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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31

~‘문화와 문명’의 전통
징후, 신호, 통제자의 관측 수단으로서의 대중문화에서 문화 그 자체로 초점의 변화.
원인_ 산업화, 도시화
1. 계급에 의한 주거분리
2. 새로운 노동관계
3. 위 2가지 변화를 기반으로 문화적 변화가 생성

대중문화는 산업중심지에 피지배층만이 갖는 분리된 문화로 시작되었다.
원인
1. 새로운 문화기업들이 영리를 위해 제공하는 문화,
2. 정치선동을 위해 정치선동 때문에 일어난 문화,
영향
1. 기존의 전통적 개념을 약화시켰고, 다른 모든 형태의 정치적 문화적 권위에 직접적인 도전을 가했다. 다른 측면으로 이는 오직 사회권위의 약화, 사회질서 불안정만을 의미할 수 있었다
2. 이는 차티스트운동의 모태가 되었으며, 벤야민 디즈레일 리가 말한 두 국가의 시작을 나타내는 징표였다.

매튜 아놀드- 계몽 계도로서 문화.
아놀드의 문화에 대한 정의.
1. 인간 사고와 표현의 정수, 최선,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능력)
2. 문화가 도덕적, 사회적 이득을 준다는 성격, 최선을 알기 위한 노력인 동시에, 모든 인류를 위해 그런 지식이 널리 알려지도록 하는 노력(최선 그 자체)
3. 인간 사고와 표현의 정수를 알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지식체계(최선의 것에 대한 정신적 영혼적 적용.)
4. 최선을 추구하는 것.

매튜 아놀드의 계몽, 계도로서의 문화의 역활
아놀드의 글에서 ‘무정부상태’와 대중문화는 동의어로 쓰인다. 아놀드는 대중문화를 무질서(무정부)적인 것으로 보았다. 사실 대중문화는 없고 무질하고 천박한 서민, 못 배운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무질서한 상태, 즉 ‘파괴적, 분열적 존재(거칠고 가공되지 않은 대중, 프랑스 대혁명 시기의 대중들)를 계도, 계몽시키는 것이 문화의 역할이라고 본다.
이 아놀드의 주장은 계급적인 성격이 강하다. 아놀드는 사회를 귀족층(바바리아인), 필리스틴(중산층), 과서민(노동계급)으로 구분하고, 귀족층과 중산층이 노동계급에 비해 더 진화된 인간으로 보았다. 이러한 계급적 인식은 결국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귀결된다. 우선 귀족층과 중산층은 ‘이런 상황에서 조심스럽게 이끌어야 하고’, 두 번째로는 서민의 인간성을 가진 노동계급에게는 무질서한 경향과는 반대되는, 그리고 꼭 필요한 권위의 원칙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아놀드는 왜 이렇게 생각했을까?
이는 19세기의 역사적 변화와 관련이 있다. 문화를 현재의 어려움으로부터 구원할 것으로 보았을 때 이 어려움은 양면적 맥락을 지닌다. 첫 번째로는 도시 남성 노동계급의 투표권을 둘러싼 문제이고, 두 번째로는 17세기부터 일어난 역사적 과정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놀드는 이 투표권이 교육받지 못한 이들이게 권력을 부여했으며, 이를 통해 권력을 흭득한 노동계급을 매우 위험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들에게 복종과 종속의 감각을 되살려주어야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교육이며 문화이다. 문화로서 대중문화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무질서한 노동계급, 무정부에 반하여 문화는 국가를 제시한다. 아놀드는 이 노동계급에게 문화를 교육할 권위를 국가에게서 찾는다. 이 주장의 배경은 첫 번째로 권위의 중심이었던 귀족층의 쇠퇴이며, 두 번째로는 민주주의의 출현이다. 아놀드의 국가는 중산층이 이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만큼 문화할 때 까지 노동계급을 통제, 조절하는 것이다.
아놀드의 계급주의적인 교육관
아놀드는 각각의 다른 계급의 아이들이 같은 길을 걷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귀족층에게 있어서 교육은 그들의 쇠퇴를 받아들이게 하며, 노동계급에 있어서는 종속과 복종 착취에 익숙하도록 만든다. 아놀드는 교육을 그저 문명, 문화를 향한 교두보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놀드의 관점의 모순은 문화인이 인간 사고와 표현의 정수를 알고 있지만, 그 외 대다수가 허약하고 불건전해왔다면 대체 이들은 누구를 위해 이러한 보물을 지켜오는 것인가? 이는 아마 문화적 엘리트층을 위해서이다. 여기서 아놀드는 자신이 만든 엘리트주의라는 덫에 걸린다. 그는 현실 정치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가 거부하는 것 항의의 정치, 반대의 정치뿐이고, 이는 지배질서의 매우 고루한 방어이다. 그럼에도 아놀드적 관점은 50년대 말까지 이 분야의 대중문화와 문화정치에 대한 인식을 말 그대로 지도해왔다.


리비스주의
아놀드는 리비스에게 상당부분 영향을 끼쳤다. 결국은 리비스는 아놀드의 문화정치학을 도입하여 30년대 문화적 위기에 적용했다. 그에게 있어서 20세기는 점차 뚜렷해지는 문화적 쇠퇴의 시기이다. 이는 ‘평준화와 하향화’의 문화였고 시민이 이것들을 배척해야 된다고 말한다. 리비스의 전제조건은 문화는 항상 소수의 유지자들에 의해 지켜졌다는 것이다.
변화한 것은 소수의 위상이다. 대량 문명과 대량문화는 전복적인 모습을 뛰면서 소수의 권위를 위협한다. 이들은 대량문화가 우리를 돌이킬 수 없는 혼란으로 이끌 것이라 말한다. 결국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학교 안에서는 대량문화에 대항하는 것을 학교에서 훈련시키고, 밖으로는 활동적인 소수가 저항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리비스의 대중문화와 수수의 문화의 정의
일반문화가 산업혁명을 거쳐 소수의 문화와 대량문명으로 구분됨
1. 소수문화는 문학적 전통성으로만 축소된 ‘사고와 표현의 정수’의 가치로 형성. 교육받은 소수의 문화.
2. 대량문화는 ‘교육받지 않은’ 다수에 의해 소비되는 대량문화, 상업문화로 구성.
대량문화의 효과.
1. 보상과 오락의 중독적인 형태를 제공. _연예 소설
2, 환상을 꿈꾸게 하여 현실으로부터 도피하게 만듬_연예 소설
3. 영화_ 최면술적 수용상태에서 허접한 감정적 호소에 빠지게함,
4. 대중용 신문 “대중들의 마음에 가장 강력하게 침투하는 비교육적 매체.
5. 라디오_ 비판적 생각 자체를 말살시킨다.
6. 광고 언어를 저질화 시키는 동시에 전체 언어공동체의 감정적 생활을 저질화시킨다. 생활의 기준을 낮춘다.

황금시기
황금시기는 전원속에 신화적인 과거, 상업적 이해관계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문화가 공유되었던 시기이다. 이는 19세기의 문화적 몰락 이전의 시기이다. 황금시기는 문화적 통합으로 특징지워졌지만 결국 이는 위계질서적 원리에 기반을 둔다. 이 문화는 한 편으로는 지적 자극을 주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감정적 즐거움을 주는 일반문화였다. 이들에 의하면 이러한 문화는 이미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리비스는 잃은 것으로서 유기적 공동체와 이를 구현하는 문화를 이야기다. 이것은 자연적 환경과 한 해의 리듬에 맞추어 기억할 수 없을 때부터의 경험에서 자라난 삶의 예술이며,........ 사회적 예술을 포함하는 질서 있고 정돈된 삶의 방식이다. 전원적 리듬의 세계는 교외거주의 단조로움과 평범함으로 대체되었다.
그럼에도 리비스는 빈궁함과 옹졸한 폭정, 질병과 사망률, 무지와 좌절된 지식 등도 황금시대의 요소임을 언급하는 것을 잊었다. 리비스가 제시한 것은 역사적인 설명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상실했다고 여기는 것들의 본질을 깨우쳐주는 문화적 신화로서 그 가치와 기준들들 접하는 것은 아직 가능하다. 문학은 인간 경험의 높은 가치를 햠유한 보물같은 것이나, 문화라는 왕관에 박힌 보석으로서의 문학은 이미 권위를 잃고 말았다. 리비스는 이에 대항하여 문화적 선교단, 소수 지성인들로 하여금 교육을 통해 대량문화에 대해 투쟁을 해야한다고 말하고, 이를 통해 문학의 권위가 확립된다 하더라도 유기적 공동체로 복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대량문화의 영향이 확장되는 것을 조절하여 인간 사고와 표현의 정수를 계속 유포시키는 아놀드적 전통을 이어나갈 교육받은 대중을 유지하고 만들어나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산업화, 자본화로 인한 노동의 변화.
노동의 질도 유기적 공동체의 상실에 따라 저하되었고, 이러한 상실의 신호로 여가의 필요성이 나타났다고 보았다. 황금시대에는 노동자가 그들의 노동에서 살았지만, 현재는 노동을 벗어난 삶을 누리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다. 산업화의 여파로 노동의 질이 너무나 떨어져 노동자들은 사실상 노동 때문에 무능하게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여가는 재창조(recreation)  가 아니라 비창조(decreation)(노동을 통해 느끼는 박탈감을 뒤겄는 것)만 가져다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보상과 수동적 위안을 위해 대량문화에 관심을 돌리게 되고 이는 마약과 같은 대리 인생에 탐닉하는 상습복용자들이 될 뿐이다.


미국의 대량문화 : 전후(戰後)의 논쟁
2차 세계대전이후 15년간 대량문화에 대한 논쟁.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은 자유주의, 다원주의, 무계급주의에 토대를 두고 일시적으로 문화적, 정치적 합의에 성공했고, 이는 미국 지신들의 권위에 상당부분 의존하였다. 이를 통해 지식인들은 문화적 도덕적 정치적 리더쉽의 민족적 대리인으로 인정받을 기회를 얻었고, 이의 기반은 대량문화에 대한 지식인들의 강렬하고 공개적인 논쟁이 있었다.

타자들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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