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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고 슬픈 소식

음.............................

레퍼허 마을이 없어졌답니다.

버마군의 공격을 받아 피난을 가느라 뿔뿔이 흩어졌다네요.

우리가 함께 나눴던 레퍼허 마을 아이들의 이야기, 학교 이야기가 부서진겁니다.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 머물지 모르지만

그들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게 참 죄송하네요.

사진 속 책을 들고 있는 저 아이의 생존과 존엄한 삶을 바라며,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되면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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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1년

이 훌쩍 지났네요. 마지막 글을 올린지가요. 버마에 갔던 사람들 얘기는 작년 한겨레 21에 특집기사로 실려있습니다. 2월 또는 3월에 나온 호수 중에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지금도 계속 레퍼허 마을과 소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경없는 친구들'에는 우리 만원계가 와해된 관계로 후원을 계속 못하고 있구요.

 

한가지, 올 봄에 '국경없는 친구들'의 주최로 제1회 태국인권영화제를 한다고 해서 구하기 원하는 한국영화를 서울인권영화제를 통해 연결해줬습니다. 핌이 서울 인권영화제 홈페이지를 보고 관심있어 하는 2편 정도의 이주자관련 한국 영화가 있어서 서울인권영화제를 통해 각 작품 감독님과 연결이 됐고 흔쾌히 상영을 허락해 주셔서 태국에 DVD를 보냈습니다. 

 

핌은 그동안 한 아이의 엄마가 됐다고 합니다. 임신과 출산 때문에 뜸했지만 다시 활동을 재개한다고 합니다. 우리 만원계가 재개할 가능성은 지금으로선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쪽도 정치 상황이 무지 안좋고 우리쪽도 그렇구요. 서로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으면 하는게 지금의 작은 바램입니다.

 

1년 동안이나 아무말씀 못드려 죄송합니다. 저도 한 단체를 꾸리다 보니 정신이 없고, 그러다 어느날 문득 생각해보니 1년이 훨씬 넘었더라구요.

 

만원계의 시도가 계속됐으면 하는 바램을 놓지 않으며 다음번을 기약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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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4일 후원금 송금내역

새해 복 많이 나누세요. 설 잘 보내시고요.

1월 초에는 모아진 후원금이 없어서 후원금 송금을 건너뛰었는데, 만원계로 오랫만에 돌아온 계원들이 송금해 주셔서 2월달에는 후원금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제 동료 2명이 버마에 가 있습니다. 러퍼허 난민 마을 아이들에게 전달할 책을 잔뜩 갖고요. 아이들이 공부할 책이 없어서 이곳에서 만화작가들의 도움을 받아 교과서를 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안전한 여행길 되길 바라며, 돌아오면 귀동냥해서 그곳 소식을 생생히 전하도록 하지요.  

 

 

2007년 잔액 - 423,018원

1월 3일 이윤* 1만원

1월 7일 황수* 3만원

1월 21일 연상* 10만원

1월 31일 류은*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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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모금액 15만원

2월 4일 송금액 100달러+수수료=99,851원

잔액 -372,868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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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6일 후원금 송금내역

일단 모아진 금액이나마 송금했습니다. 예전처럼 월 150달러의 고정적인 후원은 힘들 것 같고, 모아지는대로 보내려 합니다. 100달러 이상 송금가능하기 때문에 모금액 7만원에 좀 보태서 100달러를 송금했습니다.

 

만원계는 한달에 1만원으로 아시아지역의 인권운동과 연대하려는 취지를 갖고 있습니다. 계원가입같은것 안하시더라도 월 1만원으로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후원구좌는

국민은행 031601-04-065545(국민은행 류은숙) 입니다.

 

송금내역은 아래와 같습니다.

 

잔액 -395,041원


10월 모금액 1만원

11월 모금액 6만원

12월 6일 송금액 100달러+수수료=97,977원

잔액 - 423,018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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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평화에 대하여

정말 오랫만에 '국경없는 친구들'에 대한 글을 올리는군요. 제가 올해 정말 너무 바쁜(바쁜 것은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는 일입니다) 탓에 만원계 사이트를 거의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아래 번역한 글은 핌이 보내온 '국경없는 친구들'의 소식지 서문입니다. 버마 민주화 항쟁과 유혈진압이 있은 직후에 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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핌, '국경없는 친구들'

 

 

안녕하세요. 

이번 ‘국경없는 친구들’의 주제는 ‘정의로운 평화’입니다. 이 문제는 언뜻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정의’를 정의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이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양심에 근거할 때, ‘정의로운 사회’는 ‘수탈자’도 ‘상실자’도 없는 것이고,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또는 이런 것들이 존재한다면 가해자가 이익을 취하지 못하도록 중단시키는 과정이요, 생존자를 ‘상실’로부터 보호하는 과정이요, 불평등한 상황을 평등으로 바꾸는 과정이 정의일 겁니다.


버마 랑군과 그 외 도시에서 거리로 나와 자신들의 필요로 하는 것을 요구했던 수천의 민중과 승려들로부터 온 뉴스를 듣고 저는 처음에는 정의에 대해 의심했습니다. 몽둥이 세례가 있기전부터 총이 발사되기 전부터 피의 냄새가 진동했지만, 우리 중 누구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극도의 혼란에서 비롯된 침묵의 소리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용감한 운동을 무의미한 것으로 분명 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우리는 그것이 오래 갈 것을 은밀하게 기대했고 또한 두려워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그렇게 오랜 억압을 애써 참아왔던 버마 인민이 군부가 씌운 공포의 새장에서 나올 것이란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피를 흘릴 것이라는 것도.


우리 모두는 고통을 느꼈지만, 아무도 비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잔인한 일은 국경지대의 소수민족 친구들이 매일매일 겪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더 이상 울수가 없습니다. 보다 중요한것은 이런 우울한 순간에 우리 가슴속에 희망이 있다는 겁니다. 경제 정의를 향한 절규는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정의에 대한 요구로 분명히 들렸습니다. 나는 용감한 시위자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바는 절망하지 말고 희망을 붙드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제 마음이 정의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는데 사로잡혀있을 때, 언론이 물어온 첫마디가 절 깨웠습니다. “그러니까 더많은 난민들이 생기겠지요. 그것이 타이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무엇이고 타이가 그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나요?” 그건 별로 이상한 질문이 아니었지만 제가 충격 받은 것은 그것이 첫 질문이었다는 점입니다. 아직 피가 식지 않았고 눈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나온 첫 질문이었습니다. 피흘리는 버마의 9월의 뉴스는 영화나 비디오 게임의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총탄의 천둥소리는 진짜였습니다. 총알이 정말로 사람의 몸을 관통했습니다. 비명과 고통은 훨씬 더 진짜였습니다.


그래서 ‘정의’를 정의하려는 저의 첫시도가 성공하기도 전에 제 머릿속엔 또다른 답이 떠올랐습니다. 정의와 평화의 부정은, 버마에서건 타이에서건, 궁극적으로 또다른 곳에 불의와 폭력을 창조할 것이라는 겁니다. 불의를 피해 도망친 사람들을 다루는 것은(난민문제 대응)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불의를 피해 도망왔지만, 그들이 이곳에서 정의를 구하리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고통받는 친척을 대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들의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며 공정하게 다루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일까요?


인간은 국경선에 중요한 의미를 두지만, 불의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불의가 발생할 때마다 그것은 화재처럼 폭력을 퍼뜨립니다. 국경에 상관없이. 오직 정의와 평화만이 그 불을 끌 수 있을 겁니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신념으로


Pim Koets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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핌에게서 온 소식

핌에게서 메일이 왔습니다.

 

상황을 충분히 이해한다면서, 그간 자신과 '국경없는 친구들'이 하는 일을 많이 공유하지 못한건 실수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활동상황을 담은 이야기 파일을 여러개 보내왔습니다. 일단 번역을 해야 공유할 수 있기에 이건 되는데로 빨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핌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타이 내에서도 버마 상황에 촉각을 세우고 있지만, 타이가 현재 군부통치하에 있고, 핌이 있는 지역에서는 국가안보를 이유로 카렌어 라디오 방송이 금지되고 있다고 합니다. 국경지대로 랑군에서 도망친 사람들(승려들을 포함하여)이 오고 있고 심하게 부상당한 사람도 있지만 타이 당국이 체류를 허용하고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든 어떤 일이 벌어지든 상황을 자주 공유하는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11월은 만원계를 만든지 3년이 되는 달입니다. 그간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는데, 앞으로 만원계를 지속하든 그렇지 않든 버마-타이 국경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우리의 관심 속에 같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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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후원금 송금 못함

아시다시피 매달 1일 후원금을 송금해왔습니다.

 

그런데 지난달에는 단 한분만 후원금을 내셨기 때문에 제가 고민에 빠졌습니다. 월 150달러(이 돈은 국경없는 친구들의 한명 활동가의 월 활동비에 해당합니다)를 후원해왔는데, 계속된 적자(현재 약 40만원)를 제가 그럭저럭 메꿔왔습니다. 하지만 저혼자 보내는 것이라면 굳이 만원계를 통해서 하지 않아도 되는 것 같고, 만원계와 '국경없는 친구들'과의 관계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 이번달은 후원금을 송금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핌에게 솔직하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웹호스팅 비용 때문에 만원계 사이트를 옮겼고, 사이트에 업데이트되는 내용이 너무 없다, 사람들은 국경없는 친구들의 활동에 대해 알고 싶어할텐데 지금은 사이트가 너무 조용하다. 이번달에는 후원금을 전혀 모으지 못해서 미안하다'라고요. 그리고 의견이나 제안이 있으면 달라고 했습니다.  

 

핌에게서 답변이 오면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만원계 활동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고려해보지요. 그간 만원계를 거쳐가셨던 분들의 의견도 구합니다.

 

바람이 차가워졌는데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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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쓴글-버마, 어린영혼들의 외침

인권오름에 실은 글입니다. 우리 만원계 게시판에 소개됐던 글을 토대로 썼습니다.  

 

 

버마, 어린 영혼들의 외침


어지러운 대권경쟁의 불꽃놀이 속에서 사회양극화와 비정규직의 신음소리가 불쏘시개로 동원되고 인용되는 틈새로 희미한 촛불 하나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버마’, 공식적으로는 ‘미얀마’로 불리는 나라에서 오랜 폭력과 억압에 대한 저항이 터져나왔고 앞날에 대한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고 있다.


버마는 1948년부터 내전 상태이고, 1962년부터 죽 군사통치하에 있다. 1988년 대규모 항쟁이 있었으나 군부는 수천명의 시위자를 학살하고 진압했다. 이후 체제를 정비하면서 1989년 군사정부는 국가의 공식이름을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꿨다. 유혈 진압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에 대응하여 1990년 민주화세력과의 타협책으로 총선을 치뤘다. 군부는 대참패했고,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가 압승했으나 군부는 정권을 이양하지 않았다. 그리고 폭압은 계속됐다. 군부는 비사법적 처형, 약식처형, 고문, 강간, 강제이주, 강제노동, 토지와 재산의 몰수, 아동군인의 이용 등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인권침해를 저질렀다. 즉 함부로 죽이고 뺐고 노예처럼 부리고 아이들까지 총알받이와 지뢰탐지기로 활용했다는 말이다. 최근의 시위는 그렇게 오래 강요된 고통과 침묵을 뚫고 터져 나온 것이다.


여기까지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건조한 사실 묘사에 담긴 정황을 살아있는 인간이 겪는 구체적 현실로 그려보는 일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이런 상황 속에서 아이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나를 보여준다. 이 글들은 강제로 고향을 등지고 살아가는 난민아동이 쓴 것이다. 타이-버마 국경지대에서 활동하는 타이의 인권단체 ‘국경없는 친구들’(Friends Without Borders)이 소개한 것으로, 국경지대의 카렌족 난민 마을 러퍼허 아이들이 그 주인공이다(버마에는 130여개에 이르는 소수민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마족이 다수족이고 카렌, 카레니, 샨, 몽족 등이 많이 알려져 있다.)


전쟁과 자원 부족으로 난민 아동 중 열에 한 명 정도밖에 교육을 접할 기회가 없다고 한다. 움막에 불과한 초라한 학교지만 아이들은 이런 것을 배운다 한다.


“아침에 선생님이 사회수학(social math) 수업을 시작하셨다.

“모래 한 더미에 또 모래 한 더미를 더하면 얼마가 되지?” “둘이요”

“맞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요. 만약에 두 더미의 모래가 하나로 섞이면 어떻게 되죠? 마치 우리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인권은 사람과 사람의 연대를 토대로 할 때만 추구될 가치가 있고 성취할 수 있는 가치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 한 모퉁이에서 밝혀지는 작은 촛불 하나를 돌아보고, 민주화된 한국에 와서 난민 인정도 받지 못한 채 노동과 민주화투쟁을 병행하는 버마인들을 지지하고, 돈벌이를 위해 군부에 무기를 팔고 ‘건설적 개입’이라는 명분하에 자원착취에 나선 한국 및 아시아 주변 국가들에 대한 압력을 넣는 것이야말로 인권을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하진 않더라도 필수적인 방도일 것이다. 


 

********

쏘 투 루(Saw Tu Lu, 14살, 3학년)


나는 커리루키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농부셨다. 내겐 누나 한명과 형 세명이 있다. 난 막내다.


내가 어렸을 때, 버마 군부가 강제로 마을사람들을 짐꾼으로 데려갔다. 내 아버지는 너무 나이가 많으셔서 무거운 것을 감당할 수 없었고, 그래서 매를 맞으셨다. 아버지와 다른 마을 사람들은 도망치고 싶었지만, 고향과 땅을 떠날 수 없으셨다. 그때 우리는 견뎌야만 했다. 하지만 결국 버마 군인들은 우리에게 고향을 떠나도록 떠밀었다.


우리는 쏘코 마을로 도망쳤다. 그 마을에는 학교와 병원이 있었다. 나는 거기서 학교에 다녔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아버지는 병이 드셨고 결국 우리를 남겨둔 채 돌아가셨다. 가끔씩 버마 군인들과 무장세력이 와서 우리 마을을 또다시 부쉈다. 우리는 강을 건너서 타이로 도망쳤다. 거기에는 타이 군인들이 있었고, 그 군인들은 우리를 난민 캠프로 데려갈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무서워서 그들의 자동차를 타지 않으려 했다. 어머니는 난민 캠프에서 사는 것을 무서워하셨다. 많은 마을 사람들도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강을 다시 되돌아 건너가기로 했고, 해방구에 있는 러퍼허 마을에 모였다.


러퍼허 마을에서는 학교와 병원을 다시 갖게 돼서 행복했다. 하지만 평화로운 시간은 너무 짧았다. 군인들이 쫓아왔고 우릴 공격했다. 또 한번 나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타이로 도망쳤다. 군인들이 가버리고 나서 우리는 돌아갔다. 하지만 거기서 나는 우리 집과 학교를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들이 모두 불태워버렸다.


우리는 남쪽으로 좀더 내려갔다. 나는 마을 사람들이 집과 학교와 병원을 다시 세울 때까지 나무 아래서 공부해야 했다. 우리는 그곳을 ‘새 러퍼허’라고 불렀다. 형들과 누나는 결혼해서 나갔다. 그래서 집에는 어머니와 나만 남았다. 어머니는 아주 나이가 많으셔서 나는 어머니가 음식 구하는 일을 도와야 했다.


어느날 나는 친구들과 함께 새와 쥐를 잡으러 갔다. 어둑해질 때,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내 친구들이 앞장섰고 나는 뒤따랐는데 나는 지뢰를 밟았다. 친구들이 마을로 달려가 도움을 청했다. 마을 사람들은 타이에 있는 병원으로 나를 보냈다. 내가 회복되자 학교에 다시 보냈다. 하지만 내 다리는 더 이상 똑같지 않았다.


모든 선생님들이 나를 도와주신다. 난 더 이상 부끄럽거나 나 자신을 초라하게 느끼지 않는다. 매일 밤, 숙제를 하고 나서 잠자기 전에, 나는 기도한다. 우리를 모든 해악에서 보호해달라고, 공포로부터 자유롭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나처럼 피난 다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 무 재(Naw Mu Jae, 11살, 1학년)


나는 여기서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 고향은 평화롭지 않았다. 우리 마을은 불태워졌고 우리는 쫓겨났다. 그래서 여기 와있다. 내가 여기 왔을 때, 사람들이 쌀과 소금과 어묵과 옷을 가져다줬다. 나는 너무 좋았다.


여기 있으면서 나는 아주 행복하지만, 가끔은 아주 비참하기도 하다. 우리 학교와 마을은 연거푸 불태워 무너졌다. 나는 너무 무서웠고 정글에 숨었다. 나무 아래 땅바닥에서 모기와 벌레들에게 물리면서 자야했다. 공포와 걱정이 내 인생의 친구가 됐다.


이제 나는 학생이다. 아침에, 나는 학교친구들과 놀러간다. 학교가 문 닫으면 전혀 재밌는 일이 없을 거다. 집에만 있어야 하고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 나는 학교에 가고 싶다. 선생님은 친절하시고 나를 사랑해주신다. 나도 언젠가는 선생님이 돼서 우리 선생님이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을 돕고 싶다.


쏘 무(Saw Mu, 13살, 3학년)


우리 학교는 버마 쪽 강둑에 있다. 나는 학생이다. 매일 나는 빨간색으로 된 카렌족 전통 셔츠를 입고 학교에 걸어간다.


때때로, 나는 학교 근처에 서서 타이 쪽을 바라본다. 타이 쪽에 있는 학교는 근사하게 서있다. 아름답다. 거기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있다. 때때로 나도 그 학교에 가고 싶다.


우리 학교건물은 대나무로 만들어졌고, 지붕은 마른 잎으로 돼있다. 땅바닥 말고는 우리가 공부하는데 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때때로 버마 군인들을 피해 숨어야 하고, 그럴 때는 학교 대신에 나무 밑에서 공부한다.


나는 이따금 이런 일 때문에 부모님에게 불평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작고 볼품 없는 학교지만, 좋은 선생님이 계시고 좋은 교육을 받고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 학교를 졸업하겠다고. 언젠가 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의사가 되고 싶다.


쏘 수 래 (Saw Su Le, 11살, 1학년)

빨간색 카렌족 셔츠를 입고, 미래를 향해 걸어간다. 선생님이 안 계시면 학생들은 배울 수 없다. 선생님이 안 계시면 우리는 읽는 것을 배울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학교 때문에 셈을 할 수 있고, 많은 것을 읽고 쓸 수 있다. 선생님은 우리를 밤낮으로 도와주신다. 전혀 불평하거나 소리를 치지 않으시고, 너무나 친절하게 너무나 인내심을 갖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신다. 우리 카렌족 아이들은 부끄럽지 않다. 우리가 노력하면 언젠가는 우리도 우리 친구들을 선생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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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자료실 문제

분명 게시판을 이전했을때는 사진자료실의 자료들이 열렸었는데, 원래 게시판(10usd.net)이 영구 삭제되고 난후 진보넷 블로그의 사진들도 사라져버렸습니다.

 

제가 파일로 갖고 있는 사진을 얼마 안돼서 조만간 그것만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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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후원금 송금내역

게시판을 이전한 후에 여러분들이 제대로 찾아오실지 걱정이 되는군요. 이전 공고를 할 시간이 충분치 못해서요. 아시다시피 버마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고, 한국에서도 촛불시위등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젯밤 촛불집회에 가봤더니 30여명 남짓한 분들이 모여 있더군요. 오늘 버마 대사관 앞 집회에는 더 많은 목소리가 있기를 바라며...

 

핌에게 한국에서도 버마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다며, 국경없는 친구들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물었습니다. 아직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답장이 오는대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달에는 무기명으로 일시후원을 해주신 분이 계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시다시피 만원계는 월 만원으로 아시아의 인권운동과 연대하는 모임입니다. 그동안 잊고 계셨던 만원계 회원분들이 다시한번 관심을 모아주시길 바랍니다. 이번달 후원금 송금내역은 아래와 같습니다.

 

 

8월 잔액  -382,101원


9월 3일 이윤* 1만

9월 21일 이민* 1만

9월 25일 무기명 일시후원 10만

9월 30일 류은* 1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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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모금액 13만원

10월 2일 송금액 150달러+수수료=142,940원

잔액 -395,041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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