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neoak29님의 영화평

요즘 주변에서 EBS 지식채널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한다. 가끔 채널을 돌리면서 화면 한 켠에 새겨진 지식채널 로고를 보기는 했으나, 하루 종일 지친 정신을 달래기에는 야구나 스타크래프트 혹은 무한도전이 더 좋았기에 EBS는 늘 ‘스킵채널’이었다. 그런데 내가 뭔가를 배울것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많은 경우가 지식채널에 대해 얘기를 했다. 신기함 반, 공부할 맘 반에 31일(금) 퇴근 후 과감히 EBS를 선택했다. 그때는 EDIF 기간 중이었기 때문에 브라운관에서는 다큐멘터리 한 편이 나왔다.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낯익은 새만금의 풍경. 이강길 감독의 <어부로 살고 싶다>였다. 인디포럼에서 상영된 이 다큐멘터리가 ‘아주 괜찮다’는 말을 들어왔을 터였다. 그래서 작심을 하고 끝까지 보기로 했다.

사실 지금은 새만금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이 식었다.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 핫 이슈로 다뤄졌기 때문에 새만금을 모를 리 없다. 오히려 나의 고향이 댐에 잠긴다는 상황과 맞물려 새만금은 늘 볼 때마다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갯벌을 메운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에서 시작해 시대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도 그 변하지 않는 의지에 좌절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새만금 문제는 지겹기까지 했다. 그동안 반복된 정부와 환경운동가, 정부와 주민들의 갈등이 풀리지 않으면서 내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내가 새만금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것도 무관심해 지는데 한 몫 했다.

그런데 새만금 문제를 자본과 환경 등의 구조의 문제로 환원시키면서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사람이다. 영화를 먼저 보면서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촬영 당시 그곳에서 형성됐던 대치구도였다. 반대자와 찬성자, 그리고 경계를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런 구도를 워낙 많이 봐왔기 때문에 그것을 파악하는 데는 채 2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브라운관을 통해 죽어가고 있는 새만금에 눈을 맡기고 있을 무렵,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반대자가 아닌 00씨, 반대자가 아닌 XX씨. 그들은 그곳에서 숨을 쉬고, 화를 내고, 움직이고 있었다.

새만금 사람들은 배를 타고, 물막이 공사가 한창인 바다로 나아갔다. 그들이 고기를 잡던 곳, 잡은 고기에 초장을 찍어 먹으며 소주를 한 잔 걸쳤던 곳. 이제 그곳은 차가운 시멘트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들은 공사현장에 뛰어들어 자신보다 수천 배가 큰 트럭 앞에 몸을 맡겼다. 나를 죽이지 않으면 길을 막을 수 없다는 의지표현이었다. 하지만 그 의지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의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니다. 잘 훈련된 전경들이, 누운 사람보다 수십 배 많은 전경들이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호송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지나간 자리. 그곳에는 다시 돌과 시멘트가 부어졌다. 그렇게 물길이 막혔다.

물길이 막히던 날.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전국의 99.9%의 국민들이 새만금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그들은 0.01%의 희망을 보고, 갯벌을 위로했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꼭 지켜줄게.’ 그런데 그 희박한 가능성마저 사라진 순간, 그들은 갯벌을 위로할 말을 잃었다. 딸을 붙잡고 “어부는 국민도 아녀, 나라가 어부의 터전을 빼앗아 갔어, 그러니께 너는 어부가 돼서는 안 돼, 공부 열심히 해서, 힘 센 사람이 되야혀”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참을 수 없었던 시간이 군화를 신고 36시간째를 맞이한 순간이다. 참을 수 없는 그 찝집함이란 아픈 것도 아니고, 힘든 것도 아니다. 그저 그런 감각이 나의 몸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 참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때는 군화를 벗어봐야 소용이 없다. 군화를 벗고 발을 주무르고, 뛰어다녀 봐고 그 감각을 사라지지 않는다. 새만금 사람들의 슬픔을 얘기하면서, 이런 개인적인 비유를 하는 것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겠지만, 문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로 인해 다가오는 짜증과 슬픔은 그저 방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 청년이 대책위 사람들이 모여 있는 마을회관으로 간다. 그는 그곳에서 분노를 터트린다. “오늘 물길이 막혔다. 그동안 대책위는 무엇을 했는가.” 사실 청년과 대책위 지도부의 생각이 애초부터 달랐다. ‘생존권 사수’라는 같은 명제를 가슴에 품고 있었지만 그 해결방법이 달랐다. 청년은 어떻게든 물길을 못 막게 하면서 갯벌을 살리는 것이 생존권을 지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책위 지도층은 어떻게든 좋은 조건에서 정부 혹은 지자체와 협상을 잘 해서 좀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것이 생존권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시위를 하면서도 기자들을 부르고, ‘보여주는’ 시위를 벌인다.

이 지점에서 <어부로 살고 싶다>는 새만금 주민들의 ‘생존싸움’에서 ‘인간의 욕망과 갈등’의 측면으로 그 외연을 확장한다. 선과 악이 분명한 상황에서 싸움을 벌이는 것은 오히려 쉽다. 하지만 그 속에서 다양하게 분화되면서, 선과 악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싸움의 동력은 쇠퇴한다. 동료들에게 느끼는 배신감은 막혀버린 새만금과 더불어 주민들이 겪어야 하는, 그리고 관객들이 더한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것이 이 작품이 단순한 뉴스릴을 넘어 영화로 재탄생되는 지점이다.

영화가 결말을 맺을 때 즈음, 정말 영화 같은 사건이 벌어진다. 투쟁을 벌이던 한 주민이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녀는 평소처럼 일을 하러 갔다가, 뚝방의 수로가 열려 바뀌어버린 바닷물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해 자신의 ‘공간’에서 죽은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가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니라 죽음을 당한 것이다. 평생을 물질을 하고 살았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 없다는 것이다. 먼저 수로 개방시간을 귀뜸이라도 해줬으면 한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는 주민들. 먼 바다를 보고 눈물짓는 주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떠올려본다. ‘인상적’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기엔 너무나도 추한 장면. 물막이 공사가 끝나던 날, 현대건설 직원들과 정부․지자체 관계자들은 막혀버린 뚝방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삼창을 부른다. 수천 개의 흰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리는 그 장면을 어찌 장관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구역질이 났다. 그 거대한 자본의 힘. 그들이 환경에 대해 몰지각하고, 주민들에게 무관심(혹은 혐오)한 것을 탓하지 않겠다. 하지만 어떻게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그렇게 아파하는데 웃을수 있을까. 통장에 차곡차곡 쌓일 돈이 그들의 아드레날린을 분비케 한 것인가.

영화를 보고, 자막이 올라가는 순간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니 눈물이란 표현은 적절치 않은 표현이다.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어깨가 들썩이며 흐느꼈다. 작은 방에 홀로 앉아 브라운관을 바라보며 눈물이 범벅된 얼굴이 절대 아름답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자본의 노예가 되지는 말자. 그래서 남들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지지 말자. 언제 기회가 될 때, 이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 <어부로 살고 싶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