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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텍스트 독자의 자괴감에 대하여

신문기사건, 책이건 간에 1차 텍스트에 비해 비평을 읽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다 보니 쥐뿔도 없으면서 마치 뭐 좀 되는 것마냥 착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판단능력 상실.ㅜㅜㅜㅜ - @illoser

나는 한국사 연구자가 아니다. 광해군에 관한 1차 사료들을 하나하나 살핀 적도 없고, 2차 연구 자료들을 꿰고 있지도 못하다. 따라서 이 글의 초점은 오항녕의 주장이 학문적으로 타당한지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연구자들의 몫이다. 두 학자의 논지를 대비해 쟁점을 명확하게 하는 것, 그것이 이 글의 목표다. - 김덕련, [광해군을 보는 두 가지 시선], 프레시안북스

http://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21005133643&section=08&t1=n

 

1.

첫 번째 인용한 트윗을 봤을 때, 친구로서 그리 자신감 없을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 내심 찔렸다. 나 자신이야말로 1차 텍스트에 대한 독해 능력은 없이 누가 연구하고 번역한 것들을 '읽는' 사람이고, '쓰는' 것이라고는 트윗이나 가끔 길게 맘잡고 써봐야 서평인 사람인 탓에 조언할 처지가 아닌 것 같아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분수에 대한 자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나름 대중인문서나 약간 심화된 연구서, 논문 등을 열심히 읽었던 시기에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무작정 번역자를 믿지는 않을 정도의 안목은 생겼지만 검증할 외국어 능력은 없었으며, 그리 좋지 못한 2차 텍스트들에 들어있는 빈약한 정보와 넘치는 근거없는 편향에 불만을 느낄 정도는 되었지만 1차 텍스트에 접근하고 해석할 독해력은 없었다. 뭘 읽어도 핵심에 가닿지 못하는 찝찝한 기분은 "언젠간 정말 프로페셔널하게 공부를 해서 몇 분야는 정확히 알고 싶다. 텍스트에 대한 인상이 아닌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싶다"는 욕심으로 이어졌었다.

 

하지만 대학이라는 테두리를 조금만 벗어나자마자 아쉽게도 스스로에게 그 욕심을 이어나갈 끈기가 조금 부족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현재는 공부에의 욕심은 일단은 접어둔 상태이다. 하지만 살던대로 살다보니 결국 대중인문서를 읽진 않더라도 습관적으로 구매하는 그런 일상을 보내고 있다. 여전히 주로 사는 책은 대중인문서, 2차 텍스트이다. 문제는 계속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2차 텍스트(대중인문서)의 독자의 자괴감'이라는 문제 말이다.

 

 

2.

보다 전문적인 공부라는 방법을 통해 해소하려고 했던 이 문제에 대해서 대강의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뚜렷한 언어로 사고하거나 말하지는 못했다. 윗 트윗을 보고 "자기 생각이 중요하다"는 도움안되는 멘션을 보낼 때까지도 그러했다. 그러던 와중 프레시안북스에서 두 번째 인용의 "2차 연구 자료들을 꿰고" 부분을 읽고 몇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 문구는 인식, 지적 성취의 어떤 차원을 환기시켜주었다. 즉, '2차 텍스트의 목록과 그 텍스트들 간의 관계를 아는 것은 1차 텍스트에 능통한 것보다는 못할 수 있지만, 뚜렷한 계획없이 2차(그리고 1차) 텍스트를 접하는 것보다는 '향상된' 수준, 차원이 아닐까?'라는 생각 말이다.

 

대중인문서는 (애매한 말이지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관심을 잘 가지지 않는 분야에 대해 좀더 많이 보다 정확히 "알고" 싶은 사람들이 찾는 책이다. 그 시작은 기쁘고 힘차지만, 모든 아마추어리즘이 그러하듯이 아마추어는 아마추어에 만족할 수만은 없다.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대중인문서 독자들은 세계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남들이 만든 세계에서 이리저리 헤멜 뿐이라는 느낌에 무력감에 빠진다. 그리고 이런 2차 텍스트에 대한 무력감은 1차 텍스트에 대한 열의로 이어진다.

 

이런 무력감과 열의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이는 일부 천재를 제외하고서는 더 높은 지적 성취로 나아가기 위해서 겪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독자는 '지금 당장' 가공되지 않은 1차 텍스트를 소화할 수 없으며, 소화능력을 갖추기 위해 대학원을 가거나 전문적 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각자 자신의 생애과정에 있어 너무 많은 기회비용을 치뤄야 한다. 마땅한 처리방법이 찾지 못한 이 무력감과 열의는 자신의 한계에 대한 자괴감으로 전환된다. 이렇게 인문지식 일반에 대한 흥미는 사라져 가고, 그렇게 책에서 멀어져 간다. 

 

그렇지만 이런 자괴감은 자신에게 너무 야박한 일이 아닐까? 하나의 비유를 들어보자. 우리 모두는 음식을 먹고 좋아하지만 요리사가 되겠다거나, 맛집블로거가 되곘다는 욕심을 품진 않는다. 물론 집에서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대접하고 싶고, 인상깊게 먹었던 음식을 기록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야 보편적인 것이지만 그 정도인 것이다. 지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활자를 읽고 좋아하는 이들 모두가 연구자나 비평가가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머리'의 활동에 '입'의 활동만큼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것은 어떨까?

 

딜레탕트, 그러니까 잡학다식한 일상인의 수준에 만족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만족감은 오래가지 못한다. 더 많이, 정확히 알고 싶은 욕구는 그런 기만으로 충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아까 집요리와 음식포스팅의 비유로 다시 돌아가보자. 그리고 " 2차 연구 자료들을 꿰고"라는 인용으로 돌아가 보자. 앎에도 이런 중간 층위가 있다. 아예 모르는 건 싫고, 잘 알면 좋겠지만 꼭 선택지가 이 두 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은 안다"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며 그 자체로 좋지 않을까?

 

 

3.

최근 한국 출판시장에서 이런 수준에서 쓴 책, 2차 텍스트 독서 경험을 묶어낸 책들이 몇 권 떠오른다. 한윤형의 [뉴라이트 사용후기](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7691022)와 전성원의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9062197)이다. 연구자 혹은 1차 텍스트 독자가 2차 텍스트 독자 자신이 2차(3차 혹은 n차??) 텍스트를 쓴 경우이다. 이 책들은 2차 텍스트를 읽고 나온 책들이 몇 가지 빈약한 개괄 및 입론과 2차 텍스트 저자의 주관을 요약하지 않고, 그 자체로 1차 텍스트 또는 1차 텍스트의 1차 텍스트인 세계 자체에 대한 앎을 증진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책도 홀로 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책은 항상 더 많은 책의 일부이다. 이 책들은 나름의 질서를 갖추는데 실제 세계가 최상단을 차지하고 있고 1차와 2차, n차가 각각 밑단을 이루고 있는 계단식 분수의 모습은 적어도 아닌 것 같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양도 적고 질도 나빠지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물은 다시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오기도 한다. 수평적 네트워크 형태는 아닌 것 같지만 직관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글에서 나온 글이 글 이상의 것에 대해 알게 해주는 그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마법처럼 일어나곤 한다.

 

 

4.

이런 질서의 구체적 양태에 대해서는 지금 잘 모르겠지만 그 조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저자 개인의 탁월함도 있겠지만 사회적 요소, 출판시장이 그것이다. [자본]에서 가르쳐 주었듯이 무한한 확대재생산이라는 고유한 욕구만을 따르는 자본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상품이라는 형식을 통해 세계의 사물들 간의 유통속도를 가속시킨다. 인간의 앎 역시 상품이라는 옷을 입어 책이나 기타 다른 사물을 통해 유통되기 시작했다. 단순히 속도의 가속이 책의 신비한 질서를 구성한 것은 아니겠지만 출판시장이라는 키워드는 항상 생각하면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되지 않나 싶다.

 

 

5.

난삽한 상념을 수습하며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우리 인문학 애호가, 학부생, 대학원생(특히 석사) 여러분, 힘냅시다! 화이팅! 우리가 읽는 글도 쓰는 글도 세상에 존재가치가 있어욧!!^^..... 스스로를 조금더 긍정하자. 정확히 어떤 층위에서 어떻게 긍정해야 할지 알고서 그리하도록 하자. 스스로를 꺾는 법도 알아야 하지만, 지키는 법도 알아야 크든 작든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인용한 김덕련 기자의 비교서평은 심지어 2차 텍스트에 정통하지 않아도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한다. 저 기사가 보여주고 있는 신중함처럼 그렇게 한발한발 나아가는 것이다. 오늘 트위터에서 보고 위로가 되었던 말을 마지막에 적어놓아 본다. 

 

그 일을 멈추지 않는 이상 당신이 얼마나 천천히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 앤디 워홀 봇(@ndwarhol_kb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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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12.10.7(Sun)

1차 윤문 및 가필)   2012.10.9(T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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