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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테사 모리스-스즈키의 『우리 안의 과거』(김경원 옮김, 휴머니스트, 2006)의 5장 “마음에 새겨진 ‘이미지’:만화가 보는 역사”를 보고 최근 고민하는 문제들과의 접점 몇 가지가 떠올라 (정리가 아닌) 기록 차원에서 몇 자 '늘어 놓아' 보고자 한다.
테사는 만화라는 매체가 역사를 다루는 다른 매체들에 비해 가지고 있는 장점으로 재현의 범위가 매우 폭넓다는 것을 지적한다. “만화는 사진이나 영화에서 구체화되는 리얼리즘 규범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다른 수단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과거의 이미지도 얼마든지 시각화할 수 있다.”(p.219)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다룬 아트 슈피겔만의 『쥐』와 히로시마 원폭을 다룬 나카자와 게이지의 『맨발의 겐』이 그 예로서 언급된다(221-2). 또한 이런 표현 능력을 갖춘 만화가 활자보다는 텔레비전과 만화와 함께 지낸 전후 세대들의 역사적 상상력에 끼친 영향력은 결코 작게 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만화는 일차적으로 강한 시각적 인상을 안겨주는 동시에 그 어떤 매체보다 더 독자/관객을 자신이 전제하는 특정 관점의 “우리”로서 묶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만화가 가지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역으로 역사를 다루는 작가들에게 쉽지 않은 고민거리를 제시해 주기도 한다. 즉 10대 만화의 경우에서와 같이 그것이 게재되는 공간의 특성상 역사적 현실의 극단적인 모습을 표현하기 어려우며, 설령 그렇게 표현을 한다하더라도 진실을 알게 하고 교훈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자극적인 쾌감으로서만 기억하게 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테사에 따르면 슈피겔만은 이런 위험을 자각하고 나름의 대처를 통해 이를 극복한 드문 사례이지만 만화에 이런 위험은 항상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만화의 힘과 위험을 일본의 우익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사례에서 보다 분명히 확인해볼 수 있다.
테사는 본서 pp.256-277을 통해 고바야시 요시노리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제공하고 있다. 고바야시는 원래 부정부패와 일본의 수험제도를 풍자적으로 고발하는 만화가로서 활동하다가 오염혈액 조제약과 관련한 에이즈 환자들의 운동과 결별하면서 입장을 선회(혹은 자신에게 잠재되어 있던 특정 성향을 극화)하게 된다. 그가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은 1990년대 일본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과 함께 ‘종군위안부’(테사는 따옴표를 달아 이렇게 표기하지만,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은 <일본군 ‘위안부’>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하는 그냥 ‘위안부’로 표기한다.) 문제를 부인하고 나아가 공격하는 작업에 함께 하면서부터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998년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신 오만주의 선언 스페셜 전쟁론》이다. 고바야시는 ‘위안부’의 증언을 부인하는 ‘새역만모’의 입장을 넘어 노골적으로 대동아전쟁을 긍정하고 난징학살은 사실 중국군이 자국 국민에게 자행한 일이라는 철저히 근거가 없는 이야기들을 마구 퍼붓는다.
그가 행한 역사적 왜곡에 대해서는 그동안 무수한 역사가나 사회비평가들의 비판이 이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정합적인 비판이 만화가 인간의 정서에 행사하는 힘에 거의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텍스트를 학술적인 논문이나 잡지 기사를 통해 글로 써서 비판할 경우, 그 주장이 아무리 타당하다 해도 만화가 독자의 상상력에 부여하는 충격을 차단 ․ 해제시키는 효력은 꽤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261-2) 테사는 여기에서 고바야시에 대한 규범적인 비판을 반복하는 것을 넘어 고바야시를 만화라는 매체 자체가 가진 힘에 대해서 숙고할 계기로 삼고자 한다. 그녀 역시 한 사람의 독자로서 고바야시의 만화를 보고 “매우 짙은 혐오감을 품지 않기란 대단히 힘이 든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고바야시에 맞서기 위해서는 이런 감정에 근거해 욕설이나 비판을 퍼붓기 보다는 고바야시와 나아가 그를 혐오하는 것으로 반응하는 자신의 감정을 포함해 만화라는 매체를 깊게 고찰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감정에 작용을 미치는 어떤 매체를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러한 기분을 인지하는 동시에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이해하고, 동일한 만화가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 두루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p.262)
테사가 고바야시가 역사적 상상력을 왜곡/형성하기 위해 끌어내는 만화의 기법 또는 매체적 가능성으로는 우선 ①과거와 현재라는 두 가지 다른 시간틀을 사용해 일본의 군사적 확장이라는 역사를 ‘기성의 권위에 기댄 반대자들에 맞선 외롭고 정의로운 작가의 투쟁’의 은유로 해석하여 개인화하기, ②내용은 보이지 않지만 인쇄물(신문, 논문, 책)로 된 콜라주를 갖다 붙여 자신의 주장이 학술적인 근거를 가진 것 인 양하기 등이 있다. 그리고 내가 봤을 때 가장 문제적이고 무서우며 또 그래서 흥미롭게 느껴지는 부분으로는 “이미지에 감추어진 기억”(p.280)이라는 문제가 있다.
앞서 우리는 만화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할 수 있기에 폭넓은 재현의 힘을 얻는 동시에 그것이 표현되었을 때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곤란함 내지는 위험에 대해서 짤막하게 이야기한 바 있다. 즉 “영화나 만화에서 극심한 폭력을 그릴 경우, 특히 그 이미지는 오락적인 성격의 포르노나 판타지를 상기시킨다면 진부하거나 선정적인 표현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pp.271-2)는 것이다. 다른 예를 따로 들 필요 없이 고바야시의 작업을 보면 우리는 이 말을 가슴깊이 이해할 수 있다. 고바야시는 제목을 밝히지 않은 채 ‘위안부’ 관련 증언서를 악의적으로 자신의 만화에 인용한다. ‘성노예라는 지옥 같은 짐승 우리에 갇힌 자신들’같은 절절하게 들을 수도 있는 글귀 옆에 고바야시가 그려 놓는 것은 “한쪽 발이 사슬에 묶인 벌거벗은 여자가 엉덩이를 독자 쪽을 향하고 전형적인 새디스트 포르노에 나오는 포즈로 기어다니는” 것이다.
고바야시가 만약 광인이 아니라면 그는 자신의 주장이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잘 알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우리가 약간의 시간을 들여 역사를 공부하고 이성적으로 충분히 사고하기만 한다면 그의 마수를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만약 강렬한 시각적 인상을 통해 ‘위안부’라는 말에 포르노의 이미지가 들러붙는다면 어떨까? 독자는 사실이든 말든 자신에게 어떤 이익도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역사적 사실에 손을 들까 아니면 적어도 지금 자신을 성적으로 흥분시켜 주는 이미지에 손을 들까? 테사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떻게 보면 특정한 역사에 대해 올바르게 생각하는 일은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닐 수도 있다. 서적을 살 약간의 돈만 있다면 ‘위안부’ 문제같은 사안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시각을 가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지에 얽힌 기억이 우리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것”에 대해 우리가 저항할 수 있을까? ‘위안부’ 포르노를 보고도 ‘위안부’를 역사의 희생자가 아니라 ‘창녀’로 생각하는 것을 쉽사리 멈출 수 있을까? 설령 지금 당장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더라도 이성(理性)적인 사고에 집중할만한 상황을 가지지 못했을 때는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을까? 이건 미래의 일이 아니다. 테사는 고바야시의 만화가 주목받게 된 데에는 일본인들이 겪고 있는 정체성의 위기가 큰 몫을 한다고 지적한다.
테사는 고바야시와 같은 작가들에 맞서 “그림에는 그림으로 맞대응한다는 접근법을 취하여 다른 식으로 동일한 과거를 이야기하는 또다른 만화”를 제작하는 동시에 “독자들이 스스로 소비하는 이미지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도록 권장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각각의 방법은 한계를 가지는데 우선 전자의 경우, 과연 ‘위안부’와 같은 “상상하기도 여러운 정신적 외상을 어떻게 선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하는가”라는 난제에 부닥치게 된다. 또한 이 문제는 만화 시장이 제품이 “극단적이 될수록 또는 물의를 빚을수록 잘 팔린다.”는 “무법의 경제학”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욱 심화된다. 이미지의 강렬함과 역사적 사실 중 전자만 고려하면 되는 고바야시와 달리 이에 맞서려는 만화가는 둘 다 고려해야 한다. 전자에 치우치면 결국 역사가 포르노나 폭력물로 해석되는 것을 막을 수 없으며, 후자에 치우치면 만화로서의 영향력을 송두리째 잃게 된다. 그리고 독자의 윤리적 각성은 너무나 막연하게 느껴진다. 만약 우리가 정서적으로 자극적인 이미지를 잘 기억하도록 구조화되어 있다면 그러한 이미지들에 대한 윤리적인 저항을 강조하는 것은 공염불이거나 매우 제한적인 데 지나는 것이 아닐까?
1-2.
여기서 제시된 질문들은 '선정적'인 형태로 대중의 정서를 끌어모으면서 그것을 통해 역사든 정치든 어떤 메세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예술들 일반에 적용될 수 있을 듯싶다. 재미가 없으면 관객이 없으며, 너무 재밌게 하면 메세지는 희석된다. 밤섬해적단의 경우에는 어떠할까? 이런 질문은 이론적 형태는 아니지만 밴드와 지인들 사이에서는 언젠가 얘기된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 밴드가 유명해 진다면 끊임없이 받게 될 질문이지 않나 싶다. 본격적인 답은 다른 포스트로 미루고 일단 밤섬해적단에 이 딜레마를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만 지적하고 싶다. 일례로의 <해치>같은 노래의 가사를 보자.
정의를 위해 달린다 우리들의 해치
분열을 조장하는 좌파들을 무찌른다
심술쟁이 파업꾼 모두다 꼼짝마
(Seoul City! Design City!)
욕심쟁이 시위꾼도 혼내주겠다
(Seoul City! Design City!)
지저분한 노점상 모조리 물리쳐
(Seoul City! Design City!)
정의롭고 슬기로운 우리의 해치!
자유! 민주! 선진! 국가! 뚝뚝딱딱 햇차!
평화를 위해 싸운다 우리들의 해치
분열을 조장하는 좌파들을 무찌른다
사악한 환경단체 모두다 꼼짝마
(Seoul City! Design City!)
친북좌파 학생들도 혼내주겠다
(Seoul City! Design City!)
광장에다 멋있는 분수대 갖다논
(Seoul City! Design City!)
정의롭고 슬기로운 우리의 해치!
자유! 민주! 선진! 국가! 뚝뚝딱딱 햇차!
여기에서 밤섬해적단은 고바야시 요시노리가 위안부에 대해 수행한 것, "이미지에 대한 기억"을 다른 내용을 담아 싣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해치가 그렇게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이 강한 상징은 아니고 이미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냉소의 대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노래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런 냉소에 정서적 강도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가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은 매우 모호하지만 그것은 보다 넓은 사람들의 정서에 접촉하기 위해서 치뤄야 할 대가일런지 모른다.(이런 면에서 밤섬의 가사는 테사가 지적하는 관점에서의 '만화적'인 구석이 있다.) 밤섬해적단 자체가 어떤 종류의 '정치'를 의미하기는 힘들지만 이 밴드는 정치가 무얼 의미해야하는지 무얼 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를 정서적으로 제공하지 않나...하는 것이 지금 내 잠정적인 생각이다.
2.
테사의 문제의식을 만화 매체 분석이라는 작업에서 떨어져 좀 더 보편적인 형태로 제기해보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만약 인간이 이성 못지않게 정서에 근거해 행동한다면, 그리하여 ‘앎’만으로는 좀 더 올바른 존재로 변해나갈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이런 질문의 맥락에서 나는 김은주의 논문 한 편(「알튀세와 들뢰즈를 통해 본 스피노자 철학의 문제」, 『트랜스토리아』, 2005년 상반기, 제5호)의 일부를 읽어보고자 한다. 김은주에 따르면 알튀세르와 들뢰즈, 나아가 스피노자를 포함한 17세기 근세 철학자들 역시 이러한 문제를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근대 초기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전형적인 반응은 인간이 정서에 구속된 존재라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도덕적 행위를 보증하는 이성이 본유적으로 인간에 내재되어 있음을 강변하는 것이었다. 다른 편에는 인간 이성의 무능력을 인정했던 좀 더 현실주의적인 사람들이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인간은 도덕적으로 개선될 수 없는 존재였다. 김은주는 이들 사이에서 스피노자와 그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알튀세르와 들뢰즈의 고유한 지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에서 “현실주의”라 함은 “상상과 정서”를 격퇴하지 않는 것, 정신분석의 개념을 빌리면 명백히 존재하는 것을 부인(disavowal)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인간이 스스로를 개선하기 위한 윤리적 노력을 포기되지 않는데, 다만 그 노력이 이뤄지는 방식이 상상과 정서 밖이 아닌 ‘안’에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김은주가 보기에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와 들뢰즈의 이론적 노력은 여기에 집중된다. 이에 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능력과 여유가 갖춰지게 되는 후일로 미루고 블로그답게(?) 조금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아 보고 싶다.
3.
이들의 문제의식에 대한 증명은 소녀시대와 나의 (상상적 혹은 정서적) 관계에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소녀시대에 대해 느끼는 기쁨 또는 그녀들이 술자리에서 모욕을 당했을 때 느끼는 분노의 강도의 크기를 실감할수록 나는 만약 내가 필요한 순간과 쟁점에서 과연 어떤 문제적인 정서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인지 의심이 든다. 꽤나 예전에 쓴 이데올로기론에 관한 술자리 후기1에 이은 술자리 후기2는 이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졌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후기2는 쓰여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이에 대해서 자신있게 쓸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것은 내가 소녀시대에 대한 선호가 외모차별주의적 현실의 정서적 토대가 된다는 데 실은 동의하게 때문만은 아니다. 문제는 이 정서적 관계 자체가 중립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개인의 삶과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긍정적 기능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충분히 논증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스피노자나 뭘 엮어서 정서의 중립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는 있겠지만 상업적인 대중문화에 의해 뒷받침하는 정서가 그러한지에 대해서는 매우 복잡한 쟁점들이 얽혀 있다(‘상업주의=악’의 등식은 유치해 보이지만 문화 문제에 있어서 이 등식은 유치하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거부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논의되지 않는다면 질문자는 물론 나 자신 역시 납득하기 힘들 것이다.
소녀시대 이외의 다른 이론적 탐구의 영역에서의 자신을 생각해 보면 이 의심은 공포로까지 전화한다. 어떤 정서적 선입견 없이 이론들의 가능성을 타진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내 자신이 (논쟁이라 말하기는 민망한) 어떤 이론적 주제들에 대해 격렬하게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들을 떠올려 보면 이론적 입장들 간의 필연적 차이보다는 특정한 정서들(혐오감, 질투심, 무시 등)에 기반했던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떤 세미나든지 간에 말을 하고 듣는 과정에서 나는 어떤 정서들이 내 머릿속에 떠다니는 것을 지각하고 이를 통제하려는 노력을 쉴 수가 없다. 술자리에서야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정서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말을 경제적으로 하지 못하면 일정 기간 우울감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다.
하지만 정서라는 것이 그렇게 잘 휩쓸린다면 이는 우리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거나 관계를 맺을 경우 이를 다시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불안정'이라는 말은 한계와 동시에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것이 타자든 제도든 예술이든 미디어든 무엇이든 외적인 관계 하에서 개체의 정서가 구성된다는 것이 이른바 관개체론(trans-individualisme)의 핵심적인 주장 중의 하나다(이 논의가 가지는 철학적/사회과학적 함의에 대해서 역시는 후일을 기약해 보고 싶다. 아 읽지 않은 책에 이어 쓰지 않은 글들이라니...).
4.
잠깐 방향을 돌려 말하자면, 그렇기에 테사가 스스로가 고바야시 요시노리에 대한 감정을 토로하고 또 그것을 탐구의 계기로 삼는 대목은 사뭇 감동적이기도 하다. 뭔가 ‘선배’를 보는 기분이랄까... 아마도 공부해야 할 이유를 찾는다면 이러한 길목 즈음에 위치하지 않을까 싶다. 스스로가 정서, 상상, 이데올로기 안에 사는 인간으로서 그것을 뛰어넘은 척 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공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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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이제야 '찬찬히' 읽었네요. 개인적으로는 테사 모리스-스즈키의 글을 읽을 때마다 속에서 (긍정적인 의미에서) 울컥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위에 정리하신 모리스-스즈키의 글도 보면, 어떤 매체를 매개로 파생되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분석함에 있어 단순히 실증의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매체의 형식과 속성을 연구하면서 역사학적인 대응을 하는 것이 매우 인상적인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매체가 어떤 것이든, 특정 매체에서 다뤄지는 지식이 맞는 역사지식인지에만 매달리는 경우가 많아서, 역사학적으로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왜 사람들이 그 부정확한 역사학적 지식에 공감하고 열광하며 위안을 얻는지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모리스-스즈키의 글을 읽으면 역사학적 지식이 담기는 매체의 형식과 속성에 관한 이해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녀의 글에 있는 다른 장점들과 함께) 실증이상의 고민을 밀고 나갈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분석하고자 하는 역사지식이 담긴 매체에 관한 분석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분석 대상의 매체를 향유하는 대중들을 무시하지 않고 조금 더 성실하게 대면하려는 자세의 다른 표현이기도 할 것이구요. 모리스-스즈키의 글에 관한 정리에 이어지는 것은 저도 고민을 해봐야 할 부분이(면서 고민을 한 적이 없진 않지만 명확하게 해결이 안 되는 부분이)네요(^-^;).그나저나 레폿 폭퐁은 정리가 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