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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7 인상적인 시, 학원가기 싫은 날
    조씨

2015/05/31

~‘문화와 문명’의 전통
징후, 신호, 통제자의 관측 수단으로서의 대중문화에서 문화 그 자체로 초점의 변화.
원인_ 산업화, 도시화
1. 계급에 의한 주거분리
2. 새로운 노동관계
3. 위 2가지 변화를 기반으로 문화적 변화가 생성

대중문화는 산업중심지에 피지배층만이 갖는 분리된 문화로 시작되었다.
원인
1. 새로운 문화기업들이 영리를 위해 제공하는 문화,
2. 정치선동을 위해 정치선동 때문에 일어난 문화,
영향
1. 기존의 전통적 개념을 약화시켰고, 다른 모든 형태의 정치적 문화적 권위에 직접적인 도전을 가했다. 다른 측면으로 이는 오직 사회권위의 약화, 사회질서 불안정만을 의미할 수 있었다
2. 이는 차티스트운동의 모태가 되었으며, 벤야민 디즈레일 리가 말한 두 국가의 시작을 나타내는 징표였다.

매튜 아놀드- 계몽 계도로서 문화.
아놀드의 문화에 대한 정의.
1. 인간 사고와 표현의 정수, 최선,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능력)
2. 문화가 도덕적, 사회적 이득을 준다는 성격, 최선을 알기 위한 노력인 동시에, 모든 인류를 위해 그런 지식이 널리 알려지도록 하는 노력(최선 그 자체)
3. 인간 사고와 표현의 정수를 알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지식체계(최선의 것에 대한 정신적 영혼적 적용.)
4. 최선을 추구하는 것.

매튜 아놀드의 계몽, 계도로서의 문화의 역활
아놀드의 글에서 ‘무정부상태’와 대중문화는 동의어로 쓰인다. 아놀드는 대중문화를 무질서(무정부)적인 것으로 보았다. 사실 대중문화는 없고 무질하고 천박한 서민, 못 배운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무질서한 상태, 즉 ‘파괴적, 분열적 존재(거칠고 가공되지 않은 대중, 프랑스 대혁명 시기의 대중들)를 계도, 계몽시키는 것이 문화의 역할이라고 본다.
이 아놀드의 주장은 계급적인 성격이 강하다. 아놀드는 사회를 귀족층(바바리아인), 필리스틴(중산층), 과서민(노동계급)으로 구분하고, 귀족층과 중산층이 노동계급에 비해 더 진화된 인간으로 보았다. 이러한 계급적 인식은 결국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귀결된다. 우선 귀족층과 중산층은 ‘이런 상황에서 조심스럽게 이끌어야 하고’, 두 번째로는 서민의 인간성을 가진 노동계급에게는 무질서한 경향과는 반대되는, 그리고 꼭 필요한 권위의 원칙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아놀드는 왜 이렇게 생각했을까?
이는 19세기의 역사적 변화와 관련이 있다. 문화를 현재의 어려움으로부터 구원할 것으로 보았을 때 이 어려움은 양면적 맥락을 지닌다. 첫 번째로는 도시 남성 노동계급의 투표권을 둘러싼 문제이고, 두 번째로는 17세기부터 일어난 역사적 과정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놀드는 이 투표권이 교육받지 못한 이들이게 권력을 부여했으며, 이를 통해 권력을 흭득한 노동계급을 매우 위험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들에게 복종과 종속의 감각을 되살려주어야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교육이며 문화이다. 문화로서 대중문화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무질서한 노동계급, 무정부에 반하여 문화는 국가를 제시한다. 아놀드는 이 노동계급에게 문화를 교육할 권위를 국가에게서 찾는다. 이 주장의 배경은 첫 번째로 권위의 중심이었던 귀족층의 쇠퇴이며, 두 번째로는 민주주의의 출현이다. 아놀드의 국가는 중산층이 이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만큼 문화할 때 까지 노동계급을 통제, 조절하는 것이다.
아놀드의 계급주의적인 교육관
아놀드는 각각의 다른 계급의 아이들이 같은 길을 걷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귀족층에게 있어서 교육은 그들의 쇠퇴를 받아들이게 하며, 노동계급에 있어서는 종속과 복종 착취에 익숙하도록 만든다. 아놀드는 교육을 그저 문명, 문화를 향한 교두보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놀드의 관점의 모순은 문화인이 인간 사고와 표현의 정수를 알고 있지만, 그 외 대다수가 허약하고 불건전해왔다면 대체 이들은 누구를 위해 이러한 보물을 지켜오는 것인가? 이는 아마 문화적 엘리트층을 위해서이다. 여기서 아놀드는 자신이 만든 엘리트주의라는 덫에 걸린다. 그는 현실 정치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가 거부하는 것 항의의 정치, 반대의 정치뿐이고, 이는 지배질서의 매우 고루한 방어이다. 그럼에도 아놀드적 관점은 50년대 말까지 이 분야의 대중문화와 문화정치에 대한 인식을 말 그대로 지도해왔다.


리비스주의
아놀드는 리비스에게 상당부분 영향을 끼쳤다. 결국은 리비스는 아놀드의 문화정치학을 도입하여 30년대 문화적 위기에 적용했다. 그에게 있어서 20세기는 점차 뚜렷해지는 문화적 쇠퇴의 시기이다. 이는 ‘평준화와 하향화’의 문화였고 시민이 이것들을 배척해야 된다고 말한다. 리비스의 전제조건은 문화는 항상 소수의 유지자들에 의해 지켜졌다는 것이다.
변화한 것은 소수의 위상이다. 대량 문명과 대량문화는 전복적인 모습을 뛰면서 소수의 권위를 위협한다. 이들은 대량문화가 우리를 돌이킬 수 없는 혼란으로 이끌 것이라 말한다. 결국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학교 안에서는 대량문화에 대항하는 것을 학교에서 훈련시키고, 밖으로는 활동적인 소수가 저항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리비스의 대중문화와 수수의 문화의 정의
일반문화가 산업혁명을 거쳐 소수의 문화와 대량문명으로 구분됨
1. 소수문화는 문학적 전통성으로만 축소된 ‘사고와 표현의 정수’의 가치로 형성. 교육받은 소수의 문화.
2. 대량문화는 ‘교육받지 않은’ 다수에 의해 소비되는 대량문화, 상업문화로 구성.
대량문화의 효과.
1. 보상과 오락의 중독적인 형태를 제공. _연예 소설
2, 환상을 꿈꾸게 하여 현실으로부터 도피하게 만듬_연예 소설
3. 영화_ 최면술적 수용상태에서 허접한 감정적 호소에 빠지게함,
4. 대중용 신문 “대중들의 마음에 가장 강력하게 침투하는 비교육적 매체.
5. 라디오_ 비판적 생각 자체를 말살시킨다.
6. 광고 언어를 저질화 시키는 동시에 전체 언어공동체의 감정적 생활을 저질화시킨다. 생활의 기준을 낮춘다.

황금시기
황금시기는 전원속에 신화적인 과거, 상업적 이해관계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문화가 공유되었던 시기이다. 이는 19세기의 문화적 몰락 이전의 시기이다. 황금시기는 문화적 통합으로 특징지워졌지만 결국 이는 위계질서적 원리에 기반을 둔다. 이 문화는 한 편으로는 지적 자극을 주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감정적 즐거움을 주는 일반문화였다. 이들에 의하면 이러한 문화는 이미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리비스는 잃은 것으로서 유기적 공동체와 이를 구현하는 문화를 이야기다. 이것은 자연적 환경과 한 해의 리듬에 맞추어 기억할 수 없을 때부터의 경험에서 자라난 삶의 예술이며,........ 사회적 예술을 포함하는 질서 있고 정돈된 삶의 방식이다. 전원적 리듬의 세계는 교외거주의 단조로움과 평범함으로 대체되었다.
그럼에도 리비스는 빈궁함과 옹졸한 폭정, 질병과 사망률, 무지와 좌절된 지식 등도 황금시대의 요소임을 언급하는 것을 잊었다. 리비스가 제시한 것은 역사적인 설명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상실했다고 여기는 것들의 본질을 깨우쳐주는 문화적 신화로서 그 가치와 기준들들 접하는 것은 아직 가능하다. 문학은 인간 경험의 높은 가치를 햠유한 보물같은 것이나, 문화라는 왕관에 박힌 보석으로서의 문학은 이미 권위를 잃고 말았다. 리비스는 이에 대항하여 문화적 선교단, 소수 지성인들로 하여금 교육을 통해 대량문화에 대해 투쟁을 해야한다고 말하고, 이를 통해 문학의 권위가 확립된다 하더라도 유기적 공동체로 복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대량문화의 영향이 확장되는 것을 조절하여 인간 사고와 표현의 정수를 계속 유포시키는 아놀드적 전통을 이어나갈 교육받은 대중을 유지하고 만들어나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산업화, 자본화로 인한 노동의 변화.
노동의 질도 유기적 공동체의 상실에 따라 저하되었고, 이러한 상실의 신호로 여가의 필요성이 나타났다고 보았다. 황금시대에는 노동자가 그들의 노동에서 살았지만, 현재는 노동을 벗어난 삶을 누리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다. 산업화의 여파로 노동의 질이 너무나 떨어져 노동자들은 사실상 노동 때문에 무능하게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여가는 재창조(recreation)  가 아니라 비창조(decreation)(노동을 통해 느끼는 박탈감을 뒤겄는 것)만 가져다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보상과 수동적 위안을 위해 대량문화에 관심을 돌리게 되고 이는 마약과 같은 대리 인생에 탐닉하는 상습복용자들이 될 뿐이다.


미국의 대량문화 : 전후(戰後)의 논쟁
2차 세계대전이후 15년간 대량문화에 대한 논쟁.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은 자유주의, 다원주의, 무계급주의에 토대를 두고 일시적으로 문화적, 정치적 합의에 성공했고, 이는 미국 지신들의 권위에 상당부분 의존하였다. 이를 통해 지식인들은 문화적 도덕적 정치적 리더쉽의 민족적 대리인으로 인정받을 기회를 얻었고, 이의 기반은 대량문화에 대한 지식인들의 강렬하고 공개적인 논쟁이 있었다.

타자들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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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와 문화이론

1. 대중문화란.

1.1 문화

1.2 이데올로기

1.3 대중문화

 

때중문화는 분명한 용어가 아니라 사실상 ‘비어있는’ 개념적 범주이다.

1 문화

그렇다면 ‘대중 문화’에서 문화는 무엇인가.

윌리엄스의 정의

대중문화를 말할 때 보통 2번과 3번째 정의를 사용한다.

1. ‘지적, 정신적 심미적 계발의 일반적 과정’

2. 한 인간이나 시대 또는 집단의 특정 생활방식

이때 특정한 생활방식이란 해변가의 후가나 크리스마스 축제 또는 젊은이의 하위문화를 예를 들 수 있는데, 이를 보통 ‘살아있는’ 문화 또는 문화적 실천행위라고 부른다.

3. 지적인 작품이나 실천행위, 특히 예술적인 활동_ 이는 의미하거나 의미를 생산하는 혹은 의미의 근거가 되는 것을 주된 기능으로 하는 텍스트나 문화적 실천행위를 지칭한다. (이때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가 말하는 실천행위와 동일하다) 이를 보통 문화적 텍스트라고 부르는데 일일 연속극이나팝 뮤직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는 대중문화에 있어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문화와 같이 이데올로기에도 많은 의미들이 얽혀있다. 때문에 이데올로기의 개념이 복잡해지는 이유는 문화분석에서 대중문화와 혼용되어 사용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 개념에서 대중문화 연구와 관련있는 의미들.

1, 이데올로기는 특정 집단에 의해 부각되는 조직적인 사고체계이다. 예, 노동당의 이데올로기, 직업적 이데올로기 특정 당의 이데올로기

 

2. 이데올로기는 일정한 눈가림이나 왜곡, 은폐를 의미한다. 여기에 사용되는 이데올로기는 문화적 텍스트나 실천행위들이 어떻게 실제 이미지를 왜곡시키는지 보여준다. 이는 소위 거짓 의식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왜곡은 약자들의 이익과 상반되는 강자들의 이익을 위하여 봉사한다고 한다. 예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있다. 이러한 방식의 이데올로기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첫 번째로 권력을 잡고 있는 자들의 지배의 실체를 감추는 역할을 한다. 두 번째로는(더 중요하게는) 권력이 없는 자들에게도 피지배의 실체를 은폐해버름으로써, 이들 역시 자신들이 착취나 억압받는 자들로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개념은 사회의 경제적 토대에 존재하는 힘의 역학 관계에 대한 상부구조적 반영이나 표현이다. 그리고 이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적 가정이다. 이 가정에서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의 구성방식에 따라 결정된다. 이와 같은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문화적 산물들은 ‘이데올로기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사회의 경제구조에 의해 이득을 보는 지배계층의 이해를 잠재적, 표면적으로 뒷받침해주기 때문이다. (5장에서 마르크스와 엘겔스 자신들이 이러한 공식을 어떻게 수정하였고 많은 문화비평가들이 대중문화와 문화의 사회적 관계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기계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 것을 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어떻게 수정했는지 알아보겠다.)

 

3. 이데올로기는 여러 ‘이데올로기 형식을’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된다. 이 정의는 어떤 텍스트가 항상 세상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를 나타낸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인다. 이 인식은 사회가 합의적이라기 보다는 대립적이라는 것에 기반한다. 이 인식에서는 모든 텍스트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다.(브레히트) 각 텍스트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 대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부여한다. 대중문화는 ‘의미작용의 정치’ 즉 독자에게 특병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도록 한다.

 

4. 이 정의는 알튀세르에 의해 발전된 이데올로기 정의이다. 그의 논점은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관념들의 집합이 아니라 물질적인 실천행위로 보아야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우리가 일정한 의식이나 관습을 통해, 어떻게 부와 지위와 권력 등의 엄청나게 불평등한 요소들로 결정되는 사회잘서에 얽매이게 되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를 지속시키기 위한 결제적 상황과 경제적 관계에 필요한 사회적 상황과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5. 롤랑 바르트는 이데올로기가 주로 함축적인 수준에서, 즉 텍스트나 실천행위가 전하거나 전할 수 있는 이차적, 때로는 무의식적인 의미의 단계에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내포 의미의 범위를 정하기 위해, 어떤 함축적 의미를 수정하거나 새로운 함축적 의미를 만들기 위한 헤게모니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예: 영국 보수당 정치선전방송

 

대중문화.

대중문화와 관련된 문화이론의 역사는 ‘문화’, ‘대중적인’ 이라는 두 용어가 특정 역사정, 사회적 맥락내에서 어떤 이론적 작업을 통해 다양하게 연결되었는가에 관한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1

첫 번째 방법은 대중문화는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폭넓게 좋아하는 문화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의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말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거나 좋아하는 것은 너무 많기에 대중문화의 정의로는 실제로 전혀 쓸모없다. 그럼에도 명백한 것은 대중문화에대한 어떤 정의라도 양적으로 큰 범위를 포함해야한다는 것이고, 동시에 양적인 크기 그 자체만으로는 대중문화에 대한 정의를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도 명백하다.

 

2.

두 번째 방법은 고급문화를 제외한 수준미달의 작품들이 대중문화라고 정의내리는 것이다. 고급문화는 대중을 배제시키며 일부 특정 소수의 배타성을 확고히 해준다. 피에르부르디외는 문화적 구분이 계급구분을 유지시키기 위해 이런 방법으로 이데올로기가 사용된다고 말한다. 이 구분에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둘 사이에 명확한 기준이 있다고 말하지만 이 기준, 믿음에는 문제가 많다. 사실 과거에 대중문화였다가 시간이 지나서 고급문화가 된 사례나(느와르, 세익스피어), 이 둘 사이의 경계를 자유로히 넘나드는 사례도 있다.(루치아노 파바로티) 결국 이 구분의 이면에는 엘리트주의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관점에서는 대중적, 대중문화는 우리 사회에서 열등감을 내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중요한 점은 그 차별성을 지속적으로 표시하는데 요구되는, 바로 그 제도외 제도적 과정, 그리고 그 차별성을 지탱하는 힘과 관계라는 것이다.

3.

세 번째 정의 방법은 ‘대량문화’로서 대중문화이다. 이 관점은 대중문화가 대량생산으로 찍혀져 나온 것이고 관중은 무분별한 대량 소비자집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량문화의 비판자는 현재상황을 그 문화적 형태가 달랐던 황금기와 비교하는데 사실 이는 쓸모없는 낭만적 향수병이라고 피스크가 지적하였다. 5장에서 볼 프랑크부르트 학파의 경우에는 역설적으로 ‘사라진 황금기’를 과거가 아닌 미래에서 찾고자 했다.

대량문화라는 이론적 테두리내에서 작업하는 어떤 비평가들은 대량문화는 질적으로 저하된 복제품이 아니라 분명히 식별할 수 있는 수입된 미국문화라고 말한다. 이는 영국문화가 미국의 대량생산적 문화에 영향으로 동질화 혹은 퇴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대하 이야기 할 수 있는 두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대중문화는 유럽보다 미국에서 현저하게, 오랫동안 사회적 제도적으로 중심이 되어왔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전세계적으로 미국문화의 영향은 의심할 여지는 없지만 그 성격은 모순된 점이 있다는 것이다. 50년대의 영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미국문화를 영국문화 생활의 암울한 현실에 대한 해방의 힘으로 느꼈다. 동시에 이 문화에 대한 두려움은 부상하는 대중문화에 대한 불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또한 정치적 좌파 우파가 있는데 후자에서는 노동계급의 전통적 생활방식이 대중문화의 유혹에 의해 위태롭게 된다는 인식이고 후자는 고급문화의 전통적 가치에 대한 위협이다.

대량문화를 보는 온건하고 순진한 견해도 있는데, 이는 대중문화의 텍스트와 실천행위들이 대중적 환상의 현태로 나타난다는 시작이다. 이 견해에서는 대중문화는 ‘어디로부터 또는 어디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상상적 자아도피‘이다,이는 집단적인 소망과 욕망의 가장된 형태이다. 구조주의는 대중문화를 지배이데올로기를 쉽게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의 제조기쯤으로 본다. 독자들은 이미 수동적인 자리에 갇혀 있으며 그의 역할이나 텍스트의 모순성에 대해 논란할 여지가 거의 없다. 이에대한 후기 구조주의의 비판은 이 논점에 대한 비판의 여지를 남긴 것이고 4장에서 이 문제를 다룰 것이다.

4.

네 번째 정의는 대중문화가 민중으로부터 발생되는 문화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대중문화는 민중의 진정에서 우러난 문화이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상징적 저항이 주로 나타나는 곳이다. 이러한 정의의 문제점은 이 문화가 만들어진 재료, 출처의 성격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이 정의를 고집한다해도, 그들 스스로 만든 재료들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문화를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남는다. 결국 이 재료는 상업적으로 제공된 것인데 이 접근은 이 결론을 비껴나간다.

5.

5번째 정의는 그람시의 정치적 분석, 그의 헤게모니 개념의 발전에서 나타난 것이다. 문화이론가들이 그람시의 정치 개념을 어떻게 맏아들였고 또 대중문화의 성격과 정치성을 설명하는데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 일반적인 윤곽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 접근방식을 채택한 이들은 대중문화를 피지배계층과 지배계층의 투쟁의 장으로 본다. 대중문화는 이 둘 사이의 교환이 일어나는 영역이며, 이 영역은 저항과 통합으로 표현된다. 이 과정은 그람시의 말에 의하면 타협적 평형속에서 움직인다. 이 과정은 통시적이면서 동시에 공시적이다.

신그람시적 관점의 주 개념은 명시화이다. 보수당의 정치방송은 이 과정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보수당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 정치행위를 비명시화하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적 행위를 명시화한다.

신그람시주의의 입장에서 제시된 다른 하나는 대중문화의 이론들은 사실 민중의 구성에 대한 이론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대중문화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갈등이 빚어지는 장소라면, 대중문화의 이론들은 ‘일상생활의 형태를 구성하는 힘의 관계를 조사함으로써, 그 관계가 제공하는 이해관계를 알 수 있기에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8장에서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기호학적으로 사용한 존 피스크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6

6 번째 정의는 최근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 의해서 소개된 것이고 이는 7장의 주제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논점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분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든 문화는 상업문화라고 단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니 그 이론에 관심이 없는 이들은 이러한 포스트모던의 인식이 과연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이냐라는 문제이다. 이는 7장에서 다룰 것이다.

7

이 모든 정의들이 공통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은 대중문화가 무엇이든 간에 이는 산업화와 도시화에 뒤따라 일어난 문화라는 것이다. 문화와 대중문화에 관한 정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의존한다. 대중문화에 대한 이 특정한 시대구분을 뒷받침하는 것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대중문화의 지형에서 문화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이전에는 일반 문화와 엘리트 문화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변화의 요인은 첫 째로 산업화는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를 오직 현금거래 관계로 변화시켰다. 두 번째로 도시화는 계층관 주거분리를 발생시켰고, 서 번째로 프랑스 대혁명의 공포가 정권으로 하여금 급진주의를 분쇄하기 위한 다양한 억압을 행하게 하였다. 이러한 요인들의 결합이 일반문화에서 가부장적 사고 외곽에서 하나의 문화적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는 지배계급의 영향 밖에서 대중문화를 만들기 위한 문화공간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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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7 인상적인 시, 학원가기 싫은 날

지금 이슈가 되는 잔혹동시가 있다. 이는 솔로강아지라는 책에서 처음 나왔다. 무수히 많은 잔인, 잔혹한 시들이 있고 꾸준히 출판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표현자체만의 문제는 아닌 듯 하다. 이 시가 유명해지고 많은 사람이 읽은 이유는 오직 초등학생이 쓴 시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사는 이 시 자체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오직 초등학생이 이런 잔혹한 말을 썼다 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고 네티즌도 그러하다. 적어도 고등학교 나이쯤 된 사람이 썼다면 섬뜩은 해도 그렇게 이슈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초등학생이 문제인 것이지 시 자체가 문제가 아닌 듯 이야기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시가 아닌 모 초등학생을 중심으로) 수 많은 이들이 도덕적인 어른들 흉내나 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음흉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심장이 안전하다는 것을 재확인한다. 그런 식으로 시를 보는 것은 아무런 재미도 없을뿐더러 비윤리적이다. 그들이 섬뜩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 시의 표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가 무언가를 건드려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짜증나는 것은 이 시가 담긴 솔로강아지가 전량 폐기처분되는 것이다. 독재정부나 하던 분서갱유를 친히 민주주의(?) 시민들께서 하고 계신다. 책을 불태우면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바뀌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재만 날릴 뿐이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학원가기 싫은 날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
이렇게

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고 구워 먹어
눈깔을 파먹어
이빨을 다 뽑아 버려
머리채를 쥐어뜯어
살코기로 만들어 떠먹어
눈물을 흘리면 핥아 먹어
심장은 맨 마지막에 먹어

가장 고통스럽게.

 시는 편지나 에세이와 달라서 그 시의 화자와 작가와의 관계는 유동적이다. 그 시의 화자가 작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창조된 인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를 읽고 초등학생이 자기 엄마를 죽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심히 곤란하다. 이러한 행위는 마치 소설적 인물의 가치관을 작가의 생각이라 주장하면서 싸잡아서 욕하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그 초등학생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썼든 그가 시라는 형식을 선택해 썼다면 이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이 건 시이지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나 회고록이 아니다.
그리고 동시라는 프레임 자체도 별로이다. 대체 동시는 어떤 의미인가? 아이들이 쓴 시? 아이들이 읽는 시? 아이들을 위한 시? 아이들이 읽고 쓸 정도로 쉬운 시? 글쎄 어떤 표현도 그닥 만족스럽지는 않다. 동시라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나는 것은 그 시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면 될 듯 하다. 동시의 세계에는 불협화음이나 문제, 갈등은 거의 없고 있어도 바로 해결될만한 사소한 것들 뿐이다. 피망을 먹냐 안먹냐 같은 문제 말이다. 그리고 동시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다분히 환상적이고 작의적이고 거짓말 투성이인 세상을 노래한다. 이렇게 동시가 하는 역할은 어른과 아이 사이에서 어른의 이익에 맞게 설정된 인식을 주입하고 훈육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렇기에 ‘학원가기 싫은 날’은 전자의 프레임과 후자의 프레임 사이에 걸쳐있다. 전자에서는 어린 초등학생이 썼기 때문에 동시이며, 후자는 초등학생이 접하는 부조리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동시가 아니다. 이 시가 파괴적인 이유는 이 두 가지 속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동시이면서 동시가 아닌 이 시는 양쪽을 자유롭게 오가며 동시적 세계를 파괴한다.
인터넷상에서 이 시를 평가하는 한 가지 단어는 ‘섬뜩’이다. 맞다 섬뜩한 시이다. 하지만 절대 표현이 섬뜩해서가 아니다.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이 시의 매력은 섬뜩한 시이기 때문이다, 이 시의 화자는 학원이 가기 싫은데 강압적으로 가야만 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입장은 화자 뿐만 아니라 한국에 살아가는 다수의 청소년들, 아이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한다. 관심도 없는 영단어 하나 더 외우려고 시간에 쫒겨 학원에 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정말 흔하다. 너무나 익숙해서 당연한 것이 된 것처럼. 보는 입장에서는 그러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무자비한 폭력일 뿐이다. 그렇기에 이 시는 보편성을 가진다. 동시에 이 시의 논조는 마치 학원에 가기 싫은 다수의 학생들에게 전하는 말 같다. 학원을 가기 싫다면 학원을 가게 만드는 당신을 죽이라고. 학원을 가게 만드는 원인으로 들어나는 것은 엄마지만 사실은 사회 시스템 자체이다. 그렇기에 이 시는 두 가지 복합적인 작용을 꾀한다. 첫 번째로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받는 이들에 대한 설득, 선동이다. 두 번째로는 경고이자 선전포고이다. 자신들을 학원으로 내몬 사회에 대한 으름장이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겠다는 선전포고이다. 네 심장은 안전하겠냐는 서슬퍼런 경고이다. 여기서 우리는 섬뜩함을 느끼는 우리는 그들을 학원으로 내몬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 책을 모아서 폐기처분하는 것은 그저 자신의 공포에 대한 치졸한 복수일 뿐이다.(사실 살만 루시디의 사형선고와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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