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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0/01
    201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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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1/03/20
    한 블로그 정독과 이번주 신간 프리뷰, 그리고 떠오르는 잡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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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1

"사회주의자라고 떠들며 소위 이론 얘긴 끝없이 늘어놓으면서 현안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사회주의를 얘기하는 것은 좋은데, 그래서 강만수의 메가뱅크론에는 찬성할 건가, 반대할 건가? 반대한다면 무슨 대안이 가능한가? (...) 내 얘기는 좌파를 확실히 하자는 얘기도 아니고 선명한 이념을 말하자는 얘기도 아니다. 제발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 입으로 말을 하라는 것이다. 대중의 바다에 나가서 대중에게 사회주의를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말을 들으란 말이다. 대중의 말을 듣고 뭘 해야 할지를 정하라는 말이다." -이상한 모자 http://blog.jinbo.net/bideologue?page=10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칼하게도 사회과학 지식은 도로 별로 쓸모가 없는 것이 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사실 사회과학은 대개 당장 쓸모가 없으며 특정한 소수에게만 그리고 특정의 목적을 위해서만 직접적인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이러한 지식들은 대개 그 지식의 보유자가 조직에서 높은 위치에 있을 경우에 실질적으로 사용 가능하다. 예를 들면 경영학에서 배우는 경영전략이나 경제학에서 가르치는 거시정책 같은 것은 아무리 공부해도 일반인이 그런 지식을 실제로 사용할 기회는 거의 없다. 둘째, 사회과학에서 배우는 이론적 지식은 당장 쓸모가 없다. 사회과학이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해석하는 세계를 다시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예를 들면, 경영학자가 기업의 업무능률 향상법이나 혁신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업무능률이 향상되거나 혁신이 일어난 실례를 먼저 연구해야 한다. 이렇게 그 본질상 현실세계에 의존적인 사회과학이 현실의 실제상황에 상관없이 당장 적용될 수 있기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이 당장 쓸 만한 인재를 배출하지 못한다고 기업이 불평하는 것은 많은 부분 심각한 착각의 결과이다. 셋째, 어떤 이는 사회과학적 지식이 '당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할 수도 있다. 상당부분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왜냐하면 알면서도 당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본이 노동을 착취한다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결국 자본이나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착취당하기(취직하기)를 바라고 선택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과학은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쓸모가 있는 것일까?" -Pepe http://moraz.egloos.com/page/31

 

"나는 스피노자 철학의 더욱 예민한 세부 항목들에 대한 학문적인 논쟁을 원치 않는다. 그러한 것은 다른 때에, 다른 장소에서 했으면 좋겠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나의 독자들이 관심을 갖기를 바라는 것은 중요하고 매우 가치 있는 사상가의 생애와 시대와 사고이다.
   이 전기의 중심에 놓여 있는 질문은 스피노자의 민족적인 배경과 사회적인 배경, 암스테르담의 포르투갈계 유대 공동체와 네덜란드 사회와 같은 두 다른 문화 사이를 유랑하는 그의 입장, 그의 지적인 발전, 그의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관계와 같이, 스피노자 생애의 다양한 측면들이 어떻게 스피노자를 역사적으로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작용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다른, 더욱 일반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네덜란드의 황금기에 철학자이며 유대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스티븐 내들러, 『스피노자』, 김호경 옮김, 24쪽. http://blog.jinbo.net/bideologue/127

 

"평생 현실 사회와 정치에 대한 적극적인 사고나 글쓰기를 굳이하지 않고도 나름 괜찮은 직업적 사회과학 연구자로 살 수 있고, 반대로 훌륭한 사회, 정치평론을 하기 위해 반드시 사회과학 연구자가 될 필요도 없다." -하늘타리, http://skytary.tistory.com/m/post/view/id/4

 

어제 술자리에서 '이론'이 쓸데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항상 과거를 반성하고 거리를 두는 내가 이런 말을 할 때 의미하는 것은 그토록 버닝했던 현대정치철학 이론들이고, 지젝으로 시작되어 고진을 거쳐 읽은 발리바르까지를 대강 말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쓸모 없다'는 말은 이런 이론들이 현실 분석에 도입되었을 때 위에 이상한모자님이 말한 것같은 메가뱅크 사태들에 대한 일상적인 주제들에 대해 유의미한 시사점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론들을 통해 또는 활용해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꼭 그럴 필요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독자층을 제한하는 효과를 가진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제한점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글이 쓰여진다면 그것은 그 이론이 유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관점이 좋아서이고 이론은 오히려 그런 관점들이 구체화되는 데 짐이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게 내 최근 가설이다.

 

하지만 어제에도 반박되었듯 이런 무리한 가설들은 쉽게 반박에 부딪친다. 그 글이 문제지, 이론 일반이 문제냐고 할 수 있다. 확실히 그렇다. 그래서 위에서 말했듯이 내가 부정하는 이론들이라는 걸 현대정치철학, 더 구체적으로는 서유럽/프랑스 출신 남성 학자들의 정치철학 이론이라는 것이라고 수정해야겠다. 그리고 위의 볼드 표시한 아닐까아닐 수 있다로 수정해야 할 것이다. 내가 아직 확신을 담아 말할 수 있을 만큼 국내든 국외의 글을 읽지 못했고, 적어도 최소한 나를 반박한 사람만큼은 읽지 못했지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잘못 생각했다기보다는 자신있게 주장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어제 자리를 마치고 나서, 좀더 고집을 부릴 걸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어제도 말했지만 "필요없다"나 "아니다"같은 무리하고 취약한 형태의 주장을 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돌이켜보면 정말 이론을 활용해서 좋은 시사점을 던져준 글을 본 기억이 없다. 뭔가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현실을 새롭게 보기보다는 그 이론의 언어게임의 예증으로서의 현실을 본 것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이것들을 읽는 데 말하는 데 쓰는 데 들이는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위로를 얻고자 한 것일 뿐이었다.

 

과도한 자기학대 성향이 아마 이런 생각을 하는 데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꼭 (이런 문헌들을 읽는) 노력을 들인 것이 의미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이 그런 종류들을 읽는 노력을 읽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정도로 이야기를 갈무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차분히 생각해 보면 이게 맞는 거 같다. 그런데 쿨하게 그러지 못하겠는 게 이런 필연성이 없다는 것, 그러니까 해도 상관없고 안 해도 상관없는 일을 해왔고 또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했다는 게 부끄럽다. 화가 난다. 그리고 이 다음에 뭘 할지 생각하니, 그토록 확신을 가졌던 행위 일반에 대해 의심을 하니 딱히 뭘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주로 하는 게 과거를 욕하는 거다. 이게 그나마 내 정체성을 어느정도 보장해 주는 최소한의 행위다.

 

그리고 이런 정체성 보장 욕구는 과거의 자신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내 또래 비슷한 인물들에 대한 것이기도 한다. 내 근처에는 가까이는 아니지만 항상 나보다 많이 읽는 사람이 있고, 나보다 많이 쓰는 사람이 있다. 나는 언제나 마음 속에서는 그들을 비웃지만 생각해보면 그들보다 내가 낫다는 걸 객관적으로 증명해줄 게 없다. 그래서 그들이 읽지 않는 책을 찾아 읽고, 쓰지 않을 것 같은 글을 쓰다 여기에 온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나는 그렇게 애늙은이로 지내고 싶어했건만 영락없는 20대다. 자기자신에 대한 고집 없이 주변과의 경쟁에 전전긍긍하는 모습, 거기에다가 당당하지도 못하고 게을러서 대놓고 경쟁에 나서지도 않는다.

 

 

이런 말들을 하는 게 마냥 좋지만은 않다. 이렇게 내 주장의 개인적인 맥락을 고백하는 것은 내 주장의 표면적 비논리성을 나라는 인간의 생애과정 안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해주길 바라며 하는 짓이다. 그러나 은근슬쩍 그라운드를 홈으로 옮기려는 것 같아서 치사한 것 같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들어와 준다고 해도 나라는 인간의 정신병리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내가 내 주장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을 설득시키기 보다는 약화시키는 것 같아서 속상하다.

 

하지만 어쩌랴. 내가 사실 이리저리 말하는 논점들은 이런 요약성 포스트로는 입증이 안 되는 것들이다. 구체적으로 글 하나하나를 뜯어보고 반박하고 그런 시간을 들이는 과정을 거쳐야 나에게도 좋고 상대에게도 유익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런 포스트를 쓰는 것은 말그대로 귀찮아서, 귀찮아서이다. 시간을 들이는 것도 감정에 휩싸이는 것도 귀찮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이해해달라고, 상대로 하여금 귀찮음을 극복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요즘 가장 자주 많이 하는 말이 "엉망이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대중 이런 것들이더라. 나름 이렇게 과거와 타인에 대한 안티테제로 떠오른 아이디어들을 구체화시켜보려 뉴스도 읽어보고 그렇지만 잘 되지가 않는다. 내가 취하는 변화란 구매하는 책들의 종류를 바꾸는 정도이다. 읽는 책의 종류를 바꾸는 것은 아니다. 그냥 사는 책들의 목록을 바꾼다. 국내 저자의 시사적이거나, 철학보다는 사회과학적인 종류의 책을 산다. 사고 읽지는 않는다. 알라딘 구매리스트와 책장이 나로 하여금 내 변화를 돌아보게 해주는, "나는 어느 정도 변했고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라는 입증을 어느정도 해주는 물질적 증거들이다. 독서노트를 꾸준히 작성했다면 이것들이 좀더 확실한 증거들이 되어줬겠지만 원래 그런 것들은 쓰지를 않았다.

 

사실 오늘도 조앤 스콧(여성 페미니즘 역사학자, 지금까지 읽어왔던 남성 정치철학자와 왠지 대비되는)과 송태경의 책을 사서 위안을 좀 얻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위안이 생각만큼 잘 안 될 것 같다. 결국 과거와 단절하기 위해 한다는 게 활자와 관련된 일, 그것도 사는 책을 바꾸는 정도라니. 그래서 요즘은 운동이나 댄스나 활자와 관련되지 않은 취미를 가져볼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나같은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쓰는 것 같다. 쓰면서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차곡차곡 정리를 하지 않으면 계속 맴돌게만 되는 사람이다. 적어도 지금 어쨌든 써놓으면 지금처럼 과거에 마냥 부끄러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과거를 폄하하려는 순간 활자들이 과거의 나를 대변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고 대신 주장해 줄 것이니까. 그래서 못하나 다시 박으면 될 일을 다시 집을 시공하는 그런 일을 하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내 삶이 쌓여가는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해줄 게 필요하다. 비록 매우 어린 나이지만 활자와 떨어지기는 이미 어느 정도는 늦었다 싶다.

 

현대정치철학에 대해서 실컷 욕을 했건만 랑시에르의 말 한 구절이 생각난다.

 

"정치는...자기 일 외에는 다른 것을 살필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분노하고 고통받는 동물이 아니라 공동체에 참여하면서 말하는 존재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자기들에게 없는 시간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자크 랑시에르, [문학의 정치]

 

어제 내가 이 구절을 이야기하자 지금까지 했던 말과 모순되지 않느냐고 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치안'과 '정치'라는 그런 개념을 창안한 랑시에르가 아닌, 그런 개념들이 도출된 구체적 상황들에 집중하는 랑시에르를 보여주고 있다. 내가 거리를 두고 싶은 건 "읽고 쓰는 것" 일반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삶이나 상황에서 관련된 문제에서 시작하지 않는 그런 읽기와 쓰기다(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해 죄송하다). 랑시에르의 이 아이디어는 그런 입장들과 거리를 두면서도 다시 글과 말이 삶을 얻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을 해보게 해준다.

 

또 말에 대한 믿음이 활자덕후로서의 대한 애호만이 아닌 다른 사회적 근거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 보게 해준 다른 저자는 한윤형이다. 안운사에 대한 단상(http://blog.jinbo.net/bideologue/101 ) 2절에 그런 생각들을 끄적여 보았었다.

 

주절대다 보니 어쨌든 작은 결론은 나온 것 같다. 어쨌든 활자랑 아직은 좀더 친하게 지내야겠다는 것. 연애로 치면 아직 1년도 못 넘은 시기 같다. 남들의 연애담을 들으며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지만 아직은 모든 게 다 설익은 떄 같다.

 

그런데 나는 1년 이상 연애를 해본 적이 없잖아. 이러니 안 될거야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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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블로그 정독과 이번주 신간 프리뷰, 그리고 떠오르는 잡상들

텍스트를 통해 지식을 섭취하고 생각을 지속하는 방법은 독서만이 아니다. 특히 최근의 기술적 환경적 조건은 이렇게 독서를 매개하지 않은 지적 활동을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사사키 도시나오는 '요즘 젊은이는 책을 읽지 않고 자극적인 영상에만 몰두한다'는 류의 인터넷 문화 개탄론에 대해 "인터넷의 내용물은 유튜브의 동영상이나 음악전송 등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활자 미디어다"([[전자책의 충격]], 125쪽)을 온당하게 지적한다. 웹에 올라온 문장은 호흡이 짧다는 불평에 대해서도(최근에 번역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 [링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지금 인터넷에는 블로그나 뉴스 사이트를 중심으로 굉장히 긴 기사가 대량으로 올라오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컴퓨터의 액정 화면에서 읽힌다. 잡지나 신문에 비해 지면의 제한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인터넷에서 긴 기사가 더 많아질 수도 있다. 이렇게 인터넷에서 활자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디지털 네이티브native 세대는 책과의 친화성도 높아진 것이 아닐까?"- [[전자책의 충겨]], 126쪽.

나름 재밌는 구절이지만 이야기를 더 붙이지는 말고, 여튼 내가 최근에 뭔가 짧든 길든 지식과 정보를 취하는 주요 루트는 '아이폰'이다. 다만 책과 달리 아쉽게도 아이폰으로는 텍스트를 읽으면서 그때 그때 떠오른 단상을 여백에 적거나 할 수 없기에 사후적 포스트로나마 기억을 하기 위해 몇 자 적어보도록 한다.


1. Pepe님 블로그에서 Get

이 인용들은 내 개인적 맥락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자극을 주었던 것들이지만 일단 이에 대해서 일일이 밝히지는 않겠다.

"담론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사실이란 없다. 하지만 담론에 의해 매개된 사실이 곧 어떠한 담론이라도 가능하게 하고 어떤 사실도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담론에 의한 매개는 담론에 의한 발명(invention)과는 다른 것이다. 발명된 담론을 가지고 원하는 대로 사태를 통제할 수 없다." -[비판적 실재론의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비판], http://moraz.egloos.com/563015

"하지만 형식적(또는 특정 방법론에 근거한 연역적) 접근법은 구체적인 현상이 가진 특성들을 간과하여 내용없이 공허한 형식적인 결론에 도달하거나 어떤 법칙이 사태의 전개를 미리 혹은 자동적으로 결정한다고 보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반면에 내용 분석은 현상의 구체적인 작동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지만, 배후에 실재하는 힘과 메커니즘에 대한 통찰을 주지 않음으로써 제도 만능주의, 심지어는 자원주의에 까지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경제를 포함한 모든 사회현상은 법칙이라는 형식과 행위와 제도라는 내용의 결합이므로 이 두 가지에 대한 분석을 결합하는 접근법이 필요하다." -[전략관계적 접근법에 대한 간략한 이해], http://moraz.egloos.com/537952

"다른 한편, 푸코가 하는 식의 비판이란 많은 경우에는 예를 들면 '이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매일 3번 3분씩 양치질을 하라'는 식의 치과의사의 조언을 좁게는 치과의사와 환자와의 권력관계, 더 넓게는 뭐 노동인구의 건강관리, 통치 등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너무 시니컬한게 아닌가 싶은, 그런 비판해서 뭐하나 싶은 생각이 들게 할 정도이다." -[지식인], http://moraz.egloos.com/797421

"시계-시간은 내용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적 행위(자연의 움직임, 사회적 행위)의 순환, 주기, 리듬을 그 자체로 나타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첫째, 시계-시간은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활동에서 유래하는 다양한 리듬, 순환, 주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절대적인 시간의 환상을 강화하고 여러 다양한, 상대적인 시간들이 있다는 생각을 못하게 한다). 둘째, 연구자의 학적인 관점에서 시계-시간은 사회변동을 이해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한 연표나 연대기가 사건들의 인과적 관계를 쉽게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서 이미 자명한 것이다. 셋째, 그러므로 시계-시간은 사회현상이 띠는 복합적인 인과성(예를 들면 장기적 원인, 중기적 원인, 단기적 원인의 복합성)을 이해하는데 장애가 된다. (...) 하지만 보다 중요한 ‘실제적’ 결과는 자연의 운동과 인간의 활동으로부터 소외된 시계-시간은 바로 그 소외로 인하여 자연과 인간의 운동과 활동을 특정한 방향(주로 억압적인 방향)으로 조직하는데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에 관한 가장 쉬운 이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려운 이해], http://moraz.egloos.com/852875

"1) 전략적 대응: 구조의 특성에 대해 성찰하고 계산하면서,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목적지향을 갖는 한 그 행위는 전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본관계 그 자체 혹은 포드주의적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전략—사회주의나 신자유주의적 전략—을 예로 들 수 있다.
2) 전술적 대응: 성찰적-계산적이지만 구조를 변화시키기 보다는 구조에 적응하고, 전략을 지원하려는 행위는 전술적이라고 할 수 있다. 포드주의적 구조를 유지하면서 그것을 최대한 이용하고 그로부터 최대한의 이익을 얻으려는 자본 혹은 노동의 행위를 예로 들 수 있다.
3) 비전략적, 비전술적 대응: 1), 2) 이외의 행위들, 우발적 행위뿐 아니라 전통적, 감정적 행위 또한 포함된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들도 그 동기, 원인과 상관 없이 전략적 혹은 전술적 함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비판적 실재론과 전략관계적 접근법], http://moraz.egloos.com/852250

"혼동하지 말아야 할 몇가지 구별들

지식인과 일반인
잘 아는 사람과 잘 모르는 사람
비판적인 사람과 무비판적인 사람
진보적인 사람과 보수적인 사람" -[지식인2], http://moraz.egloos.com/835112

"최근에 든 생각은 것은 서구에서는 '공부한다'는 개념보다는 '연구 프로젝트' 개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일단 직업적인 학자가 되면 study라는 말이 아니라 work라는 말을 더 자주 사용한다. study는 work를 위한 전제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정말 일하는 것이고 뭔가 만드는 것이다. 즉 일단 어느 정도 기본 소양이 생기면 자료를 모으고 그것에 따라 관심사에 대해 연구하고 결과를 생산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공부인 동시에 공부를 대체한다. 마치 먼저 이것저것 다 공부하다가 뭔가 통찰력이 생기면 그 때 가서 논문 한 편 쓰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 말하자면 한국의 교수, 학자는 (결과물을 많이 내야하는 어떤 연구소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면) 'research worker'라는 인식이 거의 없는 것이다. 대신 '지식인'이니 '사회지도층'이니 하는 의식이 그 자리를 대부분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가르치려고만 들지 '생산'을 하는데는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 원인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에는 대충 모호한 전공분야 관심사만 있고 이런 구체적인 프로젝트가 없는 학자, 교수들이 너무 많다. 있다고 해도 연구비 탈 목적, 혹은 본말이 전도된 채 연구업적 쌓을 목적으로 급조되는 유명무실한 프로젝트들. 그래서 프로젝트라고 하면 연구비 밖에 언뜻 안 떠오르는 것이다" -[국가를 상상하기], http://moraz.egloos.com/793194

"정치경제학이라는 말이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이라는 것이 앞에서 언급된 문제들을 이론적으로 탐구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을 자본론의 내용에 대한 탐구로 축소하는 것은 하나의 학문을 추상적인 이론 탐구로 축소하는 것일 뿐이다. 사회학 탐구가 사회에 대한 탐구가 아닌 마르크스, 베버, 뒤르케임, 짐멜, 하버마스, 부르디외, 기든스 등의 이론에 대한 탐구로 축소될 수 없는 것처럼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 연구도 정치경제적 현실에 대한 탐구가 아닌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 룩셈부르크 등의 이론에 대한 탐구로 축소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그것을 마르크스 이론을 정확히 이해하거나, 그 정합성을 증명하려는 시도, 예를 들어 가치의 가격으로의 전형이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상승에 따른 이윤율의 저하를 수리적이나 이론적으로 입증하려는 시도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잘못된 관념인가는 말할 것도 없다. 이론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이 가격결정이론이나 이윤율 결정이론 등으로 축소될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추상적인 경제학 이론의 탐구로 축소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정치경제학'이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정치와 경제가 상호 연관되고 통합된 사회적 현실에 대한 분석이자 비판이다. 그러한 접근법이 반드시 마르크스 이론에만 기대어야 할 필요도 없고 경제학적일 필요도 없다." -[정치경제학에 대한 오해], http://moraz.egloos.com/1014725

"과학자는 이론을 만들기 위해, 법칙을 발견하기 위해
이론과 법칙의 공부는 적당한 선에서 끝내고는 사실들을 지겹도록 연구한다.

그래서 성공하게 되면 그는 유식하고 교양있고 경박한 아마츄어가 아니라,
하나의 효과적인 이론을 만들어낸, 무식하고 교양 없지만 깊이 있는 전문가가 된다." -[전문가와 아마추어], http://moraz.egloos.com/1064363

"하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칼하게도 사회과학 지식은 도로 별로 쓸모가 없는 것이 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사실 사회과학은 대개 당장 쓸모가 없으며 특정한 소수에게만 그리고 특정의 목적을 위해서만 직접적인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이러한 지식들은 대개 그 지식의 보유자가 조직에서 높은 위치에 있을 경우에 실질적으로 사용 가능하다. 예를 들면 경영학에서 배우는 경영전략이나 경제학에서 가르치는 거시정책 같은 것은 아무리 공부해도 일반인이 그런 지식을 실제로 사용할 기회는 거의 없다. (...) 셋째, 어떤 이는 사회과학적 지식이 '당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할 수도 있다. 상당부분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왜냐하면 알면서도 당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본이 노동을 착취한다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결국 자본이나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착취당하기(취직하기)를 바라고 선택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의 쓸모], http://moraz.egloos.com/919308

"예전에 참석한 어떤 세미나에서 옥스포드대의 교수 한명이 '내러티브와 정체성: 하버마스적 페미니스트의 경우'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매우 유명한 사회학자 및 철학자 이름이 열명은 나왔다. 그리고 엄청 난해한 용어들을 구사하고 엄청 많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어려운 얘기를 했다. 누가 이런 얘기를 했는데 이것의 문제는 뭐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누가 이런 얘기를 했는데 이것은 이런 점에서 비판 받아야 하고... 등등. 하지만 현학적으로 과시만 했을 뿐 사기였다. 왜 사기인가? 그의 주장은 그럴듯하게만 포장이 되어 있지 우리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현실에 기반한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론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도 그랬지만) 이런 생각이 있는 것 같다. 공부란 남이 한 얘기, 그것도 그냥 아무나가 아니라 대단하다고 들 하는 사람들, 정답을 제시한 것은 아니더라고 그에 준한 얘기를 한 사람들의 주장을 해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칸트, 헤겔, 맑스를 읽고 거기에 나름대로 평가를 하고 토를 단다 이거다. 물론 뛰어난 사람들에게서 배우는 건 장려할 일이다. 철학자, 사상가, 이론가들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 그런 작업들은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되면 한국과 같이 '오리지날'을 특히 좋아하는 데서는 특히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의 부재'라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이러한 이론에 대한 잘못된 경도는 특히 자신들의 구체적 문제 의식을 결여하고 있을 때 생긴다. 여기서 구체적 문제 의식이란 물론 현실적인 문제 의식인데, 그렇다고 순전히 이론적인 문제의식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순전히 이론적인 문제의식도 현실과 연결점이 있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고 또 그런 문제의식만이 뛰어난 문제의식이 된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저 관행에 따라 남들 하는 대로, 이를테면 요즘 뭐가 유행하니까 뭘 공부해야겠다는 식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가들의 도움은 물론 받지만, 대가들이 살지 않았던 그래서 그들은 잘 모르는, 하지만 자신은 살고 있고 따라서 그들보다도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더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현실적 맥락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길을 찾아야 한다. (...)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답을 알아 나가는 것이고, 그 답을 알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책의 도움은 받을 수 있지만 결국에는 스스로 수많은 연습과 경험을 통해 터득해 나가야 한다." -['학습' 또는 '배운다'는 것에 관하여], http://moraz.egloos.com/1103484

"세부적인 메커니즘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과학도들은 분석, 즉 차이를 포착하는데 능하고, 독서를 많이 하고 자료를 많이 모으는 인문학도들은 종합, 즉 공통된 본질을 포착하는데 능한 경향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하나의 능력이라도 제대로 가지고 있는 경우도 흔하지 않다. 그리고 당연히 두 가지 능력을 다 가지고 있는 경우는 더욱 더 흔하지 않다. 그러나 일급의 학자란, 서로 같거나 비슷해 보이는 것들을 엄밀히 구별해 내는 능력과 서로 다르고 무관하게 보이는 것들을 연관해 생각해 낼 줄 아는 능력 둘 다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현실을 면밀히 살피면서 ‘정말 그것들은 서로 같은(또는 연관된) 것들인가, 정말 그것들은 서로 다른(또는 무관한) 것들인가’를 계속 자기 자신에게 골치 아프게 묻는 수 밖에 없다." -[종합과 분석의 방법], http://moraz.egloos.com/1501736

"근대 국가는 정부 내부의 관계의 측면에서도 이해해야 한다. 방금 언급했듯이 ‘국가가 불법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은 국가가 법적으로 하나의 주체인 것처럼 간주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국가는 불법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주체이고, 그 경우 국민은 법적 주체로서의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법적 관념 때문에 국가 혹은 정부 내부의 다양성 및 분열과 갈등의 가능성을 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 우선 정치로부터의 전문관료제의 상대적 분리(또는 정치시스템과 국가시스템의 분리)는 근대 국가에 특징적인 현상이다. 정치인들은 대체로 정쟁을 통해서 집권, 자리, 권력을 추구한다. 이와 달리 관료들은 대체로 합리적 정책의 형성과 집행을 통해서 자리와 권력을 유지하고 행사하려 한다. 정부 정책의 성패는 여/야로 나뉘는 정치인들의 성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역으로 기술합리성을 특징으로 하는 관료집단 전체에 대한 정치인들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편이다. 이에 더해 관료제 국가기구 내부에도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예를 들면 경찰과 검찰의 입장이 다를 수 있고, 재정경제부와 노동부의 입장이 다를 수 있는데, 그 입장의 차이는 단순한 의견차가 아니라 각 부처의 이해 관계, 문화 등 보다 근본적인 차이를 반영하는 것인 경우가 많다. 이렇게 보면 형식상 중앙집권적이더라도 근대 국가도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는’ 단일한 행위 주체가 아니라 완전히 통일되지 않은 권력이 행사‘되는’ 분산된 장이라고 할 것이다." -[근대 국가의 특징들: (1)국가 그 자체, 나. 국가 내 관계: 다양성과 분산성], http://moraz.egloos.com/1021327

"근대 국가가 이렇게 친자본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는 까닭은 국가가 사회와 경제에 영향만을 주지 않고 역으로 사회와 경제로부터 특정한 영향을 받는 데서 찾아야 한다. 그 몇 가지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우선 국가관료와 정치인들은 자본가들과 계급적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 다음으로 경제로부터 분리된 국가의 내적 구조 자체 때문에 국가는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의 수준을 유지하고 증대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논리(들)에 부응할 필요성이 생긴다. (...) 그러나 여기서 명심할 것은, 이것은 하나의 경향일 뿐으로 근대 국가가 반드시 자본주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자본주의에 친화적인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완전히 보장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시장이 실패할 수 있듯이 근대 국가의 친자본주의적 통치도 충분히 실패할 수 있으며, 이것은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국가들이 경제발전에 실패했거나 경제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 니코스 풀란차스 Nicos Poulantzas가 말했듯이, 국가란 “세력관계의 물질적 응축”인 것이다. 근대 국가의 친자본주의적 성격과 그 내용은 결코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근대국가에 반영되는 세력관계가 반드시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에 의해 매개된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10.26 사태는 비민주적 권위주의 국가에도 사회적 세력관계가 반영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비록 대부분 ‘민주주의’라는 수사를 사용하지만 지구상에 현재 존재하는 근대적 국가 중 상당수는 여전히 절차적, 제도적 민주주의 국가의 범주에도 넣기 곤란하다. 그러므로 유감스럽게도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근대 국가의 필요조건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 --[근대 국가의 특징들: (1)경제/사회 관계 속의 국가, 나. 국민국가와 자본주의 국가], http://moraz.egloos.com/1021325

"실재는 동일한 존재론적 층위(수준 ontological depth)에 있지 않다: 실재적(real -힘, 메카니즘), 실제적(actual - 힘, 메커니즘의 현실화/구체화), 경험적(empirical - 구체화된 현상에 대한 경험)." + "비판적 실재론의 실재-현실-경험(real-actual-empirical)이라는 존재론의 세 층위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구조, 체제로서의 파시즘, 제도와 전략 혹은 실제로 행사되는 권력으로서의 파시즘, 그리고 경험되는 것, 즉 이데올로기로서의 파시즘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층위 구별의 장점은 파시즘의 추상적 모델로부터 파시즘의 특수한 형태를 구별하는 것, 혹은 본질로부터 현실태와 현상을 구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 http://moraz.egloos.com/563015 & http://moraz.egloos.com/847120


2. 이번주 인문/사회과학 신간 중 일부 프리뷰

이번 주 출간도서들 사이에 특기할 점 중의 하나는 넓은 의미에서 인문학도 사회학도 아닌 (내맘대로) '사회과학'으로 분류될 수 있는 도서들의 출간이다.

콘크리트유토피아
카테고리 인문 > 철학 > 교양철학
지은이 박해천 (자음과모음,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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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모든사생활의역사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 인문교양
지은이 빌 브라이슨 (까치,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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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살롱공화국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 사회학일반 > 르뽀/시사/비평
지은이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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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10일경영담론으로본한국의휴가정치
카테고리 정치/사회 > 정치/외교 > 각국정치 > 한국정치일반
지은이 김영선 (이학사,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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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이론의 내적 탐구나 추상적 개념의 연마(혹시나 오해를 막자면 이게 불필요하다는 게 아니다)보다는 아파트, 집, 룸살롱, 휴가와 같은 구체적 쟁점을 주제로 잡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 책들이다. 그렇다고 이들을 '사회학' 서적이라고 부르기는 그런데 왜냐하면 적어도 내가 배운 사회학은 이런 구체적 쟁점들을 그 자체로 탐구하여 특정한 이론적 결과를 얻거나 사회적 인식에 기여하기 보다는 거대 사회학 이론의 예증 사례로 열거하던가 구체를 탐구한다면서 실제로는 현상을 사회학 나름의 개념들로 환원해서 바라보는 몰역사적 접근을 보이던가 통계적 디테일에 집착해 정작 현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해야 되는 데에서 데이터에 대한 변명만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앞으로 부연할 기회가 넘치고 넘칠 것이다...

그냥 좀 심플하게 돌아와서 책에 대한 간단한 평들을 하자면 브라이슨의 책은 의외다. 이 양반 오지랖은 참 엥간치 넓다 싶다. 다른 책들과는 달리 어떤 '비판적' 결론을 끌어내지는 않지만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것들에 대해서 이해하고 그래서 내가 왜 오늘의 나와 같이 살기 위해 이해하고 싶다면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인식은 직접 화폐로 전환되지 않다할 뿐이지 매우 다양한 쓸모를 가질 수 있다.

근성남 강준만의 사회문화사 책은 펴보지 않아도 구성을 알 수 있다. 한국사회를 뚫는 키워드가 최근에 '실업'이었는데 이번에는 '룸살롱'이고 해방부터 오늘날까지 대강 10년씩 끊어 해당 키워드들이 어떤 사회적 의미를 지녔는지 추적하는 것이다. 이러한 강준만의 책은 1차 자료 수집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의 책에는 철학적으로 정당화된 개념은 없지만 질적인 자료들을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획득한 그야말로 '동물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감각과 개념아닌 개념이 있다. 이런 개념아닌 개념을 평가해줄 안목 내지 아량이 없는 사람들은 '강준만이 정리는 잘하지' 식으로 인정을 가장한 무시를 하는데 그건 결국 자신들의 빈곤을 드러내지 않나 싶다. 자기가 익숙한 방식으로 쓰여지지 않은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의 빈곤. 활자가 인식을 구성해내는 과정이 복수적이며 그 과정 사이의 질적 우위를 따지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매우 많은 주의를 요하는 일이다.

김영선의 휴가에 관한 책은 여러 모로 출판 사실을 아는 순간 고무감을 느꼈던 책이다. 제도 사회학계에서도 이렇게 연구자 내에서만 공유되지 않고 모두에게 피부로 다가올 수 있는 문제를 다이렉트로 다루는 사람이 있구나 싶어서 좋았더랬다. 야밤에 가진 일반 직장인과의 만남에서도 책 논지를 소개하면서 이 주제가 얼마나 보편성을 띠고 있는지 살짝 시험해봤는데 반응이 매우 긍정적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차마 책을 사보라는 말이 주춤거려진다는 데 있는데 무엇보다도 이 책이 '논문' 투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학위논문을 단행본으로 낼 때 사실 이는 매우 일반적인 과정이기는 하다. 다만 저자가 휴가10일 확보 '운동'까지 한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책을 읽히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을 것 같아 더더욱 아쉽다. 휴가시간을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책이 휴가시간에 읽을 수 없는 형태로 나왔다는 아이러니 아닌 아이러니.
  '좀더 대중적으로 쓰였으면'이라는 불평이 꼭 논지와 진리값의 축소나 마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학술적인 형식의 서적은 일단 그 책이 근거하고 있는 이론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시간을 소비하게끔 한다. 이런 접근은 저자의 사고 구조를 통째로 이해하게 하는 장점을 지니지만 꼭 모두가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독서를 편의적인 독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자. 만약 어떤 논지가 많지 않은 시간 내에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 있는 형태로 나온다면 이는 해당 지식으로 하여금 더 많은 공감과 비판을 거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그 지식이 현실에서 가지는 의미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보다 정확히 평가되고, 그리하여 지식이 가진 진리값이 잠재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닌 '현행화'될 수 있는 그런 계기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상품이 그렇듯 지식 역시 생산된 과정을 따라 소비할 필요는 없다. 그 생산과정에 대한 고려가 있으면 좋을 수도 있겠지만 그저 그뿐이다.

그런 면에서 박해천의 책은 기대되는 주제일 뿐더러 구성에 있어서도 흥미로운 책이었다. 픽션과 팩트. 도식화하자면 쉽게, 그리고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는 픽션과 이에 더해 보다 체계적인 인식을 얻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팩트. 다만 이렇게 픽션과 팩트를 같이 넣다보니 부피가 두꺼워지고 책값이 비싸져 상업성이 조금 떨어지는 역효과가 있을 수 있겠다만 300페이지 초반으로 그리 두껍지도 않고 알라딘 할인가격으로 13600원으로 그리 비싸지도 않다. 기대되는 책...

3.
 첨언하면 이렇게 블로그나 출판사 보도자료를 통해 다량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론'을 추구하는 사람들, 그리고 책을 쓰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지적 과제가 있지 않나 싶다. 어떤 입장의 '주장'이나 간략한 팩트의 '전달'(전달 자체는 매우 중요하다. 폄하의 의도는 없다)은 굳이 이론이라는 형식과 책이라는 매체가 담당할 필요가 없게끔 웹 매체가 훨씬 더 잘 수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론과 책에게 오늘날 요구되는 역할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로 고민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론의 경우에 한하여 나는 그것 중의 하나가 '총체적 인식'이 아닌가 싶다. 정보와 정보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하는 것, 서 말인 구슬을 꿰어내어 보배로 만드는 것, 이 '꿰는 행위' 자체.

그리고 이런 논지를 말하는 포스트가 남들이 쉽게 보기 힘든 문체로 쓰여진 것 역시 아이러니 아닌 아이러니다. 변명을 하자면 블로그라서 그렇다. 떠오른 생각의 결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내가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쓰다 보니 그렇다. 언젠가 나도 공적인(블로그가 사적이냐 공적이냐는 논쟁은 접어두자. 여기는 많이 와야 20명 들리는 촌동네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면(능력의 차원에서나, 책임의 차원에서나) 지금 이 파편들을 다른 형식으로 펼쳐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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