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06

2009/08/06 00:50 베껴쓰기

이층에서 내려와 현관문을 열고 나설 때만 해도 산책이라면 한 걸음 한 걸음 떼면서 걸어가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걸어가려고 보니까 어쩐지 그로서는 그 한 걸음을 떼기가 힘들었다. 역시 나쁜 징조였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는 맨션 주차장 앞에 서서 좌우로 길게 이어지는 골목길을 바라봤다. 그의 오른쪽 담장 아래 어둠 속에 숨어서 기다리다가, 더는 견디지 못한 길고양이 한 마리가 조금도 머뭇거리는 기색이 없이 그의 앞을 지나쳐 골목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는 그렇게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는 한 걸음을 내디딘 뒤에 자신이 과연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었는데, 그런 불안감이 매일 밤 그를 잠에서 깨우는 심장의 통증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차가운 새벽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폐와 식도를 거쳐서 덥혀진 공기가 이빨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는 코끼리와 함께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_김연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전전하지 말 것.

날은 계속 덥고, 나는 이미 길을 출발했다.

 

오늘밤, 잠들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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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6 00:50 2009/08/06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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