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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구경 발제문
수잔 손택
수잔 손택은 현대에 최고의 연극들은 개인의 심리를 파고드는데에 전념한 작품들이고, 현대의 연극에서 들을 수 있는 공적인 목소리는 거칠고 귀에 거슬리며, 몽매하다고 비판한다. 이 ‘연극 비평’은 이러한 후자의 연극들을 비평한 글이다. 이 글은 아서 밀러의 ‘몰락 이후’ 유진 오닐의 ‘백만 장자 마르코’, 롤프 호흐후트의 ‘대리인’에 다다른다. 이 지점에서느 이 연극들의 한계들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들의 단점은 ‘어떠한 형식을 취하든, 관습적인 ’진지함‘을 통해서는 지성을 바랄 수 없다. 나는 오히려 희극을 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희극에서의 위험은 지적단순화가 아니라, 격조와 취향의 결핍이다.’ ‘격조와 취향의 결핍은 모든 문제를 희극적으로 다룰 수는 없다는 사실 때문에 연유한다.’ 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예로서 영화,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와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혹은 어떻게 나는 근심을 그만두고 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나’를 이야기 한다. 그리고 다시 연극으로 돌아와 가면이라는 연극장치를 쓴 연극들을 본다. ‘가면은 정서를 단순하고 뚜렷하게 보여주며 ... 짧은 시간 안에 미덕과 악덕을 정의해주는 효과적인 장치이다. ... ’검둥이‘라는 어리석은 인물상이 미덕을 가리키는 중요한 가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 이는 철저하게 고통과 희생을 당했다는 점 때문이다.’ ‘이러한 검둥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새로운 투쟁의식이 유태인을 전형적인 인물상으로 삼아 왔던 낡아빠진 자유주의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 투쟁 의식을 발생시킨 정서가 자유주의라는 사상을 경멸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여전히 희생자 가운데에서 미덕의 이미지를 찾는다는 특징은 건들이지 못했다.’ 이러한 연극으로는 제임스 볼드윈의 ‘찰스 나리를 위한 부르스’, 르로이 존스의 단막극 ‘네덜란드인’이 있다. ‘찰리 나리를 위한 부르스’의 한계는 흑인이라는 ‘가면’을 사용했음에도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다른 주제에 빠져들어 갔다는 것이다. ‘찰리 나리를 위한 블루스’에 경우에는 ‘금지된 성적 열망을 둘러싼 고뇌, 이 열망에 직면함으로써 야기되는 정체성의 위기, 이 위기에서 헤어나기 위해서 동원하는 분노와 파괴성’이 주제가 되었다. ‘걷보기에는 오데츠와 같지만, 내면은 테네시 윌리암스다’ '네덜란드인' 또한 흑인이라는 가면을 가지고 갔음에도, '성적인 입장만 표명하다가 인종 문제는 빼먹고 말았다.'
이 글의 제목, 연극구경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글은 수잔 손택이 그 당시의 연극을 보고 쓴 글이다. 하나의 작품을 깊게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연극의 흐름들을 몇 편의 연극들을 들어 설명한다. 대체로 작품에 대한 찬사보다는 가혹한 비평을 중심으로 글을 진행한다. 솔직히 이 연극들 중에 내가 집적 본 연극은 하나도 없다. 연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진입장벽이 워낙 높은지라(비싼지라, 그리고 선택의 영역이 좁은지라) 연극 자체를 잘 보질 못하고, 거의 글로만 보는 것이 다이다.(솔직히 그 마저도 몇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연극의 기억은 글이고 이는 무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슬픈 사실에도, 마치 글은 읽으면 한 작품을 다 알고, 그 작품의 비판까지도 다 아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글이 군더더기 하나 없고, 설득력이 있다. 약간의 열등감과 함께, 이 글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은 연극에 대해 감탄하기보다 글에 대한 감탄이 주를 이루었다. 표현 하나하나, 비유 하나하나가 재미있고 참신했으며, 동시에 번잡스럽지도 않았다. 표현, 문장 외에도 글로서 어떤 무언가 비판을 하려면, 어떠한 방식으로 비판을 해야하는지를 알게 해주는 글인듯 싶다. 이 글을 읽으면서 '아, 이게 비판이구나 내가 쓴 글은 뭐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글에서 내가 자극을 받은 것은 이러한 지점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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