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
마지막 학기의 중간고사가 끝났다. 학부 생활에서 이렇게 매번 시험을 칠 때마다 불변하는 마음같은 것은 없다는 관념론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시험 도중에는 시험 공부만 아니라면 세미나 공부, 개인적인 관심사 공부, 어학 공부 모조리 다 밤새면서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시험이 끝나고 그런 긴장감은 송두리째 사라져 버리고 소덕(소녀시대 덕후)질로 며칠을 보냈다.
지금 눈앞에 닥친 것을 한 번 정리해 보면 뭔가 써야 되는 것은
1)<자본>발제
2)에피쿠로스 발제
3)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관계를 당시 그리스의 정세와 연관지어 정리하는 레폿
4)가세트 책 요약 레폿
5)구조주의 정리 레폿
6)다른 시험 준비
이렇게 6가지이고
일단 읽어는 놔야 하는 것들은
1)몸사회학 참고자료 읽기
2)보르헤스 세미나 준비
3)랑시에르 <불화> 읽기
4)근동이물 세미나 준비
이 정도쯤 되지 않나 싶다. 어학 공부를 추가하고 싶지만 학기 내에는 아무래도 무리다. 단어 정도는 외워볼 수 있을까... 아마도 여기에 서양현대철학특강 레폿이 하나에서 두 개 추가되고, 프리모 레비 읽기 모임까지 일단락되면 일단 이번 학기는 끝이다. 그리고 대학생활도 끝이다. 이제 어디 가서 "어이구, 학부생이세요?"같은 소리를 들을 날도 그리 남지 않았다.
2.
무언가 끝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시작부터 지금까지를 돌아보는 것은 상투적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같다. 처음 대학에 들어왔을 때 모 후배의 증언에 따르면 펑크락커를 장래희망으로 가지고 있었고, 도중에는 혁명가 내지는 그에 연관된 일을 꿈꿨던 나는 지금 먹물로서의 삶을 준비해 가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에서 예상하지 못한 것이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책을 읽고 뭔가 실컷 떠들겠다는 점에서 봤을 때 학창시절부터의 경로를 꾸준히 따라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나는 몸으로 사는 사람과는 거리가 조금 있는 사람이다. 축구는 지독히 싫어했고 싸움은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언젠가 선빵을 맞고 그 친구의 눈을 쳐다보며 얘가 대체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이해해보려 한 적은 있다). 좌파를 공부했지만 좌파로서 시위에 나간 적은 그리 많지 않고 나갔다할지라도 선봉에 서기보다는 후측이나 측면에 서서 시간을 때우곤 했다. 그렇다고 소심하게 살아온 것과는 좀 거리가 있었던 시기들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이렇듯 몸으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조금 읽고 많이 생각하는 식으로 보냈던 것이 지금까지 내 삶의 전반적인 성향이었던 듯싶다.
이런 점들이 때로는 스스로를 가련히 여기게도 한다만 그런 좌절감은 지칠 정도로 생각을 해봤고 이제는 그저 역발상일련지 모르겟지만 사회에도 필요하고 나 자신이 할 수도 있는 그런 일이 있다는 확신이 들고 있다. 작년 즈음에 줄곧 했던 '내가 아는 것을 이 세상 사람 몇 천 명 정도만 안다면 세상은 달라질텐데...'와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그러한 확신이 든다(고 믿어 본다). 누가 뭘 모른다고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도 손쉬운 일이다. 비판만 하는 사람들을 비판만 한다고 비판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반도덕주의는 반도덕을 규범으로 삼는 도덕주의가 될 수 있으며, 냉소주의에 대한 격한 비판 역시 '저 사람'과 나의 관계를 부정하는 냉소주의의 또다른 양태가 될 수 있다(요새 여기저기서 회자되는 탈정치 운운하는 이야기들도 마찬가지다). 핵심은 책임을 지는 일이다.
내 경우에는 내가 같이 살기를 원하는 누군가들이 알아야 할 것을 알게 한다는 것이 이에 해당할 것 같다. 지식인/대중의 이분법에 반대하면 근원적인 지적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만,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의 투자가 요구된다. 비록 의식주를 생산하지는 않는다만 어떤 것들이 알려지지 않는 이상 대중의 역량 역시 온전히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나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지금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는 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도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을 알아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학문 역시 '사회적 노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런 태도를 말로 지키는 것과 이대로 살아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일 것이다.
3.
좀 이상하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소녀시대를 보면서 하게 되었다. 내가 그녀들을 보면서 얻는 정서적 이익들에 대해서 매번 고맙고 뭔가 그녀들에게 직접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활동을 행함으로써 '보답'해야 된다는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비록 개인의 결정권이 고려되는 상황은 아니다만, 하루하루 스케쥴을 소화하는 또래의 이 친구들을 보면 나도 내 분야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안철수같이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이나 내가 존경하는 선배 학자들을 볼 때에는 이런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왜 그럴까? 아마도 내 정서적 공감능력이 생각보다 꽤나 협소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논리로는 노동자의 고통이 왜 정당한지 왜 정치는 항상 보편주의적이어야 하는지 말할 수 있지만, 뭐랄까... 참 부도덕하지만 뭔가 함께 살고 있다는 느낌이 정말로 들지 않는다. 그들과 그녀들과 함께 웃고 울기에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 거리감이 꼭 무관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변명이 아니다. 오히려 그 거리감 때문에 괴롭고 피곤하다. 내가 저 사람들과 공감해도 좋을까 공감해도 저 사람이 나를 보고 뭐라 하지 않을까 같은 고민들이 이 기묘한 거리감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다. 어떤 분은 저번 술자리 후기에서 나에게 "연애의 감수성이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평을 해주셨는데 아마도 나의 이런 보잘 것 없는 정서 공감 능력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인상을 들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보다 이질적인 경험과 인생들에 공감하는 능력을 키워야 할까(하지만 어떻게?), 아니면 이런 간극을 인정한 채로 나 자신이 그들과 나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는 것이 좋을까?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는 나의 선택은 아마도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개념적인 반성은 미뤄둔 채로 일상적인 용법에서, 그래서 나는 감정보다는 이성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다. 감정은 언제나 나에게 당혹스럽다. 그리고 감정이 항상 불충분하다고 느끼는 나로서는 파토스가 가득한 운동의 현장이 매우 당혹스럽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의를 보면 화를 내지 못하고, 억울한 일들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또 아닌데...아무래도 사람들과의 물리적 접촉을 늘려가면 쉽게 해결이 될 그럴 문제일런지도 모르겠다. 성품보다는 습관을, 적성보다는 근성을 믿는 유물론자라고 스스로 자처한다면 그렇게 해나가야 되겠다 싶기도 하고...아무래도 졸업 전에 할 일들에 좀더 많은 술자리 정도는 포함시켜 놓아야 겠다.
4.
윗 이야기는 내 개인적 이야기는 하다만, 어쩌면 소녀시대를 사랑하는('열광하는'이라는 표현은 이미 부정적 가치평가가 전제되어 있다) 내 또래들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놓고 탈정치적이다, 무뇌다라고 비판하는 것은 옳은 비판이지만 무책임한 비판이기도 하다. 남의 삶에 대한 공감의 욕구는 모두에게 존재한다. 이런 공감의 욕구를 제한된 경로에서 찾아야 되는 상황 자체가 어디서 어떻게 비롯되었는지 밝히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런 작업을 수행하는 데 요구되는 인내심을 심판자의 입장에서 이것저것 훈수놓기 좋아하는 (진보를 표방하지만) 보수적인 문화비평가들에게서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으니 목마른 자로서 우물을 한 번 파보고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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