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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5 해석에 반대한다. 이오네스코 요약, 발제문

이오네스코는 실존주의파에 속하는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이다. 그는 전위극, 부조리극의 대표로 알려져 있다. 내가 아는 그의 작품은 대머리 여가수인데 실제 연극을 본 것은 아니고 대본으로 보았다. 처음 부조리극을 접한 나는 나름 꽤 신선했다. 서로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계속 대화가 어긋나고 파탄나는, 언어 그 자체는 오가지만 그 사용자들은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듯한 대화는 평소 비슷한 상황을 많이 겪는 나에게는 공감가는 내용이었으며 재미있게 읽었던 것이 기언 난다. 그렇기에 이오네스코라는 작가는 나에게 호감형인 작가였다. 그래서 수잔 손택의 '이오네스코'를 보고 이 살짝 놀랐다. 이 글이 처음으로 말하는 것은 '이오네스코는 진부하다'이고 이 문장을 설명하는 것으로 글은 끝난다. 이 글을 계속 읽으면서 나름 부조리극의 대부라고 배웠는데 뭔가 칭찬하나는 나오겠지라고 나름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다가 글이 끝났다. 내가 가진 정보라고는 이오네스코의 대본을 읽은 기억과 이 글밖에 없어서 이 글로만 애기를 한다면, 이오네스코는 자기 노력, 공부, 자기 갈등 그리고 간절함이 부족한 예술가는 결국 재미없고 진부한 그렇기에 자기를 포장하려 하고, 방어하고자하는 사람이 되기 마련이지 싶다. 

 

이오네스코는 진부하다. 책은 이보다 이오네스코를 더 잘 표현하는 수식어를 찾지 못한 듯 하다. ‘이오네스코의 평론 ‘노트와 반노트’에는 연극을 도구로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연극이란 현실을 뒤틀어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해주는 도구라는 것이다.’ 이는 ‘연극과 그 분신’에서 아르토가 이야기 한 것이다. 이오네스코는 아르토와 마찬가지로 문학적 연극을 경멸하며 모든 심리적 요소를 거부하여 리얼리즘이 거부한다. ‘이러한 이오네스코의 주장은 아르토의 주장을 희석시켜 나온 것일 뿐이다.’ ‘이오네스코는 증오 없는 아르토, 광기 없는 아르토이다.’ 그의 평론 또한 진부하고, 빈약할 뿐이다. 그의 글에서 쉽게 들어나는 구도는 소위 ‘아둔한 비평가들과 우매한 대중들’에 맞서서 투쟁하는 잘난 이오네스코라는 구도이다. ‘이오네스코의 완고한 자부심 뒤에는 고집스럽고 애처로운 불안감이 숨어 있다’ 또한 이오네스코는 자신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의 글은 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 한다. ‘이오네스코는 사상에 희생당한 예술가이다. 그의 작품에는 사상이 범람한다. 결국 그의 재능은 조잡해졌다’ ‘흔히들 그의 연극은 의미 없음, 소통의 단절에 관한 것이라 말하지만 이는 대부분의 현대 예술에서 본래 의미에서의 재재를 더 이상 논할 수 없게 됬다는 사실을 관과한 것이다. 즉, 제재 자체가 기법인 것이다. 이오네스코의 연극은 의미 없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의미 없음을 연극적으로 이용 한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의 연극의 결말은 지극히 일정한 형식의 반복이다. 처음부터 다시 하거나, 폭력으로 끝난다. 이는 그의 사상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악몽은 몸을 가눌 수 없는 황폐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오네스코의 연극은 전위적 감수성을 지닌 통극 희극이다.’ ‘또한 이오네스코는 사상에는 거의 재능이 없는 사람이며, 동시에 사상에 대한 혐오감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모든 입장을 취하는 동시에 거부하면서, 사상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가증스럽고도 쓸데없는 물건이라 넌더리낸다.’ 그에게 모든 정치는 파시즘이며, 악이다. 그는 반 지성주의를 표명한다.‘ '이오네스코의 연극은 처음에는 기괴한 것의 기괴함 때문에 흥미를 끌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끝에 가서 남는 것은 진부한 것의 진부함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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