수익 창출 규모의 문제 등 때문에 이런 미들미디어가 활성화되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때문에 지금까지의 미디어의 주도적 양식은 거대 자본이라는 경제적 교환 양식의 매개를 통해 그 활동성을 보장받는 매스미디어였다. 하지만 인터넷의 발명은 이런 거대 자본의 매개 없이도, 좀 개념적으로 말하자면 경제적 교환 양식의 직접적 매개 없이도 광범위한 수준의 사회적 교환을 가능케 하였다(사사키는 절대 이렇게 딱딱하게 말하지 않는다....내가 사사키의 주장의 의미를 내 맥락에서 생각하다 보니 이래 되었다). 그래서 사사키는 이렇게 말한다.

"인터넷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나이 든 사람들은 블로그를 아직도 "개인이 소소한 자신의 일상적인 일들을 사적으로 쓰고 있는 일기죠."라고 믿고 있다. 확실히 지금도 블로그의 대다수는 그런 영향력이 적은 신변잡기를 다루지만 한편으로는 월간 접속 건수가 수십만, 수백만에 달하는 '파워 블로그'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정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블로그야말로 미들미디어이다.(...)이러한 미들미디어의 정보 대폭발은 지금까지 매스미디어가 쥐고 있던 플랫폼을 아주 멋지게 무력화시켜버렸다."(58쪽, '파워블로거'는 한 예일 뿐임을 유의.)

그리고 매스미디어가 기초하고 있던 시청률 조사 및 광고 청탁 구조의 붕괴(즉 수익창출모델의 위기), 보다 넓게는 이런저런 기술적 사회적 변화와 그것들이 매스미디어의 위기에 미치는 영향들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또는 새롭게 전개될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기업들의 경쟁이 그려진다. 이런 개념화가 한윤형과 강준만의 사이버발칸화에 비해 가지는 이점은 양적으로는 사태를 보다 폭넓게 이해하게 해줌으로써, 질적으로는 사태를 긍정적(positive)으로 이해하게 해줌으로써 추가적인 사고와 기획들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조중동의 TV 진출 의도라든지 그것이 과연 시대적으로 보았을 때 얼마나 성공적일 기획인지에 대한 짐작같은 것들, 앞으로 민주주의적 힘으로서의 말을 뭉치기 위해 어떤 언론운동이 필요할지에 대한 전망 등등....물론 사사키 식의 논의가 없이도 이해가 가능한 것이지만 이 쪽이 좀더 깔끔하지 않나. (추가적으로 말하자면 사사키가 그렇다고 무작정 낙관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또 그렇게 썼다 하더라도 그렇게 읽지 않으면 된다. 그는 기술의 변화를 과장하는 기술결정론자가 결코 아니다.)

논점 하나만 덧붙이자. 이런 시대에 있어 저널리즘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한 저자의 지적은 보너스이다. 사사키는 말미에서 지금까지의 신문의 사회적 역할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1차 정보를 취재해 온다.
2. 그 정보의 평가를 실시해 여론을 환기시킨다.
3. 조사 보도에 의해 권력을 감시한다.

사사키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1은 통신사로 충분하며, 2는 블로거라도 가능하다. 남는 것은 3뿐이다."(229쪽) 신문의 입지 축소를 사사키는 저널리스트의 몰락이라는 허무주의적 결론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오히려 저널리스트가 자신의 주요한 기능 중 하나, 어쩌면 가장 중요할 사회적 임무에 충실할 수 있는 계기로 해석한다. 오늘날 인상 수준의 사회비판이 너무나도 대중화되어 있다. [안티조선운동사]에 따르면 우리는 그것을 노무현 시기에 가장 절실히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널리즘은 그 때 이런 고유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국 사회를 분석하고 주제화하기는커녕 일상적 비판들을 품평하고 부추기기만 하였다. 이건 사실 아카데믹한 '먹물'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저널리스트, 그리고 지식인들이 할 일은 술자리가 강의 시간에 아무나 데리고 개탄이나 하는 게 아니다. 그런 것은 웹 상의 주체들도 충분히 할 수 있고 일부 키워들은 훨씬 잘 한다. 하지만 어떤 일들, 이를테면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기와 같은 일들(즉, "조사")은 어떤 전문성을 아직도 분명히 필요로 한다. 해서 사사키는 이런 근본적 반성을 할 것을 주문한다.

"중요한 것은 신문사를 존속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문사이든지 텔레비전이든지 인터넷이든지 그와 관계없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미디어 공간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어떻게 하면 구축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발상이다. (...) 즉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아니라 필요한 정보나 양질의 오락, 그리고 국민으로서 알아야 하는 중요한 뉴스에 확실히 접할 수 있는 미디어 공간이다. (...) 그 대신, 우리들 자신이 열심히 생각해 새로운 미디어를 만들어간다면 좋은 것이다. 좋든 싫든 그것을 진정으로 생각해야 할 때가 드디어 와버린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이다."(237쪽)

앞서 말했듯이, 아카데미 역시도 마찬가지다. 한떄 웹상에 올라온 인문학 관련 기사와 정보들을 모으면서 느낀 것은 누구나 맘만 먹으면 금방 이런 것 따위 줄줄 읊을 수 있는 레벨로 오르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이런 고급 지식의 '민주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사사키가 저널리즘에게 던지려는 그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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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6~20


1. 요즘 텍스트를 별로 읽지 않고 있다. 언어 공부도 영 신통치 않다. 공부라는 것이 어떤 감정도 끼어들 수 없는 순수한 지적 수련의 과정만은 아니어서, 이렇게 게을러 지다 보면 '뒤처진다'는 자괴감을 피하기가 어렵다. 앞서서 무엇하며 뒤처진들 어떠리, 공부는 경쟁이 아니라능...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이게 또 성숙한 태도일 수 있겠지만 자존감-다시 말해 남에게 잘난척하는 것-으로 (일단 나는 돈은 안 버니 정신적으로) 먹고사는 이 바닥에서 경쟁의식을 떨쳐내기란 여간 쉽지 않은 것이다. 특히나 주변에 열심인 사람들이 눈에 보이면 더 피곤하다. 좀 스스로가 부지런해지던가 정신적으로 좀더 건강한 사람으로 개조되거나 아님 둘다 병행해야 할 것 같은데 둘다 쉽지 않는 일이다.


2. 뒤쳐진다고 느끼는 게 어디 공부 영역뿐이랴. 요즘은 특히 정치가 그러하다. 언제부터인가 약간은 일부러 정신줄을 놓고 시사 이슈에 대한 관심을 끊었는데 이게 조금 지나니 주변에 일들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모르겠다. 조병훈-양승훈-홍명교 논쟁(?)이라든지, 상지대 사태라든지, 진보신당 개명 떡밥은 뭥미... 근데 사실 이런 자평에는 구라가 좀 섞여 있다. '뒤쳐졌다'는 말에는 내가 항상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에 그닥 관심이 많지는 않았다는 점이 은폐된다. 내 기억 속의 정치는 그것이 음악을 통했든, 텍스트를 통했든 누구 당의 누가 뭘 어쨌다는 등의 이야기는 젼혀 들어있지 않은 굉장히 추상적이고, 또 그러기에 (일단 주관적으로는) 급진적일 수 있었던 그러한 것이었다. 기자 생활이라도 몇 년 시도해 봐야 되려나...

저널리즘의 방식과는 다른 측면에서 정치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게 소위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철학의 목표이긴 한데 대강 저널리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야 다르게 하든 말든 할 거 아닌가. 그리고 그 '다르게'라는 말도 좀더 섬세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적어도 정치철학과 정치평론이 서로 완전히 '별도'의 대상을 다룬다는 것, 좀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누구는 진짜 대상을 누구는 가짜 대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저널리즘의 이야기들을 귀기울여 듣는 요즘에서야 그 다른 접근이 뭔지, 정치를 보기 위해 '사회'를 다룬다는 말(발리바르의 말을 빌리면 '정치의 타율성')이 뭔지 감이 조금 잡히는 것 같다. 뭐 대단한 건 아니고 현실정치를 좀더 큰 틀에서 조건지우는 물질적 조건의 관점에서 탐구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굉장히 간단한 말인데, 이 말을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남의 역할을 구태여 부인하고 않고 실감하며 이해를 하게 된 것은 굉장히 최근이다...어쩌면 이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위에서 말한 뒤쳐짐의 느낌, 일종의 패배감을 경험했기 때문일런지도.


3. 최근 재밌어 보이는 책들이 몇 권 나왔다. 먼저 난장출판의 <두뇌를 팝니다 : 미제국을 만든 싱크탱크 랜드연구소>[책소개].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이라는 말은 적어도 2가지 함의를 가지는데 하나는 이데올로기는 경제같은 심급에 비해 부차적이지 않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그대로 이데올로기는 물질의 형태를 가진다는 것이다. 전자의 측면은 내가 생각했을 때는 조금은 과도하게 강조되어 있는 반면, 후자는 젊은 역사학 연구자들(시기상으로는 일제 식민지기)을 제외하면 그닥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은 느낌도 있다. 뭐 내가 과문한 탓에 예단을 하는 것도 있겠지만 그냥 출판시장의 추이만을 지켜보면 그런 인상이 든다. 아무래도 동시대란 그런 얘기를 하기에 너무 가까운 시기니 그렇기도 하겠지만. 여튼 이데올로기라는 문제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좀 심플해질, 그러나 가볍지는 않게 접근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푸코가 권력을 인격적인 관점에서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은, 권력을 신비적 개념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인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현대정치철학을 주로 다루는 난장출판이라는 출판사에서 이런 책이 출간되었다는 것은 반가웠다.

두번째는 꿩탱 메이야수의 <유한성 이후>[책소개]이다. 저자의 아버지는 끌로드 메이야수라고 프랑스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자이다. 끌로드의 아들이 바디우의 제자이고 그의 뒤를 이을 차세대 존재론 연구자라는 말은 듣고 아 그렇구나 했지 그의 책이 번역되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책 내용이야 아직 읽지 못했고, 설사 읽는다고 하더라도 뭔가 고개를 끄덕이며 읽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이 책의 출간을 보고서는 도서출판b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아시는 분은 알다시피 b는 그동안 한국에 지젝과 고진을 소개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던 출판사이다. 대강 1,000명 정도되는 이택광 씨의 네이밍을 빌면 소위 '인문좌파'들에게는 꽤나 유명한 출판사였다. 개인적으로 이 출판사가 좀더 정치적인 방향으로 갈지, 아니면 사변적인 방향으로 갈지 궁금했는데-이 이분법이 불합리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일단 스킵하기로 한다- 이번 책의 출간은 뭔가 예상됬으면서도 좀 의외였다. 나름 뭔가 내부에서는 출판사가 갈 길에 대해서나, 나아가 여기서 출간되는 책들이 무얼 해야 될지에 대해 가닥을 잡고 있는 것 같은데(아님 어쩌다가 걍 나온 거일 수도...) 그 '가닥'의 실체가 뭔지 좀 궁금하기는 하다.

마지막 세번째는 한형식의 <맑스주의 역사 강의>[책소개]다. 링크에도 약간의 추천의 변을 쓰긴 했지만 미리 원고를 읽어본 사람으로서는 맑스주의를 텍스트의 측면에서나, 운동이나 국가의 역사적인 측면에서나 접근하는 데 있어 기본을 충실히 지킨 보기드문 책이라고 생각한다. 좀더 양념을 치면 여기서 기본을 지킨다는 것은 지루함을 반복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세계관 내지 코스요리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보아야 한다. 설사 서술에 잘못되거나 과도한 점이 있을지라도 항상 머릿속에 준거점으로 남아 독자 자신의 생각을 형성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발판 역할을 해주는 책이 나한테는 몇 권 있는데 이 책도 그러한 책이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나오는 (주로) 한국 진보 지식인들에 대한 저자의 걸걸한 코멘트는 보너스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코멘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또 그 코멘트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사람들이 이 블로그에도 좀 들리시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추천 한 방 더 쎄운다. 이거 홍보가 너무 노골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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