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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6/15
    다른 20대를 살길 원하는 몇 사람들 : EM님의 '학생'을 위한 포스트를 보고(5)
    닉네임
  2. 2010/07/08
    2010/07/08~09
    닉네임
  3. 2010/03/28
    메모─철학의 과부하, 공부에의 용기, 진로고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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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20대를 살길 원하는 몇 사람들 : EM님의 '학생'을 위한 포스트를 보고

 

1. 최근 슈리 님의 포스트 [좌파는 성매매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트위터와 블로그에서 소란이 한바탕이 일어났었다. 나로서는 그 글의 원문은 읽지 않았지만 그 텍스트를 둘러싼 비판들은 한윤형 님과 구멍 님의 글을 중심으로 보았다. 어째서 공평하지 못하게 그렇게 읽었냐하면 거만하지만 최선을 다해 솔직한 말로 그 포스트가 어떤 내용으로 쓰여있을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떤 태도에 입각해 쓰여있을지 충분히 예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걸 예상하고서 그 글을 태연히 볼수는 없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질낮은 글을 눈에 담을 시간이 없다는 지적 우월감/자만감과 개인적 다급함이 중첩된 것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 자신이 정확히 저런 글을 써보고 그것으로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자존감을 획득하던 사람이었기에 드는 복잡한 감정이기도 하였다. EM님의 말씀처럼 이 집단은 '스승'이나 '선배' 없이 시작을 했다. 그 전에도 이런 사람들이 없던 것은 아니다.

 

 

2. 하지만 차이를 들어보자면 크게 2가지 정도가 일단 떠오르는데 우선

 

1) 왕고가 없는 들뢰즈 이후의 현대정치철학 : 2000년대 중반 이후 번역출판된 (주로) '들뢰즈 이후의 현대정치철학'를 통해 읽었다는 것. 나는 이런 단순한 사실만 포착하고 있다가 지인의 지적을 듣고 이 사실의 특이성을 느꼈는데 그것은 '선배가 없다는 것'이다. 독해가 맞든 그르든 맑스는 김수행이 있었고 그것의 비판인 알튀세르는 과천 연구실이 있었고 또 그것들과의 비판적 긴장을 유지하려 들뢰즈에는 이진경이 있었고 네그리에는 조정환이 있었다.

  하지만 들뢰즈 이후에 등장한 지젝, 바디우, 랑시에르 등에는 '선생'이나 '선배'로 대표될 얼굴이 딱히 없었다. 물론 먼저 나보다 그 책들을 영어로 읽은 선배들의 번역을 통해 우리가 읽게 된 것이긴 하지만 해당하는 이가 지젝을 전문적으로 번역할 의지를 가질 사람이었다기보다는 그냥 좋은 책 한권 번역하자는 식으로 던져주고 간 경우가 많았다. 관련 연구까지는 아니어도 잡문들은 꽤 많았었던 것 싶긴 하지만 앞서의 이름들에 비견할 존재감(이것이 경중의 의미는 아니다)를 가진 사람은 딱히 없었다. 지젝에 이성민 씨가 있다 하지만 이성민 씨의 이름이란 것은 앞서의 이름들과는 참 다른 것 같다. 

  이러한 선배없음은 잉문학도들의 어쩌면 과잉되어 보이는 자의식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본다. 눈 앞에 아무 것도 없었기에 태초부터 논의를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야말로 세계를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고 말할 용기/오만을 가질 수 있었다. 

 

2)웹을 통한 과잉전시: 다른 한가지는 이들이 글과 생각이 너무 많은 시선에 너무 오랜 시간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제 분수에 맞는 관심을 받는데 멈추지 못했다라는 말과 같을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다른 맥락도 있다. 이전과 같은 경우에는 EM님이 말씀하셨다시피 글을 아는 사람들에게 보이고 이들의 자문을 받거나, 아님 홀로 좀더 생각할 시간을 가지거나 하면서 글이 완성될 시간을 더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텍스트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속도는 이런 답답함을 참지 못한다. 심지어 생각이 시작되고 있는 과정에서도(이를테면 이 블로그 자체도 예외는 아닌) 전시와 독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후 사태는 이번 일에서 보았다시피 잘 알 수 있다. 원문이 뇌에서 다른 이의 눈으로 들어가는 시간도 빠르고 이 속도는 말과 말이 오가며 가속도를 붙여 가다 견딜 수 없는 경지에 오면 어느 한쪽이 폭발하고 서로 평행선을 그리는 식으로 사태가 마무리된다. 이 부분의 심리 역시 EM님이 잘 지적해 주셨다. EM님은 다른 이들은 별로 발휘하고 싶어보이지 않는 배려를 발휘해 슈리 님의 상황을 그나마 상대적으로 슈리님의 입장에서 말씀해 주고 계신다. 내가 그런 EM님의 말에 동의를 느끼는 것은 앞서 말했듯 나 역시 그런 글, 거칠게 한 줄로 요약하자면 어떤 대상이나 내용을 다루는 것보다는 어떤 신중하거나 (무엇보다도)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중요한 연극적인 글을 쓰는 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글을 쓰고 그런 글에 리플을 다는 와중 지금 슈리님이 처했을 법한 정신이 우왁!!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태는 기술의 발전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친 가설을 들어보자면 외톨이 먹물 지망 대학생들의 소비의 장이 공동체 내지 놀이터가 학생회와 연계된 학회에서 인터넷 서점을 매개한 인문학 출판시장으로, 생산의 장이 학회 발제문이나 레포트, 운동 문건이나 대자보, 타세력과의 토론문에서 블로고스피어나 인터넷언론 등으로 이동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주의: 다른 얘기도 그렇지만 이 부분은 특히 가설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며, 글쓴이의 학생운동 무경험이라는 어떤 치졸한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판타지일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 만약 이 가설이 맞다 하더라도 이 가설 자체는 중요한 중간고리들을 빼먹고 있는데 이를테면 '게시판' 문화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한윤형의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나 [안티조선운동사], 김민하의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가 어떤 역사적 기록들과 재밌는 해석들을 보여주고 있다.

 

 

3. 원래는 요즘 내가 하는 일이 항상 그렇듯 좀 뭔가 센치하게 쓰려 했던 포스트인데 어쩌다 나름의 원인분석이 이렇게까지 길어졌다.......사실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이런 것보다는 다른 것이었다.

 

잉문학도로서, 내가 요즘 자주 생각하는 문제로서 '머리로서 사는 사람'이 현실과의 접점을 찾을 때 '몸으로 사는 사람'이나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을 무시할 수밖에 없는지.

 

20대가 공부를 해야 되는 나이라는 예감을 가지면서도 가지게 되는 불만이나 불안들. 아 나보고 닥치고 배우라는 거냐 네가 배울 만한 사람인지 증명도 안 해 놓고. 공부를 하고 글을 써서 뭔가를 바꾸거나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여를 할 수 있을까하는. 또 그때까지 있다보면 나도 저 축쳐져 10명도 안 되는 사람이 읽는 글을 쓰고 만족하며 사는 시간강사 선배들처럼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지 않으려면 지금 뭐라도 함께 해나가야 되는 것이 아닐까. 

 

내가 갈법한 길에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닮고 싶지 않기에, 심지어 나까지 포함해서 그러하기에 느끼는 미칠듯한 불안정함. 이런 걸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이들에 대한 질투와 벗어난 양 시늉하는 이들에 대한 불신과 증오.  

 

대강 이런 쟁점들. 사실 이런 것들이 나는 진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중요한 원인들이 그렇듯이 이 원인들 역시 안다고 해서 뭔가 속이 시원해지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당장 해결될 수 없음을 알고 더 답답해지기도 하는 그런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EM님의 조언들이 참 고마울 수 있고 동의가 된다만 절반의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나머지 절반을 EM님이 답해줘야 하는 것은 아니며 사실 그 다른 누구라도 그리하지 못할 것이다. 

 

 

5. 하지만 물론 이 글과 관련될 사람 중에 이런 말들을 곧이곧대로 들을 사람이 없는 것이 일단 내가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섣부른 비관에 빠졌다고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상황을 자신들에게 대입시킨다고 하거나. 아니면 내가 주장하는 차이들은 가상적이거나 기껏해야 눈꼽만한 거라고 까이거나. 나는 이런 좌절들을 몇 번 경험했다. 그래서 또 자가소비용 글을 쓰는구나 싶기도 하지만, 내가 먹을 채소를 내가 기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다 싶어 끄적여 놓는다.

 

그리고 관련된 글 을 트랙백한다. 사실 이 블로그 전체가 이 글과 관련된 것일 수 있지만 이 글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명시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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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8~09


1.
블로그의 좋은 점은 굳이 형식을 엄격히 갖추지 않아도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나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고, 나쁜 점은 바로 그 좋은 점 덕분에 생각들을 기록해야 된다는 강박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마구마구 밀리다 보면 그래도 뭔가 찔끔 써보게 되는데 주기적으로 쓰는 이런 메모 포스트와 얼마 전에 쓴 [Belive와 Trust]라는 게시물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EM님의 포스트를 보고 뭔가 느낀 바가 있어서 정리해 보려고 했는데 결론은 조금은 약간의 우스꽝스럽게 trust가 장수에 유용하다는 데로 나아갔다. 이건 결론이 글의 형태로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름 글을 마무리짓기 위해 친 '유머'였는데 과연 이걸 유머로 봐준 사람이 있을지...EM님이 여기에 트랙백을 달아주셨는데 그 때 포스트를 보고 느낀 것들에 대한 명확한 표현을 얻은 것 같아 감사하다.


2.
어제 새움에서는 새사연의 김병권 부소장의 강의가 있었다. 강의의 구성은 한국경제든 세계경제든 현대 경제를 설명하는 데 있어 부채, 그러니까 '빚'이 개념으로서 유용한지를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를 통해 논한 뒤, 한국 경제를 (IMF로 인해 친숙한) 국가부채가 아닌 가계부채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었다. 가끔 강의의 명쾌함과 논의의 성숙함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강연을 간혹 볼 수 있는데 어제의 강의가 그러했다. 특히 마지막에 가정을 중심으로 한 십자도를 그리고 기업/국가/자산시장(나머지 한 항이 기억이 안 난다...)과의 관계 아래에서 가정경제를 설명하는 대목은 정말 깔끔했고 지금까지 경제에 대해서 들었던 이런저런 주장들(이를테면 김광수경제연구소의 [위험한 경제학]과 같은)을 머릿속에서 맵핑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견지에서 한국경제의 미래를 설명하는 대목이나, 소득보장과 고용보장을 나눠 요즘 진보적 세력에서는 전자 쪽에 논의가 집중된 것 같다(기본소득을 포함하여)고 평하는 대목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다만 소득보장과 고용보장의 관계를 너무 독립적으로 보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 부분은 시간이 모잘라 따로 질문을 드리지는 못했다.(이런 코멘트를 할 때 나는 김원태 씨의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김원태 씨는 [새로운 노동시간정치를 위하여: 총체적 노동시간단축으로서의 기본소득]에서 파업과 같은 고용보장을 위한 기존의 투쟁전략들이 유효성을 가지기 힘들게 된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포스트포드주의 단계에서 기본소득과 같은 소득보장 전략이 고용보장을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 논문에 대한 간략한 정리와 논문 본문에 대한 문의는 여기를 참조하길 바란다.) 

이 날의 강연은 현재 녹취 및 정리 작업 중에 있다. 아쉬운 것은 역시나 그리 많은 사람들이 강연에 오지는 않았다는 사실. 기존의 공부와 관련해서 느낀 것은 경제학적 설명이 경제주의적 결정론으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 어제 강의에서 나는 경제적 구조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행위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상상해볼 수 있는 소스(source)를 매우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어쩌면 이데올로기론 공부에서보다 많이, 그리고 보다 현실적인(주변 사람들의 삶을 떠올리며 납득을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관점에서.


3.
또 최근에 이론적 편견을 불식시켜 주는 몇몇 텍스트들을 접할 수 있었다. 성실한 이론史 연구들을 볼때마다 느끼지만 많은 경우 내가 가지고 있던 이론적 적대("나는 ...주의적 입장에 반대한다"는 말로 이어지는)는 당파적인 차이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해당 텍스트 자체에 대한 부주의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고, 또 내가 지금 열심히 하고 있는 (그리고 마치 역사 속에서 이런 고민을 한 게 내가 처음인 것 같은) 고민들은 이미 이전에 어느 정도 정교한 형태로 진행되었던 경우가 많다. 공자 님의 가르침 대로 읽는 과정과 고민하는 과정은 항상 같이 다녀야 할 필요가 있다.

해당 텍스트들 중 하나만 언급하면 김원태 씨의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 논문 [현대 자본주의와 노동패러다임의 재구성-안토니오 네그리를 중심으로]이 그러했다. 나는 '다중'의 개념으로 유명한 네그리는 진지한 사회분석을 결여한 비과학적이고 낙관적인 주체성의 이론가로 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인식에는 비판적인 시선이 전제된 것으로 '우리는 모두 예속의 운명에 처해 있다'식의 비관주의와 엮어서 역사와 사회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일의적인 성격을 부여하거나 평가할 뿐이지 사회 자체의 동학을 기능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하지 않나 하고 생각도 해보았다. 물론 이런 인식에는 나름 네그리 자신이 후기에 그러한 텍스트적 근거를 제시한다는 데에서,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의 네그리 수용이 촛불시위 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그렇게 받아들여졌다는 데에서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네그리에게는 다른 생산적인 측면이 존재하는데 이 논문은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네그리의 이론을 노동해방(노동 안에서의 해방 +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론의 구체화를 위해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여기서 제시되는 테제들, 이를테면 자본주의 분석에 있어 노동자의 우선성이나 계급구성론이 기술결정론적 노동소멸론에 대해 가지는 비판적인 함의들, 자본의 삶시간을 노동시간화 전략 같은 부분들은 스스로가 너무 앞질러 나갔었구나하는 반성을 하게끔 하는데 충분하고도 남았다. 철학자로서의 네그리가 아니라 사회분석가로서의 네그리라고 해야 되려나...

여튼 이론적 편견을 불식하는 데 있어서나 사회문제들에 대한 이론적 관점을 좀더 분명하게 하는 데 있어서나 큰 도움이 된 논문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서의 네그리론에 기대어서 촛불논쟁에서의 조정환 씨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에서 서동진 씨의 네그리론에 대해서 비판을 전개하고, 또 이를 통해서 해당 논자들의 주된 논지 자체가 놓치고 있는 이론적 지점들을 짚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또 하나의 포스트가 기약없이 예고되는군...


4.
어제 학생인권조례 관련뉴스에서 고등학교 때 제목만으로 울분을 대신해줬던 책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의 저자 배경내와 학생인권운동을 한다던 친구의 모습을 보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분노와 변함없는 그들에 대한 부끄러움과 응원심이 동시에 떠올랐다. 딱히 좁은 의미에서의 (공장)노동자의 자식도 아니었고, 이론적으로 다양한 것을 경험한 뒤 진보적 학문을 공부하자 의식적으로 택하지도 않은 내가 '진보' 비슷한 것들에 친화성을 가지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교사들의 대화를 거부하는 태도(나아가 학생과 함께 이유와 논거를 따지는 합리적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를 도전과 수치로 여기는 태도)에서 느낀 모욕감과 RATM같이 있어보이는 밴드들을 들었던 데에서 기인한다. 더이상 다른 사람들이 그런 모욕감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관련 기사 하나 "무식한 '조중동' 덕에 우리가 떴습니다" [링크]]


5.
가끔 내가 쓴 글을 다시 보고 당연하게도 '야 이렇게 생각이 나와 잘 맞다니'라고 신기하거나, 나라는 인물이 어떤 일관성을 그래도 가지고는 있구나 하면서 안도하는 때가 있다. 방금 본 지갱프의 소개글이 그런 경우 중 하나이다. [링크] 중간에 인문학 담론의 자족적 경향과 웹문화의 변화를 연결하는 대목은 너무 간략히 다뤄진 것 같아 아쉽지만 이런저런 일들을 겪은 1년 이상의 기간동안 내 생각은 어떤 핵심을 유지하고는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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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철학의 과부하, 공부에의 용기, 진로고민

1. EM님의 최근 포스트 경철수고, 또는 마르크스의 지적발달에서 정치경제학의 의의에는 이러한 코멘트가 나온다.

"순이님이나 냉커피님의 충분히 반성되어 있지 않아 보이는 "반(anti)-경제학 환원주의"적 태도가 우려스러운 것도 대체로 그런 이유에서다. 이런 상황에서는, "경제학 대 비경제학" 또는 "경제학 대 사회학 대 정치학 대 ..."와 같은 대립구도를 타파하는, 즉 근대분과학문 체계를 전제한 물신화된 사고로부터 벗어남과 동시에,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요구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은 바로 그런 과정에서, 경제(학)의 본질에 대한 위 질문은 핵심적인 것으로서 제기될 것이다."

EM님의 해당 포스트에 본격적인 의견을 달 의지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고, 일단 EM님의 이러한 코멘트를 보니 떠오르는 것이 몇 가지 있어 메모해놓아 보려 한다.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닌데 어찌하다보니 이 블로그에 올리게 되는 글들의 주요 테마는 이데올로기론,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데올로기론의 '지위'에 관련된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뭔가 끄적거리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1)주로 정신분석학, 프랑스의 정치철학, 이데올로기론에 기반을 둔 (학계라기보다는) 대중 인문사회과학 출판시장의 경향성에 대한 문제의식과 2)이를 읽으며 급진적인 '공부'를 하고 있다고 자임해 왔던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이 그것이다.

그니까 도식적으로 나누면 사회적이라 할 계기 하나, 개인적이라 할 계기 하나가 있다. 하지만 두 계기의 내용은 대동소이한데 그것은 현재 주목을 받고 있는 현대정치철학 담론들이 경제적 환원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나치게 가진 나머지 철학 혹은 이데올로기론 내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불모적인 작업을 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이를 조금은 비꼬아 "이데올로기 환원론"이라고 불러본 적이 있다.

"내 질문은 이렇다. 경제적 환원주의가 있으면 이데올로기 환원주의도 있는 것이 아닐까? 경제학과 정치학과의 연관 속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연구 범위를 찾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치를 꿰뚫으려는 몇몇 이데올로기론들의 야심찬 기획은 사실은 그들이 그리도 학을 띠는 경제적 환원주의의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근본적인 문제는 ‘환원주의’라는 개념적 도구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닐까?"[출처 링크]

어쩌면 환원주의란 경제든 이데올로기든 특정한 범주를 중심으로 현상을 모두 설명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더 정확히 말하면 경제와 이데올로기같은 분석 범주들 간의 관계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작업을 가리키는 말로 쓰여야 하지 않을까? EM님의 "근대분과학문 체계를 전제한 물신화된 사고로부터 벗어"나야한다는 주문을 나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 보고 싶다. 중요한 것은 경제학이 잘났네 이데올로기론이 잘났네라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대상에 적절한 개념적 도구들을 이용해 문제를 설정하고 탐구하는 것이 아닐까.


2. 이런 맥락에서 왜 맑스가 철학자로 평생 살지 않고 (정치)경제학자로 전환했는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무리 정치학, 철학, 경제학 그런 걸 한사람이 커버하는 게 이상하지 않았던 시대라지만, 전공을 바꾸는 것이 학자에게 그리 쉬운 일로 느껴지진 않는다. 그것도 헤겔을 읽다 스피노자를 읽는 식이 아니라 철학을 하다가 경제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더더욱 그러하다. 사실 원래 경제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은 맑스가 아니라 그의 친구 엥겔스였다고 한다.

왜 마르크스는 자신이 이해도 앞서 있고 사람들한테 잘난체도 하기 쉬웠을 철학에 관심을 줄이거나 끊고, 익숙하지 않은 분야인 그래서 자칫하면 무시도 당하기 쉽고 어쩌면 별 소득도 보지 못한 채 학자로서 패가망신할 수도 있을 새로운 판인 경제학으로 뛰어들었을까? 내 생각에 이 전회는 그가 정말 자신의 '문제'에 정직했던 학자였음을, 알고 있는 지식이나 모아둔 장서에 집착하기보다는 자신에게 과제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찾아가는 데 용감했던 사람임에 대한 증거가 아닐까 싶다.


3.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기 앞서 나 자신이 그러한 용기가 있는 사람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하지만 이런 자기 성찰에 남에 대한 비판이 섞이지 않을 수는 없겠지..). 생각해 보라. 학자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나이 마흔에 이르러 갑자기 자신들이 익히고 사용해온 개념적 범주들이 문제를 탐구하는 데 있어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고. 연봉 몇 천만원짜리 일자리를 버리고 지금 와서 학부생들과 함께 수업을 들으며 새로운 분과에 도전할 수 있을까? 난 자신이 없다.

그리고 불행이 시작된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포기할 수는 없고 뭔가 쓰기는 써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그의 개념들은 자신이 풀 수 없는 문제들을 어떻게든 설명할 것을 요구받게 된다. 과부하에 걸린다. 말들은 점점 복잡해 지지만 정작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은 없다. 소의 되새김질처럼 볏단이 가래침이 될 때까지 씹고 뱉고 씹고 뱉게 된다.

가끔 그러한 글들을 보게 된다. 특히 철학이나 정신분석학과 관련한 대중서적들이 그런 생각들을 하게끔 한다. 또 그런 글들이 나오는 장(場)의 특성이 이 사람 저 사람 쉽게 갈아탄다는 것이다. 맑스가 아니니까 들뢰즈, 들뢰즈가 아니니까 네그리, 네그리가 아니니까 지젝, 지젝이 아니니까 랑시에르, 랑시에르가 아니니까 바디우나 발리바르, 그 다음은? 이런 사상가의 이름들의 인플레 속에서 잊혀지는 것은 바로 이들이 탐구했던 문제의 이름이다. 유럽인의 이름들의 인플레 속에 잊혀지는 것은 우리의 사유와 실천의 조건을 구성하는 장소(아시아이든 뭐든)의 이름이다.

이런 짓을 계속할 거라면 공부는 일찌감치 관두는 게 좋겠다는 것 정도가 그나마 분명한 자신과의 다짐인 듯싶다.
 

4. 최근에 인상깊게 읽었던 글 중 하나가 진보평론 40호에 실린 정성훈 선생님의 하버마스와 루만에 관한 글 한편이었는데 그 글 마지막 부분에는 이러한 코멘트가 나온다.

"필자가 볼 때 한국의 좌파 담론은 현재 '과학 없는 비판'과 '사회학 없는 정치철학'의 과잉 상태이며, 과학의 공백을 여전히 19세기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메우고 있다."

일단 내가 한국의 좌파 담론 운운할 계제는 아니며, 19세기 정치경제학 비판의 문제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문제제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모르겠다는)는 점을 밝혀두어야 겠다. 내가 꽃힌 것은 '과학 없는 비판'과 특히 '사회학 없는 정치철학'이라는 말이 위에서 언급한 문제, '철학(혹은 이데올로기론)의 과부하'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해주어서였다.

그렇다고 내가 철학과 이데올로기론을 모두 경제학, 사회과학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부하를 벗어나 자신의 범주를 잘 제한했을 때, 다시 말해 스스로가 할 일이 뭔지 정확하게 찾았을 때 정치철학이나 이데올로기론의 작업도 생산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왜 일도 한 번에 여러 가지 하면 결국 아무 것도 못하게 되지 않는가. 하나하나 차근차근 자신이 풀어갈 수 있는 문제들을 치워나갈 때 그 때 작업의 능률도 좋고 뭔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납득이 가능한 생산적인 작업이 진행된다. 

아무래도 요즘에는 스스로가 한 명의 '연구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보니 이런 고민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에게만 대단한 것이 아닌 모두에게 읽힐 수 있고 도움이 되는 연구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자신의 축적된 지식에 고착되지 않고 문제의 답만을 쫓는 공부란 무엇일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그런 공부를 하기 위해서 어떤 물질적 기초 위에서 살아갈 것인가. 아카데미에 들어갈 것인가. 돈은 별도로 벌면서 공부를 진행해 나갈 것인가. 예전에 주류 아카데미에 대한 막무가내 식의 반항심과는 다른 맥락에서 "어디에서 공부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이렇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근데 답은 공부랑 관련된 곳과는 좀 다른 곳에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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