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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불패 38회 시청후기: 예능비평, 아이돌과 네이션, 그리고 팬질


현재 KBS에서 매주 금요일 밤마다 방영되고 있는 [청춘불패]는 걸그룹 아이돌들의 농촌체험을 컨셉으로 하고 있는 버라이어티 예능 프로그램이다. 최근 멤버 교체 후 한층 시들해진 것 같지만 이 프로그램은 꾸준한 인기를 누려왔고 매주 네이트/싸이월드의 톡톡 낚시 떡밥에 언급되는 자타공인 대한민국 대표 버라이어티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프로그램의 성공요인에 대해서는 가요계의 걸그룹 열풍이나 예전과는 달리 방송에 매우 적극적인 태도로 임하는 2000년도 후반 아이돌의 예능력 등을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좀더 '비판적'으로 사태를 지켜보고 싶은 사람들은 시청자들의 현실적 고충을 달래주는/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만으로 보거나 사람들로부터 이윤을 끌어내기 위해 정교하게 개발된 행복-상품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주장들은 나름 논거를 가지고 있는 주장들이지만 정작 시청자와 팬들이 왜 이 프로그램을 보는지, 그들이 거기에서 경험하는 정서들은 무엇인지 다루지 못한다. 예능감이 좋다는 것은 사람들이 무얼 보고 싶어하는지 안다는 말이다. 현실적 고충을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 프로그램이 건성으로 서로 나누는 위로의 말들보다 더 시청자의 가슴에 다가오는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시청자는 수동적으로 브라운관의 행복을 주입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어떤 바람에 부합하는 한에서만 그것에 울고 웃는다. 좀더 차가운 개념어들로 말해보자면 예능과 시청자는 외재적이 아닌 내재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파악하지 못한 채 이뤄지는 예능비평은 그것이 얼마나 '비판적'이든 간에 스스로가 시청자 혹은 대중이 아님을, 그/녀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무능력을 여실히 드러낼 뿐이다.

(때문에 이들 비판적 평론의 결론은 우습게도 계몽적 버라이어티나 올바른 시민상(결국 건전하다고 생각되는 비평가 자신의 이상적 자아상)를 요구하는 식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꼭 청춘불패에 대한 비평이 불가능하다거나 팬이 될 필요는 없다. 내가 비판하고 싶은 것은 소위 '비판적' 비평들이 이런 내재적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닥 현실적이지 못하고 '비판적'이지 못한 규범적 주장들 혹은 잔소리를 반복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청춘불패의 성공 요인을 분석한 예로 우리는 프리스티의 포스트 한 편[링크]을 참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프리스티는 청춘불패를 [패밀리가 떴다]시즌1과 비교한다. [패떴]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여가를 위해 비운 집을 지킨다는 컨셉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컨셉에서 동네 주민은 인트로와 아웃트로에만 짧게 등장하며 서로 정감을 형성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전국의 농촌을 돌아다닌다는 패떴의 성격상 이런 시민과 연예인의 거리는 심화된다. 
  이와 달리 청춘불패에서 여자 아이돌들은 농촌에 가서 일을 하며 평생 방송국에 들릴 일은 없을 것 같은 중년 노년 층의 시민들과 일주일에 한 번이나마 '일상'을 공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전에 나왔던 시민들이 다시 나오며 아이돌과 친숙하게 인사를 주고받는 장면에서, 왕구 아저씨나 로드리가 G7 멤버들의 이름을 조카 이름 부르듯이 부르는 장면들에서 우리는 연예인들도 일반 시민들과 일상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알고 지낼 수 있다는 아주 당연하지만 미심쩍었던 사실을 시청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농민'과 '도시인', '40대 후반 이상'과 '10대~40대 초반'이라는 차이가 청춘불패 속의 시민들과 팬덤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 차이는 연예인과 일반인이라는 차이에 비하면 매우 작은 것에 불과하다. 그때문에 우리는 청춘불패에서 연예인과 일반인이 정감을 공유하는 순간 유치리 주민들과의 지역적 세대 차이에도 불과하고 그들과의 동일시를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해당 포스트는 2월에 작성된 것이고, 최근 청춘불패는 조금 다른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으며 멤버 교체 이후 이런 경향은 보다 뚜렷해지고 있다. 저번주와 저저번주의 청춘불패 일본특집은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줬던 방송이었다. 일차적으로는 일본의 선진적인 농업상품을 학습해 유치리, 더 정확히는 아이돌촌에 들여오자는 일종의 '연수'를 목적으로  기획된 특집이었다. 뭐 이 연수를 해서 유치리를 아이돌들이 경제적으로 발전시키자 이런 것은 아닐 것이고, 청춘불패의 방송 수명을 확보하기 위해 아이돌촌의 컨텐츠를 풍부하게 하고자 한다는 것이 이번 특집의 주요한 목표이자 성격일 것이다.

'연수'가 끝난 뒤, 일본특집 2편의 마지막에는 멤버들을 대접해준 일본 분들에게 답례를 하기 위한 G7의 소규모 공연이 이어졌다. 헌데 이 공연이 이래저래 흥미로운 점들이 있었다. 우선 정확히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그 공연에 온 것은 해당 마을 주민들만이 아니었다. 카메라가 잡아 주었듯이 미리 그날 등장하는 아이돌을 응원하는 피켓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으며, 노래를 따라부르는 관객도 없지 않았다. 즉, 방송과 공연 소식을 듣고 타지에 사는 팬들이 청춘불패를 찾아온 것이다. 최근 소녀시대와 카라를 비롯한 한국 여자 아이돌의 일본 진출이 본격화되고 있다. 실제로 아이돌들의 활동이 얼마나 반응을 얻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날 청춘불패의 방송 중 이 부분은 '아이돌과 주민', '아이돌과 농업' 보다는 '아이돌의 해외진출'에 초점을 맞춰 영상을 내보내었다. 마을 주민들의 반응을 잡는 와중에 아이돌을 직접 응원하는 팬들의 모습을 잡았으며, 또 구하라의 단독 무대 장면에서는 구하라 본인이 스스로 무대 컨셉을 준비해 왔다는 자막을 넣어 줌으로써 해외진출에 대한 아이돌의 '노력'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무대는 초대해주신 마을에 감사한다는 이야기에 더해 일본에서의 한국 여자 아이돌의 활동에 성원 부탁드린다는 말이 덧붙여졌다. 

이 날의 청춘불패가 [메트로]같은 무가지에서도 볼 수 있는 아이돌의 일본 진출 기사와 다른 무언가를 전달해 주었다면, 그것은 일본진출이 기획사의 마케팅 전략에서 비롯되기도 했지만 아이돌 본인들의 열의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팬들로 하여금, 적어도 나 개인으로 하여금 어떤 불안을 증폭시킨다.
  기본적으로 아이돌의 해외진출은 아이돌이 이제 나만의 아이돌이 아닐 수 있을뿐만 아니라, 우리의 한국인만의 아이돌이 아닐 수 있다는 불안을 야기한다. 그리고 언뜻 내비치는 아이돌 자신의 해외 진출에 대한 바람은 이런 불안을 느끼는 팬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한다. 팬들은 한편으로는 아이돌의 개인적 성공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한류라는 말이 시사하는 것처럼 이런 아이돌이 벌어오는 외화라든지[한류와 자본주의, 민족주의의 관계에 대해서는 고구려 역사 드라마에 대한 무연님의 포스트 참조] 아이돌의 매력이 국적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데에서 일종의 민족적인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팬들은 한국어가 아닌 언어로 활동을 열성적으로 전개하는 아이돌에게 거리감, 보다 심각하게는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써니가 일본어로 하는 주부애(주먹을 부르는 애교)에서 써니가 보고 있는 게 '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물론 한국어로 주부애를 할 때에도 그것이 나만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지만 우리는 거기에 표현되는 말의 뉘앙스나 감정의 연출들을 들여다 보며 마치 나만을 위한 것인양 착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어 주부애에서 우리는 써니가 일부러 시선을 일본인들을 향해 돌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써니의 일본어 주부애는 능숙했다. 이는 그녀가 '일본 팬'들을 위해 모종의 시간을 투자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여기에서 팬으로서의 기쁨을 경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일본 활동이 끝나고 언젠가 한국에 '돌아와 주길'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소녀시대가 일본에서 '성공'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그리고 성공을 할 거 같다.) 나아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말처럼 '아시아의 아이돌'이 되어 버려 밖으로 나가버린다면?

(팬들은 한편으로는 아이돌의 성공을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실패와 한국으로의 복귀를 바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들이 뭘 바라는지 잘 모르겠다는 심정이다. 해외진출뿐만이 아니라 많은 경우에서 보이는 이런 팬들의 욕망의 모호성 때문에 승승장구 소녀시대 편의 수영이라던가 얼마 전 무릎팍 도사의 강타처럼 연예인들은 '대체 뭘 어쩌라고'라고 반문하지만, 자신의 정서에 대해서 그렇게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시 말해 자신의 연예인에 대한 모순된 요구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예 그들에게 그런 요구를 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해를 막기 위해 말하자면 이런 욕망의 모호성은 단순히 미성숙에서 비롯되는 문제가 아닌 누군가를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문제에 있어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는 딜레마이다. 사랑은 자신의 것인 동시에 남을 위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항상 모순적이다. 연예인은 이런 모순을 있는 그대로 직면할 기회 혹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직업이다.)

원더걸스의 미국진출에서, 결성 순간부터 한국이 아닌 아시아 최고의 걸그룹이 된다는 의미에서 그룹명을 지었다는 Miss A에게서 우리가 느끼는 쓸쓸함은 이런 종류의 것일 것이다. 아직 우리 일상의 정서적 조건, 상상력의 범위는 네이션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같은 소녀시대 팬이라는 이유로 가끔 케이블 영상이나 콘서트 현장에서 일본인, 중국인, 동남아시아인들을 공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역으로 한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인해 일본의 팬, 중국의 팬, 동남아시아의 팬에게 거친 이질감과 요즘같은 해외진출 분위기에서는 약간의 질투심을 느끼기도 한다. 청춘불패 일본특집 마무리 공연에서, 더 앞으로는 써니, 유리, 현아가 일본활동을 위해 그렇게 많은 인기를 누리는 프로그램 청춘불패를 떠난 데에서(우리는 그녀들이 다른 한국 예능을 하기 위해 청춘불패를 떠나는 장면을 상상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사실은 자각적이든 아니든 그녀들의 빈자리를 볼때마다 우리에게 상기된다) 볼 수 있는 것들은 오늘날 한국의 아이돌 팬들이 처한 복잡한 상황이다. 우리는 아시아인들과 소녀시대 팬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소녀시대와 우리의 소녀시대가 같다고 말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느낀다(좀 오버하면 "한국말도 모르는 너희가 소시의 진가를 알 수 있을 리 없다능! 겉만 보고 좋아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능!" 식의). 여기에는 팬질에 따라다니는 기본적인 역설(나의 아이돌이냐 팬덤의 아이돌이냐 대중의 아이돌이냐)과 오늘날 한국인으로서 동아시아와의 관계를 상상하는 데 있어 따라다니는 역설(한국 그리고 아시아인가 아시아 그리고 한국인가)이 중첩되고 있다.

아이돌들의 계속적인 해외진출, 혹은 아시아에서의 활동이 이런 역설들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지는 미지수이다. 소녀시대는 결국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까? 돌아오는 것이 '옳은' 것일까? 돌아오는 것을 팬으로서 반겨야 할까 슬퍼해야 할까? 지금 당장 소녀시대의 일본 활동에 팬으로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써니가 당분간 이쪽으로 시선을 돌릴 일이 없다면 그녀가 시선을 돌린 쪽으로 가기 위해 일본어를 공부해야 하는 것일까? 좀더 팬이 아닌 사람들도 공유할 수 있는 질문을 던져보자면 아시아에서의 이렇듯이 문화적 공감의 '불안'한 위상을 규정하는 역사적 조건들은 무엇이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현재적 함의들은 무엇일까?





PS) [2010/07/31/13시] 청춘불패 시청 후기에 고맙게도 인톡시 님이 댓글을 달아주셨다. 자극을 주신 김에 이어서 생각을 전개시켜 보면 내가 하고 싶었던 말 중에 하나는 아이돌 소비문화에는 민족/국가(national)적인 차원이 전부는 아니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해 보는 것보다는 많이 반영되어 있으며, 이는 초민족/국가적인 자본의 이윤 추구 활동의 차원의 설명만으로는 해소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와 맞물려 역설적인 효과들을 산출해 낸다는 것이었나 보다.

우리 자신이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든 말든, 굳이 애국심을 열렬히 의식적으로 느끼지 않더라도 우리는 '나'를 '나'로 생각하지 I/Je/Ich/我/私로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돌 산업은 '나'를 쳐다보고있다는 식의 특권적 관계의 판타지를 주요한 상품으로 판매하는 상품인데, 이 관계를 상상하는 데 있어 (현재 행해지든 과거에 행해졌든) 넓은 의미에서의 민족적인 것(설날의 한복의 입는다던가 그런 것보다는 훨씬 심층적인, 이를테면 '모국어'같은)의 매개는 필수적인 것이 아닐까? 민족/국가가 일상적 삶의 조건을 이루는(이런 언급을 충분히 하기 위해서는 국적이나 사회보장같은 제도적인 측면의 논의를 덧붙여야 겠지만 여기서는 일단 차지해 놓기로 한다) 사회구성체에서 '자아'를 상상한다는 것은 '네이션'을 상상하는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게 일단 내가 택해본 이론적 전제이다.

이런 관점에서 전 2PM의 박재범 사태를 한 번 다시 들여다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때 박재범에 대한 비난과 민족주의를 연관짓는 글들은 몇 개 있었기는 한데, 내 기억으로는 죄다 민족주의의 소위 '광기'를 비판하는 규범적인 차원의 글이었다. 이런 글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아이돌 소비와 네이션이 그 출발에서부터 꽤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국산 아이돌들의 해외 진출이 활성화되고, 이제는 내수용과 수출용 아이돌의 구분마저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의식되진 않았지만) 네이션의 전제 하에서 성립되던 '아이돌과 나'의 특권적 관계는 모호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인톡시 님의 댓글에 따르면 이런 모호한 관계는 최근에 시작되었다기보다는 최소한 동방신기를 전례로 가지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동방신기 팬들이 국내 활동을 몇 년간 지속하지 않는 동방신기에 대한 정서적 관계를 어떻게 지속하고 있는지 좀 궁금하다. 물론 인톡시 님은 풍부한 컨텐츠를 통한 서운함의 상쇄를 말씀하셨지만, 결국 상쇄에 성공하지 못하고 팬덤에서 이탈한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지,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도 한국 활동에 대한 기대감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다른 국가의 팬들과 자료 공유뿐만 아니라 어떤 식의 정서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 등등의 쟁점이 좀 추가적으로 궁금하다. 돈이 많은 팬들이야 직접 바다 밖으로 따라가면 되니 이런 문제들을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만 좀 보다 '일반적인' 팬의 입장(정확히는 팬덤 밖의 팬으로서의 대중부터 팬덤 내에 해외까지 따라가 팬질을 하기에는 경제 사정이 여의치 않는 팬들까지)에서 이런 쟁점들을 고려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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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우리를 불편하게 한 이유" + 김예슬 응원OT

1.
오늘 고려대 정대후문에 게시된 박가분 님의 대자보를 옮겨 놓는다. 먼저 좀 정직해지자면 그간 누군가 나보고 '대자보 안 붙이시냐'고 물어보면 '풀 님이나 프리스티 님이 붙이셨으니까요ㅎㅎ더 쓰는 건 사족인 것 같고ㅎㅎ'라고 말했는데 약간의 구라가 섞여 있었다고 털어놔야겠다. 시간적으로 김예슬 씨와 관한 글을 쓴 건 두 분보다 내가 앞섰고 따라서 먼저 대자보를 붙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 대자보에서 다뤄지지 못한 쟁점이 있다 싶었기에 그 부분을 부연하는 대자보를 쓸 수도 있었을 게다. 

그런데 왜 나는 대자보를 붙이지 않았을까? 쁘띠부르주아 근성 때문이네 하는 식으로 비행위의 필연성을 찾아내며 자학의 괴로움 또는 재미에 빠질 수도 있겠다만은 뭐 그냥 어쩌다 보니 그리 되지 않았나 싶다. 다만 느끼게 된 건 행동이라는 것은 정말 이론적 올바름의 문제이기 전에 상황이 닥치면 움직이는 반응 속도, 몸에 배인 '습관'의 문제인 것 같다 싶었다. 이념적 성향에 어쨌건 간에 지식인/활동가의 범주는 이런 측면에서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렇다고 내가 지식인이라는 건 아니고...나야 뭐 이도저도 아닌 학생에 불과하다(쓸데없는,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오만을 의도하는 겸손을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해놓은 것'이 없기에 그러하다).

여하튼 그러던 차에 오늘 박가분 님이 보내준 대자보는 정말로 '더 이상 보탤 말이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한 좋은 글이었다. 굳이 왜 공감했는지 써보자면 1)문제의 핵심을 '비정한 학교나 국가, 기업'같은 외부의 대상으로 돌리기보다는 '우리 내부'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과 2)2006년의 출교 사태와의 관계를 상기시켰고 또 이 주제를 개인적 경험과 엮어 김예슬 씨의 선언이 갖는 역사적 현재성을 잘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3)박가분 님의 글들 중에서 가장 솔직한 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대자보는 무엇보다도 독자와 청자가 '고려'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고려는 그가 이론적으로 타협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역시 김예슬 씨와 같은 이 시대의 대학생이라는 점에 대해 정직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별로 좋지는 않은(박가분 님의 꼭 논변때문이라기보다는 내 자신의 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논쟁의 기억이 있고 그래서 요즘은 그의 포스트도 잘 보지 않는다만 이 글만큼은 깊은 고민이 느껴졌고 또 그렇기에 공감할 수 있었다. 일단 나에게 이 글은 그의 최근 글 중에서만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글 중에서 베스트이다. 그 외의 쟁점에 대해서는 좀더 말을 아껴놓고, 일단 지금은 이렇게 그에게 손을 들고 싶다.

프리스티의 대자보: http://freesty.tistory.com/entry/이-대자보의-수신인은-누구인가
네오풀의 대자보: http://blog.jinbo.net/neopool/?pnum=2

*출처: 이솔넷 http://eesoul.net/xe/?mid=genesis&document_srl=5674
**약간의 교열이 있다. 두 번째 줄 "보내주다"는 "보내주었다"로, 마지막에서 두 번째 줄 "잠깐뿐이지만"은 "잠깐뿐이나마"로 수정했다.

그녀가 우리를 불편하게 한 이유

김예슬 씨의 대자보가 붙은 지 며칠이 지났다. 단지 며칠 지났을 뿐인데 벌써 많은 학우들이 지지와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나 역시 그 지지와 응원에 작은 보탬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동시에 벌써 김예슬 씨 본인에 대한 인터넷 상의 근거 없는 비난들과, 대자보에 대한 악의적인 훼손들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김예슬 씨 개인의 선택에 대해 각자 의견이 갈리겠지만, 자신의 불편함 감정을 비뚤어진 방식으로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몇몇 학우들에 대해 나는 그들이 고려대라는 이름 자체에 불명예스러운 존재라고 말하겠다. 그리고 이런 슬픈 단면들은 우리 학교 학생사회의 공론장이 얼마나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단순히 한 학생의 개인적인 선택에 불과한 것을 굳이 사건화시키는 의도가 무엇이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반대로 그녀가 자신의 선택을 사건화시킴으로써 학생사회 내부에서 묻혀져 있던 목소리들을 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의 대자보를 지지할 수 있는 백만가지 이유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는 또 다른 백만가지 이유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정확히 전자의 편에서, 그녀가 그 어떤 운동가들도 어떤 식자들도 감히 하지 못한 일을 했다고 "선언"하겠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녀의 글이 우리에게 불편한 지점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 정대후문에 서 있는 학우 여러분들 각자의 지지여부를 떠나, 그녀의 선언이 우리를 불편하게 했던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정면으로" 바라봐야 한다.  

나 역시 그녀의 글이 불편하다. 그러나 그녀가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일부가 말하듯 그녀의 글이 단순히 운동권 쇼이기 때문도 아니고, 혹은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보통 학우들에게 그녀가 가당찮은 우월감을 표했기 때문도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은 아무런 이유조차 되지 못한다. 그녀가 나와 여러분들을 불편하게 했던 것은, 우리가 정면으로 응시하길 거부해왔던 무수한 유령들, 그 책임감들을 환기했기 때문이다. 자퇴선언의 주체로서 그녀는 용기 있는 한 개인이다. 그러나 그 용기 있는 개인을 통해 "말하게" 된 것은 대자보를 쓸 기회가 없었던, 자신을 대변할 변변한 단체 하나 없는 익명의 젊은이들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경제적 현실 속에서, 맨 몸으로 세대모순과 정면으로 맞딱뜨려야 하는 익명의 삶들 말이다. 이 "책임감" 앞에서 이제 문제는 더 이상 김예슬씨라는 한 학우의 결단이 아니다. 그녀의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되든, 부모 동의서를 구실로 학교가 그녀의 자퇴서를 받아주든 않든, 그녀가 글을 통해 드러낸 선언은 이제 그러한 개인적 진로를 "이미" 떠났다. 그리고 이제 학생사회 내부의 논쟁의 장이 비로소 열리게 되었다. 그까짓 악플 몇 개를 단다고, 혹은 대자보 몇장을 찢는다고, 이제 시작된 논쟁의 장이 닫힐 거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그녀의 글이 궁극적으로 드러낸 것은 비뚤어진 사회에 대한 투쟁의 의지도, 그녀가 "적"으로 호명한 국가와 기업 그리고 학교당국에 대한 저주도 아니다. 그녀의 글이 정확히 드러낸 것은 "우리" 안의 모순과 간극이다. 운동권이든 아니든 누구나 치솟는 등록금 때문에, 정치인들과 무력한 학생회에 대해 한 두 마디쯤은 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처럼 용기 있게 "스스로"의 책임을 환기하는 사람은 지금껏 없었다. 그녀는 자기 이름 석자를 걸고 학생사회 내부의 근본적인 무능력에 처음으로 논쟁적인 문제제기를 가했다. 이것은 지금껏 어떤 운동가나 단체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들은 기껏해야 학교에 대한, 혹은 사회에 대한 투쟁만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학생대중 자신의 위치에 대한 논쟁적인 문제제기 없이는 더 이상 그것을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논쟁은 학생대중 그 자신의 이름으로 의해 제기되어야 한다. 이제껏 평범한 학부생들이 각자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학생사회에 치열한 문제제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방식으로 학생사회에 대한 "개입"들이 이뤄지고야 말 것이다.

06학번 새내기 때 출교사태를 겪으며 나는 혼자이며 무력하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운동노선과 단체들도 나에게 용기를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평소의 문제의식들을 속으로만 곱씹던 나와 당신들은, 이제 그녀의 글 앞에 용기를 얻었으며, 이제 어느 누구도 혼자가 될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정대후문에 서 있는 당신도 예외는 아니다. 언젠가 그녀의 대자보도 텅 빈자리를 남길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학생사회 안에 남겨두고자 했던 그 "빈 자리"은 앞으로 우리를 정면으로 응시할 것이다. 혹시나 아직도 그녀의 선언에 심리적인 거부감을 느낄 자들을 위해 말하건대, "각자의 전문분야에서, 만일 젊음이 당신을 부른다면 그곳에서도 열심히 사회진출을 위한 준비를 하기 바란다." 이 점에 관해서는 괜한 자격지심을 느낄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동공을 이 학생사회 안에서 그 누구도 결코 피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자퇴를 선언함으로써 학생사회의 적나라한 동공을 드러냈지만, 그리고 그것이 잠깐뿐이나마 우리를 허전하게 만들었지만, 그 동공을 각자의 방식으로 채워나갈 주체는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이때 나는 그녀의 말을 가슴에 묻겠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 두고 보자"

경제학과 06학번 박원익



2.
그리고 이하는 내일 저녁 5시에 예정된 김예슬 응원OT 웹자보이다. 응원OT란 고려대에서 고연전(설마 누가 연고전이라 안 했다고 뭐라 하려나..)을 대비하여 '응원'이라는 군무(?)를 배워가는 자리인데 신입생환영회, 개강파티 등과 더불어 학기초부터 과반 단체의 주요 일정을 이루는 행사이다. 우리는 이 행사의 이름은 유지하면서 내용을 바꿔 김예슬 씨와 우리 자신을 응원하기 위한 자리를 한 번 마련해 보고자 했다. 웹자보 작업에 수고해주신 단편선 님께 감사 감사.


<로크-뮤직과 함께하는 김예슬 양과 우리 모두를 위한 응원 OT>

때 : 3월 16일 火 오후 5:00
곳 : 고려대 정경대 후문

준비된 거

1) 로크-뮤직 : 회기동 단편선, 노컨트롤의 황경하, 밤섬해적단
2) 한줄 씩 댓글 달아 단체대자보제작
3) 니 맴대로 자유발언대
4) 썸 막걸리즈 앤 썸 안주즈(개인표주박 필수 지참!)
(끝나고 다같이 술 한잔 하면서 잡담회 가요!)
 

라인-업 소개

회기동 단편선) 좌익뮤지션들의 어소시에이션 <인(디)혁(명)당> 멤버. 음악활동가. 포크로동자. 생계형빈민포크날품팔이. 한국마오쩌둥협의회 조직원. 포스트-일렉트릭-포크뮤직!





노컨트롤의 황경하) 노이즈락을 싸지르는 난폭한 애들 노컨트롤, 그 중에서도 가장 난폭한 황경하의 황홀한 드림팝 난사!





밤섬해적단) "좌파 대통령 이명박이 이 나라를 좀먹고 있다는 의기의식에 애국청년 둘이 모여서 북괴의 공작을 저지시키기 위해 기타를 잡으려 했으나 기타가 없어서 대신 베이스를 잡다."





문의) 김예찬(고려대학교 사학과 06) 011 9873 8394
이지원(고려대학교 사회학과 06) 010 9553 8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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